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묵상하는 마태복음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는 그림은 하나님 나라나 천국은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임을 비유로 표현한 것으로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이성과 감성이 소멸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온전한 이성과 감성이 온전한 조화를 이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이기에
누구라도 복음을 공평 타당함의 논리인 외모로 판단하여 자신도 소유하지 못한 복인 주겠다면 부모나 선생이 되어 구하고 있는 표적과 자신들의 주장인 종교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본질을 미혹하는 것은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온전한 복음과 전혀 무관한 불의와 불법이기에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신체의 일부를 찍어 내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할뿐 아니라
신기루인 바람을 정답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잡기 위하여 온전함이 논리가 아니라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본질인 이성과 감성을 소멸하고 신기루 도덕천을 따른 이상과 감성을 세뇌함으로 괴물로 변한 실상과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인 바람을 잡기 위한 불가능에 도전하지만 정답을 찾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며 공수래공수거를 우리 피조물의 정답으로 착각하여 인생무상 새옹지마요 화무십일홍이기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며 스스로 합리화하는 발악으로
이를 온전함이 아니라 공평 타당함으로 판단하면 그 외모는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처럼 복음과 같은 모습이지만 복음과 다른 점은 그 중심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신기루로 헛된 바람인 자신의 야욕과 욕망을 위하여
공평 타당함의 정의를 정답으로 착각하여 지금도 발악하고 있는 나와 이세상의 모습인 시기와 질투로 서로 속고 속이며 권모술수가 난무 하는 아비귀환의 아수라장으로 이는 온전하신 여호와의 뜻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참인 복음이 아니라
부족한 이성인 공평 타당함의 정의를 따라 자신의 유혹을 참으로 착각하여 판단함으로 결과적으로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오게 된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문자나 언어에 끄들려 참으로 착각하여 신기루 도덕천인 하나님을 부각시키므로
최고의 지혜인 회개를 하기보다 스스로 선생이 되어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라고 미혹하는 허황된 짓은 참인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로 자신은 물론 참인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가로막는 것이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는 그림은 구하고 있는 표적과 자신들의 주장인 종교의 정당성과 합리화를 위하여 천사나 하늘이나 아버지란 말로 미혹하여 새로운 피조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세뇌하기 위한 것이고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공평 타당함의 논리인 외모로 판단하여 스스로 만든 신기루 도덕천을 대자대비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양을 1대 99로 분별하는 것은 복음과 전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는 그림처럼 구하고 있는 표적과 자신들의 주장인 종교의 정당성과 합리화를 위하여 대자대비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미혹하여 세뇌하려고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아담이나 노아를 비롯하여 너무나 쉽고 간단한 기회를 다 놓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무지하여 무능한 못난이 하나님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 되고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림은
온전함이 아니라 신기루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의 실상으로 제법실상은 공하다고 하는 것처럼 율법을 비롯하여 모든 규례는 여호와가 아니라 우리들이 우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도덕천을 빙자하여 우리 스스로 만든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고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그림은
우리들이 만든 법에 정의의 여신이란 그림처럼 칼인 힘으로 공평인 정의를 실현하려는 불가능의 도전으로 스스로 만든 율법이나 규례에 하나님을 빙자하여 의미와 권위를 부여하여 정답처럼 미혹하는 것이고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는 그림은
피조물이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이성과 감성이 소멸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온전한 이성과 감성이 온전한 조화를 이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이기에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는 그림처럼 피조물의 온전한 용서는 절대 불가능함을 보여주시는 것은
누구라도 복음을 공평 타당함의 논리인 외모로 판단하여 자신도 소유하지 못한 복인 주겠다며 부모나 선생이 되어 구하고 있는 표적과 자신들의 주장인 종교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절대 불가능의 도전인 용서를 하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기보다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는 그림처럼 신기루인 바람을 잡는 불가능의 도전인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온전한 복음과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묵상을 통하여 확인 것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비유로 표현한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란 비유 안에서 여호와의 뜻인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를 따라 태초에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이미 완성된 사건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이시기에 영화를 보여주시듯이 다시 보여주시는 것이지만
