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일의병, 구국의 기치하에 봉기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기간은 반만년 민족사에서 최대의 시련기였다. 1868년 이른바 명치유신 이래로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제가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우고 대륙팽창정책을 추진하면서 대한침략을 감행해 왔기 때문이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이래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1894년 청일전쟁, 1904-5년 러일전쟁 등 침략전쟁을 연이어 도발하며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한국은 결국 ‘인혈(人血)을 빨다가 골수(骨髓)까지 깨무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 침략과 지배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강도 일본’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서 집요하고도 처절한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특히 노골화되는 청일전쟁 이후부터는 ‘고심혈통’(苦心血痛)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의병전쟁을 비롯하여 개화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단체의 계몽운동, 교육 언론활동, 산업진흥을 통한 실력양성운동 등 이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추진된 국권회복운동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청일전쟁 직후부터 국치 이후까지 전후 20여년간 지속된 의병전쟁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보여준 주체성의 정화(精華)였다. 곧 의병전쟁은 전 민족의 힘이 결집된 대일전면전인 동시에 민족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곧 이 시기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켜(1894년 음 6월 21일) 조선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본격화되고 이를 필두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들어서 갑오경장을 추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또한 1895년에는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이 연이어 발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의병이 파급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어난 의병(전기의병)은 이후 국치 직후까지 20여년 동안 일제 침략의 여러 단계와 그 양상에 상응하여 항전의 강도를 차츰 더해 갔던 것이다.
의병전쟁을 선도한, 을미사변 이전의 갑오의병 단계에서는 안동의병과 상원의병 등 두 의진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 가운데 현재 의병의 효시로 알려진 의진은 1894년 7월에 일어난 갑오 안동의병이다. 이 의병을 이끌었던 서상철은 제천의병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상렬과 같은 집안으로 화서 이항로 학파에 속한 전형적인 유생이었다. 한편, 상원의병은 1895년 7월 평남 상원(詳原)에서 일어난 뒤 재령의 장수산으로 진출해 웅거한 의진이다. 의병장 김원교는 ‘상원군수보다 높은 직위를 역임한’ 관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제로 해산된 평양부 소속의 해산 군인들과 반봉건 성격이 강한 포수들, 그리고 동학교도, 심지어는 여성들까지 이 의진에 가담한 점으로 보아 민중적 성격이 강한 의진이었다.
위의 두 의진과 더불어 단발령 반포 직전인 1895년 11월에 거의(擧義)한 평북 강계의병도 초기 의병 단계에서 특기할 만하다. 백범 김구도 가담하였던 이 의진은 벽동 사람 김이언을 주장으로 하고 그 휘하에 초산군 이방 출신인 김규현과 동학 접주였던 백범 김구 등이 가담해 압록강 변경지대에서 활동하던 포수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것이다. 이상의 갑오의병 가운데 안동의병은 유생을 주축으로 뒤이어 일어나는 을미의병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지만, 상원의병이나 강계의병의 경우는 민중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후기의병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895-6간에 일어난 을미의병은 재야 유생을 주축으로 하고 일반 평민층이 여기에 가담해 봉기하였다. 곧 양반 유생이 상층 지도부를 형성하였지만, 일반 전투원인 병사부는 평민층이 담당하고 있었다. 을미의병 가운데 이름난 의진은 대개가 이러한 범주, 곧 양반 유생(지휘부)을 능동으로 하고 평민(병사부)이 피동이 되어 양자가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을미의병의 상징인 제천의병의 경우도 의병장 유인석을 중심으로 화서 이항로 문파의 유생들이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전라도 장성의 기우만 의병도 전형적인 유생 의진이었다. 강원도의 춘천의병과 강릉의병의 경우도 유생 이소응과 민용호를 각각 주장으로 해서 봉기한 의진이다. 충청도 홍성의병도 역시 유생이었던 김복한·이설·안병찬 등이 중심이 된 경우이다. 경남 진주의병은 함양 안의(安義)의 유생 노응규가 주장이 되어 그의 문인들인 정도현·박준필 등이 함께 규합한 의진으로 역시 유생 의병의 범주에 들어간다. 또한 경북 안동의병은 양반 유림인 김도화·권세연·김흥락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의진이다.
