1980년의 문학과 활동
1980년 초, 최도규 형이 내게 작품을 보내왔다.
1980년 3월 범초 김재원 선생이 내게 편지를 보냈다. 김재원 선생은 1976년 이미 소년중앙 동시 공모에 당선한 작가이다. 그때의 당선 동시가 내게는 우상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동시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무렵, 권오삼, 방원조 등의 작가들이 좋은 글을 써서 부럽기도 하였다.
이 무렵 김완기 선생께도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내가 자매결연 학교를 맺자는 내용을 한 모양이다. 어렵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하도 오래된 글이어서 종이가 모두 바래었다.
3월 26일 조남진 강원일보 편집국장이 인사장을 보내왔다. 어린이강원 2월 14일자에 발표한 글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다. 조남진씨는 후일 강원일보 사장을 엮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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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한정동아동문학상 초청장이 왔다. 김재수 선생이 수상하는데 12회였다. 이때 위원장은 한기섭씨였고 심사위원은 양명문 시인, 이원수 아동문학가, 김영일 아동문학가, 황금찬 시인, 박경종 아동문학가였다. 김재수 시인은 「소년」지에서 작품을 읽었기에 매우 인상이 깊었다. 그리고 친근하게 여겨졌다.
당시 초청장을 받았을 때는 심사위원들이 명성 높은 분들이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보니 대단한 원로 분들이란 걸 알았다. 나는 이후 내가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1989년 이 문학상을 강릉에서 받았는데 그때에는 박경종 선생과 박화목 선생이 내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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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문단 생활을 하면서 김한룡 선생을 지면으로 알게 되었다. 그 분이 만드는 「글벗」에 아이들 작품과 내 작품도 소개해 주어 매우 고무되었고 감사하였다.
<한국아동문학 대표작 선집> 발간 계획도 의욕적이었다.
여러 모로 의욕이 큰 분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박종현씨는 1976년 [아동문예]를 창간 한 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니 크게 성공한 분이다.
( 2017년 3월 2일 記. 남진원)
1980년은 태백 황지에서 5년간 근무하다가 정선군 문래 국민 학교로 온지 이듬해이다. 이곳에 오자마자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조가 당선되었고 동시에 시조문학도 천료를 받았다. 나름대로 경사스런 해였다.
강원도교육위원회에서 출간한 「강원교육」誌 에 시 ‘보리밭’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고향의 밭에는 늘 보리 물결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 겨울을 이겨낸 고난의 끝에 터져 나오는 푸른 보리의 함성을 듣곤 하였다.
이 작품을 쓸 때에는 내가 화전학교에서 고향인 문래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봄이면 변종호 형 집 밭 주위로 보리밭이 푸른 물결처럼 출렁였다. 그 모습을 보면 없던 기운도 솟아났다. 늘 보리 떼가 물결을 지어 흔들릴 때면 내 마음은 작은 돛배가 되어 그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때 보리 물결은 소년의 마음에 깃든 푸른 희망이었다.
늘 등허리가 젖어 / 안으로만 살더니 // 흙속에서 솟아나오는 / 보리의 발목 / 그 속에 / 파랗게 묻어나오는 목숨을 보라 // 푸욱 푹 갈아엎어 논 믿음 위엔 / 이제 젖은 등허리를 내보이며 / 소망의 한 떼가 업혀나오고 // 노랗게 여문 새소리들이 / 다복다복 / 말씀으로 가꾸는 보리밭엔 // 보리처럼 푸른 / 바람의 입술이 / 넉넉히 빗물 소리로 자라고 있다.
- ‘보리밭’ 「강원교육」 1980. 3 -
나는 1980년 초 개인 문집 ,물레방아>를 발간하여 전국에 배포한 적이 있다. 그때 아마 KBS에도 보낸 것 같았다. 당시 KBS 이주일의 똥요 청소년부에 근무하는 이동순임이 보고 내게 편지글을 보내주셨다. 이제 보니 새삼스럽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1980년 4월 9일 부산의 이지산 시인이 편지를 보냈다. 문학과 생활이 정력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1975년부터 대한교육연합회에서 발간하는 교육전문잡지인 「새교실」에 작품 투고를 하였는데 76년 5월에 초회 추천이 되었다. 문덕수시인이 추천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 편이었는데 ‘꽃밭’과 ‘봄이 온대요’ 두 편의 동시가 뽑혀 한꺼번에 나왔다. 그 후 1976년 9월호 ‘공원’이란 작품이 2회 추천을 받고 12월 ‘나비’란 작품으로 천료를 받았다. 이지산 선생은 그때의 그 「새교실」지에 실린 작품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개인 문학회보 [물레방아]를 보냈다. 거기에 대한 답글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 당시 글에서 이지산 선생은 격려의 말을 전하였다.
‘벌써 2번 째 개인 문집 “물레방아”를 받고도 격려해 드리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개인문집을 보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여럿이 해도 힘든 작업을 혼자서 해낸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고달프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된 작업이 진원님의 내일을 환하게 비쳐주는 광명이라 생각하시고 쉼없는 정진을 기대하겠습니다. ” 그의 말대로 38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정지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있느니 감개 무량하다.
최도규 선생은 편지 속에 동시 두 편을 써서 보내왔다.
1980년 4월 16일 김진광 시인이 안부 편지를 보냈다.
1980년 기독교교육 7,8월호 원고청탁을 받았다. ‘여름밤 종소리’ 작품이다.
