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한국사(하)/차례 김현욱
차례
13.이괄의 반란 : 쿠데타는 다시 쿠데타를 부른다 중앙관료들에 대한 불만 변방으로 떠나는 이괄 외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시작한 반란 본격화된 이괄의 반란 반란 이후와 특성
14.이인좌의 반란 : 봉건질서가 해체될 조짐이 보이다 늘어나는 유랑민들 : 17.18세기 사회변동 환국의 반복 : 무너져가는 붕당정치 반란의 전개 과정과 특성
15.홍경래의 반란(평안도 농민전쟁) : 민란 시대를 연 농민항쟁 반란의 발생 배경 반란의 준비, 전개 과정 송림, 곽산전투 마지막 항전지, 정주성 홍경래난의 특성과 역사적 의의
16.임술민란 : 전국으로 번진 반봉건 투쟁의 불길 19세기, 격동하는 조선사회 :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민중적 자치기구 향회 : 임술민란의 조직 기반 임술민란의 전체 개요 : 전국으로 퍼진 반봉건 투쟁의 불길 진주농민항쟁 : 1862년 농민항쟁의 도화선 임술민란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성
17.임오군란(임오군인폭동) : 종속적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다 제국주의의 등장과 아시아 침략 : 동아시아의 국제 변동 대원군의 집권과 쇄국정책 : 서구 열강의 무력 침략 - 조불전쟁(병인양요) - 제너럴 셔먼호 사건.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조미전쟁(신미양요) 조선의 문호개방과 일본의 침탈 : 민씨 정권의 투항주의적 성격 임오군란 직전의 민중 수탈과 폭동의 발발 임오군란, 최초로 일어난 반봉건, 반외세 항쟁
18.갑신정변 :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청년들의 혁명 갑신정변을 보는 시각 개화파의 형성과 주요 활동 요약 : 한국 역사속에 내재되어 있던 개화사상 - 북학론과 개화사상의 함수 관계 - 개화파와 수구파의 정치적 투쟁 개화파 축출 위기와 혁명 전단계 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다 : 3일간 지속된 혁명 정부 - 혁명 첫날,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 정권 장악에 성공하다 - 혁명 둘째날, 10월 18일(양력 12월 5일) : 신정부 수립과 청군의 대응 - 혁명 세째날, 10월 19일(양력 12월 6일) : 실패로 끝난 혁명 자주근대국가 건설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19.갑오농민전쟁 : 민중 항쟁의 총결산 중첩된 내외 모순 : 강화된 봉건적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 : 고양되어가는 반봉건.반외세 투쟁의식 - 동학의 발생과 교조신원운동의 배경 - 이필제의 반란 - 삼례집회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1 - 상소운동과 반외세 벽보운동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2 - 보은집회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3 - 고부민란 : 갑오농민전쟁의 신호탄 1차 갑오농민전쟁의 시작, 3월 봉기 황토현전투 중앙군과의 숨박꼭질,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무혈 입성 홍계훈 부대와 접전, 그리고 화약 반봉건 투쟁의 핵심, 집강소 설치 재봉기의 도화선, 청일전쟁 2차 갑오농민전쟁 : 대일본 전쟁 항쟁은 이제부터이다 : 면면히 계승된 갑오농민전쟁의 정신
20. 후기 : 반란과 혁명의 갈등구조
@ff 13.이괄의 반란 : 쿠데타는 다시 쿠데타를 부른다
중앙관료들에 대한 불만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관한 통설은, 인조반정 때 김류가 망설이고 있을 때 대장이 되어 혼돈에 빠진 반란군을 수습하는 등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이후 2등 공신밖에 되지 못한 데다가 중앙에서 밀려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변방인 국경지대로 쫓겨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괄을 단순히 반역자로 몰았던 후대 사람들이 조작해낸 것에 불과하다. 반란을 일으킨 동기나 당시 상황을 볼 때 일정한 계획하에 거사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정변이 성공한 후 정부는 주동 인물들의 공과를 가려 공신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괄에 대해 정부는 정변에 나중에 참여했다는 명목을 내세워 판윤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2등공신이 되었다. 반면 도감대장 이수일은 내응한 공이 크다 하여 공조판서직에 임명하였다. 누가 보아도 불공평한 인사 발령이었다. 이전에 반정공신을 정하는 자리에서 이귀는 이괄의 공을 알고 인조에게, "어제의 반정은 이괄의 많은 활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해야 할 줄 압니다"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괄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괄은 말하기를,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을 다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케 하였는데 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하였으나, 귀가 극력 말려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김류도 같이 있었는데도 이괄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속마음을 인조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괄은 관직은 둘째치고 김류의 기회주의적인 자세에 더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다. 김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반격하였다. "이경으로 시간을 정하였으니 병법으로 논한다면 미리 온 자는 참형을 당하여야 합니다."자기가 늦게 현장에 나타난 것을 변명하려는 말이었다. 그러자 한교라는 자가 나섰다. "병법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김류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다시 대답하였다. "<오자>(전국시대의 명장 오기가 지은 병서)에 나와 있소이다."이에 참다 못한 이귀가 김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자>에는 병졸이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미리 돌진하여 명령을 어기면 참한다는 말은 있으나 미리 온 자를 참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김류의 말이 변명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이에 인조는 더이상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쇠고기와 술을 잔뜩 준비하여 모화관에서 위로 잔치를 벌였다. 여기서도 김류와 이괄 사이의 눈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이괄은 김류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이때 이귀가 나서서 화해하라고 종용하였다. 두 사람은 일단 서로 시선을 거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이괄의 성격은 급하고 단순한 면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사후 처리에 대한 감정보다는 비겁한 행동 끝에 반정에 참여한 김류가 일등공신으로 책정된 데에 격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단 사후 처리는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괄은 이때의 체험을 잊지 못해 두고두고 중앙 관료들에 대한 불만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변방으로 떠나는 이괄
인조가 세력을 잡은 뒤에도 국내외 정세는 어수선하였다. 안으로는 아직 반정에 따른 민심 수습과 정치권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밖으로는 후금이 날로 강성해져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여서 북방 국경지대에는 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누르하치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광해군 정권이 몰락한 뒤에는 더욱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부는 우선 전투 경험이 많고 유능한 지휘관을 변방 책임자로 보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장만을 도원수직에 임명하였다. 도원수직은 원래 전시 중에 내려지는 임시직이다.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에는 왕명을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는 총지휘권을 가질 수 있는 직책이었다. 이러한 중책에 장만을 임명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봉산군수로 있으면서 수령들과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명나라 군사들을 잘 달래어 민생의 안전을 도모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을 알게된 정부는 그에게 포상을 내리고 동부승지로 승진시켰다. 전쟁 이후에는 대사간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함경도 관찰사가 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후금이 강성해져 언제 남하할지 모른다고 정부에 보고하여 방어책을 세울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후금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친 일도 있었다. 이듬해인 1611년에는 이항복의 건의에 따라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관서민들의 형편에 맞게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여연 등 버려진 지역이 조선의 국토임을 여진족에게 알려 그들을 철수시켰다. 또한 명나라가 요동 지역에서 패한 이후 1619년에 장만은 이시발과 함께 광해군 앞에 나아가 대후금 정책을 숙의한 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만은 명나라와 후금 등 인접한 국가에 대한 소식통이었으며 국제 정세에 밝은 사람이었고, 이러한 장만(그는 당시 57세의 노장이었다.)을 변경에 보낼 정도로 양국간은 초긴장 사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도원수를 보필할 부원수 자리에도 역시 유능한 지휘관을 골라 임명해야 했다. 더구나 부원수직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전방에 진을 치고 직접 적과 맞대고 경계를 해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장만은 이괄과 이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임명하여 줄 것을 인조에게 요청하였다. 인조가 판단해 볼 때 두 사람 모두 유능한 장수들이기 때문에 누구를 보내도 상관이 없다고 보고 임명권을 장만에게 일임하였다. 그러자 장만은 이괄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이괄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의 자리에 올라 장만과 함께 중대한 임무를 띠고 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장만이 먼저 평양으로 출발하였는데 이때가 1623년 5월이었다. 인조는 직접 모화관까지 나와 북으로 떠나는 군사 행렬을 전송하였다. 왕이 친히 나와 전송할 정도로 북방 경비는 국가의 존립과 관계된 중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괄이 변방으로 쫓겨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같은 해 8월 17일, 인조와 작별을 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도원수와 경이 가니 이제야 서북 지방의 근심을 잊게 되었소."인조가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이괄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괄은 머리를 조아리며 인조에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소신의 재주 없음을 아시면서도 분에 넘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시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두렵웁기는 1만 5천의 군사로 적을 감당하기 어려울까 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괄은 인조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소상히 아뢰었다. "군사의 모집은 마땅히 사세를 관망한 뒤 이에 따라 적절히 행할 것입니다. 신이 가서 주둔할 곳은 원수(장만을 말함)와 상의해서 차후 보고할 예정입니다. 현재 구성과 태천에는 아직 성채가 없으니, 영변이 주둔지로서는 가장 적당한 줄 압니다. 그리하여 그 지방 소속 각관으로는 소관 지역을 지키게 하고 신은 저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며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불만을 갖고 떠나는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임금 앞이라 겉치레로 말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그의 계획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또한 그는 실제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주둔한 뒤에 군사 조련, 성책 보수, 진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물론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그는 떠나기 전부터 반란을 계획했기 때문에 이것을 숨기기 위해 연막술을 쓴 것이라고. 그러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이 반란이 얼마나 어이없이 터졌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외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시작한 반란
정변이 한번 일어나고 나면 민심의 동요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정변을 주도한 인물들은 다시 반대파의 반격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광해군은 아직 죽지 않고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광해군 복위를 꾀하며 역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상태였다. 이리하여 공신들은 구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겠다는 강박 관념을 갖게 되었고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하여 휘하의 군관들을 동원, 민심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불순한 행동을 계획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권력을 잡은 자들 주변에는 아부하는 자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며 이를 통해 출세하려는 자들이 속출하는 것이 어느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세태이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붙기 위하여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밀고를 일삼았다. 실제로 이 밀고가 차고 넘쳐 그중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걸려들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서 반역 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이 일어났다. 이괄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1624년 1월에 문회, 허통, 이우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사실 이들의 고변은 전혀 근거없는 것으로서 추측하건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문회의 경우 향교 등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종6품의 교수를 맡고 있었다. 문회 등의 고변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국청에서는 연일 관련자들을 잡아다가 엄중 문책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근거없는 고변이었기에 뚜렷한 물증을 잡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무고당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정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만한 공통점이 있다. 기자헌은 영의정 등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명사였다. 그는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이 되었고, 북인이 다시 대, 소로 나누어질 때 대북의 편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당파에 관계없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지조있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정여립 모반사건 때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을 신원하게 하고 당시 옥사를 일으킨 서인들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그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였으며,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는 선조의 뜻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래서 유영경 등이 교서를 숨기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할 때 이에 반대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헌하였다. 그렇지만 이이첨 등이 내세운 폐모론에는 반대하여 길주로 유배를 가야 했으며, 후에 강릉에 처사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이 다시 관직에 오르라고 하였지만 끝내 거절하였고 인조반정의 주동 인물들이 거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을 때도 왕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담하지 않았다. 또한 인조가 그의 인품을 높이 사 관직에 임명하려 했지만 이것 역시 거절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자헌은 이원익처럼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중도를 지키며 신하로서 해야할 소임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던 것이다. 아마 문회 등이 모함할 때, 그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조의 명을 어긴 사람이니 분명 역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이괄과 끝까지 정부군에 대항한 한명련은 의병장 권율 휘하에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이었다. 그는 명나라의 제독이 오위장에 임명할 정도로 종횡무진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방어사를 거쳐 1623년,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구성순변사에 임명되어 전방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투 경험이 많은 역전의 노장인 그를 국경지대로 보냈던 것이다. 그는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려 했지만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한명련이 무고에 휘말리게 된 것은 전쟁에서 거둔 공적이 커서 이괄과 공모하여 막강한 군대를 세울 수 있다는 점을 들추어냈기 때문이다. 이시언의 경우, 그 역시 왜란 때 많은 전적을 세운 무신이었다. 광해군 때에는 그는 전투 경험을 인정받아 평안병사,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광해군을 도와 대후금 정책을 세우는 데 큰 밑바침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후에는 순변부원수에 임명되어 국방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시언 역시 문회 등의 표적이 되었다. 이괄의 반란과 관련되어 처벌된 사람들이 수십 명에 달하지만, 일단 대표적인 인물들인 위의 세 사람만 살펴봐도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광해군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이다. 즉 스스로 세운 공로에 따라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문.무신들이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봤을 때 문회 등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고변을 하여도 쉽게 걸려들 만한 대상을 눈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또한 쿠데타로 세력을 잡은 인조나 반정공신들은 광해군과 가까이 지낸 인물들의 동향에 대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국청의 신문 결과 무고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층은 이괄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던 것이니,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쨌든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지자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시 반정공신 등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그 진상을 신문한 뒤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이들은 문회 등의 고변 내용 가운데 이괄의 명단이 들어 있다는 점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또한 그가 떠나기 전 중앙 관리들에게 보여준 태도를 상기시키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충분히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목하였다. 게다가 그는 정예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처음에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를 묵살하였다. 자기의 판단으로는 전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괄이 떠나던 날 자기에게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명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무장으로서의 굳은 결의가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의 건의가 근거없는 말들이지만 이괄과 그의 아들에 대한 변고가 계속 이어지자 인조로서도 일단 확인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인조 역시 정변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반역을 꾀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마침내 이괄의 군중에 머무르고 있던 그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서울로 압송하라고 명하고는 금부도사 고덕상, 심대림과 선전관 심지수 등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괄은 당황하였다. 더군다나 찾아온 목적이 자기 외아들을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압송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이괄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관례적으로 볼 때 역모로 일단 정부 손에 잡히게 되면 혐의가 풀릴 가능성보다는 반역자로 몰려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이것을 이괄이 모를리 없었다. 이괄은 자기 손으로 아들을 인계해주어야 할 위치에 처했다.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다. 또한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자기나 가족 모두가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이괄은 정부에서 온 사자들을 안심시켜 놓고는 부하 장수인 이수백, 기익헌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몇 차례 의견이 오갔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괄은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다. "나에게 자식이라고는 외아들 하나 뿐이오. 그런데 무참하게 죽게 되었소. 아들이 잡혀가는 이 마당에 어찌 그 아비인들 온전할 리 있겠소? 사태는 매우 급하게 되었소. 남아가 어찌 가만히 목을 늘여 죽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소?" 그러자 부하 장수들도 그의 뜻을 알고 먼저 사자들을 죽이자고 결정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중앙에서 온 사자들을 목베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괄의 반란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는 전혀 사전 계획도 없었고 반란을 일으킬 명분도 없었다. 이괄의 반란은 이렇게 외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무작정 터진 것이다.
본격화된 이괄의 반란
한편, 구성부사 한명련은 이미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되어 가고 있었다. 이 보고를 들은 이괄은 지체없이 날랜 항왜병을 길목에 잠복시켜 기습 공격한 뒤 그를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명련은 전투 경험이 많아 작전에 능한 인물이었다. 이왕 반란을 결심한 이괄로서는 한명련 같은 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624년 1월 22일, 마침내 이괄은 항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 서울로 향하였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그의 최종 목표는 서울 점령이기 때문에 중간에 쓸데없이 전투력을 소모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장만은 이괄에게 잡혔다가 풀려난 군관 남두방을 통해서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그의 지휘하에 있는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일단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휘하 군졸들을 평양으로 결집시켜 성문을 굳게 닫은 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즉시 반란 소식을 중앙에 알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은 개천, 자산 등지를 거쳐 1월 26일에는 강동의 신창에 주둔하였다. 이틀 후인 28일에는 삼등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달이 바뀐 2월 1일에는 수안으로 향하였다. 수안에 이른 반란군은 정부군이 새원에 주둔하고 있음을 알고 기린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그만큼 반란군은 서울 당도가 최우선이었다. 황해감사 임서의 군대와 경기방어사의 군대도 모조리 피하며 남하하였던 것이다. 반란군의 행군 속도가 빨라 정부에서는 이들의 남하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한명련이 지리에 밝고 용병술에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완전히 지방 정부군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과 정부군이 최초로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에서였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정부군 지휘자는 정충신과 남이홍 등이었다. 그런데 이중 정충신은 이괄과는 매우 철친한 친구 사이였다. 정충신은 왜란 당시 권율의 휘하에 있을 때, 장계를 행재소에 전할 사람이 없음을 알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장계를 전달할 정도로 강단이 센 무신이었다. 그 역시 광해군 때에는 국경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럴 즈음에 이괄과 친한 관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회의 무고로 잡혀 갔다가 혐의가 풀려 명을 받들어 이괄의 군과 대치, 친구 사이에 서로 칼부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괄은 정충신의 부대를 피해갈 수 없다고 판단, 잠시 전략을 생각하다가 묘안을 떠올렸다. 그는 정충신이 자기의 친구라는 것을 감안하여 가급적이면 정면 돌파를 삼가하겠다고 판단, 부하 장수인 허전 등에게 거짓 항복케 하였다. 그러자 정부군은 반란군의 의중을 파악하기에 고심하였다. 그만큼 방비도 허술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이괄의 반란군은 정부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결과는 반란군의 승리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정부군의 선봉장인 박영서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즈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이돈 등이 체포되어 능지처참당하여 죽고 말았다. 이러한 비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괄은 서울을 향하여 쉬지 않고 진격해 들어갔다. 이괄은 평산에 이시발, 임서 등이 이끄는 정부군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파악하고, 봉산 고읍에서 전탄을 건너 샛길을 이용하여 마탄(예성강 상류)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다시 정부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당시 정부군은 방어사 이중로, 평산부사 이확 등이 여울을 경계로 삼고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탐지한 이괄의 반란군은 낮은 여울을 건너 급습하였다. 정부군은 반란군의 전술에 말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이괄은 장수들의 목을 베어 말에 매달아 정충신의 부대로 보냈다. 이를 본 정부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때 이확은 시쳇더미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정충신이 포 소리를 따라 남하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즈음 서울에서는 내응 세력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기자헌 등 수십 명을 잡아 처형하였다. 이괄의 거침없는 남하에 집권층은 불안을 느낀 것이다. 이때 이귀 등은 극구 인조를 만류하였으나 여론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두번째 전투에서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반란군은 사기가 더욱 올라 빠른 행보로 개성을 지나 임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정부군이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괄과 한명련은 강의 형세를 살핀 뒤 정부군이 볼 수 없는 샛길을 따라 강을 건너 정부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반란군의 기습에 임진을 지키고 있던 정부군은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너 벽제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정부는 코앞에 적이 와 있음을 실감하고, 2월 8일 해가 질 무렵 인조와 대신들은 한겨울의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서둘러 궁을 빠져나와 남대문을 지나 한강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건너갈 배가 보이지 않았다. 사공들이 난리 소식을 듣고 모두 몸을 숨긴 뒤였다. 가까스로 배를 강제로 구한 일행은 강을 건너 서울을 빠져나가 수원을 거쳐 공주로 피난하였다. 그럴 즈음 반란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 근교에 이르게 되었다. 먼저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병 30여 명이었다. 이미 서울 주민들은 임금이 궁을 빠져나갔고 반란군이 곧 들어온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었다. 이들은 말을 몰고 다니면서,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마시오. 새 임금이 즉위한 것이오." 하고 외쳐 반란군이 승리했음을 사방에 알렸다. 2월 10일, 이괄과 한명련이 선두로 반란군 주력부대가 마침내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때 서울 주민들 중에는 거리로 나와 이들을 환영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각 관청의 서리 등 관리들도 의관을 갖추고 나와 예를 갖추었다. 반란군은 행군을 멈추고는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였다. 한국 역사상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역으로 말해서 이렇게 허술한 정부군을 가지고 후금과 싸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의병이 일어나겠지만 정규군 전력만 보더라도 당시 사대파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이 사건을 통해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왕의 피난 행렬이 수원에 이르렀을 때 부산에 와 있는 왜인들에게 구원 요청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떤 경로로 이런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것 역시 당시 정부군의 허술함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서울을 점령한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편으로는 각처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흥안군은 원래 인조를 따라 한강을 건넜다가 중간에 몰래 도망쳐 서울로 온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이괄의 부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마땅히 임금으로 삼을 왕자도 없어 사태 수습을 위해서라도 일단 그를 왕위에 앉힌 것이다. 이를 보고 서울 주민들이 "식(흥안군의 이름)이 추대되었으니 오래 못가겠구나." 하면서 혀를 찼다고 한다. 어쨌든 임금을 세운 반란 정부는 여러 기관에 관원을 배치하는 등 새로운 행정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또한 승리에 도취한 반란군은 흥안군이 내린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반란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이괄의 직속 상관인 도원수 장만은 이괄이 남하하는 동안에 뒤를 쫓아오면서 계속해서 각지의 지방군을 끌어모아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사실 장만이 부대를 지휘할 경우 이괄이나 한명련으로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워진다. 이괄이 평양을 우회해서 내려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강행군 끝에 장만이 이끄는 연합 정부군은 서울 근교인 파주에 이르렀다. 그는 왕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보고를 듣고 즉시 종사관을 보내 문안을 올렸다. 장만은 혜음령에 이르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괄의 부대가 정예부대라는 점을 감안하여 장만도 함부로 이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장만과 그의 부하 장수들은 길에다 풀을 깔고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작전 계획을 짰다. 장만은 도성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공격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정충신이 조심스럽게 이에 반대하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보았으나 적을 격파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의 죄는 만번 죽어도 다하지 못할 지경인데 어찌 이렇게 적을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보건대 북산을 먼저 점령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길마재에 진을 친 뒤 이에서 내려다보며 싸움을 걸면 저들이 반드시 응전할 것이고 싸움을 시작하면 적군은 우리를 올려다보며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군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싸우게 되는 것이니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며, 이에 적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충신의 작전 설명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홍도 이 계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마침내 정충신의 작전대로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러한 정충신의 작전은 적중했다. 이튿날에야 반란군 진영은 정부군이 길마재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장수가 이괄에게 뒤에 위치한 장만을 사로잡으면 적은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배후를 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괄은 정부군의 주력부대가 별로 많지 않고 쉽게 쳐부술 수 있다고 판단,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이었음을 당시 아무도 몰랐다. 이괄은 "적을 쳐부수고 밥을 먹자"고 호언장담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정부군 진영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때 반란군의 선봉장은 한명련이었다. 이괄은 중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그때 마침 동풍이 세차게 불어와 반란군은 바람을 등에 업고 유리한 싸움을 벌였다. 정부군은 불리한 자연 조건 속에서도 사력을 다하여 저항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에 밀려 수십 보 뒤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늘은 정부군의 편을 들었던 것인가.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서북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먼지를 동반하며 반란군을 향하여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반란군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전투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서북풍이었다. 결국 한명련은 화살을 맞고 뒤로 물러섰다. 이괄은 전투 진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뒤로 움직이자 대장기도 따라 움직였다. 그때 이를 본 남이홍이 "이괄이 패하였다"고 외치자, 먼지바람 속에서 격전을 벌이던 반란군들은 이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앞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괄 등이 독려하였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난 뒤였다. 정부군은 일제히 고개를 내려와 반란군을 사정없이 칼로 내리쳤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부군을 포위, 공격하려 했던 작전은 이렇게 해서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날 밤 이괄과 부상을 당한 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로 달아나면서 목사 임회를 죽이고 이북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나 정부군의 추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2월 15일 밤, 이괄 등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천의 묵방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부하 장수인 기익헌과 이수백 등은 더이상 도망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치자고 은밀히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두 사람이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쳤다. 너무나도 허망한 최후였다. 이로써 이괄의 반란은 한달도 안되어 평정되었다. 인조는 2월 22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반란 이후와 특성