학문을 업으로 삼고 있던 유생들을 추축으로 편성된 을미의병은 그만큼 전투 능력면에서는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당대에 남긴 자료에서나 의병 연구의 선구적 논고인 계봉우(필명 ‘뒤바보’)의 「의병전」(義兵傳)에서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논파하고 있다. 예컨대 흔히 인용하듯이 노사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 의병에 대해서 매천 황현이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심의(深衣)에 대관(大冠)을 쓰고 서로 자리를 양보하면서 행진하였고 식량과 무기가 없고 기율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패할 것으로 점쳤다”고 한 대목은 갓 쓰고 도포 입은 채로 출정하던 유생 의병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케 한다.
또한 계봉우가 을미의병의 전력상의 한계를 지적하고 “최소부분의 유학자가 분연히 일어나 장검을 들고 대성질호한들 청일전쟁의 승기를 탄 여위(餘威)를 가진 그 자(者)에 향하여 난석(卵石)의 차별이 생(生)하여 항적할 만한 가능성이 없고 까닭에 실패는 예정한 것으로 되었고”라고 하여 결과적으로 ‘실패는 예상된 것’으로 단정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전기의병이 전력상 여러 제약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전국 각지에서 의진이 편성되었다고 하지만, 우선 후기의병에 비할 때 단위 부대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참여 인원 역시 특정 지역의 일부 신분층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전 국민의 일체화된 총력이 투입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 시기에 설정된 의병전쟁의 조건이 을사조약 이후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었다. 한말 의병전쟁에 대한 접근과 평가에서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각 시기별 의병에 대해 균형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여러 제약적 조건들만 가지고 전기의병의 평가에서 그 한계만을 강조하거나 부각시킨다면, 역사의 발전적 측면과 의병 스스로가 표방한 민족 주체정신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의 기록자 계봉우가 을미의병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는 대목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네들(의병을 일으킨 유생-필자주)은 왜적에게 대하여 맨 처음 선전포고를 할 따름이다. 따라서 독립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이 완고하거나 관념이 구식이거나 습성이 유교거나 또는 성공하였거나 말았거나 다 평론할 바가 아니다.
2. 을사조약(1905.11) 늑결 후 의병, 재기하다
중기의병(을사의병)은 1904년 러일전쟁 직후부터 1907년 전반기에 걸쳐 일어나 활동하였다. 곧 을사조약을 계기로 재기한 이후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을 계기로 격화되는 후기의병(정미의병) 이전 단계의 의병을 말하는 것이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압박을 더욱 강화시켜 갔다. 개전 직후 강요한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1904년 3월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한 뒤 이듬해 말에는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한국 전역에 배치됨으로써 한국민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이 늑결되어 재정, 외교 등 일본인 고문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소위 고문정치를 실시하게 됨으로써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대한침략 책동은 러일전쟁이 종료된 뒤 1905년 11월 19일 을사조약을 늑결함으로써 그 극에 달해,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 발표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당시 망국으로 치닫는 참담한 민족적 현실을 만천하에 생생하게 폭로하고 또 그러한 책동을 통렬히 규탄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뇌리 속에 오래도록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이 늑결되는 시기에 한국민의 반일 적개심은 한층 팽배해졌고, 국권수호를 위한 반일투쟁도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을사의병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재기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을미의병 때의 항전 경험을 축적한 의병들이 상당수 재기 전선에 투신하였으며, 이들이 결국 전국적으로 의병항전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을미의병에 참가하였던 인물들은 1896년 의진 해산 이후 직함과 신분, 그리고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양한 활동노선을 걸었다. 의병장 혹은 중요 참모의 경우에는 원용팔·정운경·이세영·이강년 등의 경우와 같이 을사의병으로 재기하거나, 김도화·김복한 등의 경우와 같이 은거하거나, 이상룡·구연영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부는 계몽운동자로 변신하거나, 또 허위·노응규·민용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관직으로 진출하는 등 그 동향이 비교적 다양하였다. 한편 을미의병에 일반 병사부로 참가하였던 농민층의 경우에는 해산 이후 1897-1904년간에 펼쳐진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활빈당·영학당·남학당 등의 이름을 걸고 항쟁한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897년부터 중기의병(을사의병)이 재기하기 이전인 1904년까지 8년간에 걸친 이들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광무농민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광무농민운동을 통하여 농민의 역량은 크게 향상되었다. 