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물은 혼을 가지고 있는가?
“계속해서 피로 흠뻑 젖어 채, 전체 지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끝없이, 그치지 않고—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거대한 제단일 뿐이다.”
— 콩트 조제프 드 메스트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녁들 I. ii, 35
I
동양에는 서구 국가들이 자주 그리고 경솔하게 비웃는 “낡아빠진 종교적 미신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동물 생명에 대한 동양인들의 위대한 존중만큼 무시받고 실제적으로 경멸받지 않는 것이 없다. 육식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사람들을 공감할 수가 없다. 우리 유럽인들은 날것의 뼈로부터 피와 골수를 빨아먹었던 동굴에 거주하던 우리 선조들과 불과 몇 천 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문명화된 야만인들의 국가들이다. 이렇게 빈번하게 부당한 전쟁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을 너무 값싸게 여기는 사람들이 동물 피조물의 죽음의 고통과 매일매일 무시하고 선량하고 무해한 수백 만의 생명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호랑이 스테이크나 악어 갈비를 먹을 만큼 미식가적이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양고기와 황금 깃털의 꿩고기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크루프 (무기 제조 재벌) 대포와 과학적인 생체 해부 시대에 있는 것이다. 강인한 유럽인들이 소를 죽이는 생각에 몸서리치는 유순한 힌두인들을 비웃거나, 코끼리부터 각다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도와 자이나교도와 공감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크게 경이로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육식이 우리 서구 국가들에서 필수적인 것—"폭군의 변명!”—으로 되었다면; “그들의 신(God)이 그들의 배(belly)”인 사람들이 숭배하고 성 바울이 비난하였듯이, 문명화된 세계의 모든 마을, 자치구와 도시에서 많은 희생양들이 신에게 바쳐진 사원들에서 매일 도살되어야 한다면; 이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철의 시대”에 피할 수 없다면, 누가 스포츠에 대해서도 똑 같은 변명을 주장할 수 있을까? 낚시, 총사냥 그리고 사냥, 문명 생활의 모든 “오락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 오컬트 철학의 관점에서 확실히 가장 불쾌한 것이고, 비의가르침의 직접적인 결과인 힌두교와 불교의 이런 종교 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장 사악한 것이다. 유럽인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이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들인 두 종교의 옹호자들이 동물계—네발 짐승부터 가장 작은 곤충까지—를 그들의 “어린 형제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무런 좋은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타당한 검토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아무리 과장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소위 문명 세계의 무수히 많은 도살장에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장면들 혹은 심지어 “사냥 시즌” 동안에 매일 행해지는 것들을 몸서리치지 않고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에 거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떠오르는 태양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사방에서 수많은 학살이 준비되고 있을 때, 첫 번째 햇살이 뒤척이는 자연을 아직 깨우지도 않았다. 모든 기독교 국가들에서 하루 종일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연 전체에 두루 고통의 긴 찬송가처럼 울리는 가련한 통곡 같은 희생양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이교도의 몰록도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 고대의 스파르타—그들의 엄격한 시민들은 인간의 가슴의 섬세한 느낌에 덜 민감하지 않았다—에서 한 소년이 오락으로 어떤 동물을 괴롭혔다고 유죄로 판결 받았을 때 그 성질이 너무 철저하게 악랄해서 그가 살아가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 사람처럼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기독교 미덕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문명화된 유럽에서, 오늘날까지 힘(might)이 권리(right)와 동의어로 여전히 남아 있다. 단지 스포츠를 위해서 무수히 많은 새들과 동물들을 총으로 사냥하는 전적으로 쓸모 없고 잔인한 실습이 프로테스탄트 영국보다 어디에서도 더 열광적으로 자행되고 있지 않는다. 그곳에서 크리스트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주 앞에 강력한 사냥꾼,” 님로드 시대만큼 인간의 가슴을 부드럽게 하지 못했다. 