인조는 환도한 뒤에 이괄의 반란 평정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장만, 정충신, 남이홍 등 32명을 진무공신으로 포상하는 등 사태 수습을 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국내외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국내의 반란으로 인해 처음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에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민심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집권층은 다른 반란이 유발하지 않도록 각계 각층에 대한 사찰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명련의 아들 중에 한윤이 있었는데,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구성에 숨어 있다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강홍립의 휘하에 들게 되었다. 그는 조선 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627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물론 한윤의 배반 행위가 호란의 근본 원인은 아니지만 광해군 몰락 이후 조선 정부의 대후금 정책을 알게 된 후금 정부가 조선을 치겠다는 결정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한적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매우 우발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부의 강경적인 통치 방식이 이괄의 반란을 야기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반란들이 대체로 뚜렷한 명분과 상황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일어난 것이라면, 이괄은 단순히 자신의 외아들과 가족의 신변 보호를 위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해하는 집권층에 대한 불만도 작용하였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어쨌든 이 반란 이후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쿠데타로 세력을 잡은 정권은 구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찰을 강화하게 되며 이러한 강압적 분위기에서 다른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출세를 위해 변고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지만, 이로 인해 무고한 대신들이나 무장들이 처형을 당하여 다시 한번 조선 정부는 내부 혼란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ff 14.이인좌의 반란 : 봉건질서가 해체될 조짐이 보이다
'이인좌의 반란'은 흔히 노론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들이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정변에 불과하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인좌의 반란이 전개되면서 이에 참여한 계층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인좌의 반란은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심화된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범위를 한정하여 정계의 동향만을 반란의 배경으로 삼는 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에 머물 위험이 있다. 이인좌의 반란은 당시 봉건질서 해체의 조짐을 보인 18세기 사회변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늘어나는 유랑민들 : 17.18세기 사회변동
17세기초 이후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수공업이 발전하는 등 조선사회는 일정 수준 발전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그런 반면 중앙 정치권에서는 광해군의 몰락으로 친명적인 사대주의가 팽배해져, 후금이 청나라가 되어 중국 전역을 정복한 뒤에도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고 하며 '북벌론'을 주장하는 여론이 드세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실현성이 없는 공론에 불과했다. 이를 흔히 모화사상이라고 부른다. 이성계의 사대주의 정책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명분론으로 변질된 셈이다. 그러나 모하사상의 뿌리는 사대주의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효종 때에는 실제로 군사력을 강화시키면서 북진정책을 수립하는 등 어느 정도 실천력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전성기를 맞이하여 강대국으로 변신한 청을 상대로 하여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군사력이나 사회 상황을 보더라도 볏단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주장한 이들은 이러한 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오직 모화사상과 사대정신에 입각하여 오랑캐인 청을 배척하고 종주국인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의리 명분을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후에 연암 박지원 등 실학자들도 북벌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간단히 말해서 북벌론은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비교하자면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내세웠던 반공정책처럼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에 모든 계층의 이해와 의식을 편입시킴으로써 중앙집권을 강화해나가고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었던 것이다. 군신 관계를 맺음으로써 여진족에게 완전히 굴복한 조선 정부는 백성들에게 나설 명분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당시 위정자들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에 부심하였다. 결국 민심을 다시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시키고 굴욕적인 항복으로 무너진 국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이 갖고 있는 반청 의식을 더욱 고취시켜 정부의 일사불란한 통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벌론'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성리학적 이념이 반영되어 있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북벌론은 봉건질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호란을 겪고도 일정 수준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었던 것도 이러한 지배계급의 이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사회에는 조심스럽게 봉건질서를 해체시키는 요소들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우선 농업생산력이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농업생산력 발전은 당연히 농업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직접 논에 볍씨를 뿌리던 원시적 방법에서 벗어나 모판에서 모를 가꾸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벼와 보리를 돌려 수확하는 이모작 기술도 점차 발전해갔다. 이뿐 아니라 거름을 만드는 기술도 발달하여 생산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수리시설도 증가하여 모내기를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토지 이용 방식도 발달하여 한 밭에서 돌려가며 곡식을 추수할 수 있는 근정법이 유행하였다.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생산물이 풍부해져 이것이 상품화되어 바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사례가 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들 중에는 아예 농산물을 상품으로 내다 파는 것을 목적으로 농업을 경영하는 이가 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상품화폐경제의 단계로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국에 큰 장시가 열리게 되어 그 수는 날마다 늘어났다. 또한 농업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토지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결국 토지는 점차 상품화되어 본격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토지를 파는 이들은 주로 영세농민들이었고 이것을 사는 쪽은 지주나 대상인, 또는 부농들이었다. 이러한 토지매매 행위가 성행함에 따라 지주제는 더욱 발달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계급 분화 현상이 촉진되어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을 초래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대토지)와 계급이 불일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러한 사회 변동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중앙집권 강화에 따라 양반들은 강력한 통제에 억눌리게 되었고, 상인이나 부농들의 신분 상승에 밀려 신분적, 사회적으로 몰락하는 수가 점차 늘어났다. 반면에 부농들이나 상인들은 돈으로 족보나 신분을 사서 양반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양반 행세를 하는 등 사실상 신분 계급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것은 상승된 민중 의식의 반영이며 사회 계급의 절대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밖에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된 원동력으로서는 수공업과 광업의 생산력 발전을 들 수 있다. 수공업의 경우, 가내수공업이 전업화되어 시장 판매를 위해 지역 특성에 따라 상품을 개발하였다. 이렇게 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품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부에서도 이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 유통이 원할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화폐경제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이것은 자본주의적 맹아가 생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과도기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또한 정부에서 금지 명령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광업은 날로 성행하여 금이나 은이 생산되어 농촌을 떠난 유랑 농민들이 임노동자가 되어 대거 광산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다. 뒤에 보게 될 '홍경래의 반란'에 광부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회 변동을 입증해주는 실례이다. 이렇게 농업, 수공업, 광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발전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민중들의 사회의식이 그만큼 상승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봉건적 질서에 순응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스스로 직업을 선택하고 신분을 상승시키는 등 사회 세력으로 점차 등장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7.18세기는 19세기에 일어난 민중 봉기의 준비기였다. 그러나 부세제도 등 영세농민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제도가 고쳐진 상태는 아니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 임진왜란 이후 혼란에 빠진 사회제도를 재정비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지만 그것은 분명한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영조대에 이르러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수령의 통치권한을 넓혀 향촌에 대한 지배권을 다져나갔다. 이후 강화된 권한을 역이용하여 탐학을 일삼는 관리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민중들의 저항을 야기키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지주제의 발달, 수령들의 탐학 등 구조적 모순이 다시 심화되어 갔고 이에 따라 유랑 농민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이들 중에는 노비나 임노동자, 화전민이 되거나, 또는 도시로 흘러들어가 수공업자가 되는 이들도 있었지만 도적으로 전락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인좌의 반란에 참여한 명화적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발생한 무장단이었다. 또한 그 유명한 장길산이 활동한 것도 숙종 때부터였다. 정부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가, 장길산 사건은 미증유로 남게 되었다. 도적떼는 명화적이나 장길산 뿐이 아니었다. 도적은 사방에서 들끓어 사회적 동요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제반 현상에 대해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서민이 부역을 도피하고 부세를 면하기 위해서 숨어드는데, 관에서 감히 묻지 못하고, 조정에서도 걱정만 할 뿐 능히 금단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많은 노비를 거느리는 지주들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우리나라 노비의 해는 다 말할 수도 없다.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이 여기에 연유하고, 백성의 가난함이 여기에 연유한다. 이것이 비록 여러 대로 이어지는 종들이라도 오히려 인원수를 정해서 외람되게 거느리지 못하게 함이 마땅한데 하물며 평민을 억압해서 종으로 부리는 것이 되겠는가.
요약하자면, 17.18세기 조선사회에서는 기존의 봉건적 질서가 조금씩 무너지고 새롭게 계층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 정치권에서도 민감한 방응을 보여 심지어는 도적에게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권의 중요한 변화는, 국왕들이 왕권 강화는 물론이고 민생 안정에 최우선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모화사상이 깔려 있다. 숙종 전후에 벌어진 극심한 당쟁은 이러한 왕권 강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진 현상이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환국의 반복 : 무너져가는 붕당정치
환국이란, 지금으로 치자면 정당의 정권 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적인 정당정치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 붕당정치는 정권 장악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시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치권은 서인과 남인의 양대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인조 이후 효종을 거쳐 현종 때까지만 해도 양대 세력은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현종 때 예론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유혈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 학문적인 교류도 나누고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 권내에서 건설적인 논쟁을 통해 정국 운영을 같이 논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숙종대에 이르러 붕당정치는 말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현종 말기부터 주도권을 남인들이 갖고 있었지만 숙종 즉위 이후인 1680년 허견의 역모와 연루되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런데 1689년 장희빈이 낳은 세자 책봉문제가 문제가 되어 다시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가(기사환국), 1694년 폐출되었던 민비가 다시 복위됨으로써 남인이 완전히 정계에서 축출되어 노론과 서론으로 분열된 서인 집권 시대가 열렸다.(갑술환국) 이후 노론과 소론은 긴장 관계를 유지하다가 1716년을 고비로 노론 일색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환국 과정에서 각 붕당은 사분오열 갈라져 나갔다. 남인의 경우, 청남, 탁남으로 나누어졌으며, 서인에서 둘로 갈라진 노론과 소론 가운데 노론은 다시 화당, 낙당, 파당으로 분립되었다. 말그대로 정치권은 이합집산으로 일대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송시열, 윤휴, 김수항 등 당대 명신들이 죽음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붕당이 갈갈이 분열된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위에서 전제로 말한 국왕들은 왕권 강화의 과정에서 각 당간의 경쟁심이 극대화되었기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즉 국왕은 임진왜란 이후 극도록 약화된 왕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권한을 확충해 나가면서 한 붕당의 세력이 커지면 환국을 통하여 상대 세력으로 교체하고 다시 그 세력이 왕권을 넘보면 이를 대신할 세력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바로 이러한 숙종 때 반복된 환국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조는 고루 인재를 등용한다고 하면서 되도록이면 온건적인 인물들을 골라 조정에 임명하였다. 그러다보니 신하들은 국왕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왕실이나 외척들의 권한이 커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국왕의 권한이 전보다 강화됨에 따라 후계자를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어 간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조신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것을 역이용하여 자파의 세력을 키워나간다는 구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로서 숙종이 죽기 전후하여 후계자 선정 문제를 놓고 경종과 연잉군(영조)을 각기 지지하는 파벌이 형성된 것을 들 수 있다. 숙종은 죽기 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 세자가 바로 경종이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몸이 허약해지고 특히 그의 친모인 장희빈이 사약을 먹고 죽은 뒤에는 병까지 생겨 숙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717년, 숙종은 고민 끝에 노론 4대신 가운데 한 사람인 이이명을 불러 세자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이것을 '정유 독대'라고 한다.) 숙종은 이어서 세자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그러자 소론 사람들은 꼬투리를 잡아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도 반격하고 나서 양 계파간에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때부터 임금 자리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를 기화로 옥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신임사화라고 부른다.(신축년인 1721년과 임인년인 1722년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1720년에 숙종이 죽자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쟁은 한층 격화되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여 조신들과 직접적인 큰 마찰은 없었지만 30이 넘도록 자식이 없는데다가 병이 점점 악화되어 정무 수행에 차질이 생기자 권신들 사이에 경종에 대한 시비가 날로 늘어났다. 특히 연잉군을 추종하는 노론들은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그 계승자는 연잉군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노론에 속해 있는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노론 4대신인 영위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이 계속 후계자 문제를 들고 나왔다. 주요 대신들의 강력한 청원에 경종은 할수없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21년 8월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소론의 유봉휘 등은 세제 책봉의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면서 책봉의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우의정 조태구도 이를 지지하면서 책봉에 문제가 있다고 동조하였다. 그러나 노론들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의 상소를 통하여 아예 세제청정을 요구하였다. 경종은 연일 올라오는 노론 사람들의 상소에 스스로 지쳐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그러자 소론들이 반대를 하자 다시 환수하였다. 이러기를 몇번 반복하였다. 경종은 병에 걸려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해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것이다.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은 이제 절정에 달해 양파간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이때 소론 중에서도 과격파에 속하는 김일경 등 7인은 경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론측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상소를 통하여 경종이 병을 앓고 있지 않으며 또한 손수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데도 노론 4대신들이 세제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일은 나라를 망칠 죄라고 하면서 4대신들의 죄는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에 해당된다고 공격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노론측이 협작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로 노론 4대신은 관직을 삭탈당하여 김창집은 거제도에, 이이명은 남해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은 나로도에 각각 유배되었다. 이밖에 노론측 사람들이 대거 관직을 잃거나 문회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이렇게 해서 노론의 권력 기반은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되었다. 소론에 속해 있던 최석항이 영의정에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혀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론은 양분되고 말았다. 일부 소론 사람들이 김일경의 과격함을 경계하여 노론 숙청에 온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 조태구, 최석항 일파는 완소,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라고 불렀다. 노론측의 시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가 바뀐 1722년 3월에 소론 과격파는 이른바 '삼급수설'을 주장하면서 노론들이 역모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삼급수란, 대급수(칼로써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함하여 왕을 폐출함)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 무고로 노론 4대신 등이 사약을 받고 죽었고 114명이 유배를 갔으며 이에 연좌된 자만도 173명이나 되었다. 즉 신임사화를 통하여 노론 중심 인물들이 대부분 중앙에서 제거되어 소론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자, 노론들은 반격에 나서서 신임사화의 책임을 물어 김일경 등 소론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처단하여 다시 집권하였다. 영조는 즉위 전부터 당쟁의 병폐가 극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송인명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탕평책을 펴나가기로 결심하였다. 영조는 노론측이 신임사화의 책임을 물어 소론측에 대한 보복을 주장할 때도 무고함을 밝히고 원통한 것을 풀어주면 그만이지 보복은 안된다고 하여 노론 강경론자들을 파면시키기도 하였다. 김일경이 죽은 것은 영조가 친히 신문을 할 때 불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김일경을 제거할 뜻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즉, 영조는 당파성이 강한 인물들을 배제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인물들을 모두 등용하여 정계 개편을 하였던 것이다.(정미환국)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완전한 조치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탕평책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노론 내의 과격파인 준론자들은 계속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인좌의 반란'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란의 전개 과정과 특성
간단히 말해서 '이인좌의 반란'은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일부 세력과 남인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정변이라고 할 수 있다. 경종이 죽자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헌, 이유익, 심유현 등 과격 소론측은 갑술 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에 대해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사전에 인근 지역의 소론 세력이나 남인들은 물론이고 향반층과 일반 농민들까지도 동원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당시 무장을 하고 활동하고 있던 명화적도 포섭하여 반란에 가담케 하였다. 다른 반란도 그렇지만, 이 정변 역시 일정한 명분을 내걸고 있다. 즉, 경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앞세워, 영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이 이들의 명분이며 목적이었다. 또한 무력 기반을 갖추기 위하여 지방군과 유랑민들을 반란군에 편입시키는 등 당대의 사회적 모순으로 분화된 농민층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주도 세력은 여러 가지 사회 개혁안을 내세워 하층민들을 규합해 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강령들이 효과를 발휘하여 지방 군인들이나 향임층, 그리고 유랑민 등이 대거 이 반란에 참여하였다. 여기다가 사노비들도 참여하여 반란에는 다양한 계층이 뒤섞이게 되었다. 주도 세력은 영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725년부터 당론을 토대로 세력 확장을 위해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에 걸친 조직망을 확충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청주에 살고 있던 이인좌도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경종의 비였던 심씨의 동생으로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는 심유현이 그의 죽음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하자 이를 토대로 사방에 흉언을 퍼뜨려 전국 곳곳에서는 흉서와 괘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렇게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조직과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놓은 상태에서 '이인좌의 반란'은 터지고 말았다.
봉기는 1728년 3월 15일, 소론 과격파였던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함으로써 발단되었다. 원래는 거사일을 3월 10일로 정하였으나 지방간의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기다리다가 독단으로 먼저 봉기를 서두른 것이다. 이인좌는 무기를 실은 상여를 장례 행렬로 꾸며 청주성 앞 숲속에 숨겨두었다가 밤이 되어 성의 경비가 소홀한 틈을 이용, 청주성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반란군은 병영을 급습하여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등을 처단하고 청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반란의 거점을 마련한 이인좌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에 임명한 뒤 인근 주요 지역에 격문을 돌려 '경종을 위한 의거'라고 강조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하면서 병마를 모집하는 한편, 인심을 얻기 위하여 관곡을 풀어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인좌는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아침 저녁으로 절하며 곡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원수라고 자칭한 이인좌는 반란군을 이끌고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하였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인좌는 산사에 숨어 있다가 인근 주민들의 신고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후 3월 26일에 대역죄로 능지처참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원래는 경기도에서도 호응을 하기로 했지만 밀고 등으로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인좌의 반란군만이 관군과 싸워야 했다. 한편, 청주성에 있던 신천영은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청주성에 사는 창의사 박민웅 등이 이끄는 토벌군의 공격을 받아 저항하다가 청주성을 빠져나와 상당성에서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이인좌의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이후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에서도 호응하여 반란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영남지방에서 반란을 주도한 인물은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과 이웅보(이인좌의 동생인 이웅좌가 이름을 바꾼 것이다.)였다. 이들은 원래 이인좌와 합의하여 같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겨 이인좌가 먼저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정희량은 조묘의 이장을 구실로 군사를 모집한 뒤 이웅보가 이끄는 반란군과 연합하여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창에 주둔한 뒤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하여 쉽게 두 지역을 장악하였다. 투서에 놀란 현감은 병영으로 도주하였다. 두 사람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합천에 있던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 등이 나서서 반란군이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점령하는 데 일조하였다. 반란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그 세력이 영남지방 전체에 퍼질 기미를 보였다. 이에 경상감사 황준은 반란군의 동태를 파악한 후,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빙을 좌방장으로 삼아 의령, 함안, 단성 등의 관군을 통솔하게 하여 토벌에 나섰다. 그밖에 정산이나 진주의 관군들과 연합하여 반란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러면서 황준은 반란군의 동태를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관군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위기감을 느낀 반란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계를 넘어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운봉장영 손명대 등이 입구를 차단하는 등 주변 관군들이 반란군을 사방에서 조여오자 다시 거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관군의 포위 작전에 말린 반란군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정희량, 이웅보 등 21명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2차 반란 역시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원래 호남지방에서도 군대를 일으켜 봉기할 계획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소론 과격파의 대표 주자인 김일경과 친분이 두터웠던 태인현감 박필현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박필현은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1725년에 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 등이 그를 역적의 자식이라고 탄핵하는 바람에 낙향하였다. 이후 그는 노론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실제로 김창집을 공격하고 김일경을 추종하였다. 또한 1726년에 상주에서 이인좌와 생사를 같이 하는 교우 관계를 맺으면서 반란을 꿈꾸었다. 마침내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4일 후인 3월 19일에 근왕병을 모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관할 지역 군사들을 모아 정비한 다음 태인을 거쳐 전주로 향하였다. 전주성에서 반란에 참여하겠다는 사전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라감사 정시효는 성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근왕병 모집이 아니라 반란을 위해 모병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부하들이나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도주하고 말았다. 결국 혼자가 된 박필현은 가솔 몇 명만 거느리고 상주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참수당하였다. 박필현은 원래 박필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박필몽을 대장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박필몽은 신임사화의 주역으로서 노론의 견제를 받고 있던중 실록청에 사사로이 드나든다는 탄핵을 받아 갑산에 유배되어 있었다. 전주로 가는 도중 박필현의 군사가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에 숨어 잔류 세력과 재기하려 했지만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능지처참당하였다. 이로써 청주에서 시작하여 영남, 호남 지역으로 번져나갔던 '이인좌의 반란'은 완전히 평정되고 말았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하여 4월 19일 개선하였고,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와 이들을 영접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앙은 완전히 노론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고,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탕평책을 펼쳐 이들 세력을 견제하였다. 잘 알려져 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러한 정치권의 흐름 속에서 왕권과 노론의 신권 사이에 벌어진 알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이인좌의 반란은 16세기 이후 누적된 당쟁이 폭발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반란에 참여한 계층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반란에는 지방 군인, 향임층, 유랑민, 심지어는 명화적까지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1)영조의 정통성을 의심케 하는 여론을 확산시켰고 2)현실개혁적 강령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반란이 비록 누적된 당쟁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모순 타파를 원하는 민중들의 의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이 반란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반란 주도층은 이들을 정치 세력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이념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란에는 18세기 사회 변동으로 분화된 농민층의 개혁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으며, 나아가 지식인층과 일반 민중 사이에 연대감을 조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반란의 새 시대를 여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이 확대되어 나타난 경우가 바로 '홍경래의 반란'이다. 즉 '이인좌의 반란'은 19세기에 시작된 민중 항쟁의 한 전범이 된 셈이다.