곧 농민들은 그들이 처해온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 즉 동학농민전쟁-을미의병-광무농민운동의 경험 위에서 1904년부터 그들의 조직을 의병으로 전환시켜 간 것이다. 그동안 축적된 농민들의 역량은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강요된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그리고 철도 부설과 토지 약탈, 혹은 황무지 개척권 요구 문제 등으로 이어지고 있던 일련의 일제침략을 당하여 의병투쟁으로 승화되어 간 것이다. 이처럼 농민층이 주축이 되어 활동에 들어간 초기 단계의 중기의병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1906년에 들어서면서 유생 의병이 전국적으로 재기하게 된다. 그동안 활동하던 농민층은, 자료상 명확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새로운 유생 의병에 흡수되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조직을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인 의진을 편성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중기의병 시기에 유생 의병을 선도한 의진은 원용팔과 정운경이다. 이들은 전기의병 시기 제천의병에 참여한 인물들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8-9월에 제천·단양·영춘 일대에서 재기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후 영남지방에서는 삼척에서 전도사(前都事) 김하규와 전군수 황청일 등이 거의하였으며, 안동에서는 유생 유시연이, 영천에서는 중추원의관을 지낸 정환직과 그 아들 정용기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편성해 활동하였다. 영해지방에서는 평민 출신의 신돌석이 의병을 조직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문경에서는 중기의병 가운데 다소 늦은 1907년 전반기에 무관 출신인 이강년이 의진을 편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호서지방에서는 먼저 전참판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재기한 노응규의 황간의병이 특기할 만하다. 호남지방의 경우에는 면암 최익현의 태인의병을 비롯해 백낙구의 광양의병, 양한규의 남원의병, 화순일대에서 활동한 유생 고광순 의병, 그리고 유생 양회일의 주도하에 편성된 쌍산의소(雙山義所) 등이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끝으로 양서지방에서도 이 시기에 의병활동이 일어나 평북 용천 일대에서 유생 전덕원이 의병을 조직해 활동에 들어갔다.
중기의병 시기에 일어난 의진의 상당수가 재기한 형태를 보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천의병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정운경과 원용팔·이강년을 비롯해 신돌석·유시연·노응규, 그리고 홍주의병의 이설·안병찬·이세영 등이 그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들이다. 즉 재기한 인사들이 유생 의병을 선창하면서 농민층의 투쟁 역량을 수렴하여 활동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을사의병 단계의 유림 의병은 전기의병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동안의 투쟁 경험을 토대로 하고 참여 신분층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짐으로써 이전 단계보다 가일층 발전된 형태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는 지역성과 학통성, 혈연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위에서 예거한 전국 의병의 개황은 현재 확인된 의병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단위 의진에 해당되는 것이며, 그밖에도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곧 이 시기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단위 의병의 빈도수가 그만큼 증가하고, 또 그에 따라 단위 의병 구성원의 수도 현저히 줄어드는 추세가 나타난다. 전기의병 당시 통칭 수만에서 수천에 이르던 대단위 부대가 이 시기에 와서는 수백, 수십 명을 구성원으로 편성되던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만큼 의병이 정예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또한 의병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되어 가던 사실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04-5년간 을사의병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을미의병 시기에 보이지 않던 농민층을 주축으로 한 평민 의병이 출현하면서 의병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 중기의병 단계에도 전기의병과 같은 양반 유생 의병장이 다수였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재야 유생 외에도 민종식·정환직·최익현 등 관료 출신 인사가 많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가 척사(斥邪)보다 국가의식이 더 절박하게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의병은 을미의병에서 지향한 ‘복수보형’(復讐保形)보다 발전된 더욱 선명한 구국(救國) 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기의병 단계에서는 또한 전술상의 변화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참여 신분층이 점차 저변 확대되고 단위 의병의 수는 늘어나고 단위 의병 구성원의 수가 감소하는 경향은 후기의병 시기의 일반적 전술인 유격전의 형태가 등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산악지대가 의병의 근거지로 점차 그 비중을 더해가게 된다. 그만큼 일제 군경을 상대로 한 전투가 치열해져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중기의병은 다음 단계의 후기의병(정미의병)으로 간단없이 계기적으로 확대 발전해 갔던 것이다.