기독교 윤리가 “이교도”의 윤리처럼 모순적인 삼단논법으로 편의적으로 바뀐다. “단 한 마리의 참새도 아버지의 의지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스포츠를 위해서 죽이는 그가 예를 들어 백 마리 참새를 죽인다면 나는 아버지의 의지를 백 번이나 하는 것이라고 한 스포츠맨이 어느 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무자비한 숙명으로 굳어져버린 가여운 운명이 가련한 동물 피조물들의 운명이다. 기독교 가르침은 동물의 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에서 인간의 이성적인 혼은 태어나서 동물의 비이성적인 혼의 살해자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카인과 아벨의 전설이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의 문명 시대의 또 다른 수치인 “생체해부실”이라고 불리는 저 과학의 도살장을 보라. 파리에 있는 그곳 한군데를 들어가서, 폴 베르 혹은 이런 다른 사람들—“그 연구소의 유식한 도살자들”이라고 정당하게 불리는—이 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것을 보라. 이 “집행자들”의 작업 방식을 철저하게 연구한 유명한 프랑스 작가이자 목격자의 힘있는 묘사를 번역만 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체해부는 하나의 전공으로 우리의 도살자-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절약하는 고문이 하루 종일, 주간 내내 그리고 심지어 한달 내내 똑같은 희생자의 근육과 섬유질에 가해진다. 그 고문에서 온갖 종류의 도구를 사용하고, 가련한 대중 앞에서 분석을 수행하며, 매일 아침 열명의 수습들이 그 일을 나누어, 한 명은 눈에 작업하고, 다른 사람은 다리에, 세 번째는 두뇌에, 네 번째는 골수에 작업한다; 그리고 경험 미숙한 손들이 낮 동안의 작업이 끝난 후에 밤까지 지속되며, 그들이 조각해 내라고 명령받은 살아 있는 시체 전체를 발가벗기고, 그 희생자에 생명과 민감성의 숨결이 남아 있다면 다음날 아침 일찍 그것에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저녁에 저장소에 그것을 신중해서 보관해 둔다. 그라몽 법의 관리들이 이런 혐오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지만, 파리가 런던과 글라스고우 보다 더 냉혹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
그러나 이 신사들은 그들이 추구한 웅대한 목표에 대하여 자랑하고, 그들이 발견한 웅대한 비밀에 대해서도 자랑한다. “공포와 거짓들이다!”—같은 작가가 외친다. “비밀들의 문제에서—몇몇 기능들과 뇌의 움직임의 몇 가지 국부화를 제외하고—우리는 권리로 그들에게 속하는 한 가지 비밀만을 알고 있다: 즉, 고문의 비밀을 영구화하였다는 것으로, 게다가 자가포식(autophagy)—서로 잡아먹기(mutual manducation)—의 끔찍한 자연 법칙, 전쟁의 공포, 스포츠라는 명랑한 대학살 그리고 도살자의 칼 아래에서 겪는 동물의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과학자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그들은 이전의 모든 종류의 고문을 능가하였고, 어떤 가능한 논쟁 없이, 인위적인 비통과 절망의 왕들로 이제 영원히 남아 있게 되었다.”[2]
생체해부에서처럼 동물들을 도살하고 죽이고 심지어 법적으로 고문하는 통상적인 변명은 성서 속에 있는 한 두 개 구절이고, 잘못 소화한 그것의 의미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소위 스콜라 철학에 의해서 훼손되었다. 심지어 교회의 권리들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인 드 미르빌도 그런 구절들, 즉 “다른 많은 것들처럼, 대홍수 이후 신으로부터 얻어냈으며 우리의 힘의 타락에 토대를 둔 성서 속의 허용들”이라고 외친다. 아무리 이렇다 하더라도, 그런 구절들은 성서 속에 있는 다른 구절들과 많이 서로 모순된다. 육식하는 사람, 스포츠맨 그리고 심지어 해부자—해부자 사이에 만약 특별한 창조와 성서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는 일반적으로 창세기에 있는 그 구절로 정당성을 인용한다. 즉, 신은 이중의(dual) 아담을 준다—"물고기, 가금, 가축 그리고 지구 상에서 움직이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준다 (창세기 1장 28절); 그래서 기독교인이 그것을 이해하듯이,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동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힘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훨씬 더 철학적인 브라만과 불교도가 대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진화는 존재의 가장 낮은 등급 속에서 미래의 인류를 형성하기 위해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동물을 죽임으로써, 심지어 곤충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자연 속에서 최종의 목표인 인간(MAN)을 향해서 가는 어떤 실체의 진보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오컬트 철학의 학생은 “아멘”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그 실체의 진화를 지체시킬 뿐만 아니라 다음에 따라오는 인간의 진화와 앞으로 오게 될 더 완전한 인종의 진화를 잡는 것이라고 첨언한다.