@ff 15.홍경래의 반란(평안도 농민전쟁) : 민란 시대를 연 농민항쟁
반란의 발생 배경
'홍경래의 반란'은 조선 후기 1811년(순조 11년)에 홍경래, 우군칙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 항쟁을 말한다. 이 반란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났다.(이 난을 농민전쟁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19세기에 있었던 여러 농민항쟁과 구별짓기 위해 기존처럼 '홍경래의 반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홍경래의 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특히 1801년에 있었던 신유교난을 전후로 전개된 보수 진영과 개혁 진영과의 치열한 정치적 경쟁에서부서 그 뿌리를 찾아봐야 한다. 18세기의 조선은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체제의 와해 조짐이 엿보이던 시대였다. 잘 알려져 있는 실학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개혁과 변혁을 주장하였지만 노론 벽파의 집요한 정치적 탄압 음모에 의해 현실에 별로 반영되지도 못한 채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신유교난이었다. 이 신유교난은 이미 경인 지역과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퍼져 있는 천주교인들을 노론 벽파들이 '무부무군하는 사교 집단이요 반역자들'이라고 몰아부치면서 모두 몰살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종교적 탄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천주교는 주로 17세기 이후로 거의 백년 동안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먼저 전파되었다. 이미 16세기에도 천주교(당시에는 주로 천주학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지식인들의 연구는 있었지만 종교적 형식을 통해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훈이었다. 또한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철신 등 재야 남인 세력 사이에 천주교는 조심스럽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문제는 정조의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는 선왕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써서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을 대거 조정에 기용하였다. 거기에 천주교인들은 아니지만, 역시 소외 세력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제자들인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을 규장각 검서관에 임용하는 등 정조의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세력을 중앙에 집결시켜 나갔던 것이다. 게다가 연암의 제자들이 대부분 서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정조의 조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에 심환지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는 기회가 생기는 대로 상소와 항의를 통해 남인 세력을 탄압하였다. 그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준 것이 천주교였던 것이다. 보수적인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노론 세력들은 남인들을 '임금과 조상을 부정하는 천주쟁이들'이라고 하면서 정치적 모략을 계속하였다. 실제로 천주교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전파된 이후에 각 지역에서 관할 군수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남인의 거두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천주교에 대해 회유책과 교화정책을 펼쳤다. 노론 세력의 눈에는 이러한 정조의 태도가 남인을 비호한 것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00년, 개혁 의지가 분명했던 정조가 죽고난 뒤 그의 어린 아들이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순조이다. 이에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어린 임금은 사실상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했다. 결국 정조가 급사하자, 노론 세력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유교난을 일으켜 남인 세력을 일대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후 1802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 노론 세력의 전략가로 알려진 김조순이 자기의 딸을 순조의 비로 밀어넣고 이른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노론 일당 독재가 거의 6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일당 독재체제하에서 올바른 정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이권과 권력을 독점하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면에서도 온갖 부조리를 일삼았다. 이른바 삼정 문란으로 농민들은 끊임없이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뒤에서 볼수 있듯이, '홍경래의 난'을 이끈 주도 세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의 경제 구조와 신분의 변동 등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세도정치에 의해 야기된 제반 부조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여기서는 '홍경래의 난'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부분만 거론하기로 하고 19세기 전반에 일어난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임술민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먼저 농업의 형태 변화를 보자.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들어서서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17, 18세기에 시작된 사회 구조 변화의 연속이었다. 특히 중앙정부의 비호 아래 불법적인 토지 겸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광범하게 진전되었으며 지주전호제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또한 종래의 벼농사를 개량한 이앙법, 이모작 등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변화에 따라 단위 면적당 노동력이 대폭 감소되어 이른바 노동 집약적인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의 발달과 토지 겸병으로 인해 농토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불가피하게 농촌에서 축출되어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즉 농민층의 분해 현상이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농촌에서 소외된 농민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상업이나 광업, 또는 심할 경우엔 품팔이로 전락하거나 도시 빈민이 되어 막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일도 찾지 못할 경우엔 도적이 되거나 걸식 행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무리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어만 갔다. 여러 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당시 유민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각 도별로 수만 명 또는 십만 명이 넘기도 했다. 정조 때 이미 전국적으로 산도적 무리가 극성을 부리게 된 것도 이러한 사회 변동의 산물인 셈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 방치됐던 간에 중앙정부는 통치력에 따라 이들 유민들을 다스리려 했을 뿐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세도정치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원성이 높아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농업경영을 하는 농민의 수도 늘어났다. 이들은 선진적인 농업 기술에 대한 지식과 현장 경험을 겸비하여 봉건지주의 농지를 빌려 소작을 하되 앞에서 본 유민들을 고용하여 합리적인 경영을 통해 생산량을 극대화시켜 일정 배분량을 차지하였다. 그것으로 자기의 토지를 구한 뒤 다시 재투자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경영 방식을 운영할 줄 아는 부류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은 일반 생활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특용 작물이나 시장성이 좋은 곡물을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부의 축적으로 이들은 그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으니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지도층 가운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부농이 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장성을 안다는 것은 유통구조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말도 된다. 18세기 전후에 이미 상업은 전국적으로 발달하여 시장이 서는 곳이 점차 늘어갔으며 완전한 화폐경제는 아니지만 대체로 화폐에 의존하여 상품이 교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유통구조는 수요량과 공급량 모두 증가시키면서 상품 교환의 장소인 향시는 거의 모든 농촌 지역에 설치될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나 {증보문헌비고} 등에 따르면, 시장의 수가 전국에 걸쳐 천여 개가 넘어서서 활발한 유통망 구실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시전 체제를 위협하는 중요한 경제구조의 변화라고 볼 수 있는데,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상인들 가운데 이러한 구조를 통해 대상인이 된 부류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난에 참여하게 된 것도 시전 체제를 비호하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의 정경 유착과 비견되는 금난전권(일종의 독점 보호 조치)이 시행되어 일반 상인들의 활동에 큰 제한을 주었던 것이다. 상권을 둘러싸고 중앙 정치인들의 후광을 받고 있던 특권상인(시전상인)들과 자립으로 커온 사상인 간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치열했다는 것도 이 금난전권이 반증해주고 있는 셈이다. 유민의 노동력이 집중된 업종 중 하나가 광업이다. 홍경래 지도부가 광산을 연다는 소문을 내어 군사를 모은 것도 이러한 사회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당시 광업은 대체로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었다. 아직 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봉건적 정치인들은 오직 광업 때문에 농토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농업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권 다툼 과정에서 범법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만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서북 지역에는 이미 공공연하게 금광 등 광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유민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상품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 현상이 촉진되었는데, 이에 따라 조선 중기까지의 봉건 지주와는 다른 서민 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선진적인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전국적인 확대라는 유통구조의 발달에 따라 차경지를 합리적인 경영 방식으로 운영, 확대를 통하여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 부농층이 형성되었다. 그런 한편에서는 다수의 n 소농민들이 유민으로 몰락하여 영세 빈농, 무토지 농민이 되거나 빈민으로 전락하여 토지에서 소외된 농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지금의 도시 확장에 따른 현상과 비슷하게 임금노동자층이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결국 이 당시의 농민층 분해 현상으로 말미암아 다수의 농민들이 유민이나 빈민으로 전락하여 토지를 둘러싼 계층 변화가 심화되어 갔으며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선진 농업 기술과 상권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 서민 지주가 되는 등 농민들 사이에 신분적 양극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수적으로 유민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압도적이었지만 부농들이 지역 유지로 활동함으로써 사회 변동의 변수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 상공업 분야에서는 상품경제의 전업화가 이루어져 중앙 정치인들의 비호를 받는 봉건적 특권 상인들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들은 대청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른바 자본가의 기반이 어느 정도 형성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여기서 신분 구조의 변화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여러 고을에 등장한 격문의 내용 중 신분 차별과 지역 감정에 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서북인들을 선동하는 내용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봉건적인 신분질서의 구조에도 부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에 의하여 양반의 증가와 평민, 천민의 감소, 몰락 양반의 증가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무너져갔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특히 정치적으로 치열하였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안동 김씨 척족에 의한 일당 독재가 성립됨으로써 삼정 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 상인과 지방 상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방은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대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서 송상, 만상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견직물업, 유기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 작물의 재배, 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인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양반지주, 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고 일부 농민층은 부를 축적하여 향촌의 향무층으로 진출하였으며 빈농, 유민들이 잠채 광업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홍경래,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로 대표되는 몰락 양반, {정감록} 등을 바탕으로 현실 변혁을 주장하는 유랑 지식인들과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 부민 등 부농, 서민 지주층과 사상인층의 물력 및 조직력이 결합되어 10여년 간 준비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역노 출신으로 대청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의 집이 있는 다복동을 거점으로 삼고, 각지의 부호 및 대상인들과 연계를 맺는 한편,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 등을 임금제로 고용하여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던 것이다.
반란의 준비, 전개 과정
홍경래의 난 이전에도 민란은 계속 있어 왔으나, 이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완벽에 가까운 사전 모의를 했던 봉기도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그만큼 여물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남양 홍씨인 홍경래(1780-1812)는 용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진사인 것으로 봐서 그의 가문은 양반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홍경래 역시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눈을 뜨기 전에는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가 서북인들에 대해 차별을 두고 있었다. 이런 차별 정책 때문에 홍경래는 번번히 과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미 18세기 실학자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지적했듯이 과거제도는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제가가 살았던 정조시대에도 그러했으니 정조 이후의 세도정치 때에는 그 비리가 더 심화되어 상태여서 매관매직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관서제인 정정부서]라는 글에는 서북인들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어 주목을 끈다.
글은 나라의 경계를 지키고 무예는 고을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에 통하는 학문과 사람을 울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시 벼슬에 나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배울 만한 나이에 이른 아이들은 이미 서북인들을 모욕하는 것부터 배워 이들을 천하다고 하며 항상 능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상시 때에도 자주 거만하게 '서인, 서인' 하면서 서인이라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며 때로는 말하기를 '서북놈, 서북놈' 합니다.
과거 시험에서 몇번의 고배를 마시고 난 뒤에야 홍경래는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예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국을 떠돌며 유랑 생활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홍경래가 가까이 한 것은 주로 풍수였다. 그는 유랑을 하면서 지사로 자처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풍수는 홍경래처럼 소외된 지식층 사이에서는 생활의 한 방편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부도 권력도 갖지 못한 양반층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는 유학에서 천시하고 있던 풍수라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던 홍경래는 평앙도 가산군에 있는 청룡사라는 절에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나게 된다. 그는 홍경래보다는 다섯 살 아래였으나 놀라운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장차 엄청난 봉기를 준비하는 뿌리가 되었다. 둘은 가까워지면서 서로 뜻이 맞아 현실의 모순과 미래에 대하여 깊은 토론을 하였다.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현실에 대한 불만 토로는 변혁 의지로 바뀌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구체적인 사전 모의 착수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봉기를 위해서는 자금과 군사력이 모두 필요하다는 합의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먼저 평안도 내의 향무층에서도 경영형 부농층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역 실력자들과 제휴하는 것이야말로 봉기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군사력 면에서는 장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특히 자금 마련을 위해서 상인들을 포섭해나갔다. 사상인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평소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개성 상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봉기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두 사람의 활동은 처음부터 매우 조직적이었다. 과거 공부를 해본 경력이 있는 홍경래는 주로 지식층을 담당하였으며 일찍이 상인들을 잘 알고 지내던 우군칙이 자금 담당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포섭 대상이 되었던 인물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희저였다. 그는 가산군에 살고 있던 이속이었는데 도내에서 알아주는 거부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희저를 끌어들이기 위해 몇 가지 술책을 썼다. 우선 우군칙의 아내를 이희저의 처에게 접근케 하여 손금을 봐주면서, 얼마 안 있으면 크게 대길할 운수를 지녔다고 운을 떼게 하였다. 그런 후 우군칙이 지사라고 하면서 이희저에게 나타나 그의 부친 묘자리를 봐주며 대지라고 칭찬하면서 조상 덕을 입어 곧 크게 될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 다음엔 홍경래가 도사복을 입고 야밤에 몰래 이희저를 찾아가 자기의 계획을 토로하면서 동지로 삼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이희저는 봉기의 재정 기반을 마련해준 핵심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이 특별히 공을 들여 이희저를 끌어들인 데에는 그가 거부라는 점도 있지만 풍수에 밝은 그들이 이희저가 살고 있던 가산.박천의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기 위함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다복동은 대정강의 하류에 위치한 분지이다. 이곳은 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이면서 동시에 평양과 의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게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쉽게 발각되지도 않으며 다복동 앞에 있는 삼각주의 나루인 진두를 통해 다복동으로 들어오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과 같은 비밀 아지트가 되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지역 실력자들을 하나 하나 포섭해 나갔다. 홍경래는 그 일환으로서 서울에 있는 김재찬에게도 접근하였다. 그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적도 있으며 1805년 우의정 임명을 거절하였다가 황해도에서 유배 생활도 한 인물이었다. 좌의정을 지낸 고위 관직 출신이었지만 당시의 세도정치에 대한 불만이 깊었다. 홍경래가 김재찬을 찾아간 것은 거사의 기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김재찬에게 부탁하여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이천 냥을 빌리는 데 성공, 유용하게 거사 준비금으로 썼다. 두 사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정주의 부호 김약하,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 그리고 여러 개성 상인들을 차례로 거사에 끌어들였다. 우군칙은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연다는 소문을 퍼뜨려 모군 작업에 착수하였다. 우군칙은 일정 크기의 구덩이를 파놓은 다음 장정들에게 뛰어 건너게 하여 그 힘을 시험하고 새끼줄을 높게 달아놓고 뛰어넘게 하여 순발력을 점검하였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돈과 옷감을 나누어 주고 이들을 열 명 1조로 만들어 각각 마을에 잠입케 한 뒤 봉기가 있을 때 내응하도록 사전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하여 홍경래와 우군칙, 그리고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을 중심으로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들과 지방 관속들, 그리고 지식인들과 유민 계층에 걸친 광범위한 봉기 세력을 주도면밀하게 조직해 나갔던 것이다. 봉기가 있기 두 달 전인 1811년 10월부터 각지의 인물들이 비밀 아지트인 다복동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사회 신분과 능력에 따라 모군과 군량 등 봉기에 필요한 것을 세분하여 책임을 부여하였다. 거병일은 같은 해 12월 20일로 잡았다. 홍경래는 평서대원수라고 자칭하였다. 그러나 봉기군의 대거 이동은 쉽사리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선천부사 김익순(김삿갓의 할아버지)은 눈치채고 조사해 본 결과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반란군측도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12월 18일로 수정하였다. 봉기군은 크게 2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진군과 남진군이 그것이다. 이렇게 봉기군을 양분한 이유는, 반란군의 최종 목적이 서울 탈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남진군이 담당하고 후위를 북진군이 맡음으로써 완벽하게 중앙정부를 점령하려 했던 것이다. 북진군은 우군칙의 제자인 김사용을 대장으로 하고 선봉장에 이제초, 모사 담당에 김창시 등을 비롯하여 김희연 이성항 등이 참모 역할을 하였다. 남진군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홍총각이 선봉장을 맡고 모사에 우군칙, 후군장에 윤후검 등이 임명되었다. 반란군들은 출병에 앞서 김창시가 쓴 격문을 숙연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우리 관서의 부로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오. 무릇 관서는 기자의 옛 성이 있고 단군의 옛 터전이어서 특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문물이 빛난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다시 세웠으며 또한 정묘호란 때에는 양무공이 충성을 다하여 적군을 물리쳤다. 이와 더불어 돈암 선우협(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 평양 출신이며 관서공자라고 불렀다.)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의 재주도 이 서쪽 땅에서 났는데도 조정에서는 서토를 똥무더기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들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하니 서토에 살고 있는 자들로서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겠는가. 막상 난을 당했을 때에는 서토 사람들의 힘에 의존하고 또 과거를 볼 적에도 서토의 글을 빌렸으니 400년 역사 속에서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왕이 위에 있어서 권세있는 간신배들이 극성을 부려 김모(김조순) 박모(박종경)의 무리들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흔들어서,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에도 번개가 일고 지진이 나서 살별과 우박과 태풍이 없는 해가 없으며 이로 인해 큰 흉년이 들어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의 시체가 산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다스릴 성인(<정감록>의 정씨를 딴 정제민을 뜻함)이 청북 홍의도에서 탄생하셨으니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다섯 살 때에 이미 신령한 스님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장성해서는 강계사군여연에 머무른 뒤 5년이 지나 황명의 세신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마침내 철기 10만으로 부정 부패를 척결할 뜻을 세우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어서 차마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에게 기병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의로운 뜻이 일어난 곳이 바로 참 임금을 기다린 명소가 아니겠는가. 이에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지역에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시오. 만약 어리석게도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천으로 밟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협조하여 거사에 동조함이 옳을 것이다.
격문 낭독이 끝나고 홍경래의 결속을 다지는 연설도 마친 후에 마침내 봉기군은 횃불을 높이 쳐들고 선천으로 진격하였다. 남진군은 가산 삼교에 도착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홍총각에 잡힌 이곳 군수 정시는 봉기군 앞에 끌려 나와 맞아 죽었다. 결국 남진군은 무혈 입성하여 관아의 병기를 수습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김익순은 18일 아침 농민들이 떼를 지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난동의 기미가 보인다고 파악하여 농민 가운데 몇을 잡아들여 문초하였다. 그런 가운데 봉기군의 핵심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파악하였으나 체포에는 실패하였다. 이미 봉기군은 정예 부대를 구성하고 각처로 진군할 때였다. 북진군의 핵심인 김사용은 군사를 이끌고 곽산으로 향하였다. 이곳 군수는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혀 옥에 갇히는 꼴을 당하였고 그의 아우는 반항하다가 봉기군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김사용은 이어 능한산성을 점령하고 임해진을 공략한 뒤에는 요충지인 정주성으로 향하였다. 정주성은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성이었다. 그러나 내응 세력이 있었기에 입성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18일 아침, 상아현에서 집사 이침은 이미 목사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난리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과 민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성내의 주민들은 난리를 피해 대부분 피난을 간 상태였다. 그는 사전에 조직해놓은 내응 세력을 모으기 위해 그런 술책을 썼던 것이다. 이침만이 아니라 이런 내응 세력을 결집한 관리는 좌수 김이천, 칙고도감 홍하진 등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이 봉기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목사 이근주는 향교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침 등이 향교로 쳐들어가 목사를 끌어낸 뒤 인부를 빼앗은 뒤 쫓아버렸다. 이렇게 되니 김사용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정주성에 입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19일 정오 무렵이었다. 김사용은 입성 즉시 정주성 내의 지식층들을 모두 봉기군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이들 계층을 분석해보면, 좌수, 풍헌, 별감 등의 향임과 별장, 천총 등의 군임 등 중간층 이상의 실력자들이 대거 봉기군에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경영형 부농이거나 중소 부농층에 해당되는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북진군은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정주성이 정비되어 갈 때인 20일 동이 틀 무렵, 남진군은 가산을 지나 이미 박천읍에 도달해 있었다. 남진군은 도원수 홍경래가 총지휘를 하고 선봉장 홍총각이 전위를 맡은 상태에서 읍내로 돌진하였다. 여기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다. 군수는 이미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봉기군은 군수를 찾아내기 위하여 군수의 노모를 일부러 감금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서운사라는 절에 숨어 있다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나고 말았다. 이 사고는 앞으로 전개될 점령 작전에 막대한 차질을 일으키게 될 불운의 사고였다. 박천을 점령한 남진군은 영변을 친 뒤 이어 안주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분쟁이 일어났다. 안주 병영의 집사 김대린과 이인배 등은 영변보다는 안주를 먼저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이들은 홍경래를 설득하기 위해 수차례 건의하였다. 망설이던 홍경래는 이들의 뜻을 못이겨 작전 변경을 하려했으나 이번에는 우군칙이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섰다. 이렇게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우군칙의 주장대로 작전을 펼치자고 홍경래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김대린, 이인배 등은 자기들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봉기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봉기에 동참한 것 자체를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의 끝에 실패로 끝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바에 지금 당장 홍경래의 목을 베고 자수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김대린 등은 밤에 몰래 홍경래의 숙소로 찾아들었다. 김대린이 홍경래에게 칼을 휘둘렀으나 홍경래는 민첩하게 칼날을 피했다. 칼은 전립을 치고 이마를 스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새 홍경래의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황한 홍경래는 소리를 질러 부하들을 불렀다. 홍경래의 급박한 소리에 우군칙과 보초를 서고 있던 봉기군들이 달려왔다. 우군칙은 김대린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김대린은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인배는 봉기군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 이 암살미수 사건으로 홍경래는 전열을 수습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21일에 일단 거점인 다복동으로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봉기군에게는 진격 일정에 결정적인 차질을 주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진격을 하여 관군이 재정비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남진군의 후퇴로 이에 속도를 맞추기 위하여 북진군마저 정주에서 나흘 동안이나 더 머물러야만 했다. 그만큼 북진군은 다음 공략지인 의주성 점령 시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복동으로 돌아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남진군은 24일 밤이 되어서야 홍총각의 선봉부대가 박천 송림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뒤를 따라 홍경래와 우군칙의 부대가 26일에 송림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진군도 24일에 비로소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으로 빚어진 나흘간의 공백이 봉기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편 안주성에서는 19일 아침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대 기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목사 조종영은 명령에 따르지 않는 군졸 3명의 목을 치어 효수하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또한 봉기군이 후퇴하여 내분을 수습하는 동안에 안주성의 관군 역시 전열을 가다듬어 내응 세력이 봉기군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약속된 시간에 봉기군이 도착하지 않자 안에서 봉기군을 돕기로 약속한 진사 김명의도 자기의 신분 노출을 꺼리며 약속을 저버렸다. 그래서 안주성은 앞으로 벌어질 봉기군과의 싸움에서 관군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던 것이다. 봉기군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된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영변에서 부사 오연상은 소문으로만 반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0일, 전열을 수습한 안주 병영에서 급히 전해온 비밀문서를 통하여 박천에 봉기군이 집결해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고는 크게 놀라 군대를 요처에 배치하고 군졸을 더 증강시켜 무기를 나누어주어 성문을 지키게 하는 등 봉기군의 공격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탐문에 뛰어난 군졸 하나를 성 밖으로 내보내 정보를 입수케 한 결과, 피난민 가운데 봉기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12월 22일 운산 군수 한상묵과 개천군 염백관이 군사를 이끌고 영변으로 와서는 첩자가 있다는 정보를 다시 전해주었다. 부사 오연상은 정보가 분명하다고 판단, 가산과 박천에서 온 피난민들은 전부 성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런 가운데 내응자 색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은밀한 수사로 무려 19명의 내응자가 체포, 사형당하거나 옥에 갖히게 되었다. 숫적으로나 군장비 모두에서 열세인 봉기군의 작전은 언제나 내응자가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어 안과 밖에서 동시에 관군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응자가 거의 잡히는 바람에 영변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 암살미수 사건이 터져 후퇴하는 그 나흘이라는 시간동안 봉기군에게 불리한 일들만 벌어졌던 것이다. 반대로 관군은 군 기강을 바로 잡고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출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되었다. 영변의 내응 세력이 거의 색출되어 중요한 후방 기지로 점쳐놓았던 영변 탈환에 실패한 남진군은 관군을 등에 지고 안주성 공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남진군은 일단 박천에 주둔하면서 안주성 공략 작전을 면밀히 세우는 한편 태천을 공격하자고 결정하였다. 태천은 이미 담당 현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점령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진군의 일부 병력은 태천 남창에 별다른 저항없이 도착하여 곡식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25일 밤에는 읍안으로 들어갔다. 내응자인 좌수 김윤해와 변대익이라는 자들이 봉기군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남진군과 보조를 맞추어 24일 선천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곽산을 출발한 북진군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진 뒤에야 선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이미 봉기 소식에 접한 후 측근과 군졸 몇 명만 데리고 검산산성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여기서도 역시 최봉관, 유문제 등과 같은 내응자들이 봉기군의 입성을 맞이하였다. 김익순이 검산산성으로 숨었다는 것을 안 김사용은 아장을 그 성으로 보내 격서를 김익순에게 전달, 회유 협박하였다. 이에 김익순은 아장 편을 통해 항복문서를 보내왔다. 다음날인 25일에 김익순은 새끼로 목을 매고 항복하였다. 그는 곧 옥에 갇혔다. 이렇듯이 봉기군은 어디를 가나 그 성의 최고 책임자를 끝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거나 처형시키는 등 철저하게 점령군으로서 행세하려 하였다. 이것은 자신들이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라 성을 정복한 새로운 통치자라는 인상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일이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김사용은 김익순이 순순히 항복을 하자 옥에서 풀어주고 식량 등을 보내 회유한 뒤 전립과 군복을 입혀 마음대로 성을 출입케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봉기군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남진군은 태천과 박천을 완전히 점령지로 삼은 뒤에는 당초 목표였던 안주성 공략에 부심하고 있었다. 지도부도 개편하여 선봉장은 그대로 홍총각이 맡고 후군장이나 좌우익장 등은 소폭 새로 임명하였다. 성을 타고 넘을 운제를 만드는 등 공략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남진군은 28일에 출발하여 송림에 진을 쳤다. 이에 북진군은 같은 날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구성으로,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철산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구성으로 향한 부대는 황주 출신의 신덕관이 맡았고, 철산으로 쳐들어갈 부대는 김사용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철산에서는 이미 좌수 정대성 등 내응자들이 성을 점령하고 부사 이장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는 울면서 문서를 쓰고는 인부를 내어주었다. 이 항서와 인부를 정대성은 홍경래에게 바쳤다. 결국 북진군은 이곳에서도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뉘어진 봉기군은 거병한 지 약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서해안 일대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봉기군의 작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각지의 내응 세력들의 적극적인 가담이 주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내응 세력은 주로 좌수, 별감, 풍헌 등 향임과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 무임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서 평소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었다. 만일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이 없었다면 더 많은 내응 세력이 가담하여 짧은 시일 안에 평안도 일대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같이 봉기군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동안에 중앙정부는 뭘하고 있었을까. 중앙정부는 봉기가 일어난 날에 떠도는 소문으로만 봉기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12월 20일에야 평안병사 이해우의 급한 밀서를 받고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봤을 때 중앙정부는 난이 있고 난 이틀 후에야 비로소 객관적인 정보에 접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으로 공략이 늦춰진 안주성은 아직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일단 안심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가산, 박천, 정주 등 여러 지역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보고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부는 서북 지역의 명령 계통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우선 신홍주를 정주목사로 임명하는 등 지휘 계통을 정비하고 군대 파견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는 정경행이라는 인물을 곽산군수로 발령하였는데, 정경행은 봉기군의 내응자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부는 정확한 정보가 없어 작전에 애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겨우 하루 지나 신홍주를 다시 영변부사로 임명하는 등 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혼란을 빚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도 차츰 전열을 가다듬어 나갔다. 24일 긴급회의를 연 결과 금위영에 봉기군과 대적할 순무영을 설치,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이에 양서순무사에 이요헌을 임명하고 순조는 그에게 전시중 왕명을 대행할 수 있다는 상방검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 정비 과정에서도 중앙정부는 중간 참모들의 임명을 번복하는 등 대비책에 경황이 없었다. 그만큼 봉기군의 거병은 기습적인 것이었으며 치밀한 계획에 의해 발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중앙정부는 아직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임금의 친위 세력인 순무영의 군사를 출전시키기에 앞서 체면을 생각하여 일기군을 먼저 출정시켰다. 그런데 일기군의 간부인 좌별장 김처한이 죽기를 무릅쓰고 출정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어명을 어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김처한은 군문효수되었고 그 자리를 중군 박기풍으로 메꿨다. 이때가 이미 봉기군이 가산, 정주 등 주요 7개 지역을 점령한 27일 전후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은 순조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27일 전후하여 봉기군의 소식은 이미 서울 등 경기도나 황해도 일대에 쫙 퍼져 있었다. 봉기군이 곧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자 난을 피하기 위해 양반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가운데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만 갔다. 또한 중앙정부의 통치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적들이 부잣집을 터는 등 인심이 흉흉해졌다. 중앙정부의 우유부단한 조치에 안타까움을 느낀 일부 대신들은 이러한 내용을 담아 순조에게 상소하였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28일에 평안감사의 보고가 들어왔다. 평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의 방어진을 구축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보고서였다. 이에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의 중앙군을 급파하여 29일에는 개성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봉기군과 관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대접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평안감사의 보고서가 도착한 28일은 말그대로 폭풍전야였던 셈이다. 관군과 봉기군의 본격적인 접전은 29일에 있었던 송림전투로 그 불꽃을 당기게 되었다. 물론 안주 병영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봉기군 사이의 전투는 예상대로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벌어졌다.