중기의병 가운데 신돌석 의병의 경우는 중기의병에서 후기의병으로 발전되는 전형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평민층의 의병 참여 확대 경향과 그들의 주체적, 능동적 투쟁 양태를 비롯해, 전술적 측면에서도 탁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한 유격전술을 주된 전법으로 활용하였다는 면에서 정미의병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 단계인 중기의병 시기의 항일전을 선도한 의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의병전쟁 - 전 민족이 참전하다
일제는 1907년 6월의 헤이그 밀사 의거를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도하에 대한식민지화 방침을 확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단계에 돌입하였다. 헤이그 밀사 의거 소식을 접한 일제는 가장 먼저 사행의 책임을 물어 7월 20일 반일정서가 농후하고 한민족의 정점에 있던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해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월에 들어서는 급기야 대한제국 정규군대의 강제 해산을 감행하고, 9월에는 민간인이 소지한 일체의 무기류까지 강제 압류하는 이른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발포함으로써 ‘한반도 내에서의 완전한 무장해제’를 표방하고 대한식민지화를 위한 최후의 수순을 밟았다. 곧이어 감행할 계획이던 병탄작업 시 예상되는 한국민의 무장봉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치밀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헤이그 밀사 의거를 빌미로 대한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의거 직후인 7-8월간은 막바지로 향하는 일제의 국권침탈의 긴박한 상황이 연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일련의 국권침탈 조치는 역으로 한국민의 총체적 저항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 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8월 1일 서울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의 자결로 비롯된 군인들의 저항은 원주·여주·강화·진주·평양 등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파급되어 갔다. 이들이 해산을 거부한 채 그대로 의병으로 전환됨으로써 의병전쟁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해산 군인들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거나 기존의 부대로 흡수됨으로써 이후 의병은 무기와 전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전국 각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의병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1908년 전후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의병이 활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먼저 중부지역에서는 이강년과 민긍호 의병을 필두로 이은찬·허위·연기우·김수민·한봉수 등의 의병이 특히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경기 북부와 황해도 일대의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서는 이은찬과 허위, 그리고 연기우 등이 상호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유기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강년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활동무대로 삼고 강원도까지 진출하였으며, 민긍호는 원주와 횡성 일대에서 영웅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밖에 경상도 남부지방에서는 신돌석과 서병희·노병대 등이 이 지역 의병전쟁을 선도하고 있었다.
한편, 북부지방의 경우, 함경도와 황해도지역에 특히 의병의 활동이 집중되었다. 관북지방의 경우에는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북청·풍산·삼수·갑산, 그리고 장진 등지의 험산준령을 무대로 홍범도와 차도선·송상봉·태양욱 등이 주로 산포수들로 조직된 의병을 이끌고 일제 군경을 상대로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경성(鏡城)과 명천 일대에서는 이남기 등이 연해주의병의 남하세력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도처에서 항전을 벌였던 것이 특기할 만하다.