반대자들 중에 누가 옳고, 누가 더 논리적인가? 그 대답은 그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 선택한 중재자의 개인적인 믿음에 주로 달려있다. 만약 그가 소위 말하는 “특별한 창조”을 믿는다면, “왜 살인이 신과 자연에 반하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로 간주되고, 수 백만의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죽이는 것이 단순한 스포츠라고 여겨질 수 있을까?” 라는 평범한 질문에 그는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 자신의 이미지로 창조되었고 그의 창조자와 그의 탄생지인 하늘(천국)을 우러러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은 그들의 탄생지인 땅을 향해서 아래로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가축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창세기 1:24) 왜냐하면 “인간은 불멸의 혼을 가졌고, 말 못하는 짐승은 불멸이 없으며, 심지어 사후에 짧은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성서가 이 미묘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권위라면, 인간의 탄생지가 기어 다니는 것들의 탄생지처럼 하늘이라는 어떤 사소한 증거도 성서 속에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것에 대답할 수 있다—상당히 반대이다;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만약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고 “그들”을 축복하였다면, (창세기 1장 v. 27-28) 마찬가지로 “거대한 고래들”을 창조하였고 “그들을 축복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21, 22절) 더구나 “주 신(Lord God)이 땅의 먼지에서 인간을 만들었다.” (2장 7절): 그리고 “먼지(dust)”가 확실히 분쇄된 흙이 아닌가? 왕이자 설교가인 솔로몬이 가장 결정적인 권위자이고 성서의 성자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전도서에서 (3장) 이 주제에 대하여 모든 논쟁을 해결하는 일련의 진리들을 말한다. “인간의 아들들이 . . . 그들 자신들이 짐승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3장 18절) . . . “인간의 아들들에게 닥치는 것이 짐승들에게도 닥친다 . . . 인간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다”—(3장 19절). “모두가 한 곳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먼지로 만들어지고 먼지로 다시 돌아간다 (20절) . . . “인간의 영(spirit)이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spirit)이 아래로 땅으로 내려가는지 누가 아는가? (21절) 진실로 “누가 아는가?” 하여튼 그것은 과학도 아니고 “신성한 학교”도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이 성서나 베다의 권위에 근거해서 채식주의를 설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공처가의 우리 조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중의 아담—2장의 공처가의 우리 조상과는 아무 관련 없는 창세기 1장의 “남성과 여성(male and female)”—에게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력”를 주었다는 것이 아주 사실이라면, “주 신(Lord God)”이 아담이나 다른 존재가 동물 창조물을 걸신 들린 듯 먹으라고 혹은 스포츠를 위해서 파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씨를 맺는 어떤 나무의 과일”과 식물계를 가리키면서, 신이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너희 (인간)에게 그것이 먹을 거리가 될 것이다.” (I, 29.)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 진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날카로워서 몇 세기 동안 그들은 고기를 결코 건드리지도 않았다. “옥타비오”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미누키우스 펠릭스에게 쓴다: “동물 피가 섞인 음식을 맛보는 것을 거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살인을 목격하는 것도, 심지어 살인을 말하는 것을 듣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동물 권리들”을 방어하고 성서의 권위를 토대로 그런 권리들을 무시하는 오류를 보여주려는 시도로 채식주의를 설교하지 않는다. 더구나 잘못된 해석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진화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의 길이 언제나 어려움으로 포장된 것을 볼 것이다; 그래서 육체 인간을 동물들의 알려진 모범으로 단순하게 여기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영적인 자아(Ego)를 동물의 혼과 신성 사이의 중간 원리로서 간주하는 것이 사실과 논리에서 훨씬 더 일관적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서 인용한 구절들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겉보기에 터무니없는 것들과 모순들 전체 덩어리를 조화시키는 에소테릭 철학의 관점에서 성서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진리에 대한 열쇠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고 그에게 말하는 것이 헛된 일이다; —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 전체는 인간에 대한 자비로 가득하고 동물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하다. 