송림, 곽산전투
관군은 첩자를 보내어 28일부터 송림에 머물고 있던 남진군의 병력과 동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관군의 병력 수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선제 공격을 하느냐였다. 관군 지도부는 봉기군의 성격상 곧 공격해올 것으로 판단하고 군대를 셋으로 편성하여 29일 아침 송림을 향하여 세 갈래 방향에서 진격하였다. 이에 관군의 동태를 파악한 남진군도 역시 3군으로 나뉘어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전투 초기에는 남진군이 월등하여 관군이 밀리는 형세였다. 평안병사 이해우는 백상루에 서서 중앙 주력부대가 밀리는 것을 보고 즉시 곽산 전군수에게 병사 천여 명을 주어 남진군의 후위를 치게 했다. 이른바 양동작전이었다. 이해우의 작전은 적중했다. 남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총각은 말머리를 돌려 후방 지원에 나섰다. 관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군의 좌영장 윤옥열은 도망치는 군사들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면서 전진하게 만들었다. 죽음 아니면 승리뿐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관군은 다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남진군을 공격하였다. 활과 총알이 난무하고 관군의 북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남진군의 기병 몇이 말에서 떨어지자 일반 병사들은 차츰 뒷걸음쳤다. 남진군의 1차 방어선이 무너져갔다. 곧 남진군은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승기를 잡은 관군은 도망가는 남진군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관군은 그 길로 봉기군의 주둔지인 송림까지 쳐들어갔다. 관군은 보이는 막사마다 불을 지르는 등 남진군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관군의 칼에 죽은 남진군의 시체가 수백 명에 달하였고 생포된 자는 그리 많지 않아 수십 명에 불과했다. 생포보다는 살육에 더 주안점을 둔 셈이었다. 관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본부에 해당하는 가산 다복동까지 진격하여 근거지를 불태워 버렸다. 관군들은 봉기군의 본부만이 아니라 민가에도 쳐들어가 불을 지르고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을 일삼았다. 추측컨대 관군 지휘부는 승기를 잡을 경우 남김없이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린 듯하다. 일개 군졸들이 함부로 민간인을 죽인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군은 초토화전술로 봉기군을 밀어부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토화전술은 '홍경래의 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관군들은 이후에도 계속 민가에까지 들어가 일반 백성들을 살육하게 되는데, 이런 대량 학살을 피해 농민들이 봉기군의 마지막 거점이 된 정주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송림전투에서 패한 남진군이 정주성으로 들어갈 때에도 일반 농민들은 식솔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도피해갔던 것이다. 송림전투의 패배는 봉기군으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진군은 관군의 정확한 병력을 파악하지 못한 채 평야 지대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비등한 수로 관군과 접전을 벌인 것도 물론이지만 한겨울에 활과 조총으로 무장한 관군을 은폐할 곳이 없는 평지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꼴이 된 셈이다. 처음에 홍총각의 진두 지휘로 승기를 잡을 뻔 하였지만 이해우의 양동작전으로 남진군은 걸어다니는 표적이 된 것이다. 둘째, 홍총각은 무리하게 정면 돌파만을 생각하였다. 남진군의 3군 대부분이 중앙 돌파에 동원되어 관군의 우익군과 접전을 벌여 결국은 좌익군을 소홀히 여겨 허를 찔린 것이다. 관군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정예군이다. 정예군은 언제든지 전술을 바꿀 수 있는 군사 지식을 갖추고 있다. 일정한 방향에서만 공격해오는 남진군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관군으로서는 수월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진군의 지도부는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없었다. 이른바 국지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홍총각은 나름대로는 전면 승부를 걸었던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이해우는 백상루에서 관군과 남진군 모두의 동태를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무만을 보는 자와 숲 전체를 조망하는 자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남진군이 송림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에 접한 북진군 지도부는 마지막으로 정주 이북 지역을 지켜야만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북진군의 김사용은 해가 바뀐 1812년 1월 1일 이후에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는 먼저 용천을 1차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용골산성을 먼저 공격해야만 했다. 용골산성은 예로부터 험준하고 쉽게 외침을 받지 않는 곳이어서 요충지로 유명하였다. 김사용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산성 맞은 편 산에 올라가 군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대의 수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는 등 위장 전술을 썼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군졸들의 부모 등 가족들을 동원하여 울면서 군졸들의 이름을 크게 부르게 하였다. 갑자기 용골산성 주변이 마치 집단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울음 소리로 가득했다. 그러자 성을 지키던 군졸들 대부분이 도망가고 이에 부사 권수도 사태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의주로 야밤 도주하였다. 김사용의 사면초가 전법이 먹힌 셈이다. 결국 북진군은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용천읍에 입성하게 되었다. 입성한 김사용은 남진군의 패배를 감안하여 더 많은 군사를 모을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부터 관군과 전면전을 하려면 막강한 군사력이 없이는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김사용은 우선 진사급에 해당하는 향반층들에게 군관첩을 주어 종사관으로 임명, 봉기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도록 포섭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지역 중간 실력자들이기 때문에 그 밑에 있는 이임이나 면임들을 동원하여 군사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봉기군 지도부는 하층 농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물론 일반 농민들의 의식이 아직 그런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향반층을 통하지 않고서는 군대를 키울 수 없을 만큼 봉기군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관군의 무자비한 학살에 반발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간 농민들이나 그 주변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항거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정주성전투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향반층들 역시 봉기군이 유리할 때에는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에 참여하지만 일단 불리한 정세가 되면 농민들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하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김사용은 향반층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문제점이 봉기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1월 8일 관군은 북진군이 정주의 남진군과 합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에게 이천여 명의 군사를 주어 곽산을 치게 하였다. 곽산에 주둔하고 있던 북진군 군수 박성신은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는 등 긴장을 풀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관군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관군은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기습 공격을 하였다. 북진군의 패배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곽산의 북진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은 도망치는 북진군사들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목을 베었다. 수백 명의 시체가 순식간에 산과 들에 즐비했다. 생포된 자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박성신은 혼비백산하여 선천으로 도망쳐 관군의 공격을 지도부에 알렸다. 이에 지도부는 북진군의 이제초에게 기병과 일반 군사 천여 명을 주어 곽산으로 급히 보냈다. 이번에는 사태가 거꾸로 되었다. 곽산에 주둔하던 봉기군을 꺾고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이영식 등의 관군은 이제초의 기습작전에 걸려 패주하고 말았다. 윤욱열의 관군이 곽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이제초의 부대가 점령한 뒤였다. 숨돌릴 틈도 없는 전투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다시 윤욱열의 부대가 봉기군이 전열을 수습하기 전에 사송야에서 선제 공격을 펼쳤다. 북진군은 얼마 싸워보지도 못하고 윤욱열의 과감한 공격에 밀려 도망을 쳤다. 다시 산과 들에는 봉기군의 시체가 수백 구 뒹굴기 시작했다. 결국 엎치락뒤치락 하던 곽산전투는 관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송림전투에 이은 봉기군의 두번째 대패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북진군의 주력부대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게다가 이제초마저 사로잡힌 뒤 처형당하여 봉기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도저히 회복할 길이 없었다. 잔류병들은 간신히 관군들의 감시를 뚫고 정주성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곽산전투 이후 봉기군은 패배를 거듭하였다. 용골산성은 물론이고 서림성 등도 곧 관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사태는 봉기군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있었다. 서림성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받은 김사용은 동림성에 머물고 있었다. 김사용은 멀지 않아 봉기군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정주성 뿐이었다. 김사용은 중대 결단을 내렸다. 그는 군사들을 모두 불러모아 모든 창고를 열어 갖고 갈 수 있는 양을 챙겨 가라고 하면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김사용은 군사들에게 정주성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에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야밤을 틈타 정주성으로 탈출하였다. 이로써 북진군도 거의 붕괴된 셈이다.
마지막 항전지, 정주성
정주성은 봉기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홍경래의 난'은 이 정주성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곽산전투가 있기 며칠 전부터 각지의 봉기군은 정주성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관군 지휘부는 각군에게 명령을 내려 정주성을 중심으로 진을 치도록 하였다. 관군이 정주성 주변에 모여들자 봉기군은 성밖 인가의 곡식을 모아들이는 한편 민가에 불을 질러 관군이 거점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농민들 대부분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봉기군은 청야전술을 펼친 것이다. 1월 5일 아침, 곽산군수 이영식은 2초(약 240명) 군사를 이끌고 정주성 서문 밖에 진을 치는 한편 4초(약 480명)를 2군으로 나누어 북문 밖에 매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동문과 남문 밖에도 다른 지휘관이 이끄는 군사들이 진을 쳤다. 정주성은 말그대로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성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성문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것을 폭파시키거나 태워버린다면 성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관건은 성문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있었다. 그래서 관군은 먼저 동문을 집중 공격하였다. 방패를 머리 위로 한 군사들이 성문을 태우려고 접근전을 펼쳤다. 성 위에서는 관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시환을 쏘아댔다. 관군은 더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군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도망쳤다. 비록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정주성에서 가진 첫 전투는 봉기군의 승리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성문을 공격하였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관군 내에는 적잖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추위가 심한 서북 지역에서 봉기군과 싸우느라 일반 군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장교들은 그래도 온돌방을 차지하고 잠을 잤지만 일개 병졸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 막사를 치고 칼잠을 자야만 했다. 계급 차별이 심해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투 대상이 외세도 아닌 같은 민족이다 보니 전투를 할수록 명분에 대한 자신감도 상실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불만을 일반 민가에 들어가 횡포를 부리며 풀었다. 군사들은 봉기군을 잡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아무 집에나 들어가 약탈을 일삼고 심지어는 반항하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살상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이를 말리는 상급자에게도 칼을 휘두르는 자도 생겨났다. 추위와 오랜 전투에 관군들은 난폭한 도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정주성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 성 주변 주민들이 성 안의 봉기군에게 적극 협조하게 된 것이다. 또한 농민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 이유가 관군들의 무자비한 살육을 피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관군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봉기군은 이러한 농민들로 인해 다시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정주성의 봉기군은 완전히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농민군이 되어 있었다. '홍경래의 난'을 농민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이것이다. 이 난의 성격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정주성전투는 1월 초에 시작하여 봉기군이 완전 섬멸당하는 4월 19일까지 거의 세 달 보름 동안 진행되었다. 하나의 성이, 그것도 정규군도 아닌 민간인으로 구성된 농민군이 이처럼 오래도록 버틴 것은 역사상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정주성전투의 과정을 모두 정리할 필요는 없다. 일진일퇴하는 전투의 연속이었기에 그 주요 고비만 소개해보기로 한다. 봉기군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3월 22일 전후였다. 이날 전투에서 봉기군은 포수까지 동원된 관군에 밀려 수십 명의 사망자와 90명에 가까운 인원이 관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 날 전투 후에 성 안에는 유가족들의 울음 소리가 성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게다가 성 안의 식량이 점차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우물이 여러 개 있어 물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수가 성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사방이 포위된 상태에서 식량을 보급하여 연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군사들에게 하루에 절미 한 되씩 주던 것을 절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고 소나 돼지 등 가축뿐만이 아니라 전투에 쓰는 말까지도 거의 잡아먹어 10여 필도 안 남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 주변을 대낮같이 밝게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충전시키던 횃불에 쓸 장작조차 모자라 집을 부수기도 하였다. 일반민들은 궁여지책으로 술을 만들어 팔거나 죽을 쑤어 군사들에게 파는 형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시 홍경래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침의 배신이었다. 이침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정주성에 봉기군이 입성할 때 내응자 역할을 하던 이 성에 사는 집사였다. 그런데 전세가 봉기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침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하여 관군에게 투항하기 위하여 서문 안에서 홍경래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이침과 연루된 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사태를 수습한 홍경래는 성내의 인구를 줄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백 명의 노인과 아녀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러한 조치는 암살미수 사건으로 뒤숭숭해진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내의 움직임을 감지한 관군은 봉기군이 매우 취약해져 있다고 판단하고 4월이 되면서 본격적인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봉기군도 다시 관군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더 많은 횃불을 밝히고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였다. 예상과는 달리 봉기군의 저항이 거세자 관군이 일단 후퇴한 뒤 성 주변에서 지대가 높은 곳을 골라 그 위에 흙을 쌓아 성 높이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관군의 양동작전이었다. 흙을 쌓기로 한 곳은 동북각이라는 곳이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반대편인 북장대 쪽 성 밑을 파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를 위해 관군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봉기군은 이러한 관군의 공격도 물리쳤다. 그러나 이것은 연막전술이었다. 관군은 이미 4월 3일 경부터 성 밑을 파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관군의 마지막 공략 작전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성벽 폭파 작전이었다. 성벽만 없다면 얼마 남지 않은 성내의 봉기군을 쳐부순다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보름 이상 땅을 판 관군은 드디어 18일 밤에 엄청난 양의 화약을 땅에 묻었다. 이때 동원된 인부들이 광산 노동자들이었다고 하니, 봉기군의 초기 구성원이 광산 노동자라는 것을 상기할 때 상반된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날이 밝았다. 4월 19일 새벽, 관군은 묻어둔 화약에 불을 당겼다.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북장대 쪽 성벽이 일시에 무너져 앉았다. 성루에 있던 봉기군들은 비명을 지르며 돌무더기 속으로 떨어져 압사하고 말았다. 성 한 쪽이 완전히 뚫린 셈이었다. 그 다음 과정은 뻔했다. 홍경래는 전투 중에 죽고 성안에 있던 체포된 대부분의 장정들은 4일 후인 23일에 처형당하였다. 그 수가 무려 1,917명이라고 한다.(그러나 이것은 당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더 많은 봉기군들이 살육당했다고 한다.)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던 홍총각도 체포된 뒤 처형됐으며, 우군칙, 이희저 등은 도주하여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811년 12월 18일에 시작된 홍경래의 난은 4개월 만에 대량 처형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홍경래난의 특성과 역사적 의의
한마디로 말해서 홍경래난은 저항지식인, 장사, 부농, 상인층, 향임층, 농민, 천민 등 각 계층이 모두 참여한 전쟁이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중간 계층이 형성되고, 이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발하여 농민들을 봉기군으로 결집시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분명 반란을 주도한 것은 소외된 양반들이나 상인, 향임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 계획이 가능했던 것은 계급 대립이 첨예화되고 봉건체제의 부패성과 모순이 폭발 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애의 반란'이나 미수로 끝난 '정여립의 반란'에서도 보았듯이 저항지식인들과 민중 사이에 사회적 모순에 대한 합의점을 찾게 될 경우 그것은 쉽게 봉기로 이어질 수 있다. 지식인 등 주도층은 민중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반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아직 자생적인 조직력을 갖기에 미흡한 농민들은 지식인층의 진보적 이념에 따라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홍경래난이 급속도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상호 보완성이 내재된 상태에서 사전에 짜놓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홍경래난이 지니고 있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중간 계층의 참여이다. 상인자본이 발달되어 있던 평안도 지방에는 대상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많은 부를 축적하면서 일면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는 부류들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서구에서 말하는 중산층 형성의 시초라고는 볼 수 없지만 봉건체제가 와해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신세력들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홍경래난은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는 데서 더 큰 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지역 차별에 대한 감정이 일면 작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많은 농민, 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정부적인 요소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질적 토대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형성됨으로써 고양된 사회의식을 갖게 된 지식인, 중간층의 이해와 맞아떨어져 모든 계층이 봉기에 참여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경래난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봉기 지휘부는 농민들을 모을 때 향임 등 그 지방 관속들에게 의존하였다. 역으로 말하면 아직 지도부가 봉건적인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 농민들을 직접 결집시킬 수 있는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당시 삼정 문란으로 피폐화된 농촌경제를 살리기 위한 토지개혁이나 제도개혁 등과 같은 반봉건적이고 선진적인 구호를 내걸어 '굶주린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체제 변혁을 목표로 거사를 추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 계층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직은 조직적인 반체제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변혁 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경래난은 이후에 일어난 민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3년에 제주도에서 민란이 발생하였으며, 1815년 경기도 용인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웅길은 홍경래난을 본받아 그 고을을 점령하고 교두보로 삼은 다음 서울을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816년 평안도 성천에서는 학상이라는 자가 거사하여 홍경래의 남은 부대라고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1826년 청주에서 김치규는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풍문을 퍼뜨리면서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홍경래난은 '민란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지식인층의 선동으로 참여했던 민중들은 이제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술년(1862년)에 일어난 전국전인 농민 반란이다. 이제 민중은 본격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ff 16.임술민란 : 전국으로 번진 반봉건 투쟁의 불길
19세기, 격동하는 조선사회 :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1862년(철종 13) 2월 4일 경상도 단성민란에서 시작하여 연말의 전라도 남해민란을 전후로 막을 내렸던 전국적인 농민 봉기를 흔히 임술민란이라고 부른다.('1862년 농민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19세기 조선사회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거의 매해마다 끊임없는 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하였다. 임술민란과 갑오농민전쟁 사이에도 갖가지 민란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농민 봉기의 절정이라고 한다면 1862년에 일어난 농민항쟁은 이를 위한 전초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농민들은 이제 스스로 주체가 되어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기 위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사회 변동에 대하여 우선 알아보기로 하자. 18세기부터 지속되어온 향촌 지배 강화 정책은 조선 후기에 들어 납속제 실시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 경제 생활의 변화로 인한 농민의 계층 분화와 양반의 몰락, 그리고 이에 따른 상공업의 발달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기존의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순조 즉위 이후 계속된 안동 김씨 등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전통사회의 기존 질서가 크게 변질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당쟁은 처음엔 이념을 달리한 당파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후기로 올수록 정권 탈취를 위한 유혈 투쟁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당쟁이 유혈로 끝을 맺곤 하였지만 그것은 당쟁이 극대화된 하나의 형태였을 뿐이지 당쟁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어차피 정치에는 다른 이념과 견해를 가진 집단들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이질적인 당파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정반합적인 논의와 경쟁을 한다면 정치 행태는 그만큼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처럼 일정한 약속과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정부가 아니라 자파의 실익을 중심으로 대의명분에 따라 흩어지고 모였으니 결국 힘의 우위에 있는 쪽이 상대방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폐를 막기 위해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써서 각 파의 인물들을 고루 등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세력이 있으니 바로 노론 벽파였다. 앞에 홍경래난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 김조순 등은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여 자기 종친과 가문의 욕구 충족에 최우선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정치는 없고 사리사욕에 물든 무리들이 왕실에 득세하게 되었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세도정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도정치 자체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임술민란'과 관련해서는, 그러한 파행적인 통치체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19세기 중엽까지의 세도정치는 바로 조선의 운명, 한국 역사의 향로를 크게 바꾸어 놓은 본질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 상대가 사라진 상태에서 일당독재는 온갖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내적으로는 새로운 질서와 체제를 원하는 민중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고, 밖으로는 이미 번성한 제국주의의 동태 파악 등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무능력한 정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성은 반동적 체제에 반기를 들기 마련이며 이러한 흐름 가운데 임술민란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중엽까지의 세도정치에 대한 이해는 역사 발전의 논리 차원에서 필수적이다. 세도정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통치 형태는 아니다. 세도정치 역시 나름대로 역사적 기원과 배경을 갖고 있다. 멀리는 숙종 때까지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영조와 정조 때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내용이 중복되지만, 세도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18세기까지의 정치사를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영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붕당 정치의 틀이 굳어진 조선 중기에는 이른바 사색당파라는 것이 생겨 실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숙종이 죽고 나자 경종과 연잉군(영조)을 둘러싸고 왕통을 누구를 통해 이을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는데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이 연잉군을 따르는 노론파를 일대 숙청하여 정권의 안정을 바랬다.(신임사화)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난 뒤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영조는 세자 시절에 신하들간의 당쟁이 왕권을 좌우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탕평책을 구체화시켰다. 그렇다고 붕당간의 정쟁이 멈추지는 않았다. 정치 관료들은 계속해서 당파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다. 영조의 즉위로 세력을 잡은 노론들은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고 이에 따라 소외되어온 남인들이나 소론 사람들의 등용이 그만큼 힘들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소론과 노론의 재대결이 불가피해졌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이인좌의 반란'이었다. 노론은 왕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세력권을 확장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암투를 벌였다. 특히 사도세자와의 갈등은 점점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비대해진 일부 노론 세력에 의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까지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영조는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놓고 파벌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세자를 따르는 이들이 시파이며 그 반대파가 벽파였다. 그러나 결론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는 것으로 나고 말았다. 이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어린 세손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벽파들의 끊임없는 탄압과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을 통해 벽파의 핵심 인물들을 처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확대하여 그때까지 거의 정계에서 소외되어온 남인 사람 등 신진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에 노론 벽파는 정조와 남인 세력 등 반대파를 향해 계속 논쟁을 걸어왔다. 이들의 주요 무기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당시 남인들 중에는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노론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회였다. 노론 벽파들은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몰아부치면서 반대파 제거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인들을 대상으로 교화정책을 썼으며 어떤 경우에는 직접 천주교인을 풀어주는 적도 있었다. 정조는 왕권 강화와 민생 복지를 위해 천주교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갑자기 등창이라는 병을 얻어 급사하고 말았다.(정조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사와 야사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최고의 정적이었던 정조가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정계는 노론 일색이 되었다. 이미 신유교난의 과정을 밟아 반대파를 제거한 노론들은 일당독재 체제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19세기 세도정치는 김조순으로 시작된다. 1802년 그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어 외척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이상이 세도정치의 등장 배경에 대해 간추린 내용이다. 그런데 세도정치가 단순히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나타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왕실은 후기로 오면서 당쟁에 휘말려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임금은 군사지휘권을 가장 믿을 수 있다고 본 외척에게 맡겼고 호위대장 같은 중책도 역시 외척의 몫이었다. 이것은 왕명에 따른 것으로 공식적인 관례로 굳어졌다. 이렇게 세도정치의 뿌리인 외척 세력은 임금의 후원과 뜻에 따라 중앙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세도정치의 출현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김조순의 등장이 가문의 세력이 확장된 탓도 있지만 왕권에 불안을 느낀 순조가 김조순을 신임함으로써 더욱 세도정치의 토대가 굳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세도정치가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세도가가 민생을 돌보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면 일당독재라고 해도 그리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들은 부와 출세에만 관심이 있어 외척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매관매직 등의 부조리가 만연되어 지방 관리까지도 부패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로 인해 국가 기강은 해이해져 군주체제마저 위협을 받게 되어 통치권의 부재 현상까지 나타났다. 결국 흔히 말하는 19세기의 삼정 문란, 즉 임술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지방 관리들의 탐학은 가히 무정부적인 상태에서 빚어진 부패 현상이었던 것이다.