1907-9년 무렵 의병전쟁이 가장 고조되던 시기에 지역적으로 볼 때 호남지역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사실은 특히 주목된다. 통계수치로 보더라도 호남지역은 교전 횟수와 참여 의병수에서 전국 의병 가운데 25%와 24.7%(1908년), 47.3%와 60.1%(1909년)를 차지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전해산·심남일·안규홍 등을 비롯해 문태서·김동신·이석용 등이 이 시기 호남의병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해산은 영광·함평·나주 등 주로 호남 서부지역에서, 심남일은 함평과 강진을 축으로 하는 호남 남부지역에서, 안규홍은 보성·순천·광양 등 동부지역에서 각각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호남 의병을 이끌었다.
의병전쟁이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자, 그동안 각기 독자적 활동을 벌이던 여러 의진간에는 전력이 분산되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합전선 구축의 방안이 모색되었다. 곧 일제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전력 극대화가 절실히 요구되었고, 또 이를 위해서는 전국 의진간의 유기적인 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서울 진공을 목표로 1907년 12월 결성된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이러한 의병 연합전선 구축의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십삼도창의군은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의진들을 주축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원래 허위를 비롯해 이인영·이강년·민긍호·이은찬 등 중부지방을 활동무대로 삼고 있던 의병장들은 상호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항전에 보조를 같이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원주지방에서 활약하던 이은찬은 5백명의 의병을 모집한 후 이인영을 초치하여 1907년 9월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이인영은 허위와 상의한 뒤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용병의 요체는 그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즉’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이인영의 이러한 호소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 의병의 총수가 ‘48진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 내역을 보면, 강원도 의병이 민긍호 의병 2천명, 이인영 의병 1천명을 비롯해 약 6천 명이었고, 경기도의 허위 의병이 2천명, 충청도의 이강년 의병이 5백명, 황해도의 권중희 의병이 5백명, 평안도의 방인관 의병이 80명, 함경도의 정봉준 의병이 80명, 전라도의 문태서 의병이 1백명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중에는 양주에 집결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전국 의병의 통합을 표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병전쟁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907년 12월 회의를 열어 의병 연합부대로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여 이인영을 그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전체적인 편제를 갖추었다.
십삼도창의군은 편성 직후 곧바로 서울 진공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 소식을 듣고 급거 귀향함으로써 지휘부에 타격을 가져왔다. 이에 군사장(軍師長) 허위가 대신 전군을 통솔하면서 작전을 선두 지휘하였다. 그는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하도록 조치한 뒤, 스스로 3백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였다. 그러나 허위의 선발대는 후발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접전을 벌인 끝에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말았다.
서울 진공전이 이처럼 실패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화력이 일본군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의병측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전국 의병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서울 공략을 목표로 그 인후에까지 진공하였던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병전쟁사의 손꼽히는 쾌거라 할 것이다. 오늘날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도로를 왕산로(旺山路)라 이름한 것은 이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후기의병 시기 일제 군경을 상대로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여기에 호응해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국외에서도 한인 의병부대가 편성되어 수차에 걸쳐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북간도 의병의 경우에는 조상갑이, 그리고 연해주 의병의 경우는 최재형과 이범윤, 그리고 안중근 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그리하여 1908년 7월 연해주의병이 대규모로 국내진공작전을 결행하여 경흥·온성·회령 등지에까지 일제 군경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때 안중근도 한 부대를 거느리고 함북 회령까지 진격했으며, 특히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의거 역시 아래에서 보듯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결행해 올린 ‘전과’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때 한국군의 시가전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안중근은 그날로 망명길에 올랐다.