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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Adam Smith 영국, 1723~1790년)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 철학자이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그는 이기심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때문이다."
한 해가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처럼 그렇게 사라져간다. 경제와 돈에 관심이 없어도 모두가 다 아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말이 있다. 이 투명 손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이렇게 망자처럼 수백 년을 떠돌고 있는 것인가? 유난히도 힘들었던 한 해가 2023년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아담하게 생긴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이 유명한 말은 그의 저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과 도덕적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에 각각 한 번씩만 나올 뿐이다. 단 2번만 언급된다. 그는 누구였으며 어떤 시대를 살았을까? 지나간 시대의 한 사람의 과거를 캐는 일은 사금을 캐는 것만큼 재미있다.
그에겐 엄청난 장점이 있었으니 근면, 성실함과 도덕성 그리고 남을 즐겁게 하는 장난기이다. 이렇게 하늘이 흐리고 메마른 가지에 흔들리는 잎새처럼 마음이 황야를 달릴 때는 그가 그립다. 하루 종일 웃게 만드는 지성의 마력을 가진 남자! 그는 글래스고 대학의 인기 있는 교수였다. 끝없이 노력한 성실함의 표본이었다. 경제활동의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에든버러 세관 국장(1778)을 지냈고 존경과 명예의 대상이었다.
왜소한 키에 말을 더듬었으며 틱장애가 있었다. (기실 이 정도면 여자들이 그를 피했을 것 같다.) 여성 공포증(기피증)이 있어서 결혼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 마거릿이랑 살았다. 운 좋게 공작 아들의 개인교수가 되었다. 3년 동안 함께 여행을 하면서 국부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책은 "도덕적 감정론"이었다.
한나라의 부는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그는 도덕적 감정론을 먼저 썼다. 그는 돈보다는 사람을 사랑한 철학자였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불필요한 정부의 경제적 간섭을 자제하라는 말이다.
뛰어난 경제학자가 나타나도 사기꾼 같은 정치인이 나타나면 다 망한다. 도덕성의 결여로 경제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 개인의 경제적 이기심은 도덕적 체계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는 경제를 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인간의 도덕성과 건전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암시했다. 경제도 진화해야 하고 정치도 바뀌어야 한다. 이중요한 순간 왜 퇴보하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를 스스로 돌아가게 만드는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경제 원리 속에 숨어있는 원리이다. 자연스럽게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손과 같은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움직이게 도와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18세기 중상주의로 왕실은 부유했고 강력했다. 국가 주도의 중상주의는 귀족과 일부 상인들의 독점과 비리의 온상이었다. 투기 과열의 시대가 준비 중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비판하여 만든 것이 시장을 자유에 맡겨야 한다는 국부론이었다.
머릿속에 체스판 위의 손처럼 거대한 것이 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방임 주의자는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산불이 계속 타들어 갔던 것은 오랫동안 정부에서 작은 산불들이 날 때마다 계속 관리해서 생긴 문제였다. 그는 최초로 경제를 학문으로 직시했다.
자연이 준 소소한 불들을 미리 예방함으로써 더 큰불을 불러왔다. 자연이 내린 번갯불이 큰불을 미리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랑 자연의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경제란 어느 정도 스스로 회생하게 두어야 한다. 움직여 준다는 것이다. 큰 부가 있는 곳엔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 한 명의 부자가 있기 위해선 500명의 가난한 이들이 필요하다. 소수의 풍요에는 다수의 분노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도덕성의 결여로 경제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어쩌면 2024년, 헬 게이츠가 열릴지도 모른다. 개인의 경제적 이기심은 적어도 도덕적 기반의 체계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점점 더 이기심이 커져가고 명분이 사라져가는 오늘 우리 시대의 불평등을 보고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사회를 통렬하게 후려치는 자가 필요하다. 정치인들이랑 경제인들 모두가 눈여겨봐야 하는 책이 도덕적 감정론이다. 일반인은 꿈꿀 수 없는 길을 천재들이 알려주고 갔다. 도덕감을 바탕으로 한 규율과 법적 처벌이라는 두 가지 장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 공감이 정의와 함께해야 이기적인 면도 아름답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버릇없거나 잘못 행동할 때 내 대갈통을 후려치던 어르신의 곰방대가 떠오른다. 개혁의 왕, 정조의 곰방대가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빗자루와 대걸레 양동이에 물을 담아와 청소하는 이가 그립다. 힘든 세상, 격정은 사라지고 열정은 정적을 떠도는 추상어가 되었다. 경제와 도덕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Please!!!!!(탐욕의 시대가 통탄스럽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을 선도한 도덕철학자(moral philosopher)였다. 정경유착과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불공정한 중상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고전적 자유주의를 연구한 자이다. 그 당시 사상가들이 고뇌했던 개혁의 문제점들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 문제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는 정치인들을 코인이나 사고 세계 일주하라고 뽑지 않았다. 권력을 부의 축적의 용도로 사용하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들이 경탄스럽고 한심하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영국은 시민혁명(1642-1649)을 거쳤지만 아직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중상주의 시대였다. 오로지 사적인 부의 추구를 위한 본능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생산력의 힘을 인정하고 찬양하면서도 무분별하고 불공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으려는 중상주의 체제는 도덕적으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생각이다.
당신이 어떤 철학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종교나 신념은 내가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실을 보고 상대방이 궁금해서 혹시 종교는? 하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하는 것이다. 건전한 경제는 도덕성이 우선이어야 한다. 새로운 성찰과 반성은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이다.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가 쇠나무산에 놓고 그 소가 쇠풀을 다 먹어도 신념과 믿음은 같다. 도덕률은 영원히 살아 징과 돌처럼 돌고 들으리라.
위대한 경제인 "김우중"이 나타났어도 시대는 그를 품지 않았다. 후조처럼 떠돌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눈물이 났다. 남편은 "최동원"선수의 장례식 장면을 보고 울었다. 이렇게 뼛속까지 다른 남자랑 함께 있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동거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벌을 주는 세상과 착한 일을 했을 때 상주는 세상 중 난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돈이 모든 신념들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또 다른 이름의 신이 되어버린 현실,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가? 돈과 도덕이 상보의 관계가 되길 바라는 순간에 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