'삼정 문란'은 그 폐해가 극에 달하여 지배체제 자체가 붕괴될 조짐이었다. 모든 부세를 지방의 수령, 이서, 향임 등에게 일임한 탓에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특히 돈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은 그 대가를 민중들에게 바라고 탐학을 일삼았다. 그래서 삼정을 통한 수탈의 극대화는 수령과 농민 사이에 적대 관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주와도 계급적인 대립을 하게 되었다. 역대 이래로 농민 수탈의 목적은 탐관오리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부과되는 세금은 곧바로 착취와 억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치면 농촌은 그야말로 초토화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철종대(임술민란이 일어난 1862년 다음 해에 철종은 죽었다.)에는 오랜 세도정치 탓에 왕권이 극히 약화되어 지방 행정에 대한 중앙 간섭이 너무나 미약하였다. 국가는 국가대로 재민 진휼 등을 위한 재정 지출이 증가하여 매년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농촌 피폐화의 가장 큰 원인은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지주들의 착취 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이상 생계를 지탱할 수 없는 농민은 유랑민으로 떠돌거나 빈민으로 전락하여 이에 항의하기 위해 무력 항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술민란을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란이라고도 부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을 위한 복지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환곡의 문란과 관리의 토색질 등이 가장 농민들을 괴롭히는 부조리였다. 원래 환곡(환정)은 고려 때 시행된 흑창나 의창 비슷한 기능을 가진 제도였다. 즉, 환정은 보릿고개라고도 부르는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식량과 종자를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여 기본적인 식량 문제와 농업 재생산성을 제고하는 한편 묵은 곡식인 군자곡을 새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일석이조의 구빈 제도였다. 그러나 근세에 가까이 올수록 환곡은 재정 강화의 수단으로 바뀌어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고 난 뒤 환곡을 요구하는 농민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중앙정부는 이것을 궁핍해진 재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갚아야 할 곡식의 양을 세 배 이상으로 늘려나갔다. 이렇게 되자 지방 관리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기 시작하여 18세기 말엽에는 여러 형태의 환곡 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관리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위해 강제로 원곡을 떠맡기는 경우까지 생겼다.(이를 억배라고 부른다.) 가령 예를 들자면, 임술민란이 있기 직전 지방 관리들은 원곡조차 갚기 힘들 만한 양을 강제로 빌려주고 이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심지어는 원곡에 모래나 쭉정이, 겨를 섞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외지에서 헐값으로 미곡을 사들여 이를 농민들에게 강제로 빌려주고 엄청난 이자를 부여해 고가로 징수함으로써 수확의 대부분이 관리의 손에 들어가고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원곡의 양을 속이거나 전량을 전부 억배하여 여기서 생기는 이익을 챙겼다. 원래 환곡은 저장되어 있는 전체 원곡의 절반만 할 수 있었다. 전정은 토지로부터 받는 각종 세금을 말한다. 원래 전정은 1결마다 전세가 4두, 대동미가 12두, 균역법 실시 이후에 받게 된 결작의 양이 2두, 여기에 훈련도감 소속 삼수병의 급료 지급을 위한 삼수미 1두 2승 등 모두 합쳐봐야 20두 정도였다. 이 양은 일반적으로 수확량의 10분의 1이 되지 않는 적은 것이었다. 그런데 수령과 향리들은 여기에다가 인정미, 선가미, 민군미 등 40여 가지가 넘는 갖가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하여 1결당 징수하는 양이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100이 넘어갔다. 관리들의 착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는 놀고 있는 땅에도 세를 부과하거나 도결(지방관리가 공전이나 군포를 사취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결세를 정액 이상 받아내는 것)을 통하여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갖가지 방법으로 세를 거두어가니 농민들은 부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초근목피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가거나 고향을 버리게 되었다. 군정이라는 것은 16세에서 60세에 해당되는 남자들에게 군포 1필을 징수하는 제도를 말한다. 18세기 말에 시행된 균역법 이전에는 2필이었다. 군포 1필은 쌀 6두에 해당된다. 그러나 실제로 따지고 보면 군역이 면제된 양반의 몫까지 나머지 농민들이 이를 부담해야만 했다. 국가는 재정 강화 일환책으로 지역마다 일정한 군포액을 할당해주어 관아에서는 이를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부여하고(백골징포) 젖먹이 아이에게도 책임량을 할당하였으며(황구첨정), 심지어는 나이까지 바꾸어 60세 이상의 남자에게도 부과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이런 탐학에 시달려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면 그 해당량을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였다. 이런 연유로 자산을 모은 일부 농민들은 돈을 주고 양반을 사서 군정의 폐해를 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양반의 수가 급증한 이유 중 하나이다. 결국 소작농 등 빈농들만 관리들의 집중적인 착취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농민들을 착취한 것은 관리들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토호들은 향촌민들을 무단적으로 토색하거나 심지어는 관청과 협작하여 부세 운영에 관여하면서 농민들을 사적으로 수탈하였다. 1862년에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의 원인이 수령, 이서의 탐학뿐만 아니라 토호들의 사적 착취에도 있었다. 물론 토호들 중에는 민란을 주동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수령과 개인적 마찰을 일으켜 농민들을 강제로 모아 저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로 민란은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 토호들은 대체로 과거를 등진 명문거족의 후예들이기도 했지만, 이중에는 평민이나 이서층이 경제적 성장을 토대로 호족적인 세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토호가 된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토호들은 당연히 대표적인 기득권층이 되었고 이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향촌민들을 착취함으로써 수령이나 향리와 버금가는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 수령 등 지방관들의 탐학과 이서 등 중간 관리들의 농간, 그리고 토호의 토색질이 횡행하여 이 틈바구니에서 농민들과 일부 부민요호들은 착취 대상으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민중적 자치기구 향회 : 임술민란의 조직 기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술민란의 도화선은 삼정 문란, 즉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토호들의 토색질에 있다. 특히 지방관과 이서층의 탐학과 농간이 매우 심하였다. 단성에서 시작하여 남해민란까지의 반란 동기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임술민란의 원인을 지속적인 관리들의 탐학에서 찾는다고 봤을 때 언뜻 보면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기 쉽다. 고려시대 이래로 계속된 농민 반란의 양태 가운데 우발적으로 일어난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임술민란이 일어나기 전후의 농민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단순히 감정에 의존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조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적인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향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향회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1862년 일년 내내 전국적인 봉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향회는 원래 조선시대 양반들의 지방 지배기구로 설치되었다. 즉 향회는 관청의 보조기구로서 지방사회의 교화에 앞장서면서 수령들과 이서들의 통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유교에 입각한 신분 질서를 안정시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통치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주로 향안이라는 양반이나 재지사족들의 명단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 구성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들을 향원이라고 불렀다. 설치 당시에도 지역에 따라 그 특성이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향회에서는 향임 선출과 사족간의 단결, 이서층의 임면 등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지방 양반들은 향회를 통해 사족의 공동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수령을 견제하면서 이서층을 통제하였다. 다시 말해서 향약은 지방 사족들의 군 통제 기관이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중앙의 통제가 부정적일 경우에는 향회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방 발전에 기여한 점도 있다. 그러나 향회는 어디까지나 신분을 전제로 한 기득권층의 주도 모임이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의 의견은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서 사민 체제의 와해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양반 계층에 분화 현상이 일어나 일반 민중들의 몫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회는 사족 중심에서 이향층으로 옮겨 가게 되어 이서의 임면도 이서층 자신들이 결정하게 되었고 향임은 수령이 임면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향층의 정체가 무엇이냐이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여 자영농으로서 부농층이 되는 자들도 생겨났으며 또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양인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사거나 신분이 상승되어 사족을 대신하여 지방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출신이 일반 양인이거나 천민이었기 때문에 중앙에 진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만큼 민중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들을 당시 요호부민층이라고 불렀다. 19세기에 들어 수령들의 탐학이 본격화되면서 향회는 수령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성장하게 된다. 이전의 향회는 대체로 수령들의 들러리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삼정의 문란은 단순히 일반 농민 계층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고 일부 요호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요호의 성격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임술민란에는 일부 요호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령들이 재력이 있는 자가 있으면 향임을 강제로 떠맡기고 이에 대한 대가로 거액을 요구하는 등 토색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휼을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곡식을 착취해가 요호들은 중앙의 통치체제에 깊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수령들은 원만한 부세 수취를 위해 향회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일반 평민들의 참여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향회는 수령들이 제시하는 수취에 관한 안건을 의논, 결정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정 사항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중 중심의 지방자치기구로 자리잡아 나갔다.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지방민들은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이들이 파견한 수령들에 대해 심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각성을 하였고, 향회는 이러한 '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지방의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이상 민중은 수탈 대상이 아니라는 자각하에 무너져가는 봉건적 지배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뜻에서 향회의 모임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방별로 향회의 활동이 활발해진 이유는 대대로 내려오는 계나 두레, 품앗이 등 공동체 사상이 농촌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향회를 중심으로 대동 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수동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수령들의 실정을 비판하고 착취의 부당성을 관청에 항의하는 등 대등한 입장에서 향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수령들은 이러한 향회의 능동적인 대처에 불만을 가졌다. 악질적인 관리들은 이마저 부정하고 계속 탐학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향회는 부당한 안건이 생기면 통문을 돌리고 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토의하여 의견을 결집한 다음 수령에게 소를 내고 그래도 안되면 감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즉 향회는 일단 사안의 부당성이 나타나면 적법적인 절차에 따라 항의하는 형식을 밟아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임술민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에서 임술민란이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향회의 선진적인 활동은 임술민란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즉 민중들은 무조건 무력으로만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령들의 탐학을 견제하려는 노력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향회의 근대적인 성격이 갖는 의미는 이렇다. 우선 19세기 민중들은 빈번히 소장을 제시할 정도로 권리 의식이 상당 수준까지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합법적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나중에 볼 갑오농민전쟁의 폭발지인 고부의 농민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는 실례이다. 따라서 향회는 근대적인 의미의 지방자치기구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 봉건 질서가 와해되어가는 속에서 민중들은 불안한 조선사회에 향회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들의 개혁 의지를 수령들이 모두 받아들일 리는 만무였다. 요호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합법적인 항의의 한계를 느끼고 드디어 무력으로 신질서를 세우기 위해 봉기를 계획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임술민란은 일정한 조직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70여 회에 걸친 민란 모두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임술민란이 합법적인 저항을 거친 후에 일어난 불가피한 봉기였다는 점이다.
임술민란의 전체 개요 : 전국으로 퍼진 반봉건 투쟁의 불길
1862년 2월 4일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다음 해 초까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지방과 황해도, 함경도, 경기도 광주와 제주도로 이어졌다. 중요 항쟁 횟수만 따져봐도 무려 72차에 걸쳐 일어났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기준으로 파악한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 숫자보다 더 많은 민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농민항쟁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먼저 합법적인 방법으로 부세의 부당성을 알린 다음 그것이 불가능해질 때 무력 봉기로서 의사 표시를 하여 관청을 점령, 해당 관리들에게 삼정 문란에 대해 심문한 뒤 쫓아내고 이서 등을 처단한 다음 제도적 개혁을 보장받은 뒤에 해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지역 농민봉기는 한번 발생하면 2-7일간 계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성주, 상부, 거창, 창원 등에서는 두 차례,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봉기가 이루어진 곳도 있었다. 또 항쟁이 3-5월의 춘궁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동기가 그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달만 해도 전라도 고산과 부안,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등 20여 개 지역 이상에서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또한 각 지역별 항쟁 지도부를 보면, 단성, 인동, 장흥은 전관료, 개령은 반민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농민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항쟁에 참여한 숫자는 진주, 성주, 제주도가 수만 명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대체로 수천 명이었다고 하니 대규모 운동임에 틀림없다. 봉기한 농민들의 요구 조건은 한결같이 지배계층의 경제적 수탈, 즉 도결이나 통환같은 환곡의 폐단은 물론이고 삼정 혁파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항쟁을 주도하는 동안에 처벌 대상으로 삼은 대상은 탐학을 일삼는 지방 관리와 특권을 누리는 양반, 관리와 협작하여 토색질하던 토호들, 그리고 심지어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부당한 거래를 해온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이었다. 시위대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주변에서 농민들을 결집시킨 다음 시위를 하면서 중앙으로 나아가 관아를 습격, 파괴하고 그 삼정에 관련된 문부를 불태웠으며 곡식 창고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시위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증해주는 행동 양상이다. 또 이서나 양반, 토호의 집을 때려부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았으며, 혹은 인신과 병부를 탈취하여 감옥을 깨고 죄수를 풀어준 지역도 있었다. 그 가해 상황을 종합해보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던 이서들이 수십 명 살해되었고, 부상자는 수백 명이고 가옥이 불타거나 약탈당한 수는 1,000호가 넘으며 피해 액수는 100만 냥 이상이었다고 한다. 항쟁의 형태가 홍경래의 반란처럼 정규군과 같은 무장 봉기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긴급 대책으로 안핵사와 선무사를 급파하여 민란의 진상을 조사하고 사태를 수습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안핵사를 파견한 곳은 진주에 부호군 박규수, 개령에 안동부사 윤태경, 제주도에 부호군 이건필, 익산에 부호군 이정현, 함흥에 행호군 이삼현 등이고 나머지는 그 도의 관찰사에 지시하여 민란의 원인과 진행 과정, 그리고 주동자 색출과 함께 수습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앙정부는 이삼현을 영남선무사, 조구하를 호남선무사로 임명하여 현지로 내려보내 안핵사와 함께 사후 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상 조사 끝에 주동자에 대해 처벌한 내용을 살펴보면, 농민군 가운데 효수 35명, 정배 57명, 기타가 70여 명이었다. 한편 항쟁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은 그 책임을 물어 파직되거나 유배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5월 들어 항쟁이 더욱 극성을 부리자 중앙정부에서는 박규수의 개혁안이나 기타 관료들의 강력한 건의를 참작하여 민란에 대한 근본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철종은 특명을 내려 정원용, 김흥근 등 고위급 관료들로 구성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 25일부터 윤8월 19일까지 4개월 동안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개혁안의 골자는, 분급과 이자의 수취를 통하여 재정을 조달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부족한 재정을 토지 1결에 2냥씩을 부과하여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정이나 전정이 부분적으로만 개정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일보한 내용이었다. 이것을 파환귀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뒤인 10월 29일에는 이러한 새 정책을 정지시키고 다시 옛 삼정제도로 되돌아감에 따라 사회개혁 추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경상도 창원, 황해도 황주, 충정도 청안 등지에서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근본적인 치유 없이 임시 대책으로 마무리된 대농민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어 고종 때에도 매년 산발적인 민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70여 개 지역 이상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모두를 다룰 수는 없다. 오히려 이중에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1862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란의 원인과 진행 과정, 역사적 의의와 한계점 등을 밝혀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던 진주농민항쟁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임술민란의 성격과 의의를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진주농민항쟁 : 1862년 농민항쟁의 도화선
진주농민항쟁은 합법적인 부세제도 개혁 요구, 도결과 통환에 대한 무력 봉기, 그리고 해산의 순서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전형적인 임술민란이었다. 진주 일대 지역적 특색에 대해 <택리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네 고을 풍경이 합쳐져서 영강이 되고 진주읍 남쪽을 돌아 낙동강에 들어간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땅이 기름지고 또 강과 산의 경개가 있으므로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며, 제택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하여, 비록 벼슬은 못했으나 한유하는 공자라는 명칭이 있다.