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전술하였듯이 현해주의병의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 휘하 의병을 인솔하고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은 의병 동지 가운데 가장 핵심되는 인물 12인과 함께 ‘대한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 비밀결사인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였다. 의병의 전면적 항일전이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죽음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표출한 이들은 곧 의병 ‘특공대’였다. 재판석상에서 그가 진술한 ‘특파독립대’ 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의거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거-주)은 3년 전부터 내가 국사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나,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등박문을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
곧 자신의 의거는 단순한 ‘살인’이나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의병이 수행한 독립전쟁의 한 과정, 혹은 결과였음을 당당히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민족 자존, 주체의식에 근저를 둔 의병정신의 자연한 발로였다고 하겠다. 이로써 보건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는 의병전쟁 20년 역사의 대미를 웅장하게 장식하는 의병전쟁 최대의 쾌거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 의병전쟁, 구국의 성전으로 승화되다
국민 총력전의 단계로 승화된 후기의병(정미의병) 시기의 의병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의병 주도·참여 신분층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전기, 중기의병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정 신분층의 의병 편중화 경향은 이 시기에 와서 완전히 극복되었으며, 양반관료나 유생 등 귀족 신분에서부터 해산군인 및 포수와 농민·상인, 심지어 머슴 등 다양한 직업의 하층 신분에 이르기까지 전 신분층이 능동적이고도 주도적으로 의병전쟁에 투신하게 됨으로써 국민전쟁의 성격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병장의 출신 신분층이 전 계층에 걸쳐 있었던 점은 전투력의 고양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해산군인과 하층민의 능동적 참여 경향은 두드러졌다. 해산군인의 경우로는 이강년과 활동의 궤를 함께 했던 원주진위대의 특무정교 민긍호를 비롯해 김덕제(정위), 박준성(참위), 이동휘(참령), 연기우(하사), 김규식(참위) 등의 활동이 특기할 만하며, 호남의 안규홍(머슴)이나 강무경(필묵상), 그리고 서북지방의 홍범도(머슴, 포수)와 차도선(포수), 그리고 김수민(농민) 등은 하층 신분으로 대부대를 이끌며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후기의병 시기에 들어와 평민 의병장이 급증한 현상은 흔히 인용되는 기존의 연구성과에서 제시된 의병장의 직업·신분 통계수치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07년부터 1909년에 걸쳐 활동한 전국 의병장과 부장 430명에 대해 일제가 파악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신분이 분명한 의병장과 부장이 255명에 달한다. 255명 가운데 양반 유생이 63명(23%)으로 가장 많았고, 농업이 49명(19%), 사병이 35명(14%), 무직 및 화적이 30명(12%)으로 그 뒤를 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포군이 13명, 광부 12명, 주사, 서기가 9명, 장교가 7명, 군수, 면장이 6명, 상인이 6명, 기타 25명이었다. 장교(7명)와 군수, 면장(6명)을 유생, 양반 64명에다 가산한다 해도 모두 77명으로 전체의 25%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1907-1909년간에 전국에서 활동한 의병장과 부장 가운데 평민의 비율이 70-75%에 달하는 새로운 양상을 뚜렷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이지만, 일반 병사부의 경우에는 평민 참여자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08년에 일제가 조사한 의병 귀순자 신분, 직업별 통계에서 조사 대상자인 일반 의병 2,198명 가운데 양반은 2.7%에 불과한 57명인데 반하여 평민은 2,141명으로 전체의 97.3%에 달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평민 가운데서도 직업별로 보면, 농민이 전체의 79%(1,752명)를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해산군인(152명)과 상인(84명), 그리고 포수(78명) 등이 약간씩 포함되어 있는 정도이다.
