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후(許詡) 허조(許慥) 부자(父子) 정충각(旌忠閣)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450호
소재지 :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75-1번지
조선 세종조 예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정간공 허후(許詡) 와 집현전 수찬을 지낸 수찬공 허조(許慥) 부자분의 충렬을 찬양하는 정려각으로 정조16년(1792)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순조14(1814)을 건립하고 현판을 걸었다.
허후(許詡)는 계유정난 때 사사(賜死)된 후 영조23년(1747)에 복관되고 32년(1756)에 정간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후(詡)의 아들 조(慥)는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로 자결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사육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정조14년(1790)에 복관되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백곡서원
조선 선조조 현풍현감으로 재임 시에 임진왜란이 발생하니 의병을 모아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도와 의병장이 되어 화왕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공신록에 등재되었고 징비록에도 등재되어 있다. 조산대부 대구진 관병마절제사를 제수 받았다. 휘는 응길(應吉), 자는 명철(明喆), 호는 희성당(希聖堂)인데, 경암의 9세손이다. 서원 창건 후 도내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서기1938년부터 연차 제향한다. 하양 팔의사사적비에 등재되어 있고, 대구시 망우공원 임난 호국 영남 충의단에도 배향되어 있다.
만취재
경산시 진량읍 문천리 518번지
시조 17세손 군수공을 위한 재실이다. 군수공의 휘는 보(輔)이고 자는 찬경(贊卿)이며 호는 자우당(自憂堂)이다. 관직은 초계군수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출중하고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시조 17세손 군수공을 위한 재실이다.
영모재(慕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526번지 곡물에 있으며 시조 22세손 물재공을 위한 재실이다. 물재공의 휘는 환(瑍)이고 자는 여윤(汝潤)이며 호는 물재(勿齋)이다.
탁래정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337번지에 있으며 시조 23세손 청재공을 위한 정자이다. 청재공의 휘는 익주(翊周)이고 자는 대현(大縣)이며 호는 청재(淸齋)이다.
쌍휘당(雙徽堂)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87번지에 있으며 하양 허씨 시조 24세손 쌍휘당을 위한 재실이다.
쌍휘당의 휘는 호(壕)이고 자는 만리(萬里)이며 호는 쌍휘당(雙徽堂)이다.
쌍휘당은 통정대부 절창장군 휘 원주의 아들로서 출천대효라 널리 알려졌다. 무신 난에 창의하시고 향민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셨다.
경운정
소재지 : 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위의 정자는 용암 허성후공(龍巖 許聖垕公)을 추모하는 정자이다. 조선조에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본손 및 향내유림들이 가선대부 중추부사의 추모계를 모아 연차적으로 수계하다가 임신년부터 격년제로 시행하고 있다.
상의정의 사적과 유적
소재지 : 경산시 하양읍 부호2리
허대윤(許大胤)과 허경윤(許景胤)은 경암 허조(許稠)의 9세손이며 형제간이다. 대윤은 호가 훈재(塤齋)이고 경윤은 호가 지재(篪齋)이다. 임진난시에 형제가 같이 창의하여 전공을 세웠고 선무 원종공신록권에 공훈장군으로 수록되었는데 상의정은 훈재와 지재 양공의 추모재이다. 하양 팔의사 비명에 등재되어 있다.
일우 허병률(一友 許秉律) 의사 기념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동리앞 정충각 옆에 있으며 독립투사 허병률 의사 기념비이다. 허 의사는 시조 31세손으로 1918년 복회에 가입 이동찬, 박용성, 조한명 등과 군자금을 모으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세상을 마칠 때까지 끝없는 항일투쟁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춘정 허동상(春庭 許東相) 의사 기적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76번지 정충각 옆에 있으며 독립투사 허동상의사 기적비이다. 허 의사는 18세 때부터 족숙 허병률 의사를 따라 애국성금을 모금하고 22세 때에 대구 학생들과 총궐기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도중 격문을 사롶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옥고와 고문 후유증으로 43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1993년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이 서훈되었다.
허임기념사업회
선조때 名醫, 常人출신으로 鍼灸에 뛰어나 선조때 鍼醫로서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東班의 位階를 받았다. 1612년(광해군4) 許浚과 함께 醫官錄에 기록되고 뒤에 楊洲牧使 富平府使 등을 역임했다.
허임은 1570년경 서울에서 출생하여 1647년경에 충청도 공주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론되고 있습니다. 그가 쓴 침구경험방 서문 끝부분에 하양허임(河陽許任)이라고 밝혀 하양(河陽)이 그의 본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를 검토하면
허임은 하양허씨 문경공파 21세손으로 허락(許珞)의 아들이고,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의 품계)로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낸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허임의 출신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부친은 허억봉(許億逢) 혹은 허억복 (許億福)이라는 이름의 악공(樂工)으로 관노(官奴)였고, 그의 모친은 사비(私婢)였다고 전합니다
계헌공 공적비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보림 궁터마을 (보림문중)
계헌공(諱 洪烈 시조의 32세손)은 전 부산시 재무국장, 동구청장을 지낸 허규상(許圭相)의 선친이다.
구계 아홉담의 이장으로 10년을 봉직하며 동회사무소를 건립하여 온 마을 사람의 안락한 집회장소로 또 남녀노유의 문맹퇴치의 도장으로 동민봉사에 정열을 쏟으시고, 30 여 년간 마을 산림보호 책임자로써 생업조성의 업적을 새겼고 영산으로 통하는 도로의 개설 등, 동민을 위하여 평생토록 바친 음양의 공로는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62년에 시공하고 1966년에 준공을 본 내촌소류지 공사로 마을 전체의 완전 몽리면적의 확보에 산파역을 맡아 바친 노고는 주민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사실로 남아 있음이다. 1966. 9. 20 구계리 동민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