더욱더 신비한 비밀은 태초에 이미 완성된 사건이지만 나에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사건으로 결국 나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고, 또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은 곧 새로운 피조물로 영화처럼 사실을 직접 보여주어도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감동으로 느끼거나 외모만 볼 수 있기에 직접보고 느낀 그것을 정말 그대로 표현했다고 해도 그 자체가 비유가 될 뿐 아니라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는 이미 완성된 것이기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비유로 표현한 것을 문자나 언어에 끄들려 참으로 착각하면 오히려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인 참인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성경을 통하여 영화처럼 보여주시는 것은 실상이 아니라 비유로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다는 비유로 표현된 피조물이 도무지 살 수 없는 죽음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도 “하나님의 신은 순면에 운행한다”는 비유로 표현한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참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그런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위하여 일단 피조물이 살수 있는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인 아담 안에 내제된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를 위하여 최고의 환경과 조건인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었으나 절대 불가능하자 신기루이지만 이성과 감성이 남자와 여자로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이에 서로 한 눈에 반하므로 결혼하여 신혼 기분을 내듯이 이미 승리한 것처럼 즐겁고 신나게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에 도전했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최고의 지혜인 회개를 알지 못함으로 이성과 감성이 서로 온전한 조화를 이루며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하기 위하여 각자 자신이 자아의 울림인 유혹을 따라 하와가 신기루 여자와 뱀으로 분리하는 것처럼 끝없이 분리하고 또 분리하여 여호와의 뜻을 따라 피조물의 실체요 한계인 죽음을 본능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인 살아있는 길로 가는 회개를 하기보다
너무나 대단하게 보이는 유혹을 따라 엄밀하게 표적으로 구하고 있는 도덕천이나 표적들은 실상이 아니라 신기루인 헛된 유혹들로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를 절대로 이룰 수 없기에 이룬 척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로 인하여 당당하게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여 갈급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각자 현실의 삶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최고의 지혜인 회개를 하기보다 오히려 부족한 이성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두에게 도덕천을 따른 율법으로 죄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만들고 더욱더 엄밀하게 표적을 구하는 불가능에 도전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갈뿐 아니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영원히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끝없는 불안과 불평 속에서 헤매게 되다는 사실과 또 한편으로는 이것도 여호와의 뜻을 따라 피조물이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위한 당연한 과정으로 이를 통하여 결국 솔로몬 같이 최고의 지혜를 깨달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로 거듭나게 된다는 사실을 영화처럼 보여주시는 것으로 바로 알고 이제는 패망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바로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은 피조물 예수가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아직도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을 영화처럼 비유로 보여주시며 정답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의 실상과 온전한 복음의 증인으로 참인 정답을 비유가 아니라 실상으로 다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비유처럼 참인 정답을 찾으려고 발악하거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란 비유처럼
신기루 도덕천을 비롯하여 표적을 구하려고 선과 악처럼 신기루로 의미 없고, 가치 없는 불가능한 분별에 도전하는 종교와 선생이 되는 것은 성령훼방이 되어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바로 알 때
아브람 가문은 막장 중에 막장인 야비하고 무례한 꼼수 가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무상 새옹지마 같은 우리의 인생사를 따라 우연히 전화위복이 된 결과를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처럼 의미를 부여하여 아브람 가문을 신기루 도덕천의 뜻을 펼칠 언약의 가문으로,
아브람이 꿈꾸는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똥을 복으로 착각하여 복의 근원이라고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야비하고 무례한 부끄러움을 합리화하며 신기루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도록 미혹하여 세뇌하려고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은 온전하신 여호와가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내가 상상하여 내가 만든 헛된 신기루인 나의 하나님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외모나 중심도 온전하신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신기루로 헛된 바람인 자신의 야욕과 욕망을 위하여 지금도 발악하고 있는 나와 이세상의 모습인 시기와 질투로 서로 속고 속이는 권모술수가 난무 하는 아비귀환의 아수라장으로
이는 온전하신 여호와의 뜻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참인 정답이 아니라 부족한 이성으로 자신의 유혹을 참으로 착각하여 판단함으로 결과적으로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오게 된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문자나 언어에 끄들려 오히려 참으로 착각하여 신기루 도덕천을 부각시키므로
최고의 지혜인 회개를 하기보다 오히려 표적을 구하는 종교와 선생이 되어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라고 미혹하는 허황된 짓은 참인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로 자신은 물론 참인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가로막는 것이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의 증인이요 몽학선생인 예수는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속도 위반으로 태어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해도 온전한 복음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만족과 명분의 합리화를 위하여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에 등장하는 황당한 설정처럼