레위기 24장의 원본 헤브루 사본은 그것으로 가득하다. 성서에 번역된 17절과 18절 대신에: “짐승을 죽이는 자는 짐승을 짐승으로 갚을 것이다”: 원본에는 “혼을 혼으로(soul for soul)”가 아니라 “생명을 생명으로(life for life)”로 되어 있다.[3] 그리고 만약 그 법칙의 엄격함이 스파르타에서처럼 짐승의 혼을 인간의 혼으로 죽이는 정도까지는 아닐 지라도, 심지어 죽인 혼을 살아 있는 혼으로 대체할 지라도, 가해지는 부가적인 처벌이 상당히 무거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과 23장 2절이하)에서 안식일에 휴식이 가축과 모든 다른 동물에게도 확장되었다. “일곱 번째 날이 안식일이다 . . .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이며, 너희의 가축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안식년은 . . . “일곱 번째 해에는 땅이 쉬어 그대로 있게 하라 . . . 그래서 너희의 소와 나귀가 쉴 수 있게 하라”—이 명령은 고대 헤브루에 의하면 심지어 짐승 창조물도 신을 경배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에는 인간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체 질문이 “혼(soul)”, “네페쉬(nephesh)”가 “영(spirit), “루아흐(ruach)”와 완전히 구분된다는 오해에 달려있다. 그러나 “신께서 인간의 코 속으로 생명의 숨결(breath of life)을 불어넣었고 인간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이것은 동물 이상도 이하도 아닌 네페쉬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혼도 또한 네페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발달을 통해서 혼(soul)이 영(spirit)으로 되며, 둘 다 보편 혼(UNIVERSAL SOUL) 혹은 영(spirit)이 그 바탕으로 있는 똑 같은 하나의 사다리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들이다.
이 진술이 많은 선한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들이 그들 개와 고양이를 아무리 많이 사랑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이 다니는 교회의 가르침에 너무 많이 헌신해 있어서 그런 이단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개나 개구리의 비이성적인 혼이 우리 자신들의 혼처럼 신성하고 불멸하는가?”—그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외친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글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선한 기독교인의 권위자이자 다름 아닌 설교자들의 왕인 성 바울이다. 근대 과학이나 비의 과학의 주장을 너무 분개해서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의 성인과 사도가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기꺼이 귀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 말의 진정한 해석을 신지학자도 반대자도 아닌 선하고 독실한 기독교인, 즉 또 다른 성인인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제시할 것이다. 그는 바울 서신들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주석을 달았으며,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양쪽 성직자들이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다. 기독교인들은 실험 과학이 그들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들은 또한 성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동물의 생명을 간절하게 탄원하는 편지를 쓴 것보다 힌두인은 누구나 더 간절하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층 더 불쾌하게 놀랄 것이다. 힌두인들은 혼의 이주(transmigration)의 가르침 때문에 그래서 동물과 인간에게 생명 활기를 불어넣는 그 요소 혹은 원리들이 같다는 것 때문에 말 못하는 동물에 대한 자비를 주장한다. 성 바울은 더 깊게 들어간다: 그는 동물도 어떤 선한 기독교인처럼 “부패의 구속으로부터 구원”을 똑 같이 희망하면서, 그리고 기대 속에서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대한 사도이자 철학자의 이 정밀한 표현을 나중에 다시 인용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를 설명할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들 같이 너무 많은 해석자들이 성 바울의 진정한 의미를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그것의 내적인 의미에 반대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신학자들의 공정성에 반대한다는 것으로 그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상세 부분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명제를 끝까지 지지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초기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코르넬리우수 아 라피데처럼 가련한 동물에게 명예로운 사과(amende honorable)를 할 것이다.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자연이 짐승 창조물에게 할당한 역할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그가 말한다: “모든 피조물들의 목표는 인간에 대한 봉사이다. 