즉, 진주는 일찌기 농업이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곡식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만큼 19세기에 들어 탐관들과 지주들의 수탈이 극성을 부릴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는 것을 또한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방 수령.지주들과 농민 사이에 자주 대립 현상이 빚어진 것도 진주가 갖고 있는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주 농민들의 평화적인 요구는 이미 185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 6월에 진주 농민들은 바쁜 일손을 놓고 단체로 서울로 올라와 비변사에 결렴(토지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의 부당성을 개혁해 달라는 내용의 소장을 제출하였다. 이미 1840년대부터 환곡에 의한 부조리는 극에 달하였다. 이때 환곡이 대부분 분실되어 읍의 재정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관리들의 횡령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에 진주목에서는 1855년부터 분실된 환곡을 채우기 위해 농지에 일정한 세를 부과하여 징수하였는데 농민들이 비변사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1855년부터 1859년까지 약 4년 동안 이미 183,900냥을 수탈당하였다고 농민들은 주장하였다.(정부의 기록에는 125,008냥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든지간에 서울까지 올라가 항의할 정도로 수탈이 매우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환곡의 폐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령의 입장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실된 환곡을 보충해야만 했다. 진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61년 겨울에 홍병원이 부임해 오면서 분실된 환곡을 조사하여 횡령의 장본인인 서리들을 처벌하는 한편 기존 방식대로 부족분을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횡령을 주도한 인물은 전직 수령들이었다. 1862년에 이르러 진주목의 환곡 4만여 석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도결과 통환이다. 이때가 1861년 12월이었다. 도결이란, 토지에 세를 부과하는 것을 말하며 결렴과 유사한 용어다. 통환이란, 세금을 통호에 강제적으로 부과한다는 뜻이다. 이때 부과된 양이, 도결의 경우 10만여 냥이고 통환은 6만여 냥이었다. 도결은 홍병원이 향회의 지도자들을 회유 협박하여 결정되었고, 백낙신은 도결이 결정되자 이를 모방하여 덩달아 통환을 강제로 실행했던 것이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목사 홍병원보다는 백낙신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진주항쟁의 직접적인 동기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착취에서 찾고 있다. 그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861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조사한 결과, 백낙신은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무려 쌀 1만 5천 석(돈으로 환산하며 거의 5만냥에 육박한다.)을 수탈하는 등 6개 조목에 걸쳐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횡령을 하고도 분실된 환곡의 양을 채우기 위하여 도결로도 모자라 통환까지 실시, 일시에 분납, 상납하라고 다그쳤다. 백낙신은 세도정치 당시 성행한 탐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그는 이미 전라좌수사로 있으면서 부정 때문에 처벌당한 일이 있었다.) 도결과 통환이 동시에 부과되자, 환곡을 비롯하여 각종 조세의 부당한 징수,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려 이미 파탄지경에 이른 농민들은 극도로 격분하여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농민들이 바로 무력 봉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861년 12월 도결이 결정되자 진주목과 경상감영을 찾아가 이의를 제기하고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평화적 요구는 묵살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백낙신이 조작한 통환이 실행되자 농민들은 더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제도 개혁을 이룰 수 없음을 간파하고 무력 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수십 년간 쌓인 원한이 일시에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항쟁의 진행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것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곡동에 유계춘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비변사에 소장을 내는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세의 부당성을 항의하는 농민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결과 통환이 강제로 실시되자 기존의 합법적인 방식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무력 항의를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신분은 원래 양반이었지만 가문이 몰락하여 한 뙈기의 땅도 갖지 못한 농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주거지도 불안하여 진주항쟁이 일어나기 10여 년전에 진주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양반 집에서 태어났지만 농업에 종사하면서 점차 사회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계열은 진주 지역의 사족이자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적이 있는 이명윤의 6촌이었다. 따라서 신분상으로는 이계춘과 마찬가지로 양반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는 초군 (산에 오르면 땔감 나무를 줏고 논에 나가면 농사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빈농들을 말한다.)의 일원이었는데, 비교적 나이가 많고 통솔력이 있어 우두머리에 속하는 좌상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초군을 이끌면서 빈농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유계춘과 모의 때 이를 항쟁에 반영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좌상으로서 초군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밖에 김수만은 장교 출신이었으며 이귀재는 의령에 살다 고향을 떠나 진주까지 흘러들어온 유망 농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계춘, 이계열, 김수만, 이귀재 등이 주동이 되어 항쟁 계획을 짜나갔던 것이다. 이들은 본격적인 모의에 들어가기 전에도 비공식적으로 만나 도결과 통환의 부당성에 대해 토론하였을 것이다. 서로 의견 접근을 보면서 박수익의 외방객실, 사노 검동의 집, 그리고 박숙연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본격적인 항쟁 계획을 세워나갔다. 우선 기존에 해왔던 대로 먼저 민의를 수렴할 필요성을 느낀 주동자들은 통문을 돌려 향회를 열자고 결정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1862년 1월 29일 통문을 돌려 도결과 통환을 철회시키기 위해 2월 6일 수곡장시에서 집회를 갖자고 촉구하였다. 1월 30일에는 산기촌에 사는 검동의 집에서 모여 수곡집회 운영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자리에는 중앙관직을 지낸 바 있는 사족 이명윤도 참가하였다. 이렇게 도결과 통환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노비에서 양반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해체되어가는 신분제의 한 단면이다. 이 즈음에 가서리의 정원팔과 청암의 강천녀 등은 유계춘에게 같이 시위에 동참하자고 편지를 보냈지만 유계춘은 이를 거절하였다. 할수없이 가서리 농민들은 읍으로 들어가 집단 등소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한 것은 뻔한 결과였다. 이러한 점을 유계춘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별도의 계획을 벌써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태였다. 2월 2일, 박숙연의 집에서 다시 주동 인물들이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유계춘은 이날 새벽에 이명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철시를 하자는 주장이 담긴 한글 통문을 읍내에 붙였다. 이는 한문을 잘 모르는 소상인이나 일반 농민들을 위함이었다. 철시는 바로 집단 봉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에 이명윤의 유계춘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유계춘이 다시 쓴 통문을 보고는 크게 놀라며 그에게 소리쳤다. "이것이 무슨 짓이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이오. 나중에 크게 화를 당하게 될테니 빨리 불태우시오. 그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해괴한 짓은 아예 하지 마시오." 그러자 유계춘은 자신의 뜻을 전혀 꺾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이미 사람을 보내서 읍의 장시에 걸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읍의 장날입니다. 읍내 사람들은 모두 볼 것입니다. 또한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고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인데 교리 어른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이처럼 엄하게 꾸짖습니까?" 이명윤은 유계춘과는 달리 가급적이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 내에서 도결과 통환의 철폐를 주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계춘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러한 방법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정면 대응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온건과 변혁의 차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명윤이 유계춘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는 내가 잠깐이라도 앉아 있을 곳이 못 되는구만." 이렇게 화를 내며 이명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그러나 이명윤은 완전히 농민들과 관계를 끊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보기로 하자. 어쨌든 모임의 방향을 결정한 유계춘 등은 통문을 여러 장 베껴 쓴 뒤 이것을 읍내 곳곳에 추가로 붙이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초군 좌상인 이계열은 초군을 결집시키기 위해 유계춘에게 한글 가사체로 된 회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초군들은 평소 집단으로 모여다녔기 때문에 자체 조직을 갖추고 있어서 동원하기가 매우 수월하였다. 게다가 이계열이 좌상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글로써 이들의 항쟁 의식을 고취시킨다면 더 많은 초군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유계춘 등은 보다 많은 농민들이 참여할수록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판단한 끝에 인력 동원과 행동 계획까지도 면밀하게 세워나갔던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관청에서는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단지 관에서는 처음 붙인 집회 공고 통문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2월 4일 단성에서 민란이 먼저 발생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유계춘 등은 인력 동원에 주력하면서 집회 준비를 빈틈없이 해나갔다. 2월 6일, 예정대로 수곡장시에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주로 각 고을에서 뽑은 30여 명의 대표자들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농민들은 이들을 둘러선 채 회의 진행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이대로 도결과 통환이 강제적으로 실행된다면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다는 점에 공동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처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먼저 경상감영에 직접 호소하자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이와 반면 유계춘은 읍에 들어가 관청 앞에서 직접 시위를 벌이자고 하였다. 온건책과 강경책의 대립이었다. 대표자들은 대체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항의하자는 데 찬동하였다. 이는 주로 요호부민들이나 향촌 지배층들의 주장이었다. 이는 계급적 입장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유계춘은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며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지금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은 후에야 읍폐를 고칠 수 있소. 내가 당장 개를 잡아서 맹세하고자 하니 여러분들도 각기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하겠소?" 그러나 다른 대표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유계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히 통문 한 장만 낭비했구료. 이 따위로 해서 어떻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소."짧게 말을 마친 유계춘은 집회장을 빠져나갔다. 뜻을 같이 하던 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수곡집회에서는 결국 온건책으로 결정났다. 이에 의송을 보내기 위해 강화영, 장진기 등을 장두로 뽑아 경상감영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2월 7일 유계춘이 병영에 연금되고 말았다. 통문이 붙고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집회를 여는 등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이를 사전에 무마하기 위하여 유계춘을 주동자로 지목하여 잡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병영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를 고문으로 다스리거나 죄인 취급하지는 않았다. 유계춘만 잡고 있으면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계춘이 잡힌 지 며칠 뒤에 무력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계춘이 체포된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다. 이 봉기는 이미 유계춘 등이 사전에 계획해놓은 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2월 4일에 일어난 단성농민항쟁의 영향도 매우 컸을 것이다. 수곡집회의 결정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은 주로 초군을 중심으로 한 빈농들이었다. 이들은 수청가라는 곳에서 따로 모임을 갖고 무력 봉기하자고 결정하였다. 어쩌면 유계춘 이계열 등은 수곡집회의 결정이 온건책으로 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모임을 따로 가질 것을 계획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일반 농민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조직력을 갖고 있던 초군을 움직인다면 무력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전에 초군 회문을 돌릴 때부터 벌써 무력 봉기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농민 결집이 가능했던 것은 요호부민층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호들 모두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요호들 사이에도 관청과 결탁하여 토색질을 일삼는 부류도 있었다. 즉 요호도 진보적인 부류와 보수적인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항쟁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은 요호들의 집을 불사르기도 하는데 이때 대상이 된 부류는 평소 착취를 일삼던 부류들이었다. 고을의 지도층들이 대거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인원 동원이 한결 수월하였고, 이것은 계급적 입장을 떠나 농민이나 요호 모두 같은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도결과 통환를 철폐시켜야 한다는 데 공동 인식한 결과였다. 진무청에 연금되어 있던 유계춘은 2월 13일 제사를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인 2월 14일에 철시 운동을 시작으로 무력 봉기가 일어났다. 아마 관청에서는 무력 봉기의 가능성을 거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온건파가 항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 분담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곡집회에서 결정난 대로 2월 7일에 장두들은 병영을 찾아가 소장을 제출하였다. 물론 관에서는 즉각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관에서는 무력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전처럼 이렇게 항의하다가 제 풀에 꺾일 것이라고 방심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2월 14일부터 유계춘, 이계열 등이 주동이 되어 무력 시위가 진행되었다. 축곡의 서쪽에 위치한 마동, 원동의 농민들이 먼저 수곡시장을 습격하여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백곡 등의 농민들은 삼장, 시천 등의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다시 연합하여 마침내 덕산시장을 점령하였다. 덕산에서는 도결 결정에 동조한 훈장 이윤서의 집을 불살라버렸다. 이는 도결과 통환에 대해 반대한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병영에서는 도결을 실행할 때 훈장 등 마을 유지들을 동원하였는데 이윤서 역시 이러한 일에 앞장서서 농민들을 착취했던 것이다. 초군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형성되자, 농민들은 거리로 나와 이들을 대환영하면서 식사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오랫동안 쌓인 원한을 풀 수 있다는 기대감에 농민들은 시위대를 적극 지지하였다. 덕산시장에 결집한 시위대는 덕천강을 따라 진주읍을 향해 행진, 18일에는 진주읍 외각에 도달하였다. 농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고 무력 항쟁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경상감영에서는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17일에 전령을 읍내 각지에 보내 통환을 금하고 이전처럼 결부에 따른 환곡 분배를 실시할 것이니 농민들은 각 동리로 돌아가라고 당부하였다. 당시 감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된 상태에서 농민들의 원성을 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원래 계획에는 역할 분담이 논의되지 않았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온건파와 강경파의 각자 행동이 결국 양동적인 구실을 하여 주도권을 농민들이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농민들은 뒤늦은 감사의 조치에 쉽게 응할 리가 없었다. 이럴수록 시위대의 사기는 높아만 갔다. 2월 18일 오전에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손에 몽둥이를 든 농민 수천 명이 진주읍과 진주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는 "도결과 통환을 혁파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진주목사 홍병원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다. 자칫 시위대와 무력으로 충돌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주 전지역으로 번져나갈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이명윤을 통해 회유하여 일단 시위대를 해산시켜야 겠다고 하였다. 또한 이명윤이 농민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이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이미 이명윤은 배후조종자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홍병원은 이명윤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 농민들을 설득해서 해산시켜 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편지를 받은 이명윤은 서둘러 읍내로 들어갔다. 그는 목사를 만나 그의 요구를 확인하고 시위대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이명윤의 말을 듣고 도결과 통환을 철폐시킨다는 완문(일종의 최종 결재 서류, 또는 각서)을 내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벌써 수차례 속은 경험이 있는 농민들이기 때문에 관청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기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를 갖고 다시 목사를 만난 이명윤은 그대로 전달하였다. 목사는 할수없이 완문을 써서 이명윤에게 건네주었고 이명윤은 이것을 시위대에게 갖다주었다. 완문을 본 시위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일단 농민들의 승리였다. 이명윤을 칭송하면서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항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중간 관리자들의 착취가 계속되는 한 도결과 통환이 철폐된다 해도 이전과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고 보고 대열을 수습한 뒤 유계춘이 지었다는 노래를 합창하며 진주읍으로 진격하였다. 그 도중에 시위대는 진주목의 이방이나 호방 등 평소 착취를 일삼던 관리들이나 토색질을 일삼던 보수적 요호들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이뿐 아니라 이서 등 하급 관리는 물론이고 부당한 방법으로 물건을 팔아 이득을 챙겨온 개성상인, 수금하러 내려온 고리대금업자 등 농민들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이면 가차없이 그 집을 부수고 재물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경상병영의 통환 철폐도 요구하였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시위대는 2월 19일 아침 진주목 객사 앞에서 환곡 문란에 대한 해명과 병영 통환 철폐를 요구하는 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이미 시위대의 숫자는 수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진주 전체 인구를 봤을 때 이 숫자는 대단한 것이었다. 눈덩이처럼 사태가 악화되자 병마사 백낙신은 자기의 권세를 믿고 자진하여 농민들 앞에 나섰다. 물론 가급적이면 회유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뒤에 주동자들을 처벌할 계획을 갖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탐관 백낙신이 나서자 농민들은 쌓였던 불만을 일시에 터뜨렸다. 사방에서 그를 욕하는 소리가 난무하였다. 그러자 백낙신은 중영 소속 서리로서 횡령 등 탐학을 일삼던 김희순을 지목하여 앞으로 끌어내 곤장을 쳐서 죽였다. 그는 백낙신 대신 재물이 된 것이다. 그래도 시위대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병영 통환을 계속 요구하자 서둘러 완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의 원망은 이미 백낙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시위대는 환곡을 포함한 삼정 전체의 문란에 대해 백낙신을 추궁하였다. 그러면서 시위대는 병영 이방 권준범과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이에 진주 이방 김윤두는 도주하고 말았다. 그 역시 평소 농민들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시위대는 백낙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위압적인 자세로 그의 탐학과 서리들의 부정 행위를 추궁하였다. 그는 일부나마 자기가 저지른 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 되어도 시위대가 풀어주지 않아 백낙신은 길가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날이 밝아 2월 20일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도망간 서리들을 잡기 위해 추적하는 한편, 진주목사 홍병원이 있는 본부로 향하였다. 그는 농민대회에 출장할 것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리들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시위대는 그의 방안에까지 뛰어들어가 농민들 앞에 설 것을 강요하였다. 목사는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할수없이 방을 나와 가마를 타고 농민들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이미 완문을 쓴 뒤이기 때문에 백낙신과 함께 삼정 문란과 서리들의 죄에 대해 추궁을 받은 후 다시 가마를 타고 본부로 돌아갔고 백낙신도 역시 시위대의 손에서 풀려났다. 한편, 이날 시위대는 추격 끝에 이방 김윤두를 잡아 죽였다. 목사와 병마사를 풀어준 시위대는 여러 조로 편성되어 각지의 공격 목표를 설정하고 이후 다시 진주성으로 회군할 것을 결정하고는 오후에 인근 각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때를 고비로 초기부터 항쟁에 참여하였던 진보적 요호들은 대체로 탈락하고 순전히 농민들이 항쟁을 주도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주로 서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에서 결집하였기 때문에 20일 이후에는 주로 남쪽과 동쪽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각지에 진출한 시위대는 농민들을 착취해온 토호, 양반, 보수적 요호들을 대상으로 그동안 쌓인 원성을 터뜨렸다. 이렇게 진주 지역 일대를 모두 장악한 시위대는 1)지역 최고책임자의 죄를 추궁하여 완문을 받아내고 2)착취를 일삼던 중하직 관리나 토호, 보수적 요호들을 처벌하는 성과를 이루고 2월 23일에 자진 해산하였다. 2월 1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약 열흘간 진행된 진주농민항쟁은 일단 여기서 막을 내렸다. 이 기간 동안만도 진주읍의 가옥 파괴가 70호, 22개 면의 가옥 파괴가 56호로 모두 126의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하니 항쟁이 얼마나 격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셈이다. 항쟁이 종식된 후 중앙정부는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을 안핵사로 내려보내 사건의 진말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할 것을 명하였다. 박규수를 보내는 자리에서 철종은 가급적이면 농민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고, 민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소상히 알아내어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진주에 내려온 박규수는 진상 조사 끝에 민란의 원인이 지방 관리들의 탐학에 있다고 보고 삼정 문란을 혁파하고 제도를 개선할 것을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철종의 지시대로 처벌자를 최소한으로 줄여 비변사와 노론 일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형 대상을 유계춘, 이귀재, 김수만 등 3명으로 축소하고 나머지는 중형과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반대파 사람들은 처형 대상을 2급까지 확대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러 사정이 생겨 박규수는 중앙에 보고를 늦게 하였다. 이에 대해 박규수를 반대하던 관료들이 그를 비난하면서 관직을 삭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뒤에 박규수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반대파의 모함에 걸려 결국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본인이나 중앙에서 안핵사의 일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주항쟁을 기점으로 민란이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가 진주로 내려간 3월에만도 함양과 성주, 그리고 전라도 익산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중앙은 사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규수가 사태 수습을 지연시킴으로써 민란이 다른 지역으로 더 확대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곳에 파견된 안핵사들이 박규수의 사건 처리 결과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비변사나 신임 진주목사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처벌자를 최소화시켰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민란의 반역성만을 부각시킬 뿐이어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나중에 백낙신은 중앙으로 압송되어 유배를 가게 되지만, 본질적인 제도 개혁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민란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민란의 양상이 국가 기강마저 흔들 정도로 확대되자, 중앙에서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민심 수습에 나섰지만 이것 역시 얼마 못가 세도가들의 농간에 의해 임시방편적인 수단으로 전락,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임술민란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성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은 중앙정부가 보수화되고 지방 통치가 약화되었을 때 발생했다는 점에서 고려 무신정권 때 일어난 각종 민란과 유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임술민란은 봉건체제 자체가 와해되어가는 시점에서 터졌다는 데에서 고려시대의 민란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요호부민들이나 상공업과 광업, 수공업의 발달로 중간 계층이 두터워짐에 따라 농민 계층이 분화되어 갔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동에 따라 19세기 초반부터 소외된 계층이 생겨 계급간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삼정 문란 등 제도적인 모순이 가중되어 수탈 대상은 사회의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전체의 모순은 궁극적으로 세도정치의 부패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1860년대 전후 조선의 주변국가인 중국과 일본은 벌써 서구 열강과 각종 조약을 맺고 근대화 추진을 놓고 진통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진단하고 이에 대처할 만한 정책을 제시할 능력도 뜻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봉건성을 극복하고 자주국가를 건설할 정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군주체제에 입각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단순히 통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임술민란이 일어나기까지도 사회 제도 개선에 대해 별다른 정책을 수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임술민란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면서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지배층에 대해 반기를 든 농민항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임술민란은 일반적인 주장처럼 삼정 문란과 양반, 토호들의 착취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임술민란이, 한국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이제는 봉건성을 벗어나 근대 자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민중적 항쟁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임술민란이 봉건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항쟁에 참여한 농민들은 대체로 부세제도나 환곡을 중심으로 한 삼정의 폐해를 제거하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타도의 대상을 탐관들이나 양반, 토호, 보수적 요호부민으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농민들은 사회 모순이 중앙정부나 세도정권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을 객관화시키고 이에 따른 항쟁의 질과 폭을 넓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임술민란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의식적 한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전국의 민란을 조직으로 이끌어낼 만한 지도부를 갖지 못했던 것도 임술민란이 갖는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삼정 개혁안을 제시했을 때 민란이 소강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농민들이 봉건체제에 대해 현상적인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술민란은 봉건성에 젖어 있던 지배층에게 위기 의식을 심어주는 한편 봉건적 질서로는 더이상 민중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나아가 봉건체제의 와해를 한층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임술민란의 의의와 한계점은,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처럼 민중 운동이 본격적인 반봉건, 반침략 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ff 17.임오군란(임오군인폭동) : 종속적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다
임술민란이 끝난 다음 해인 1863년에 조선 25대 왕 철종이 죽고 대원군이 등장함에 따라 한국 역사는 엄청난 사회 변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임술민란에서 임오군란에 이르는 시기인 1863년에서 1882년까지의 역사는, 그야말로 격동과 혼란의 시대였다. 또한 조선이 서구 열강과 일본, 그리고 청국의 이권 쟁탈장으로 전락되어가던 때이기도 했다. 임오군란은 단순히 밀린 봉급 문제 때문에 생긴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에는 임술민란 이후 20년 동안의 조선 말 역사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과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 20년의 역사는 갑신정변이나 갑오농민전쟁을 포함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전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때 조선은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어가면서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 청국의 침탈에 대응하여 온갖 수모를 겪는 한편, 민중은 이에 대항하여 반봉건, 반침략 항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조선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해 버렸는가에 대해 우선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또한 임오군란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리고 청일전쟁 전후까지 조선은 일본과 청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고 봤을 때, 그리고 이들 양국 역시 서구 열강과 여러 분야에서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떻게 해서 청국이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할 뜻을 품게 되었는지 그 경위 역시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동아시아가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어간 역사를 먼저 더듬어 올라가 봐야 할 것이다. 그만큼 임오군란을 이해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다. 조선의 개항기 전후의 역사를 사전 지식으로 갖고 있어야 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19세기말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제국주의의 등장과 아시아 침략 : 동아시아의 국제 변동
서구는 지리상의 발견,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 등을 겪으면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서 서구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확대와 원료 공급을 위한 식민지 개척, 그리고 주기적인 공황을 겪으면서 기업합병과 대기업 등장으로 독점자본화되었고 이에 따라 자본 집중화를 위해 금융자본 역시 독점화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중소기업은 점차 몰락하고 대기업 등에 의한 독점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점자본주의는 국내 시장만으로는 모든 자본을 소화할 수가 없다. 이미 국제 무역이 발달한 서구에서 협소한 국내 경제에만 자본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또한 계속 새로운 기술과 상품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자본은 과잉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을 해외에 투자하여 더 많은 초과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른 국가들은 해외 상품시장과 자본수출시장을 안전하게 확보하여 독점화하기 위해서는 후진국들을 식민지로 지배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원료와 인력 공급을 위한 식민지는 이미 지리상의 발견 이후부터 개척되었지만, 19세기의 식민지 개척은 거대한 자본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를 노린 것이다. 이렇게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이를 토대로 국외 시장과 개척지를 확보함으로써 무한의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최고 발전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를 역사에서 제국주의라고 부른다. 제국주의의 선두주자는 역시 영국이었다. 제일 먼저 산업혁명을 겪음으로써 공업의 신속한 발달을 이룩한 영국은 주로 면공업을 수출 시장 개척의 무기로 삼았다. 또한 여기에 프랑스와 독일, 미국이 가세함으로써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체제가 구축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미 세계 대부분을 분할 점령하여 치열한 이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서구 열강은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침탈을 감행하였다. 영국이 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프랑스와 경쟁에서 이긴 뒤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로 삼은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영국은 남부아시아를 점령함으로써 중국을 넘볼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영국은 1802년에 실론섬 일대를 거의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1819년에 와서는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편입시키고 1824년에는 말레이지아 역시 식민지로 삼았다. 이 해부터 1826년, 그리고 1852년에서 53년 등 두 번에 걸쳐 버어마와 전쟁을 벌여 버어마를 영국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도가 점령된 것은 1858년의 일이었다.(프랑스는 1862년에 베트남을, 1863년에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만들어 영국과 더불어 중국을 넘보고 있었다.) 이후 영국은 인도를 거점으로 중국을 넘보게 되었고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광동무역에서도 단연 선두주자가 되어 동아시아 시장 개척에 주력하였다. 영국은 서구에서 차를 즐기는 풍습이 만연함에 따라 중국차를 수입하고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하였는데, 점차 엄청난 무역 불균형이 생겨 당시 국제무역의 유일한 결제 수단이었던 은의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가령 예를 들면, 1820년대 이후 영국은 매년 70만 파운드 어치의 모직물을 수출하였으나 중국은 60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차 등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영국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도산 아편을 밀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동인도회사는 아편을 몰래 밀수출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책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아편 수출을 통해 인도 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역 적자로 빚어진 은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면 그만큼 지배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야심이 숨겨져 있었다. 영국의 판단은 적중하였다. 청국인들은 점차 아편의 지배를 받게 되어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아편 중독자 수가 무려 200만을 넘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 직전까지 아편 밀수입양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초에는 연평균 4,000상자였던 것이 1930년대에 이르면 10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4-5만 상자 이상이 밀수입되었다. 그 결과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아편 중독자가 날로 늘어나 국민 건강이 악화되자 마침내 청국 정부는 아편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편 중독은 하루 아침에 끊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이러한 병리 현상 때문에 금령에도 불구하고 아편 수입은 계속 진행되었고 오히려 아편 중독자의 수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청국 정부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 당시 청국 정부 내에서는 아편 수입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엄금파와 이를 반대하는 이금파가 치열한 당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이금파는 아편 수입을 통해 이권을 챙기는 관료집단들이었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영국은 청국에 대해 시장 확대개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내에서는 산업혁명의 기수 역할을 한 이들이 신흥 자본가로 등장하면서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흥세력을 대표한 휘그당이 중국 시장 개척을 강조함으로써 130여 년간 독점권을 차지하고 있던 동인도회사를 물리치고 대신 무역감독관제를 신설함으로써 신흥세력들이 대거 중국에 진출하였다. 영국이 청국에 대해 시장 개방을 요구한 데에는 이러한 영국 사회의 변동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제국주의의 속성이기도 하다. 엄금파의 주장은 여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금연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특히 엄금파의 핵심 인물인 임칙서는 1839년 3월에 광주에 도착하여 아편 흡연과 판매를 금지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해군력을 강화시켰다. 이미 1834년 7월에 해군대령 윌리암 나피에르는 초대 무역관으로 임명받아 해군을 이끌고 광동에 부임한 적이 있었다. 영국은 이때부터 일반 통상과 조약을 통해 시장 개방에 실패할 경우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이를 획득하려는 저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칙서를 비롯한 현지 중국관헌들은 무역감독관을 영국 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상인 대표로만 대접하였다. 이는 현지 관헌들이 아편 수입 금지와 시장 개방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편전쟁은 이러한 마찰로 인해 일어났다. 영국이 강제적으로 중국 시장개방 압력을 강행했던 이유는 자국 내의 자본주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19세기에 들어 경제 위기에 처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에서 이윤을 추구하여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미 1835년에 영국 상인들은 정부에게 무력으로 중국 시장개방을 촉구하라고 건의했으며 이에 따라 중국 관계자들은 위원회까지 설치하였다. 그리고 1840년 2월에 영국 정부는 중국을 무력으로 개방할 것을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같은 해 6월에 전권대사 엘리오트가 이끄는 4,000여 명의 군인과 40여 척의 군함이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이에 대해 청국은 해군과 의용군을 중심으로 대항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이 전쟁은 영국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전쟁 이후 양국간에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1843년에는 추가 조약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1844년에는 청국과 미국,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국은 남경조약을 통해 홍콩을 조차하고, 상해, 광주 등 5개 항구를 개방시켰다. 이들 서구 열강들은 조약을 통해 치외법권과 무역상의 최혜국 대우 보장 등 침탈에 필요한 법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수천년 동안 아시아에서 종주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은 서구 열강 앞에 서서히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사실 아편전쟁은 화이사상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차별적 세계질서와 서구 주도적인 세계질서의 충돌이었으며 조공을 통해 주변국가를 지배해오던 중국의 봉건성이 무너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세계 인식 방향은 크게 수정되어야 했으며 나아가 아시아에서 누리던 종주국의 자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전쟁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은 '양이'들과 맺은 조약이 조공제도의 일환일 뿐이며 5개 항구가 개방된 것도 광동무역의 연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군주체제를 유지하는 한 수천년 동안 내려온 중화사상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의 시장 개방 확대 요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즉, 청국은 외국 오랑캐와의 무역이 양자강 이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영국 등은 중국 전체를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마찰과 대립에서 터진 것이 영.불 연합군과의 전쟁인 제2차 아편전쟁(애로우 전쟁이라고도 한다.)이다. 이때가 1856년이었다. 이 전쟁 역시 영.불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이 체결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말그대로 '종이 호랑이', 또는 '동방의 노제국'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청국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거의 20여 년 동안이나 저항한 셈이다. 청국은 전쟁에서 패한 뒤에야 서구자본주의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이 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이후 중국의 산업은 파탄의 길로 치달았다. 여기까지가 청국이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된 경위이다. 다음은 일본이 어떻게 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는지 살펴볼 차례인 것 같다.
