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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비가 오는데 이렇게 많이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휴가는 갔다 오셨는지요?
저는 지금 송파문화원에서 송파문화유산 해설사과정을 밟고 있는 정애숙입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성 백제의 성립과 위례성의 위치' 입니다.
여러분 '서울정도600년' 많이 익숙한 단어지요?
흔히 서울의 역사를 예기할 때 '서울 정도 600년'을 말하고 10여년 전에 대대적인 행사를 했습니다.
'정도'란 한 나라의 수도를 정한다는 말인데 ..
600백년이란 조선시대만을 예기하는 것이지 이 땅에 존재했던 다른 나라의 도읍은 고려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조선 이전에는 이곳을 도읍으로 정한 나라가 없었을까요?
며칠 전 광화문 광장을 시민의 광장으로 새롭게 개방했지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정도600년'의 스토리를 돌에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 한강유역 이남에는 진국과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사회가 성립되어 있었고 서로간의 정복전쟁이 벌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형성되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백제입니다.
백제 역사 678년 중 490여년 간을 한강유역에서 존재 했으니까요 제 생각입니다만 그것을 더 더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시대를 한성백제시대 라고 합니다.
백제는 부여족의 이동과 분파 과정에서 형성된 부여계 유이민 집단이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하므로서 이루어 졌습니다.
소서노를 아십니까? 주몽의 부인으로써 비류, 온조의 어머니로써....
얼마 전 인기리에 끝난 드라마가 있었지요
실은 그 드라마 이전에 저는 '소서노'라는 인물에 대해 무지하였습니다.
방송국 드라마라는 것이 이로움을 줄 수도 있고 너무 엉터리로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는 해를 줄 수도 있지마는 이러한 드라마를 통해 진실과 사실이 무엇인가를 가려내는 눈이 길러진다는 데에는 일익을 담당하는 것 같습니다.
백제에는 다양한 건국신화가 전해옵니다. 삼국사기 비롯한 대부분의 사료에는 동생인 온조가 형인 비류의 백성을 통합하고 더 큰 나라 백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건국설화인 비류설화는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에서 함께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추홀은 제가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지금의 인천지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현재는 경기도 양주, 파주, 연천을 잇는 지역일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조설화는 하남위례성지역에서 비류설화는 미추홀 지역에서 각각 전승되어 온 설화라는 것이지요 근데 공통점은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는 것이예요
온조설화 기준 기록은 아버지인 추모 또는 주몽이 북부여의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왔는데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습니다.
졸본부여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을 시켰답니다.
그 후 졸본부여 왕이 죽어 주몽이 왕이 되었을 때 두 아들을 낳았는데 비류와 온조라고 하였답니다.
세월이 흘러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가 태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으므로 비류와 온조는 신하10명과 함께 남쪽으로와 한산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는데 한수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라고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비류는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갔다고 했으며 후에 미추홀 백제 집단이 위례에 와서 병합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국호는 '십제' 였는데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족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고 합니다.
근데 비류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뒷부분에 딸린 참고자료로 나옵니다
시조 비류왕은 아버지가 우태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이고 어머니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로 나옵니다.
소서노는 우태와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는데 세월이 지나 우태가 죽고 소서노가 과부로 있을 때 주몽을 만나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데 소서노가 힘을 많이 보탰지요 그래서 소서노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찾아와 왕위를 이으므로써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가서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
최근 '주몽'드라마는 이것을 기준으로 만들었지요
여러분은 어느 이야기를 믿고 싶으세요?
이 두 설화를 통해 한성백제의 건국세력은 북부여에 뿌리를 둔 고구려 계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조가 도읍한 위례성이나 한성은 어디일까요? 기원전 18년 온조가 도읍한 위례성이나 한성 등에 대해서는 서울, 광주, 직산이라는 각각의 의견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 '직산위례성 발굴'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삼국유사에 백제의 초도 위례성이 지금의 천안 위례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조는 천안까지 내려갔다가 한성으로 올라 왔다는 것인데...
발굴하여 유물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위례성은 기록을 통해 볼 때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으로 구분됩니다.
하북위례성은 북한산 동쪽기슭으로 미아리 수유리 일대로 보는 견해와 세검정, 평창동 일대로 보는 견해 중랑천 구리시 아천동 등 아차산성을 북한산성과 같이 보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하남위례성은 한강남쪽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고골과 교산동 춘궁동일대, 송파구 강동구 일대를 주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원화 되어있는 위례성의 도성위치가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서울 인근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고 합니다.
'위례성' 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한번 알아 볼까요?