의병전쟁 시기에 의병이 소지한 무기는 기본적으로 화승총(火繩銃)이었다. 화승총은 격발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성능이 워낙 뒤떨어져 의병의 전투력 향상에 일정한 한계로 작용하고 있었다.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대체로 20여 보 안팎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는 한 정당 대개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분업적 형태로 사격의 효율을 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은 신식 총기로 무장한 정예 일제 군경을 상대로 힘든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상황과 조건에 따라 물론 상이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경우의 사격조 네 명은 화약을 장약하는 포수, 철환을 장전하는 포수, 화승대에 불을 붙이는 포수, 조준 사격하는 포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단독 사격이 매우 어려웠던 화승총의 경우에는 의병 성원 모두가 각자 총기를 소지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도 의병 수가 총기 수를 늘 초과하는 양상을 보인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인다. 한편, 기계적인 구조가 간단하고 성능이 뒤지는 만큼 화승총의 제작과 철환·화약의 조달은 비교적 용이하였다. 그러므로 항일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는 많은 의병부대에서 화승총을 현지에서 제작 사용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화승총은 일본군이 주력 무기로 사용하던 소총, 곧 1905년(명치 38년)에 제작된 최신 38식 소총과 성능 면에서 비할 때 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유효 사거리 4백 야아드(약 8백 m)에 분당 8발 내지 10발을 사격할 수 있는 일본군의 정예무기 앞에서 의병들은 먼저 화승에 불을 붙여 들고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하였으니 차마 볼 수 없는 전투 광경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군대해산 때 무장해제를 당한 군인들은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근대식 총기를 가지고 의병에 합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해산군인들이 소지한 근대식 무기는 의병의 화력 증강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원주진위대의 민긍호·김덕제와 같이 해산군인들이 주축이 된 의병이 커다란 활약을 보일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이들은 또한 기습작전을 통해 일제 군경이 보유하고 있던 우수한 무기류를 확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력이 부족한 의병은 일반적으로 게릴라전(유격전)을 벌이며 이를 극복하였다. 즉 일제 군경을 산간 험지로 유인한 뒤 유리한 지형 지세를 이용, 기습공격을 가한 뒤 신속히 철수하는 것이 후기의병의 전형적인 전법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후기로 갈수록 기동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위 부대의 성원수가 수백, 수십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10여명에 불과한 부대도 많았다. 또 홍범도와 차도선이 주축이 된 관북지방의 산포수 의병부대나 호남지방의 전해산·심남일·안규홍 의병 등의 예에서 보듯이 대규모 부대의 경우에는 여러 소부대로 나뉘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유기적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5.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 일제, 의병 말살 시도
의병전쟁이 격화일로를 치닫게 되자, 일제는 대한식민지화를 단행하기 위한 정지(整地)작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의병 탄압작전을 벌였다. 여기에는 일제 군경뿐만 아니라 한인 보조원, 일진회원 등 매국노에 이르기까지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총동원되었다. 그 결과 의병은 1909년 전후를 고비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던 것이다.
먼저 일제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 고조되어 가자, 정규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일본군의 경우, 이미 한국에 배치된 조선주차군 2개 사단 외에도 1908년 5월에 2개 연대 1천 6백명이 증파되었으며, 1909년 6월부터는 여단 규모의 임시한국파견대가 증강 배치되었다. 또한 헌병대의 경우에도 1907년 10월에 2백명 규모이던 것이 보조원을 포함해 1908년 9월에는 6천 5백명으로 격증하였다.
또한 일제의 통감부와 군경기관에서는 밀정이나 정탐을 고용하거나,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에 관한 제반정보를 수집하였다. 1908년 7월 현재 일제에 고용되어 전국에 파견된 정탐원이 8백명이나 되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의병진압과 적정 정찰을 목적으로한 특설순사대(特設巡査隊)를 편성하여 의병항쟁이 치열한 지역에 투입시켰다. 특설순사대는 3개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제1순사대는 강원·경상도, 제2순사대는 전남, 제3순사대는 함경도지역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에 대한 일상적 탄압작전을 반복하는 한편, 일제는 의병의 활동이 격심하던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대토벌작전을 감행함으로써 고조된 의병의 예기를 꺾으려 하였다. 이른바 일제의 조선군 북구수비관구에서 1908년 6~7월에 2개 연대를 주력으로 동원하여 황해도와 함경도 일대의 의병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것도 그러한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의병 585명이 전사하고 202명 체포되었다. 또한 1908년 12월에는 2주일 예정으로 광주 수비대와 영산포 헌병대를 중심으로 전남 일원의 의병 진압에 나선 적도 있었다. 이러한 작전에 뒤이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자행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은 일제의 의병전쟁 탄압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와 헌병 경찰대, 그리고 일진회까지 총동원되었으며, 해군에서는 수뢰정대까지 출동하여 해상을 봉쇄한 가운데 이른바 작전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초토화작전은 전북 부안-임실-남원을 거쳐 광양 이남에서 남해안의 도서지역에 집중되었다. 호남의병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 작전의 결과 대소 의병장 103명이 사살 체포되었으며, 5백여명이 전사 순국하였고, 2천여명이 체포되는 등 엄청난 인적 희생을 가져왔다.