일본이 미국의 강제로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54년에 맺은 미일수호조약 이후이다. 그러나 이 조약을 맺기까지에는 일본도 쉽사리 개방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문호개방을 전후로 한 일본은 도쿠까와 막부 시대에 해당된다. 일본은 16세기 전후에 이미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서구 문물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으나 화란(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허용한 나가사끼무역을 제외하고는 17세기 초부터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영국과 러시아가 문호개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무력 앞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국내 사정과 국제주의적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탄압과 박해를 피해 유럽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유럽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박멸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따라 영국에 대항하여 1776년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기본권과 인민 주권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국의 독립을 위한 이데올로기였지, 흑인이나 인디언, 그리고 약소국가에 대해 허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이 노예노동력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농장주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은 북미대륙 가운데 동북부 지방에 편재한 13개주로 구성된 연안국가로 출발하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내적으로 상인과 농장주 등 계급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더 많은 영토가 필요해져 미국은 본격적으로 서부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이른바 서부개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 미국은 조약 체결, 매입, 무력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그리하여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텍사스를 차지하게 되었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차지하였다.(1848년) 이렇게 하여 태평양 연안 확보와 서부 개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가 19세기 초와 중엽이었다.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공업화를 촉진하였고, 서부 개척에 따른 대륙 횡단 철도 건설과 함께 유럽자본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한 '먼로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유럽 열강에 대응하여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팽창주의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지 방어적인 고립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서부 개척이 한창 진행되던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 상인들은 대서양을 남하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중국 광동에 이르렀다. 특히 1848년 멕시코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대륙을 횡단하는 태평양 연안국가로 급부상하여 중국무역에서도 영국 다음 가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북부에서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져 남부의 흑인 노예에 게 주목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링컨이 노예 해방을 주장, 남북전쟁(1861-1865)이 발발하였다. 따라서 남북전쟁은 북부의 자본가들과 남부의 농장주들 사이에 발생한 경제적 대립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흑인들은 노예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그것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근대적 계급 관계로 변질된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미국은 자국의 공업화에 주력하여 산업자본을 축적해가는 한편 국외 시장 개척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막강한 군사력이 없던 미국이 영국의 뒤를 좇아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망하조약(1844년)을 맺은 것도 팽창주의 정책에 따른 것이다. 또한 1850년대에 들어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됨에 따라 중국과의 무역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태평양 항로도 자연스럽게 개설되었다. 이뿐 아니라 포경선단들이 미국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지금의 구소련 연안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남하하여 일본 근해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즉, 미국은 대서양을 통하여 유럽 연안을 드나들고,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까지 진출, 동서로 세계를 횡단하는 항로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남태평양의 서사모아 제도까지 세력을 팽창시키기고 있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무엇보다도 4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 개척에 주력하려 하였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다보면 항해상 여러 문제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지금처럼 아직 선박의 기능이 선진적이지 못한 관계로 자연 재해에 대한 대비나 식량과 연료 공급 등이 시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미국은 중간 기착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포경선단들이 태평양 연안에서 조업을 할 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항구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 대두되었다. 미국이 서둘러 일본을 강압적으로 개방시킨 배경은 이러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상적인 측면이 숨겨져 있다. 첫째는 문명 우월론에 따라 아시아에 기독교를 포함하여 진보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멕시코전쟁 때 내걸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라는 명분(미국인들은 이것을 신의 명령이라고 하였다.)에 따라 태평양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는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미국은 독점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개척할 만한 제국주의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단지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판단한 일본과 조선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국의 눈에는 일본이 대륙 진출의 거점으로 보였다. 이러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라 일본은 '서양의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 개방에 앞장섰던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동경만 입구 우라가에 나타난 것은 1853년 7월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미국 군함을 흑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 막부는 미국이 곧 문호 개방을 촉구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1844년 네덜란드 정부는 일본에 서한을 보내 아편전쟁의 말로를 알리면서 이와 같이 당하기 전에 미리 문호를 개방하라고 촉구하였다. 또한 1852년에 한 네덜란드인이 일본 막부에게 페리 제독이 찾아오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환기시켜 주면서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이 일본이 미국에 대해 무력 대응하기 보다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는 데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페리가 오기 전에도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인들이 일본 연안에 나타난 적은 있다. 일본을 개방하기 위하여 1837년 상선 모리슨 호가 일본 난파선원을 태우고 에도 만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우라가에 있던 포대에 쫓겨나고 말았다. 1846년에는 비들 제독이 두 척의 미해군 함정을 이끌고 우라가 연안에 접근하였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이렇게 일본 개방에 실패하자 미국 대통령 필모어는 페리에게 명령하여 원정군을 이끌고 일본을 개방시키라고 하였다. 마침내 페리는 1853년 7월 8일 우라가에 닻을 내리고 필모어의 서한을 막부에게 전달하라고 현지관헌에게 건네주면서 미.일 양국간에 친선과 통상 관계를 위한 교섭에 응하라고 요구하였다. 미국 군함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본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무사들은 흥분하여 미국을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몰아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페리와 마주 앉은 관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일본측 대표를 맡은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의 태도를 통하여 쇄국정책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피부로 절감하게 되었다. 일본은 우선 내부 사정 때문에 당장 교섭에 응할 수 없으니 차후로 미루자고 하였다. 이에 페리는 사후 교섭에 동의하고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일본을 떠났다. 페리는 아편전쟁 이후 일본 역시 무력 침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방은 시간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페리가 떠난 후 일본 정계는 미국의 문호개방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쇄국정책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아편전쟁을 염두하여 무력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음 해인 1854년 1월에 페리는 다시 우라가에 도착하여 무력 시위를 하며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의 군사력을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같은 해 3월에 카나가와조약에 조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일본은 시모다 등 2개 항구를 개방하여 미국 선박에게 식량과 연료를 공급하고 난파선 구조, 하물 보호 등 호의적 대우를 보증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을 삽입하여 유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즉 카나가와조약은 중국이 영국 등과 맺은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양국은 무역 통상에 대해서는 차후 교섭하기로 했는데, 이는 개방한 시모다 항구 등이 당시 일본의 경제중심지였던 도꾜나 오오사까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었는데, 역시 불평등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여기다가 오랫동안 무역을 해온 네덜란드도 새로 조약을 맺자고 요구해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200년 이상 지속되온 쇄국정책은 무너지고, 일본은 강제 개방에 따른 휴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청국과 일본 모두 자주적인 개방이 아닌 무력 앞에 어쩔 수 없이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써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구 열강에게 휩싸여 위기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들이 조선을 넘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일본의 경우 개방 이후 어떠한 정책과 국제 전략을 통해 자기들이 당한 것과 똑같이 조선을 무력을 통해 강제로 개방시킨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좀더 일본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먼저 조선 국내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대원군의 집권과 쇄국정책 : 서구 열강의 무력 침략
조선의 인접국인 청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에 예속됨으로써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 역시 점령 대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860년대 조선은 안으로는 폭발하는 민중들의 항쟁과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봉건체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은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대원군의 집권 시대가 열렸다. 1863년 12월 초에 조선 25대 왕 철종이 죽었다. 그런데 뒤를 이을 아들은 물론이고 가까운 일가 친척도 없었다. 이에 조대비는 철종의 먼 일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선군으로 봉하여 원로대신 정원용의 발의에 따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조선 26대 왕인 고종이다. 안동 김씨들로부터 탄압과 감시를 받고 처사로 지내던 대원군은 철종이 죽기 전에 궁중 최고어른인 조대비와 이미 연줄을 맺고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도록 종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고종은 불과 12살의 소년이었다. 대원군의 집권 시대는 이렇게 해서 열렸다. 대원군은 1862년의 임술민란과 중국의 아편전쟁, 일본의 문호개방 등 일련의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다시 건설하기 위하여 중앙집권 강화 정책과 더불어 쇄국정책을 동시에 펼쳐나갔다. 그는 우선 파벌이나 신분, 지방색에 관계없이 인재를 두루 등용하면서 안동 김씨 세력을 중앙에서 축출해나가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웠고 비변사와 삼군부, 그리고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 또는 약화시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도 간행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았다. 어느 정도 중앙 정계를 정비하면서 대원군은 농민 항쟁의 주원인이었던 부세제도를 개선하는가 하면 지방 관리들과 양반들의 탐학과 착취를 통제하기 위하여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농민 착취의 상징이었던 서원을 정리하여 47개만 남겨놓고 1,0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사창법을 되살려 부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다소 감소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체제 강화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일단 세도정치로 비롯된 온갖 부조리가 점차 사라져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면도 있었다. 이로써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면서 국가 재정을 확보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동아시아의 급격한 국제 변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원군은 강화도, 교동도, 영종도 등 서해안 일대와 한강 하구에 위치한 주요 거점에 성과 진을 쌓고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전국의 포수들을 모집하여 정규 군사훈련을 시켜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일본이 점차 서구 열강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고 부산 동래성 일대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럴 즈음 서구 열강은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 관심을 갖고 개방을 요구해오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1864년에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경지대에 사절을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대원군이 내응자를 처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철저한 쇄국정책을 펴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는 부동항구를 구하기 위한 남하정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865년에 러시아인 수십 명이 청국인을 앞세우고 나타나기도 했으며 함경감영에 국서를 가져오겠다는 통보도 하였다. 1866년 2월에 영국은 로나호를, 같은 해 7월에 엠페러호를 보내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무력 침탈을 완전히 비켜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터진 것이 조불전쟁(병인양요)과 조미전쟁(신미양요)이다. 조불전쟁은 알려진 바와 같이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군함이 조선을 침략하여 발발한 것이다. 조불전쟁이 있기 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엄청난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프랑스는 1831년 조선교구가 북경교구에서 벗어나 외방선교회가 조선교구를 담당하자 본격적인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1838년에 앙베르 주교 등이 조선에 파견되어 교세 확장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년 사이에 천주교 신자수가 9천 명 이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때 천주교를 놓고 시파와 벽파 사이에 정쟁이 벌어져 벽파의 주도로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1839년에 있었던 기해사옥(기해박해)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것을 빌미 삼아 1846년과 1847년에 두 번에 걸쳐 극동함대를 조선에 보냈으나 폭풍 때문에 상륙은 하지 못하고 프랑스 신부를 죽인 일에 대해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서한만 남겨놓고 돌아갔다. 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는 꾸준히 늘어가고 있었다. 대원군은 처음부터 천주교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천주교 선교사들을 통해 외세가 침입할 우려가 크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처리를 놓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방 변방에서 러시아가 자꾸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원군과 관료들은 러시아가 곧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이때 정부 내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고 있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대원군 정권은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우선 국내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 신부를 통해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정책 방향을 알게 된 베르누이 주교 등은 기뻐하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한 것은 한 달 뒤였다. 그 사이 대원군은 북경의 사신이 보내온 서신을 통해 청국 북경에서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정황을 알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가 궁 내부까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천주교를 반대하는 관료들이나 유생들이 연일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조대비마저 천주교를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프랑스와 협력한다는 방침을 취소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을 내렸다. 이는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1866년에 시작된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187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를 병인사옥(병인박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만도 프랑스 신부 9명과 8천 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대대적으로 처형당하였다. 이때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신도들과 함께 청국 천진으로 탈출하여 조선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주교 탄압 소식을 극동함대에 알렸다. 천주교를 이용하여 식민지 확장에 몰두하고 있던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대침공을 감행하였다.
조불전쟁(병인양요) 프랑스군은 1866년 8월에 현지 답사를 위해 군함 3척을 경기도 남양만에 보냈다. 프랑스 군함은 연안을 측량한 뒤 이중 2척은 서울 서강에까지 들어와 항로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그런데도 강화도 주둔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중앙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강화중군 이일제를 파면시켰다. 프랑스군이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해온 것은 다음 달인 9월이었다. 프랑스군은 청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군함 7척과 군인 2천여 명을 이끌고 사전 조사한 항로를 따라 강화도를 일시에 점령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조선 정부에 대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책임을 물어 배상금 지급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면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통상조약 체결 등 침략적인 요구를 제시하였다. 프랑스군은 한 달 가까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처음에 조선 정부는 프랑스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밀려 대응책에 고심하였지만 대원군은 프랑스군의 요구를 모두 묵살하고 강경하게 맞서 싸울 것을 결정하였다. 서울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훈련대장 이경하는 군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서울과 한강 연안을 사수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모집된 4,000명의 의용군부대는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해 서울 근교로 모여들었다. 이럴 즈음 9월 18일에 프랑스군은 서울 침공을 위해 통진에 상륙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프랑스군이 통진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의용군부대는 적을 문수산성으로 유인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문수산성 전투에 패배한 프랑스군은 9월 말에 강화성의 요충지인 정족산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이에 양헌수가 이끄는 의용군부대는 10월 1일에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 격렬한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렇게 두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10월 5일에 모두 퇴각하였다. 조불전쟁은 조선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조선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강화도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살육당하였으며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군은 후퇴하면서 화승총 등 군기물자와 보물, 당시 달러로 거의 4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은괴 180상자와 귀중한 문화재인 사고도서를 탈취해 갔다. 이 전투가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포수 등으로 구성된 의용군의 활동이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와 민중의 반침략 의식이 합치되어 군과 민이 협력하여 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조선 정부는 쇄국정책에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던 것이다. 조불전쟁은 서구 열강이 정규군을 동원하여 최초로 조선을 침입한 사건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조미전쟁(신미양요), 조불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 7월에 대동강에 한 낯선 외국 선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선박이 바로 제너럴 셔먼호이다. 미국 선박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셔먼호가 처음은 아니었다. 철종대에도 가끔 조선 해안에 나타난 적도 있었고, 셔먼호가 들어오기 5개월 전인 2월에 사불호, 5월에 서프라이즈호가 조선 연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선박은 조선의 쇄국정책에 부딪혀 접촉도 못하고 물러났다. 서프라이즈호의 경우, 이 선박이 황해도 앞바다에서 난파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서는 선원들을 구조하여 중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의주까지 호송해 주었다. 그런데도 포대 2문으로 무장된 셔먼호의 선장은 토마스 선교사와 무장 선원 24명을 이끌고 7월 7일(양력 8월 15일)에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주영포에 침입하였다가 곧바로 대동강 하구를 따라 육지에서 불과 10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황해도 동진 앞바다로 들어왔다. 평양 부근까지 접근한 셔먼호도 역시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홍수로 인해 선체가 강안에 쳐박히게 되자 평안감사였던 박규수는 셔먼호를 조난선으로 예우하여 식량과 식수, 땔감 등을 공급해주면서 조용히 조선을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배를 고친 뒤에도 계속 대동강을 오르내리면서 통상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선박을 약탈하고 일부는 육지에 상륙하여 민간인들을 해치거나 재물을 터는 등 강도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했다. 이는 미국인들이 조선을 뒤떨어진 문맹국으로 보고 박규수 등의 호의적인 태도를 무시한 결과였다. 이러한 만행에 격분한 평양 주민들은 평안감영의 군사들과 함께 셔먼호를 공격하여 선박을 불태워버리고 토마스 선교사와 24명의 무장 선원 모두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이하 셔먼호 사건) 셔먼호의 침입은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일반 선박들은 무장을 하고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이 없어도 미개방 국가에 함부로 들어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자행하였다. 이는 미국 팽창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은 프랑스처럼 바로 무력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조선 정부에 대해 셔먼호와 희생된 선원들에 대한 배상금 지불과 책임자 처벌, 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계속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쇄국정책에 따라 이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프랑스와 협작하여 비열한 짓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조선이 전혀 통상에 응할 기미가 안 보이자 미국은 유교국가인 조선이 대대로 조상을 신처럼 받든다는 관습을 역이용하여 교섭의 테이블에 대원군을 끌어내기 위해서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기로 결정하였다. 묘를 파혜쳐 남연군의 유골 등을 훔쳐가 이를 담보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리겠다는 야만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결정되기까지 병인사옥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의 의견이 큰 작용을 하였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의외로 독일인인 옵페르트였다. 대상인이었던 그는 1866년에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잠입하려다가 실패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중 페롱 등의 의견에 따라 남연군묘를 도굴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서 잠시 옵페르트에 대해 살펴보자. 정확히 말해서 그는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찾아온 상인들이 많이 있는데, 옵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대부분은 동방이 서방에 알려지면서 동방에 엄청난 보물이 산재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이를테면 해적질도 서슴치 않고 행할 수 있는 무리들이었다.(셔먼호 역시 선원들의 행동으로 봐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 틀림없다.) 중국에 도착하여 이들은 조선에는 가는 곳마다 금과 은이 수두룩하고, 특히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 속에는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런 소문을 그냥 듣고 넘어갈 옵페르트가 아니었다. 그는 1866년에 영국상선 로나호를 타고 한국 서해안에 들어와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다시 영국 선박 엠퍼러호를 타고 한강 입구 근처까지 들어와 측량을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조선의 보물'을 훔치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남연군묘를 도굴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금 담당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이고 선장 뮐러,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과 필리핀 등의 선원을 모집하여 140여 명의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젠킨스, 독일상인 옵페르트,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각국 선원으로 구성된 도굴단은 1868년 4월에 차이나호, 그레타호 등 1천톤급 기선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머스킷 소총을 구하여 무장하고 도굴용 도구도 구입한 뒤 같은 달 10일에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남연군묘는 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었다. 현지에 도착한 도굴단은 관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민가에 들어가 도굴에 필요한 도구 등을 약탈하고는 묘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묘가 워낙 견고하여 새벽이 지나도록 도굴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날이 밝자 곧바로 철수하였다. 옵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에 들러 프랑스 제독 알리망의 명의로 통상 요구문을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전달하려 하였지만 영종첨사 신효철은 도굴 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외국 오랑캐와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요구문을 되돌려 주었다. 국왕의 할아버지요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대원군은 크게 격분하였다. 유교 이념을 떠나서 아버지의 묘를 파헤친 '서양 오랑캐'의 만행에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대원군은 더욱 조선의 문을 굳게 잠그고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였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사옥이 1871년까지 이어졌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젠킨스는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도굴사건에 실패하자 미국 정부는 무력 이외에는 조선을 개방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주청 미국공사 로우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한편,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개방을 촉구하라고 명하였다. 이 결정은 셔먼호 사건 사후 처리와 조선 염탐을 위해 조선 연안에서 탐문 항해를 하면서 통상 요구를 하는 동시에 두 번에 걸쳐 원정계획을 짰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만큼 미국은 일찍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명을 받은 로저스는 1871년 4월에 콜로라도호 등 군함 5척(대포 85문 적재)과 군인 1,200여 명의 병력을 나가사키에 집결시키고 약 2주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마친 뒤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때 미국은 여느 때처럼 평화적 교섭을 가장하기 위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인 몇 명도 대동하였다.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무력 침공을 원칙으로 세운 뒤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그는 서울로 들어가기 위해 수로를 측정하면서 강화해협에 들어간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바로 강화해협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편, 조선에서는 미군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번지자 조불전쟁 때처럼 의용군부대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포수들도 다시 강화해협을 향해 모여들었다. 조선 군대는 미국에 비해 군사력이 열세라고 판단, 기습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하고는 서울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미군 함대를 손돌목에서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미군 함대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남의 영토에 불법으로 들어온 상태에서, 평화적으로 측량 활동을 하고 있는 미군 함대에 포격을 가한 것은 야만적인 행위라고 오히려 조선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뿐 아니라 손돌목 포격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하지 않을 경우 10일 후에는 육지에 상륙하여 보복하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러한 억지 주장에 대해 조선 정부는, 강화해협은 군사상 요충지인데도 불구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온 것은 분명히 불법이요, 침략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미군측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평화 협상이 결렬되자 미군 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기 위해 초지진, 덕진진 등에 대해 상륙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조미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무차별 함대 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뒤 상륙한 미군은 이어서 덕진진을 무혈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광성진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해왔다. 당시 광성진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군사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작전을 펼쳐 포격을 가해왔지만 조선 수비군도 반격을 가하여 미군함 3척을 격파하고 진지로 달려드는 미군들과 육탄전을 벌여 광성진을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등 53명이 전사하였지만 미군도 큰 타격을 입고 침공 20여 일 만에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 대해 주청 미국공사 로우가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의 용감성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세계 어느 민족도 조선 사람들의 용감성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은둔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에는 이러한 용감성을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미군들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해가며 성벽에 올랐다. 그들은 아군을 돌로 내려쳤다. 무기가 없는 경우 그들은 침략자들의 눈을 멀게 하려고 손으로 흙을 쥐어 뿌렸다. 그들은 한치 한치의 땅을 가지고 싸웠으며 오로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군사력에서 열세인 당시 조선 군사들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맞아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는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미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조선 정부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할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한다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워 쇄국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이렇게 서구 열강을 맞아 벌인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 군대가 갖춘 조직력이나 군장비 등 군사력을 따져볼 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강대국 청국도 영국이나 프랑스와 싸워 패배한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의 승리는 매우 값진 것이다. 이 승리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원군 정권의 강력한 지도력과 반침략 의지에 고무된 민중이 하나로 결집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봤을 때 조불전쟁과 조미전쟁에서 얻은 승리는 식민지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자주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값지고 큰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대원군의 정책이 봉건체제 유지에 궁극적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세계 역사의 흐름을 간과하여 자주적 개방과 근대화의 호기를 놓친 점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개방을 할 수도 없던 것이 국내 상황이었다. 이러한 복잡성은 대원군 정권이 몰락하여 민씨 정권이 들어선 후에 확연히 드러났다. 당시 조선이나 청국, 일본 등 아시아 제국이 개방을 하기 전에 취한 공통적인 정책은 쇄국이요, 배외주의였다. 단지 강도의 편차를 보이고 있을 뿐이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대항하고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것은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띨 수밖에 없다. 안으로는 봉건체제를 강화한 것이고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친 것이다. 당시 여러 선각자들이 자주 개화를 주장하였지만 서구 열강의 무력 침공이 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시대적 한계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가 빚어낸 과오에 대해서는 크게 탓할 것이 못된다고 본다.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오랫동안 유교에 젖어 있었던 관계로 중화사상에 입각한 유교적 차별 질서로만 세계를 인식하려 했던 당시 조선 정부의 기본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재편되어가는 세계 질서를 읽어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상태에서는 무력으로 밀고들어오는 서구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던 셈이다.
