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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되어 ‘봉기와 사랑’과 함께 다시 시작하기 책을읽다 2013/12/02 02:06 http://blog.naver.com/virilio73/80202742893 이재원(도서출판 난장 대표) |
일전에 계간 시 전문지 <포지션>(겨울/여름, 2013)에 기고한 서평 하나를 퍼온다. 국내에 “가라타니 고진과 아사다 아키라를 잇는 젊은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고 소개된 히로세 준(廣瀬純, 1971~ )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蜂起とともに愛がはじまる: 思想/政治のための32章, 河出書房新社、2012)에 대한 서평이다. 어쩌다 보니 일본 사상가들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됐는데(서평을 쓰진 않았지만 모리 요시타카의 <스트리트의 사상>도 흥미로웠다), 공교롭게도 먼저 번에 올린 아즈마 히로키와 히로세 준은 동갑내기이다(1970년대생 국내 사상가를 보고 싶다!).
‘뱀’이 되어 ‘봉기와 사랑’과 함께 다시 시작하기
히로세 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바다출판사, 2013).
히로세 준(廣瀬純, 1971~ )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은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둔 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책이다. 첫 번째로 제목에 속지 말아야 하며, 두 번째로 원래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어느 잡지에 연재된 두 쪽짜리 ‘시평’(時評)이었다는 ‘형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속임수에 넘어간다면 독자들은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제목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蜂起とともに愛がはじまる)는 이 책의 제목이 그럴 듯하게 짜맞춰낸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옮긴이가 걱정하듯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말이 뿜어내는 매력”에 아찔할 만큼 눈이 멀게 된 나머지 “혁명에 대한 무력함을 봉합하는 엉뚱한 역할”을 경박하게 솔선수범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이 책의 독자들이 피해야 할 첫 번째 낭패이다.
그 다음으로 짧은 ‘시평’이라는 형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 형식상의 특성처럼 쉽게 술술 읽힌다고 해서 그렇게 읽고 책장을 덮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읽(었)을지언정, 이 책은 차라리 두 번, 세 번 천천히 반복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비유하자면 이 책은 32개(한국어판의 경우는 34개)의 조각으로 이뤄진 직소 퍼즐이다. 각 조각마다 나름의 통찰력과 즐거움을 주지만, 모든 것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퍼즐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옮긴이가 걱정하듯이 이 책은 갖가지 현대 사상(특히 유럽의 사상)과 영화를 요약하며 “자칫 새로운 트렌드를 추종하는 경박함”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크게 오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독자들이 피해야 할 두 번째 낭패이다.
당신은 이 지독한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표현이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닌 이유는 이 제목이 그 자체로 히로세 본인의 구상(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압축한 말이기 때문이다. 쉽게 읽으면 이 문장은 이렇게 읽힌다. 봉기가 있고 나서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 그런데 아니다. 봉기와 사랑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함께,’ 즉 ‘공’(共)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저 문장은 “사랑과 함께 봉기가 시작된다”라고 읽어도 성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왜일까?
먼저 ‘사랑’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얼핏 읽으면 이 책의 제목은 1968년 혁명 당시의 저 유명한 사진, 즉 바리케이드 뒤에서 뜨겁게 입맞춤하는 남녀의 사진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히로세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운명애)이다(16쪽).
어떤 운명인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그 어떤 액션도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세계일지언정, 즉 “혁명의 불가능성”(11쪽)이 도드라진 세계일지언정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이 운명이 제아무리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일지언정(그리고 실제로 그럴지언정) 그 운명을 사랑해야만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 말은 이 운명을 ‘감수’할 것이냐, 즉 이 운명에 순응해 세계의 변혁을 그만둘 것이냐,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꿈을 계속 꿀 것이냐는 질문에 가깝다. 전자라면 더 이상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혁명이, 세계를 변혁하려는 액션이, 우리의 액션에 따라 더 나아질 수 있는 힘이 이 세상에서 고갈되어버렸는가? 히로세는 그 답변으로 “자본의 놀라운 기량”을 제시한다. 히로세는 이 힘을 설명하기 위해, 저 ‘1968년 혁명’ 이후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시작된 ‘반혁명’의 성격을 진단한 이탈리아의 자율주의자 파올로 비르노의 논의를 참조한다. “이 ‘반혁명’의 결과는 ‘혁명’ 전의 상태를 복구하는 것도, ‘봉기’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 의해 새롭게 창출된 사회 구조를 그대로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으로 ‘반전시키는’ 데 있다(26~29쪽).