1980년 4월 「보험뉴스」로부터 원고청탁서를 받았다. 그때 발표한 작품이 시조 ‘백자’이다. 원고료도 받앗는데 5,000원이었다. 글을 써서 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엄청난 기쁨이었다.
[동시조]
백자
오백년
밤을 지펴
빚어놓은
항아리
휘어질듯
이어지는
선과 힘
그 무늬마다
그 옛날
우리 하늘이
줄기줄기
쳐드네.
( 「보험뉴스」1980. 4)
1980년 4월 19일 장영철 시인이 원고를 보내오며 간단한 안부편지를 보냈다. 그때 장영철씨는 삼척군 장성에 근무할 때였다.
1980년 4월초 류제하 선생께 쓴 시조 작품 몇 편을 보냈다. 선생께서 4월 23일자로 첨삭지도한 원고를 보내주셨다. 이때 동시에 보낸 작품 중 일부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작이 되었다. 월간문학에서는 이상범 선생이 심사를 하신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80년 4월 23일 김종영 시인이 작품을 써서 보내오는 편지글을 보내주었다.
1980년 5월 1일 류제하 선생으로부터 시조문학 8월호에 천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오셨다. 이로써 1980년엔 동시에 시조문학과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가 당선되었다. 글을 써서 이름을 낼 수 있는 것도 모두 뒤에서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들의 힘이란 걸 알게 되었다. 류제하 선생은 폐가 나빠서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장례일에 참석치 못한 것은 늘 지금도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류제하 선생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생활 여건이 여의치 못했다. 김원기 선생 타계 시에도 강릉에 가지 못했다. 구영주 선생 돌아가셨을 대에도 못 갔다. 돌이켜 보면 이런 일들이 참 죄송하다.
1980년5월 9일 김원석 시인(2016년-2017년:한국아동문학인협회장 지냄)원고료를 보낸다는 서신을 보냈다.
1980년 5월 26일 범초 김재원 형이 타자기로 쓴 편지글을 보냈다. 글을 열심히 하는데 대한 격려와 자부심에 대한 내용이었다. 도규 형이 만든 ‘여울’ 동인 이야기도 하고 있다. 그간 내가 잊었던 내용이었다. 권영상, 김종영, 김진광, 장영철, 최도규, 남진원 등 몇 사람이 모여 글을 쓰는 동인으로 하려고 했는데 도규 형이 돌아가시고나서 흐지부지되었다. 어느새 나도 잊고 있었는데 지금, 범초 선생의 글을 보고나서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 당시 부산에서도 범초는 ‘산호초’ 동인을 만들었는데 그 이야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 6월 13일 성인환기자로부터 동시 원고청탁을 받았다. 7월 10일까지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내가 보낸 작품이 ‘싸리울’이었다. 성기자는 이 작품이 ‘아동문예’에 이미 실린 작품이라고 추후 다시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1980년 6월 19일, 장영철 시인이 김진광시인과 함께 1정 강습을 받는다는 안부 편지를 보냈다.
1980년 6월 25일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월간문학신인상 당선 전보를 받았다. 관사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순희 어린이가 전보 용지를 갖다 주었다. 문을 열더니 “선생님, 전보예요!”하면서 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1980년 12월 12일 한국문인협회에서 신인작품상 당선자 상장 수여 및 파티초청 공문을 보냈다. 그때 이사장은 조연현씨였다.
1980년 7월 4일 도규 형의 편지이다. 편지 오기 얼마 전에 도규 형이 있는 황지의 창죽분교에 놀러갔던 일을 적은 것이다. 시조문학 천료와 월간문학신인상 당선 축하 내용도 담겨 있다. 벌써 37년 전의 일이구나.
1980년 7월7일, 서울신문 기사에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기사 나옴.
1980년 7월 8일 조규영 시인이 당선 축하 글을 보내왔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따스한 정감이 짙게 묻어나온다. 요즘은 통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어디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만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조규영 시인이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동문학작품으로 뽑은 [꼬마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때 하청호 시인과 내가 그 다음으로 후보로 올랐다는 것도 다시 알게 되었다. ‘참 기쁜 일이 많았구나!’ 라고 생각되었다.
또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이 서울신문 1980년 7월 7일자에 나온 사실도 편지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조규영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내 삶에 있어 큰 영광이었고 힘이었다. 조규영 시인은 나중에 강원도문인협회 지회장도 지냈다. 항상 털털한 분이었다. 춘천에 심사하는 일이 있어 같이 만날 때면 농사짓던 차림으로 트럭을 손수 몰고 나오셨다. 온 몸에서 향토색 짙은 시골의 정취가 풍겨나왔다.
1980년 7월 15일 경상도 ‘나래시조문학’을 운영하시는 정석주 시인께서 월간문학, 시조문학 천료를 축하하는 글을 보내주셨다.
1980년 7월 21일 류제하 선생께서 월간문학 신인상 축하 편지를 보내주셨다.
1980년 10월14일 김진광 시인이 안부편지를 보냈다. 17일에는 도규 형이 ‘여울’에서 주관하는 출판기념에 관해 편지를 보내셨다.
1980년 10월 17일 어린이강원부에서 ‘이주일의 동시’ 원고청탁서를 보내었다.
1980년 10월 19일 아동문예작가회장 최만조 선생이 상 운영에 대한 내용을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