1. 울타리라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조선후기 정약용선생님의 주장인데요 사방을 널리 둘러싼다는 위리와 음이 비슷하여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을 말하며
2. 한강 옆에 쌓은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에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 곽을 만들고 아버지 뼈를 묻었다'는 기사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왕이 크게 화를 내고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왕성을 공격.....' 욱리, 아리가 모두 한강을 가리키며 위례도 마찬가지라는 해석입니다. 이를 처음 주장한 신채호선생님이 한강을 이두로 욱리, 아리, 위례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3. 왕이 사는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중국역사서인 '주서'에 '백제왕이 성씨는 부여씨이며 어라하 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는 모두 왕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례'는 '어라'와 함께 '왕' 또는 '크다' 라는 뜻인거죠 그래서 위례성은 왕성 또는 큰 성 이라는 것입니다.
이상 세가지의 해석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가리기는 어렵지만 저마다 개연성이 있습니다.
자 그럼 이런 용어의 해석만으로도 어디일까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한 나라의 도성이었음을 알려면 몇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주변의 방어시설, 인근의 왕릉존재, 도성 성곽존재, 백성들의 종교시설인 불교사찰 존재...
예전에는 춘궁리 이성산성을 예기하기도 했고 또한 몽촌토성도 누구도 이의 없는 백제 왕성후보였습니다. 몽촌토성은 88올림픽 때문에 스타가 된 곳이기도 하지요.
근데 두 곳 다 출토된 유물이 백제 왕성으로 보기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였지요
이때 풍납토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풍납토성은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을축년(1925년) 대 홍수가 있었을 때
참 홍수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예요.
이런 물건이 나타나 새로운 역사를 알게 하니까 말예요
이 물건(참고그림제시)은 제사 같은 신성한 의식에 사용되는 것인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물이 출토 되었습니다.
출토 유물에 대해서는 다음 다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하다고 논문을 발표한 이형구 교수는 97년에 풍납토성에서 실측 조사 작업을 하다가 현대 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과 유물이 나 딩구는 것을 목격하고 신축아파트 공사를 중단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으로서 강력한 후보지로 하기에 결정적인 사건은 성벽 발굴이었지요
단순한 흙으로 만든 토성이 아니라 판축토성임이 밝혀졌고 한강을 바로 맞닿은 구릉하나 없는 평야지대에 거대한 성벽 같은 수법으로 쌓은 성이라면 왕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판축법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평지에 강이나 하천을 끼고 각국의 왕성인 제후성과 한대의 왕성에 사용했던 축조기법 입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댐 공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과학적이고 복잡한 방법으로 축조한 것입니다.
이 토성은 폭43m 높이11m이상 둘레 3.5km 100만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시켜 쌓은 성으로 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면적의 토성입니다.
(참고-아래그림제시)
또한 주변에 석촌동의 적석총, 가락동의 백제 고분군, 방이동에 백제 고분군의 분포와 풍납토성의 발굴 유물로 볼 때 삼국사기 초기 기록 그대로 고대국가 백제의 실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써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었을 가능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송파문화원 제2기 2009년박물관대학 교재 " 박물관대학 심화과정 2009년송파문화유산해설사 기본과정 교육교재 서울역사강좌 2004년 하반기-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서울시사편찬위원회 신희권- 2007년도 제1차 역사학자와 함께 문화유적 찾아가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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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역사 '삼국'에 대해서는 너무나 초보입니다. 이런 계기로 새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발표 한 것을 '글'로 올리라 하여 걱정이 앞섭니다. 읽어보시고 여러분들이 아는 것과 다른부분이 있으면 꼬리글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공부 한 번 더 합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멘토링 하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잘 봤습니다.^^
선생님의 멘토링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여 아쉬웠는데 자료를 대하니 좋으네요. 고경님 잘 보았습니다.^^
휴가중이셨다고요*^^*못뵈서 아쉬웠지만...토요일 뵐께요
휴가는 아니고 대전에서 청소년문화재지킴이지도교사 오리엔테이션이 있어서 다녀오느라 아쉽게 되었습니다. 다음기회가 또 있겠지요? 토요일날 뵙겠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이 축적되어서인지 모든 면에서 참 잘하셨습니다. 앞으로 함께 하실 선생님들께도 좋은 이끌어주심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미흡하기 그지없었는데...과분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완벽한 사전 준비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과 함께 해 주신 자세한 해설에 감탄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끌어주심'에 저도 합류되어 있는 거죠? 함께 해서 정말 즐거워요*^^*
저 진땀 뺐거든요. 제목이 공고된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될지 막막(왜냐 공부가 짧아)전전긍긍~~당일 새벽까지 준비가 되지 않아 황망~~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그래도 즐거우셨다니까 제가 더 즐겁네요*^^*
자료 감사히 읽었습니다. 송파 도서관에서 여름 방학 특집 프로그램으로 몽촌토성 답사를 준비하였기에 도영림씨와 함께 20명 이끌고 다녀왔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토성 한 바퀴 돌리고 싶었는데 날이 너무 뜨거워서 움집터와 목책, 몽촌역사 박물관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훌륭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멘토링 하는 것 보고 싶었는데 시험이 겹친 관계로 불참하게 되어 놓치고 말았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