요컨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별다른 사건이 없다면 앞으로도 살아갈 것 같은 2010년대의 이 세계는 이 ‘반혁명’의 연속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혁명’의 완성태, 그도 아니라면 최신 판본이다. 그러니까 상황이 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을 지배하는 ‘반혁명’의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는 반란에 의해 산출된 성과뿐 아니라 반란의 전복적인 역동성 자체도 자기 것으로 훔쳐버리기 때문이다(272~273쪽). 즉, 오늘날의 반혁명은 아예 대놓고 반란을 권장한다. 반란이 일어날 때만 그 힘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아예 끊임없이 반란을 부추기고 그것 자체를 자신의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반복건대, 당신은 이런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본의 저 놀라운 기량에도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여전히 변혁을 꿈꿀 것인가?
봉기: 혁명의 불가능성에 맞서 세계를 변혁하는 다른 방법
그렇다면 이제는 ‘봉기’이다. 히로세에 따르면 혁명은 운명을 부정한다(12쪽). 다른 식으로 말하면 혁명이란 다른 세계가 존재했던(혹은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시기, 혹은 자본이 아직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서 자본이 낳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 답을 공유해 실현하는 것이 가능했던(혹은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시기에 사유되고 실행된 해방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등장했다. 히로세는 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을 원자력 발전에 비유한다. 히로세에 따르면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언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가 늘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수력 발전은 높은 위치에 있는 물 안의 문제가 낙하에 의해 한꺼번에 해결됨으로써 존재하고, 화력 발전은 화석 연료 안에 있는 문제가 연소에 의해 모조리 해결됨으로써 존재한다. 이에 비해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것은 핵분열 연쇄 반응을 가능한 한 감속시키는 것, 그래서 에너지 생산을 제어하는 것이며, 그런 제어기술을 획득해야만 비로소 원자력 발전이 가능해진다. 반(反)원자력 발전의 담론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원자력 발전은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원자력 발전은 컨트롤밖에 할 수 없는 것(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186쪽).
원자력 발전은 수력 발전이나 화력 발전처럼 그 에너지를 모조리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제어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 에너지, 즉 핵분열 연쇄 반응으로 인한 힘을 모조리 방출하면 (핵)폭발=핵폭탄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원자력 발전 사고의 위험 가능성에 불안해하면서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장 자본을 모조리 없앨 수 없다면, 우리는 자본이 양산하는 모든 사고(가령 최근의 부채 위기)에 불안해하면서 그것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
히로세가 말하는 ‘봉기’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액션이 아니라 이처럼 그 문제와 ‘더불어 살아갈 것’을 각오한 액션이다. “문제 제어로서의 해방, 문제를 과잉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의한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봉기이다. …… 봉기는 문제를 창출하면서 문제를 껴안고 준(準)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이다”(214~215쪽). 그리고 히로세는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을 빌려 이런 봉기의 주체를 혁명의 주체인 ‘두더지’와 다른 ‘뱀’에 비유한다.
들뢰즈는 …… 시작과 끝으로 구획이 나뉜 선분 위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는 또 다시 다른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옛날의 ‘두더지’와 [뱀을]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고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뱀은 땅속에서 휴식을 취할 줄 모르고 피로를 축적하면서 오로지 땅 위를 기어 다니는데, 그 땅 위에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것이다. …… 뱀이 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즉 어디까지나 과잉의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217쪽).
이렇게 본다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꿈을 계속 꿀 것이냐?”라는 질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정정, 아니 확장할 수 있고, 확장해야 한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으로 인한 사고를 껴안은 채, 그 과정에서 축적되는 피로에도 불구하고, 계속 변혁의 꿈을 꿀 것이냐?”
여전히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래, 이런 운명일지라도 사랑하겠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봉기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혁명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변혁(즉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봉기한다면 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아니, 차라리 봉기해야만 이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봉기하지 않는다면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것이고, 순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기=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봉기와 사랑’(봉기=사랑)과 함께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라고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건 도약: ‘뱀’이 된다는 것
그런데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그 위험을 껴안고 가겠다는 것만으로 변혁을 꿈꾼다고(실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그것은 전제일 뿐이다. 이 전제를 받아들인 한에서 히로세는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을 제시한다. 자본은 언제나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한다고 어디에선가 칼 맑스는 말했다. 그 과정 속에서 특정한 개별 자본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총자본은 그로 인해 그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히로세는 우리에게 우리 나름의 ‘목숨을 건 도약’을 제안하는 것이다.
