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0일 수요일입니다. '새벽기도 십일조'가 끝나는 날임과 동시에 열왕기하, 묵상을 시작하는 날이군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한 것 중에 하나도 그른 게 없습니다. 특히 <십일조>가 그렇습니다. 물질을 내고 마음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시간>을 구별하여 드린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만져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때, <시간>을 하나님의 통치권 영역으로 되돌려 드릴 수 있다면...... 한 달의 십일조, 삼 일! 하루 24시간의 십일조, 두 시간 삼십 분! 을 지켜 드릴 수 있는 것도 믿는 사람들의 복이겠습니다.
왕의 사자
말씀을 읽다보면 한번씩 엉뚱한 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왕의 사자'들의 행위가 그렇습니다. 아하시야 왕이 다락에서 떨어져 병들었습니다. 다윗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던 모압이 배반했습니다. 징벌을 해야겠는데 몸까지 병들어 진퇴양난입니다. 아합의 죽음, 모압의 반란, 아하시야 자신의 부상... 그래서 블레셋의 에그론 성에 왕의 신하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 아하시야 왕의 절박한 임무를 받들고 가던 '왕의 사자'가 엘리야를 만났던 겁니다. 왕의 사자들은 엘리야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7,8절에 왕이 그가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었을 때,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그런데 희한하게도 왕의 명령을 따라야할 사자들이 엘리야의 돌려보냄(?)에 아무런 의심없이 되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 털복숭이 산도적 같은 사람, 엘리야의 한 마디에 왕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고향 앞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는 인간 상식,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털북숭이와 가죽띠를 한 사람
아하시야 왕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라고 묻습니다.
돌아온 왕의 사자들이 대답합니다. "털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이 모습이 신약에서의 '세례 요한'을 연상하게 합니다.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에 털이 많아지는 이유는 자연의 척박함 때문입니다. 인간이 문명화될수록 피부에 털이 없어집니다. 여하튼 열악한 환경의 <야생>입니다. 엘리야의 생활을 짐작합니다. 인간 문명을 등지고 들판 초막에서의 야생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가 어떠합니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야생의 엘리야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느냐."
하나님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별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국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파리대왕
이스라엘 백성은 '존귀한 자 바알'이라는 뜻의 <바알세불>을 비하하여 <바알세붑>이라 불렀습니다. 바알세붑은 '똥파리의 왕'이란 뜻입니다. 희한하지요. 블레셋 사람들 파리형상을 만들어 우상으로 섬겼답니다.
오래 전에 '파리대왕'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윌리엄 골딩의 소설 작품입니다. 몇가지 우화적 상징성과 단순한 스토리 때문인지 오래동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조난당한 아이들이 무인도에서 점점 야만인이 되어간다는 줄거리입니다.
사회의 교육과 제도를 상징하는 인물, 랄프. 시대의 지성을 의미하는 돼지. 소라를 가진자만이 발언을 해야 한다는 규정. 안경을 이용해 불을 피우는 우화의 의미. 잭과 로저로 대별되는 인간의 야수성. 멧돼지의 머리를 잘라 제물로 바치는 원시성. 돼지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소년들.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죽게 되는 사이먼......들의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이 디테일하게 버무려져 소설적 재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무인도 아이들 생활을 통해서 작가가 보여주려는 메시지는 아마 '인간의 야만성'이 아니었나 합니다. 사회의 공공성이나 정의 보다는 힘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 동물적 본능이 힘의 원천이 되고 인간 양심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나에게는 냉혹함과 어두움 그리고 잔인함의 대명사 '잭', 곧 '바알세붑'으로 비쳐집니다.
생각의 더 많은 영역을
시간의 더 넓은 영역을
공간의 더 깊은 영역을
주님께
삶의 에너지를 보다 더 하나님께 집중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