그래서 그(그들 주인)와 함께 그들은 그들의 갱생(renovation)을 기다리고 있다”.[4] 인간을 “섬기는 것(serving)”은 분명히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무용지물로 총에 맞거나 오용되는 것을 의미할 리가 없다; 반면에 “갱생”이라는 말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크리스트의 재림 후에 체들의 갱생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동물을 제외한 인간으로 제한한다. 씨크릿 독트린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것을 주관적 객관적 존재 단계에서 그리고 동물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그 위로 장구한 일련의 진화라는 변형 속에서 형태들이 연속적으로 갱생과 완성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이것에 분개하면서 거부할 것이다. 성서에서 그들에게 설명된 것이 이렇지 않으며 그것을 의미할 수 없다고 우리는 들을 것이다. 그것을 주장해봤자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신의 말씀”이라고 기쁘게 부르는 그것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이 많이 있고 그 결과로 슬픈 일이 많았다. “가나안은 저주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창세기 9장 25절)라는 문장이 가련한 노예들, 흑인들에게 수 세기의 고통과 부당한 비애를 만들었다. 반 노예 문제에서 가장 격렬한 적들이 바로 미국의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손에 성서를 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모든 국가의 자연적인 쇠퇴의 원인이 되어 왔다; 심지어 로마도 무너졌다. 왜냐하면 “고대 세계에서 대부분이 노예들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게이어(Geyer)가 타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가장 지성적이고 최고의 기독교인들이 모든 시대에 성서의 많은 잘못된 해석들을 지독하게 주입식으로 불어넣었으며, 심지어 가장 웅대한 시인들 중에 한 사람도 인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방어하면서 가련한 동물에게는 그런 몫을 주지 않았다.
신은 우리에게 주었다
단지 짐승, 물고기, 가금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그 권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분의 부여로;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인간이
그가 주인으로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런 자격을
유보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롭게 남겨두셨다
밀턴이 말한다.
그러나 살인처럼 오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결론들이 예단하는 질문에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것으로 지지될 때마다 부조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동양의 동물애호주의(philozoism) 반대자들이 이렇게 전제와 결론 사이의 모순 때문에, 상정한 사실과 추론 사이의 모순 때문에 그들의 비평가들에게 가장 능력 있는 주장을 뒤집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무기를 제공해 준다.
이 가장 심각하고 흥미 있는 주제에 한줄기 빛을 비추는 것이 현재 에세이의 목적이다. 로마 카톨릭 작가들은 그들의 성인들이 만든 많은 기적 같은 동물의 부활들이 진짜라는 것을 지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많은 토론 주제로 만들었다. “동물들 속의 혼(soul in animals)”은 보쉬에 의견에 의하면 “모든 철학적 질문들 중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동물들은 혼이 없지 않더라도 그들 속에 영구적인 혹은 불멸의 혼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그 원리가 체의 죽음과 함께 죽는다는 교회의 가르침과 대면해서, 신학자들과 교회 성직자들이 이 진술을 동물들이 종종 기적적으로 부활할 수도 있고 부활하기도 했다는 다른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켰는지 아는 것이 흥미롭다.
비록 이 에세이가 미약한 시도—더 상세한 시도는 여러 권을 필요로 할 것이다—이지만, 신학자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성서에 대한 해석의 불일치를 보여줌으로써, 이 에세이는 동물 생명을 빼앗는, 특히 스포츠나 해부에서 엄청난 범죄성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하여튼 그 목적은 인간 혹은 짐승은 그 생명-원리가 육체로부터 영원히 떠난 후에도 부활할 수 있다는 개념이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일지라도, 그런 부활들이—만약 그것들이 사실이라면—인간의 부활처럼 말 못하는 짐승의 경우에서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짐승 둘 다 우리가 “혼(soul)”이라고 느슨하게 부르는 그것을 자연에 의해서 부여받았거나, 아니면 둘 다 어느 것도 그렇게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 “부활과 기적에 대하여”, 드 미르빌.
[2] “부활과 기적에 대하여”, 드 미르빌.
[3] 불가타(Vulgata)에 있는 같은 구절의 해석과 루터와 드 베테(De Wette)에 있는 구절의 해석 사이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4] 아포칼립스 주석, v장. 137.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