히로세는 다시 원자력 발전의 비유를 통해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설명한다. 다소 길지만 히로세 본인의 설명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니 그대로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온 것은 ‘피폭’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리였다. …… 피폭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심신을 파괴할 염려가 있는,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힘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과잉의 ‘문제’로서 자신의 심신 안에 항구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외부가 내부에 그대로 쌓임으로써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면적으로 ‘문제’를 안고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 만약 자신의 심신 안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과잉의 힘을 찾아냄으로써 발생하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효과가 ‘불안’이라고 한다면, 이 ‘불안’을 그대로 반전시킴으로써 과잉의 힘으로 가득 찬 자신의 심신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다시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188쪽).
피폭이 피폭자들의 심신 안에 남겨 놓은 저 커다란 힘이란 방사선일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방사선의 영향은 세포 조직의 손상인데, 이것을 두고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세포 조직의 손상으로 인한 결과가 언제 어떻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종 대중문화 텍스트가 방사선에 노출된 초인이나 변종 인간을 상상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방사선이 ‘과잉의 힘’인 이유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폭자들의 심신 안에 쌓인 방사성 물질을 없앨 수 없다. 다만 특정한 약제를 이용해 해당 물질을 어느 정도 외부로 배출시키거나, 이 물질이 신체에 침착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을 뿐이다. 즉, 해결할 수 없고 제어할 수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능력이나 힘을 넘어서는 무엇이기 때문에 ‘과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원자력 발전과 자본의 유사성을 지적한 히로세를 따라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 역시 우리의 심신 안에 방사선과 비슷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힘(가장 최근의 예로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을 새겨 넣는다. 이 힘 역시 우리의 해결 능력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과잉의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과잉의 힘이 우리 안에 만들어 놓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균열’”을 감지하고, 이 균열로부터 감지된 과잉의 힘을 우리 자신을 갱신하는 원동력으로 재발견할 수도 있다.
히로세는 들뢰즈를 참조해 이 재발견-반전의 과정을 “밖에서 들어온 작용을 자기 안에 접어 넣는” 것, “외부적 힘에 스스로의 신체와 뇌를 접속시키는 것, 술렁거리는 바깥의 힘 속에 스스로를 삽입하는 것,” 즉 ‘담판/교섭’(pourparler)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미셸 푸코가 말한 ‘살아가는 일이라는 기예’란 바로 이것이라고도 말한다(149~150쪽). 바로 여기서 우리는 왜 이것이 ‘목숨을 건 도약’인지 알 수 있다. 자본이 우리의 심신 안에 우리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과잉의 힘을 새겨 넣는 것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향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 힘을 조작하고 반전시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로세의 말처럼 ‘불안’이란 “과잉의 힘을 찾아냄으로써 발생하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효과”이겠지만, 우리 자신의 접속・삽입・조작으로 반전되는 순간 그 ‘불안’은 이제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될 수도 있다(쇠얀 키르케고르, 강성위 옮김,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동서문화동판, 2007), 166쪽). 물론 우리는 저 기대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죽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따라서 히로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 말고 기예로서 살라”(151쪽).
뱀의 에티카
눈치 빠른 사람은 여기에 모종의 ‘결단’이, 히로세의 표현을 빌리면 ‘도박/내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의 자본, 그로 인한 사고나 위험, 그것이 우리의 심신 안에 새겨 넣는 과잉의 힘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도 변혁의 꿈을 계속 꿀 수 있다. 즉, 여전히 혁명이 가능하다고,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봉기와 사랑’(봉기=사랑)과 함께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라는 히로세의 테제, 뱀이 되어야 한다는 히로세의 주장은 (따를 수밖에 없는)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선택해야 하는) ‘윤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좌우간 히로세는 혁명이 아니라 봉기를 선택했다. 왜일까? 히로세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1969)에 나오는 철학 교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선택으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무한대만큼 컸기 때문”(59쪽)이라고.