하나님을 빙자한 황당한 설정의 억지 주장으로 미혹하여 믿음이란 이름으로 세뇌함으로 진리처럼 참으로 알고 있지만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나, 아브람의 자손 예수나,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의 아들 예수를 비롯하여 십자가, 대 제사장, 희생의 제물인 어린양을 비롯하여 부활의 예수는
복음의 몽학 선생이지 결코 복음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복음으로 착각하면 오히려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똥칠인 불의와 불법의 나팔과 꽹과리 소리가 되어 복음으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의 궁극적인 참 소망은 피조물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것으로 이것이 진리이며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로 이는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으로 모두가 이 복을 소유하기 위하여
철학은 이성적으로 그 모든 것의 근본이요 원본인 대단한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를 찾고 있지만 누구도 찾지 못하자 대단한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포함으로 결국 신에 대하여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으로 실패를 선언 하였고
또 모든 종교는 우연히 보게 된 이데아의 외모인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을 깨달음으로 착각한 무지로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수행을 정답으로 착각하여 표적을 구하므로 악하고 음란한 도전을 강요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자신도 소유하지 못한 그 길로 이끌어 신기루인 바람을 잡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게 함으로 자유의지인 감성이나 이성을 소멸하기 위한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고 있는데
그것을 크게 보면 기독교처럼 자신보다 대단한 외부에서 정답을 찾기 위하여 신기루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며 그 안에 거하므로 영생인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와 불교처럼 자신의 내부에서 정답을 찾기 위하여 자신의 자성을 표적으로 구하며 순수한 자성만 남기고 다 버리는 해탈로 무아와 무상의 경지인 중도가 되면
악(惡)의 3가지 뿌리인 3업 즉 탐(貪, lobha)/탐욕, 진(瞋, dosa)/노여움, 치(癡, moha)/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미혹하여 종교로 추구하고 있지만 이를 통하여 자신들을 물론 어느 누구도 참이고 진리인 온전한 행복인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철학과 종교를 초월한 지혜의 왕인 솔로몬을 통하여 제법 실상은 공 하다는 붓다처럼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신기루처럼 살아질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허상일 뿐 아니라
또 붓다와는 달리 영생을 소유하게 하려는 여호와의 뜻인 복음은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피조물 스스로는 그 자체를 절대로 알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바람을 잡으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라고 보여 주시며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달아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도덕천을 만들어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예수를 비롯하여 복음의 도구인 모든 몽학 선생들을 통하여
피조물의 한계와 여호와를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로 자신을 부인함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자신의 잔을 비우면 누구든지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근본적으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과 선악과로 표현된 이성의 온전한 조화이며 그렇게 서로 사랑하므로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게 되므로 그것으로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연수까지 행복하게 증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또한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피조물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도구로 만든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이성으로 판단한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방해가 되는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한 것이 구약으로 이것이 바로 이단의 시발점이고
또 구약의 도전이 불가능하자 회개를 하기보다 다시 2차 도전을 위하여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됨으로 복음의 초대 증인이요 몽학 선생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미혹하여 표적으로 구하는 도전이 신약으로 오히려 수많은 이단들의 출현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과 온전하신 여호와에 대한 무지로 여호와께서 스스로 구약과 신약을 주고, 아론과 멜기세덱의 대를 잇는 두 라인의 제사장 직을 주고, 성소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천국 모형을 주고, 이 땅과 천국에도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바람을 잡으려는 이성적인 이런 참담한 주장들을 하는 것은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온전하신 여호와를 폄훼하며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로 표적을 구하게 함으로 자신들은 물론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불의와 불법의 나팔과 꽹과리 소리가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묵상을 정리해 보면 우리 피조물이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사실은 각자의 목숨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아깝거나 후회하기보다 너무나 감사한 절대 불가능의 과정을 통과한 기적으로 충격적인 변화요 감동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천국으로 상상할 만큼 최고의 환경과 조건인 에덴 동산에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아담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 외모는 분명히 한 몸인 아담과 하와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과 선악과로 표현된 이성이 서로 온전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자