이러한 일제의 대탄압을 전기로 하여 전국 의병의 예봉은 급격히 꺾이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이 이때 순국 혹은 투옥되었다. 상술하였듯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호남의병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을 필두로, 경상·충청·강원도 일대에서 항일전을 선도하던 이강년과 민긍호, 경기도 일대 의병의 출중한 지도자였던 허위 등도 일제 군경의 마수에 희생됨으로써 이 지역 의병의 항일전에 일대 타격을 가져오고 말았다.
생존한 의병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일전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항전으로 전력이 고갈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의병은 국내항전을 포기하고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게 되었다. 한말 의병의 상징적 인물인 유인석을 필두로 함경도 의병장 홍범도와 이남기, 황해도의 우병렬·이진룡, 그리고 강원도의 박장호 등이 해외로 망명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국망 직전인 1910년 6월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편성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유인석과 이범윤·이남기, 그리고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국내외 의병세력의 통합을 표방하였던 이 의군은 국내의 항일무장투쟁이 국외로 확대,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1920년대 들어 활발하게 펼쳐지는 독립군의 항일전도 결국 국치 전후 망명한 의병 계열이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주역인 홍범도를 비롯해 북간도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이끌었던 이범윤, 그리고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총재 박장호 등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6. 의병전쟁, 그 진정한 민족사적 의미
백범 김구는 남북협상에 즈음해서 1948년 2월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글 속에서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도(睹)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구한말이라는 시대상황에서 일제 강점은 이미 피할 수 없는 민족의 운명으로 규정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규정성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했다는 논리인 것이다.
백범의 말대로 사실 의병전쟁의 ‘승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객관적 정세는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전민족이 일치단결해 일제와 사생결단을 벌인다 해도 일제의 마수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장(戰場)에 투신한 의병 자신들도 이처럼 고단한 형세를 직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기고 지고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문제삼지 않는, 곧 ‘승패이둔불고’(勝敗利鈍不顧)를 언필칭 표방하고 ‘후세에 할 말을 있게 하기 위해’ 일신을 산화한 것이다. 일찍이 박은식이 의병을 ‘민족의 정수(精髓)’로 규정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의병전쟁에서 신분이나 전력, 또는 승패·전과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이러한 논의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의병의 지순고결한 정신적 가치를 손상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의병전쟁 전 시기에 걸쳐 일제 침략세력 축출을 표방하고 거의(擧義)한 의병은 모두가 ‘의병’으로서 동일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의병전쟁을 논급하는 경우에 이 점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연인원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의병이 봉기하던 초기에는 학덕을 겸비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규합되었으나, 항전이 격화됨에 따라 1907년 이후에는 일반 농민·상인·퇴역 군인이나 관리 등 다양한 신분 계층이 민족의 성전에 동참하였다. 또 일진회나 보조원, 그리고 친일관리 등 소수의 부일매국노를 제외한다면, 비록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물심 양면으로 성전을 후원하는 ‘준의병’으로 전 국민이 경도되어 있었다. 곧 의병전쟁은 우리 민족의 성전이었으며, 전 민족의 총력이 경주된 국민전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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