도대체 이런 ‘목숨을 건 도약’으로 우리가 얻을 것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그 희망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변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를 구성하고 있는 34개의 직소 퍼즐은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한 ‘잠정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히로세가 펼쳐 놓은 여러 개의 ‘잠정적’인 답 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고,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의 효과이다. 히로세의 해석에 따르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란 국가, 자본, 혹은 권력이 자신에게 할당해준 특정한 지위나 역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위나 역할도 ‘횡령’해 감으로써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더욱 광범위하게 발휘시키는 동시에 그런 사회적 역할 배분을 항상 요동시키는” 액션이다(198쪽). 이것을 히로세는 “운명을 긍정하면서 그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 “운명의 한가운데서 자유와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풀어쓴다(12쪽). 요컨대 ‘목숨을 건 도약’으로써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이 우리에게 부과한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운명이 원하는 대로 운명과 관계를 맺지 않고 운명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편의상 이것을 ‘뱀의 에티카’라고 불러보자.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은 내가 보질 못했으니, 내게 좀 더 친숙한 텍스트로 이 뱀의 에티카를 설명해보겠다. 내가 살펴볼 텍스트는 KBS의 인기 드라마 <직장의 신>인데, 내가 보기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미스 김’은 ‘두더지’가 아니라 ‘뱀’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황진미는 124개의 온갖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 능력을 자랑해 ‘슈퍼갑’이 된 ‘국내 최초 자발적 비정규직’ 미스 김을 일컬어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이 낳은 반어적 존재”로서 “차라리 기계가 될지언정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 대안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의 명령인 ‘기계가 되는 삶’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 자본주의 노동의 본령인 전인격적 착취에서 벗어나는 역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장의 신>은 미스 김을 비정규직의 대안으로 그리지 않는다. 미스 김 자체가 그럴 기미를 전혀 안 보이며, 플롯 자체가 아예 그렇게 생각할 여지를 스스로 차단해버린다. 가령 정규직 전환을 권유하는 상사에게 회사의 노예가 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하는 미스 김을 본 뒤, 미스 김처럼 능력만 있다면 이 직장 저 직장 옮기며 일하는 것도 멋있겠다고 말하는 신입 비정규직 정주리에게 선배 비정규직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미스 김이 아니라 (5년차 계약직인) 봉희 언니이다.”
한편, 문화연구자 문강형준은 미스 김을 영웅 신화의 반복으로 보며 이렇게 말한다. “직장의 ‘신’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주인공 미스 김은 ‘신’이자 ‘슈퍼갑’이자 ‘늑대인간’이다. …… 영웅이 국가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해, 이 새로운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비정규직 문제는 ‘신’이 아니면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직장의 신>은 현실의 문제를 비현실적 형식 속에 담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진짜 ‘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스 김이 해결하는 것은 전혀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다. 미스 김이 해결하는 모두가 난감해 하는 회사의 온갖 위기는 회사의 존폐를 결정적으로 뒤흔들 만한 위기도 아니다. 요컨대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 문제를 ‘상상적’으로나마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직장의 신>이 시침 뚝 떼고 상상적으로나마 그런 문제 해결을 자처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비현실적이다.
‘비정규직의 대안’도 아니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미스 김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회사의, 회사에 의한, 회사를 위한” 영업부 팀장 장규직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대사를 통해 미스 김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감히 비정규직 ‘따위’가!” 그렇다. 이게 핵심이다. 미스 김은 “감히 비정규직 ‘따위’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행동과 말을 천연덕스럽게 함으로써 기존의 위계질서를 끊임없이 뒤흔든다. “내가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서 통쾌하다”라고 말하는 시청자들의 열광은 바로 이 정규직/비정규직 관계의 요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물론 미스 김이 정규직/비정규직 관계 자체를 송두리째 뒤엎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규직/비정규직 관계를 그냥 놔두지도 않는다. 미스 김은 그 관계를 계속 문제로서 창출한다.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 미스 김은 장규직을 이해하고, 장규직은 미스 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장규직은 무정한 영업지원부 팀장과 다른 방식으로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관계를 더 이상 예전처럼 믿지 못하게 된다.
드라마 속에서는 124개의 자격증이 정규직/비정규직 관계를 요동시킬 수 있는 미스 김의 능력을 설명해주지만, 하나가 더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하다.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회사에 거짓말하고 다이아몬드 회사(사실은 다단계 판매회사)에 면접을 보러간 정주리에게 미스 김은 “쪽 팔린 줄 알아”라고 말한다. 이에 정주리는 “쪽 좀 팔리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렇다, 안 된다. 원래는. 미스 김이 친한 마담 언니의 입을 통해 말했듯이 “한 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이 에피소드에서 미스 김은 감기몸살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약속된 일을 마치기 위해 출근한다).
