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와 함께한 새로운 명절 풍경
추석 명절이 다가오자 지난겨울 결혼한 작은 딸 정혜가 내게 묻는다.
“엄마, 이번 추석에 대전에 먼저 들렀다 시댁 갈까? 아니면 시댁부터 갔다가 오는 길에 집에 들를까?”
“우리 집엔 다음에 와도 돼. 시댁만 가든지 편하게 해. 절대 부담 갖지 마. 우리야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볼 수 있으니까.”
나는 큰딸도 연휴 시작 전부터 온다고 하는데, 갓 결혼한 작은딸 내외까지 온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에둘러 오지 말 것을 내비쳤다.
하지만 사위는 내 속도 모르고 “어머니, 명절인데 가족들이 다 모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보성 가는 길에 먼저 들르겠습니다.”하며 연휴 시작하기 전날 대전에 올 것임을 알렸다.
남들이 보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평생을 별 고생 없이 편하게만 살아와서 몇 안 되는 식구들이 모인다는 것에도 벌써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딸 둘 다 대학 때부터 서울로 가는 바람에 진작부터 남편과 둘이서만 편하게 살다 보니 아직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된 사위와 며칠을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이 영 부담스럽기만 했다.
나는 평소 일주일에 며칠씩은 일하느라 나가 있고, 틈틈이 연습장도 다니고, 라운딩에, 집안일에, 모임에 정말 바쁘게 살고 있어서 탱자탱자 놀 수 있는 이번 황금연휴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떡하면 부모님 댁에 안 갈까, 여행이나 떠날까 한다는데 다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암튼 설마 했는데 다들 온다고 하니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며 바빠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무슨 큰일이냐며 신경도 안 쓰고 있다.
욕실과 집 안 청소부터 시작해서 이불과 베갯잇 세탁, 쓰레기 내다 버리기는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음식 장만이 제일 신경이 쓰였다. 메뉴를 무엇으로 할까? 더구나 이번 추석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폭염으로 인해 거실에서 베란다에 나가는 것조차 겁날 정도로 뜨거워 움직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자 그동안의 염려는 완전히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딸 내외가 집에 들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둘이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사위는 살갑게 말도 잘하고 깍듯하니 예의도 바르고 배려심도 많아서 부담스럽기는커녕 마치 어린 아들이 생긴 듯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언니네는 처음 사위를 맞았을 때 사위가 집에 찾아오면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했다고 하는데 우리 염 서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둘러앉아 나누는 얘기도 참 즐거웠다. 먹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 회사 이야기,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서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편안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염 서방이 아침에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물 마시러 가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또 작은딸과 같이 음식 세팅도 도와주고 식사 후에는 식기세척기도 돌리며 남은 그릇은 퐁퐁으로 알뜰하게 마무리까지 해주니 기특하고 고마웠다. 딸이 신랑은 잘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딸도 며칠을 함께 지내며 새로운 가족과 가까워지니 정말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지레 힘들었던 것은 흠 잡히지 않고 잘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맘 편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그것만큼만 하면 되는 것을.
요즘은 여자들의 위세가 높아진 탓인지 아니면 이제야 평등을 실천하는 시대가 된 것인지 남자들이 살림을 많이 도와줘서 여자들이 살아가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나의 젊은 시절엔 여자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명절에는 무조건 시댁만 가야 하는 것으로 알았기에 기본 4박 5일은 시댁에서 일만 하고 돌아왔었다. 지난 30여 년간 명절에는 단 한 번도 친정에 가 본 기억이 없다.
그래도 그래야 하나 보다 하고 살아온 세월이었고 불평을 할 줄도 몰랐었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 남자가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생겼단다. 그 정도로 친정 쪽으로 가깝게 지낸다고 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언제까지나 계실 줄 알았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 세대가 만들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온 식구가 모여 오손도손 웃음꽃을 피우며 사흘을 지내고 나니 가족의 소중함도 느끼고 명절이란 이런 것이구나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를 챙기고 관심을 갖는 것, 그래서 소속감과 안정 속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 이것이 가족이 주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조금 더 살아온 내가 식구들을 감싸고 보듬어야겠다는 마음도 다져본다.
앞으로는 누구보다 더 내가 먼저 명절을 기다릴 것만 같다. 집에 와준 아이들이 고맙고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염 서방이 집을 나서며 “정혜, 시댁 가서 일 안 시키겠습니다.”한다.
우리 사위! 말이라도 고맙네.
작은딸 내외가 탄 차가 시댁으로 출발하자 멀어져 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가슴 뭉클하면서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