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의 고드름
유영신 (하얀노루)
입동이 지나면 집 안은 겨울 채비로 분주해졌다.
여름에 말려 두었던 붉은 고추를 손질하고,
김장에 쓸 마늘은 껍질을 벗겨 절구에 찧었다.
팔이 내 팔인지 남의 팔인지 모를 만큼 고된 손놀림 속에서
엄마는 말없이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퀴퀴한 젓갈 내음과 찰밥 짓는 냄새가 뒤섞이면
집 안에는 계절이 먼저 들어오고
넓은 빨간 통 속에는
어젯밤 소금에 절여 둔 배추들이 잠들어 있었다.
밤새 몇 번이나 일어나
배추를 달랬을 엄마의 손길이 그 위에 남아 있었다.
김장이라는 이름을 걸어 두고서야
엄마는 하루쯤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겨울은,
춥기보다는 예뻤다.
눈이 오면 작은 다리로 껑충껑충 뛰며
넘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눈길에 미끄러져 벌렁 누운 두 눈 위로
하늘은 포근한 엄마의 가슴처럼 내려앉았다.
가는 곳마다 놀이터였고,
겨울이 하얘질수록 세상은 오로지 나의 것이었다.
홍시가 얼어 터지듯
내 두 볼도 추위와 맞서다 살결이 갈라지고서야
겨울을 견뎌냈다.
해가 기울면 동무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나는 어둠을 동무 삼아
콧물을 훔치며 집으로 향했다.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면서도
시간을 먹고 자라듯
조용히 길어지고 있었고,
아침 햇살 아래
손끝이 닿을락 말락한 그 수정은,
실로폰의 건반 같기도
얼어 터진 수도관의 물기둥 같기도 했다.
고드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아버지의 그림자가
내 등 뒤로 길게 드리워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고드름 하나를 떼어
내 손에 쥐여 주셨다.
차갑던 그것은
내 체온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 고드름은 매달려 있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이제 우리가 포근히 재워주자.”
그땐 그 뜻을 몰랐다.
그 고드름이 어디로 갔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손에서 미끄러졌는지,
마당의 눈 속으로 사라졌는지
기억은 늘 그렇게
조용히 흐려진다.
다만
겨울이 지나고도
차가움 하나만은
손 안에 오래 남아 있었다.
살아보니
무게를 달고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어디 고드름뿐이던가.
때로는 그 무게를 내려놓고
스스로 녹아 스며드는 순간이
손 안에서 잠시 빛나다가 사라진다.
겨울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다음 계절에게 몸을 내어준다
첫댓글 아직도 아련하게 남아있는 추억을 상기시켜 주시내요^^
고드름 따먹기도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