도망치지 않는 것, 그로써 자존심을 지키는 것(“너에게는 다 변명이고 자존심이 없어. 정규직 꿈만 있지 자존심이 없어”). 이것이야말로 운명에 순종하지 않고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 봉기하기로 결심한 ‘뱀의 에티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당연히 뱀=미스 김은 이것이 도박/내기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쪽 좀 팔리면 안 돼?”라고 반문하는 정주리에게 의외로 이렇게 말한다. “돼.” 도망쳐서는 안 되지만, 그렇게 할지 안 할지는 자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이것은 도박/내기임으로. 따라서 “돼”는 “네 마음대로 해”가 아니다. 오히려 이 “돼”는 우리의 해결 능력을 벗어나 있는 자본의 과잉의 힘을, 그 과잉의 힘이 우리 안에 만들어 놓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균열을 더 철저하게 느껴보고 선택하라는 말이다.
다시, 목숨을 건 도약: 우리의 치욕을 씻기
이렇게 본다면, 저 124개의 자격증은 미스 김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동안 미스 김이 실행한 ‘목숨을 건 도약’의 횟수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스 김이 좀 더 젊었을 적에 맞닥뜨린 과잉의 힘은 ‘정리해고’라는 자본의 명령이었다. 이 과잉의 힘은 말 그대로 미스 김의 심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몸에는 다리의 화상으로, 마음에는 트라우마로. 미스 김이 보유한 저 124개의 자격증은 그로 인해 자기 자신 안에 새겨진 균열, 그 균열을 통해 깨달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효과’로서의 불안을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서의 불안으로 반전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흔한 오해와 달리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한 고용의 비정규직화는 확실히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층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을 촉진했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다”(34쪽)는 히로세의 언급은 비정규직화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태, 도약으로의 열림을 지칭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히로세의 이 말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에서 마침내 해방됐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능성,’ 히로세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잠재성’이 비로소 촉진됐다는 사태에 있다.
미스 김이 지닌 124개의 자격증은 그 자체로 들뢰즈가 말한 담판/교섭의 산물이자, 푸코가 말한 ‘살아가는 일이라는 기예’이며, 다르게 살 수 있는 어떤 가능성/잠재성이다. 드라마 속에서 공개된 것만으로 미뤄 봐도 미스 김은 중장비 기사, 항공 정비사, 스페인어・러시아어 회화 강사, 미용사, 조리사, 간호사, 조산사 등 충분히 다른 일을 해서도 먹고살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스 김은 다시 일반 회사에 돌아왔다. 물론 다음에는 위 자격증 중 하나를 쓸 수 있는 다른 직장으로 옮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미스 김이 다시 일반 회사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미스 김이 다시 일반 회사로 돌아온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혹은 그 이유가 우리가 기대했던 그런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됐든, 나는 왠지 그 이유로 히로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제시하고 싶다. “‘된다’(devenir)는 것은 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이다. 세계가 무언가가 ‘되는’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치욕, 세계로부터 사랑받을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치욕은 우리 자신이 무언가가 ‘되는’ 것으로만, 우리가 세계를 사랑하는 것으로만 씻어 낼 수 있다”(16쪽).
우리의 치욕을 씻어 내기 위해서라도, 그로써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도망치면 안 된다. 미스 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런 ‘뱀의 에티카’이다. 따라서 미스 김이 ‘비정규직의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미스 김이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대로 터미네이터가 되어 자본주의의 전인격적 착취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착취와 맞닥뜨리기를 피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직장의 신>이 현실의 문제를 비현실적 형식 속에 담음으로써 드러내는 어떤 진짜 현실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면 비정규직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미스 김이 시도한 것과 같은 맞닥뜨림 속에 그동안 ‘생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룰 길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또 한 번 “‘봉기와 사랑’(봉기=사랑)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적어도 히로세는 이쪽에 내기를 걸었다. 이런 ‘목숨을 건 도약’ 속에서 발견할 가능성/잠재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면서도, “모두가 모든 것을 생각하며, 생각할 수 없는 것조차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279쪽). 설사 이것이 혁명을 상상하면서 그렸던 그런 변혁은 아닐지라도, 나 역시 이쪽에 내기를 걸겠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친다. “혁명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 생겨나지만 봉기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을’ 때 생겨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 (끝)
[출처] ‘뱀’이 되어 ‘봉기와 사랑’과 함께 다시 시작하기|작성자 난장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