서로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구원을 받아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모형으로 보여준 생명나무 실과를 먹기 위한 도전을 직접 또는 솔로몬을 통하여 보여준 것처럼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한 대단한 도전으로 회개를 깨달아 모든 것을 부인하는 회개를 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아담과 하와가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로 거듭남으로 온전한 한 몸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소유하여 누리는 것을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들도 깨달아 그 예수를 증인으로 삼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아직 각자의 때가 차지 않아 피조물의 옷을 벗지 못하고 신기루인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서로 발을 씻기며 서로 사랑하는 살아있는 길로 걸어감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일용할 양식처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누리는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확인하고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생을 소유하기 위하여 복음의 증인이요 몽학 선생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 신기루 도덕천을 여호와로 미혹하여 표적으로 구하며 갈망하는 복과 평강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생으로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신기루 외모인 이 세상이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도록 미혹하기 위하여 주겠다는 유혹으로 그 실체는 신기루인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고 헛된 불가능의 도전인 불안과 갈급함의 구속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복으로 착각하여 스스로를 속이며 엄밀하게 표적을 구함으로 종교가 되어
신기루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순종에 걸림돌이 되는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이나 이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사탄이니 마귀니 하면서 선과 악 등으로 분별하여 미혹함으로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여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을 용감하고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피조물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회개와 함께 이미 배설물로 버린 신기루 외모인 에덴동산처럼 피조물이 꿈꾸는 최고의 환경과 조건인 돈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 등의 몽학 선생인 이 세상의 것을 표적으로 구하며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려는 어리석고 헛된 불가능의 도전은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부인하는 성령훼방이 될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범죄한 것처럼 교묘하게 미혹하여 원죄의 굴레를 씌우며 그 아들 셋이 아들을 낳자 온전하신 여호와 대신에 나의 하나님을 만들어 그때부터 다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미혹하여 세뇌함으로 종교를 만들어 표적으로 구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종교인들보다
더욱더 엄밀하고 교묘하게 에덴동산이나 몽학선생의 표적을 구하므로 문제의 핵심은 내가 버린 배설물을 먹고 있는 바로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표적으로 구하고 있는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인 부족한 에덴동산이나 몽학 선생이란 착각으로 스스로 대단한 선생이 되어
당연히 그리고 끝없이 밀려오는 이 세상의 유혹인 불안함과 갈급함의 신기루를 해탈함으로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주변을 탓하며 울리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인 불가능의 도전으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성령훼방이 되어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채운 너무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랑스런 자신의 잔이나 반대로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한 자신의 잔을 비롯하여 어떤 모양이고 조건이든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피조물의 잔은 신기루인 헛된 것으로 이를 비우는 회개를 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용을 그리듯이 복음의 무지로 구약과 신약으로 멋대로 분별하여 복음을 그리므로 지금까지 이단이 되고 몽학 선생이 되어 한편으로는 복음으로 안내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게 하는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예수, 삼위 일체, 율법, 십자가, 성찬, 세례, 동정녀, 성령잉태, 원죄, 제사장, 제자, 기도, 예배, 찬양 등을 비롯하여
복음을 가로막아 표적이 되는 몽학 선생의 옷을 한 겹씩 모두 벗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 다시 표적을 구하므로 성령훼방을 하기보다 서로 사랑함으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첫댓글 용서와 회개에 대하여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였습니다. 용서는 기독교인의 필수미덕인것 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만 이미 엎질러진물을 담을수 없다는 말 처럼 없던일처럼 할수 있어도 나와상관없는 일은 될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며 부부싸움의 예만봐도 감정이 뒤틀리면 모든 이미정리된 묵은 감정들을 발산하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모임에서 나누었듯이 일곱번의 칠십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할수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용서가 아닌 회개함으로 새로움 피조물이 됨으로 피조물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됨으로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것임을 알아 회개가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것인지를 새삼느끼게
하는 좋은 계기가되었습니다.^^
ㅎㅎ 그렇지요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