조선의 문호개방과 일본의 침탈 : 민씨 정권의 투항주의적 성격
대원군은 척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몰락한 양반인 여흥 민씨의 가문에서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였다. 이가 바로 명성왕후, 민비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대원군 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불씨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민비는 8살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나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집안 일을 돌보면서 틈틈히 {춘추}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민비가 영리하기 때문에 대원군이 고종의 비로 삼은 것인지도 모른다. 민비는 고종이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음을 알고 여론을 환기시켜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 친정체제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민씨 외척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중앙은 민비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대원군의 집정으로 진출한 남인 세력이 당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위정척사론의 선구자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이 대원군이 실시한 서원 철폐, 호포법 시행, 원납전 징수 등을 비판하면서 올린 대원군 탄핵 상소를 계기로 민비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대원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대원군이 물러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경복궁 등을 중건하면서 악화인 당백전 등을 발행하고 백성들에게 과한 세금을 부과하여 엄청난 인플레와 민생의 위기를 야기시킨 점이다. 민비는 백성들의 원성을 정권을 잡는 데 역이용한 것이다. 1873년 11월, 민씨 일파는 대원군이 드나들던 창덕궁의 전용문을 일방적으로 폐쇄함으로써 대원군은 정권을 내놓게 되었고, 그는 양주 곧은골로 들어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을 통해 세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양반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철폐되었던 서원들을 다시 복구시키는 한편, 대원군 때부터 진행되어온 여러 궁전의 재건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민중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또한 외국 상품 수입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서구 열강 자본이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민씨 정권이 들어서고 세도정치 때 만연되었던 매관매직 행위 등 온갖 부조리가 다시 반복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토목공사 관계로 국가 재정은 점차 악화되어 군인들에게 봉급을 주기에도 벅찬 형편에 처할 정도였다.(이러한 것이 임오군란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대원군 정권 때 진행된 봉건적 개혁정치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 지방 관리들이 탐학을 일삼는 등 민중들은 다시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씨 정권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입장에서 외세와 교섭을 가질 능력 역시 갖추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일본이 조선의 개방을 촉구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 국내의 정치적 변동이라는 주요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일본이 어떠한 경위를 통해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켰는지에 대한 이해도 될 것이다. 1854년에 맺은 미일화친조약(카나가와조약) 이후 일본 전국에서는 문호개방에 반대하는 궐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궐기는 차츰 천황제, 즉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양이운동으로 집약되어 도쿠까와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 투쟁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 끝에 1868년에 결국 700년 가까이 지속되던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천황제가 부활되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봉건체제의 강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쇄국적 양이운동을 주장하면서 도쿠까와 막부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양이론의 허구성과, 이것이 세계사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비현실성에 눈뜨게 되었다. 신흥세력들은 대체로 높은 교육과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 군사적 재능이나 학문적 소양 면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즉, 이들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천황제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본격적인 개방 및 개화정책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치유신의 출발점이요, 지금까지 일본의 천황제가 유지하게 된 역사적 근원이다. 신정부는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서구 열강들에게 기존의 조약을 모두 존중하겠다는 통보를 함으로써 세계 질서에 스스로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인접한 아시아 국가인 청국이나 조선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 정벌론이 대두되었을 때 강경론자와 온건론자로 갈라선 때도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무력 침략의 시기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지,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한 분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으로 인해 세계 신질서에 편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그대로 아시아 국가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오랫동안 이웃에 접한 국가로서 대립과 우호 관계를 반복하며 유지해왔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서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그동안 막부 체제에서 조선의 국왕과 동등한 교섭을 해왔기 때문에 막부보다 한 단계 위인 천황이 등극함으로써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과 대등한 입장이 못된다고 결정지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명치유신을 알리며 새로운 차원에서 국교를 정상화하자는 뜻에서 보낸 외교문서가 대마도 종주를 통해 조선(부산의 동래부사)에 전달되었다.(1868년) 대마도주는 도쿠까와 막부 때부터 양국간의 교섭을 담당해왔다. 그런데 서한 가운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황상이 등극해서 만기를 친재하고 널리 인국과의 우호를 두텁게 하고자 이에 정관 평화사절을 보내 구교를 찾고자 한다.
당시 중국만을 상국으로 여기고 있던 터에 일본이 황조, 봉칙 등 천자국의 자격에서만 쓸 수 있는 외교용어를 쓰자, 격식에도 전혀 맞지 않고 불손하다고 하여 문서 접수를 거부하였다. 물론 이것은, 당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대원군 정권이 일본은 서양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보고, 국교 단절이라는 뜻에서 접수를 거부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게다가 대마도주를 정관이라고 부른 것도 조선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마도는 조선에서 쌀과 콩 등을 받고 이에 대한 대가로 구리나 고추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교역이라기보다는 식량이 모자란 대마도에 대해 조선이 시혜를 베푸는 그러한 관계였다. 또한 대마도에서 조선에 보내오는 문서에는 조선이 대마도주에게 하사한 인이 찍혀 있었다. 이러한 대마도주를 외교 대표로 파견한 것에 대해 조선 정부로서는 불쾌한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문서 형식을 놓고 양국은 거의 1년 동안이나 신경전을 벌였다. 이때 국내에서는 박규수 등이 문구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주개국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박규수의 주장은 당시 쇄국정책하에서는 매우 실현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중국 등을 오가며 세계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조선은 언젠가는 서구나 주변 국가와 신질서 차원에서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을 해야 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규수는 중국처럼 무력에 의해 불평등한 조약을 맺기 전에 자주 개화에 힘써 밀려오는 서구 세력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부딪혀 자주 개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일본은 단순히 명치유신을 알리면서 국교를 맺자고 한 것일까. 그건 전혀 아니다. 박규수의 우려대로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볼 수 있듯이 정한론은 일본의 기본적 대조선 정책이다. 정한론은 이미 도쿠까와 막부 시대부터 자주 거론되었다. 1855년에 초오슈우 출신으로서 명치유신의 주동자였던 키토 타카요시 (1833-1877)와 이토오 히로부미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오인이 쓴 옥중서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러시아, 미국과의 강화가 결정된 지금 경거망동으로 이적에게 신의를 잃어서는 안된다. 다만 장정을 엄격히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를 두텁게 하는 사이에 국력을 양성하여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를 분할함으로써 러시아, 미국에게 잃은 것을 보상해야 한다.
이 문구를 스쳐 읽기만 해도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당하게 된 사상적, 정치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즉, 일본은 이미 서구 열강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부국강병을 꾀하여 조선과 대륙을 점령할 '야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오 히로부미가 명치유신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은 스승 요시다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안중근 의사가 그를 암살의 표적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일본의 침략성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 일본이 바로 조선을 정벌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 전후이다. 일본 역시 서구 열강에게 반식민지화되어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정치적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을 정벌한다는 기본 정책을 수립해 나갔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켜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잡아 제국주의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충족시켜 나갔다. 조선이 일본의 외교문서 접수를 거부한다고 하자, 일본 정계에서는 긴 논의 끝에 정식 사절을 조선과 청국에 동시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에 온 사절 대표는 사다 시라카야와 모리야마 시게였다. 이때가 1870년 10월이었다. 그러나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귀국하자마자 조선에 대해 격렬한 어조로 비난하면서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은 황국을 모멸하기를, 문자에 불손함이 있다 하여 황국에 치욕을 주었다......반드시 이를 쳐야 한다......10대대는 강화부로 가서 즉시 왕성을 공격하며 대장이 이를 통솔한다. 한편 한 소장은 6대대를 이끌고 경상, 전라, 충청 3도로 진격한다. 한 소장은 4대대를 이끌고 강원, 경기로 진격하며, 또 한 소장은 10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함경, 평안, 황해의 3도로 진격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장이라도 군을 출동시켜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자는 주장이다. 또한 이 정한론 속에는 조선을 얕잡아 보고 경멸해온 일본인들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이 청국에도 사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일본의 치밀한 계산이 숨겨져 있다. 당시 청국에 입국한 사절은 야나기하라 마에미츠였다. 그는 청국측과 교섭 끝에 1871년 6월에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청일 양국간에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요, 완전히 평등한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청국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며 자연스럽게 청국에 조공 관계에 있던 조선보다 한 단계 위의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의 속셈이었다. 명치유신 이후 봉건적 잔재인 사족(사무라이)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근대화 추진 정책의 일환으로 사족을 일축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가록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족들의 반발로 연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까지 보였다. 즉 1872년 전후하여 일본은 봉건 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날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명치유신은 아직까지도 진행중이었다. 이에 명치유신의 핵심 인물들은 다시 정한론을 들고 나왔다.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마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본 막부 내부의 모습을 보는 듯한 내용이다. 1873년 5월에 부산에서 일본인들의 밀무역에 대한 단속령을 내렸다. 그런데 여기에 일본을 얕잡아 보는 말이 들어 있다고 하여 감히 황국을 모독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면서 정한론의 바람은 더 세차게 불었다. 그러나 조선 정벌은 쉽게 결정지을 수 없는 문제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서구 열강들이 이미 조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한론이라는 명분 하나 가지고는 뜻을 이룰 수 없는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그때는 아직 대원군 정권이 몰락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쉽게 무력 침공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조선을 일방적으로 누를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급진적인 정한론은 비현실적이라는 의견이 상당히 영향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일본 정부 내에서는 아시아에 진출해 있는 서구 열강들의 의견을 수렴해봐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져 당시 구미 지역을 돌고 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 후에 조선 정벌 문제를 결정하자고 했다. 또한 조약 체결 후 사후 처리를 위해 청국에 머물고 있던 외무경 소에지마 타네오미는 임무를 마치고 나서도 주청 각국 공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에지마는, 미국이 조선 문호 개방을 위해 의견을 물었을 때 청국이 보낸 답신 가운데, 조선이 비록 속국이기는 하지만 정치, 외교적인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러시아측에서는 사할린 양도 문제를 거론하면서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조선을 친다 해도 묵인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결국 소에지마는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강국들이 자신들의 국익을 염두에 두고 일본의 조선 정벌을 묵인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본국 대신들에게 알려주었다. 정한론이 이제 현실로 구체화되어 다시 조선과 일본간에 전쟁이 벌어질 직전이었다. 그러나 외교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와쿠라는 세계 정세를 보고하고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논하면서 급진적인 정한론에 반대하였다. 그는 우선 일본의 내치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정한 논쟁'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정한론을 유보해야 한다는 의견 쪽으로 결정되어 정한론을 둘러싸고 벌인 온건파와 급진파의 권력 다툼에서 온건파가 승리하여 일단락되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운양호 사건' 전후에 보인 일본의 태도에서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온건파가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급진파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대만 정벌'이다. 일본은 조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는 급진파와 사족들간의 마찰을 무마시키기 위해 1874년 5월에 대만 정벌을 단행하였다. 일본은 자기들에게 안심하고 있던 청국의 허점을 찌른 셈이다. 청국은 이러한 일본의 태도가 국내 문제로 야기된 것이라고 보고 곧 조선을 정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용으로 한 문서를 조선 정부에 급히 보냈다. 이 문서에서 청국은 프랑스 제독 지켈의 의견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 정벌을 수행한 뒤 나가사키에 주둔중이며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 프랑스와 미국도 조선과의 관계가 미해결 상태(조불전쟁과 조미전쟁 등을 일컫는 말이다.)로 있기 때문에 조선이 서둘러 프랑스.미국과 통상 관계를 체결한다면 일본은 고립되어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한반도의 안보가 보장된다.
비록 프랑스와 미국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내용이지만 당시 정황으로 봐서는 일면 타당한 점이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정세를 일단 인정하고 각 열강들과 자주적인 조약을 맺어 점진적인 문호를 개방하였다면 일본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는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없다. 당시 세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이러한 민족 자주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정치적 안목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민씨 정권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는 대원군 일파로서 대일 교섭을 하고 있던 동래부사, 부산첨사 등을 파면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민씨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일본은 대원군 정권이 붕괴된 후에야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 왜관주재관이었던 오쿠는 본국에 보내는 공문을 통해 '대원군이 실각하였으니 일본의 입장이 매우 유리해졌다'는 보고를 하였다. 대원군의 실각 소식에 접한 일본 정부는 대조선 정책을 논의한 끝에 일단 정부 차원에서 조선 국내 사정을 탐지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고는 모리야마를 부산으로 보냈다. 모리야마는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조선 내의 동향을 파악한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본국 정부에 보냈다. 그중에 중요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정한론은 청국의 신문을 통해서나, 청국을 통해 조선에도 알려져 있으며, 대만 사건 등 대마도에 알려져 있는 것은 모두 조선에도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대군이 공격해 올 것이다'라는 유언비어가 있어 일본의 태도를 매우 경계하고 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일본의 대만 정벌이 조선 정벌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안고 즉각 부산훈도 현석운을 시켜 막후 교섭을 하게 하여 '5개월 이내에 일본 외무경이 사신을 파견하여 한국 예조판서에게 국서를 제출하고 국교를 시작하자'는 등 한일 교섭을 재개한다는 점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교섭에 들어가자 양국간에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일 교섭의 기초를 다지고 돌아갔던 모리야마는 다음 해인 1875년 2월, 이사관에 임명된 뒤 외무경의 서신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하여 동래부사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모리야마는 조선에 들어올 때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에 조선측은 모리야마의 제복이 옛날과 달리 양복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태도라고 하였다. 또한 서한에 들어있는 문장 등을 놓고 양국은 논란을 벌였다. 교섭은 5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결국 결렬되고 모리야마는 이해 9월 20일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리야마는 조선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교섭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4월 15일에 '이러한 상태에서는 교섭을 계속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군함을 한 두척 파견하여 시위 운동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건의문을 본국에 보냈다. 이른바 미국이 자기 국가에 써먹었던 '포함외교'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건의문 말미에서 모리야마는 '큰 충돌을 피한다는 뜻'에서 포함외교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리야마의 태도는 조선과 평등한 조약을 맺을 뜻이 없다는 기본 입장을 재확인해준 것에 불과하다. 모리야마의 건의문을 받아본 일본은 쉽게 결정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보고 모리야마에게 보내는 답신을 지연시켰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다음 달인 5월에 다시 강경한 어조로 즉시 군함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현지에서 포함외교를 주장해오자 일본 정부는 마침내 조선에 군함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운양호 사건'의 발단 배경이다. 5월 25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운양호와 제이정묘호가 부산에 입항하였다. 일본이 내세운 구실은 '조선국 해로를 연구하기 위한 회항'이었다. 갑작스런 일본 군함 출현에 부산은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교섭을 담당하고 있던 훈도 현석운은 즉각 모리야마에게 달려가 따졌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외교 사신이 와 있을 때 군함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모리야마의 태도에서 일본의 입장을 읽어낸 현석운은 즉시 군함에 올라 사실을 확인해야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일본측은 자신만만하게 이를 허용하였다. 현석운과 그의 일행 18명이 배 위에 오르자 이노우에 함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연습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발포를 명했다. 이것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다는 시위였다. 현석운 등은 즉시 포격 연습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여 함포 사격은 중단되었으나 운양호의 무력 시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전에 일본 정부가 계획한 대로 운양호의 불법 행위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운양호는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순항하면서 무력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리고는 서울과 가까운 강화도로 가기 위하여 다시 남하하여 남해를 지나 서해로 접어들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9월 20일, 마침내 운양호는 강화도 동남쪽에 위치한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완전히 불법 침입이었다. 정박한 뒤 이노우에 등 일본 해군들은 음료수를 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보트를 타고 강화만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이에 강화해협을 지키고 있던 조선 군사들이 일본의 불법 침입을 막기 위하여 포격을 가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이노우에 일당은 보트를 타고 다시 모선인 운양호로 돌아가 즉각 초지인에 대한 맹렬한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오후에는 영종도를 점령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전리품으로 포 38문과 화승총 130여 자루 등을 약탈하고 마구잡이로 살상을 일삼은 뒤 9월 28일 나가사끼로 철수하였다. 영종도가 쉽게 무너진 원인이, 조선의 수비병들의 무기가 근대적인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들을 물리치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보다도 조불전쟁이나 조미전쟁 때와는 달리 정부를 중심으로 한 반침략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민씨 정권은 이렇게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세력이었다. 여기까지가 강화도 사건의 전말이다. 미국 등을 본받아 포함외교에 나섰던 일본은 일단 강화도 사건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반응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함부로 행동하다가는 오히려 일본이 고립되는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의 보고를 받은 후 즉각 서구 열강들과 접촉을 하였다. 그 결과 정세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오히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의 포함외교를 환영하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강화도 사건은 조선과 일본이라는 후진국가간의 문제라고 하면서도 일본이 자기들을 대신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게 적극적인 지지의 뜻을 표명한 것은 당연한 정세였다. 특히 미국은 일본의 조선 개방정책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강화도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주일 미국공사 빙함은 명치유신의 핵심 인물로서 부전권의 자리에 있던 이노우에에게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기증하면서 이것을 대조선 정책에 참고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속된 말로 "배운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제 조선 주변에는 조선을 도울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일본을 앞세워 조선이 문호개방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일본의 조처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만일 이 강화도 사건에서 조선이 일본 함대를 조불.조미전쟁 때처럼 격퇴하였다면 일본은 쉽게 조선에게 강제 개방을 요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씨 정권은 대원군 정권처럼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정책 제시나 지도력이 없었다. 쇄국정책이 지녔던 응집된 방어 능력조차 민씨 정권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봉건 수탈체제를 더욱 악화시켜 오히려 민중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민씨 정권은, 외세에 대해 자주적인 외교도 펼치지 못해 모든 면에서 국가와 민족을 역사의 암울한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시초가 바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각 열강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본은 아무 장애 없이 1876년 1월에 군함 8척과 6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부산에 침입하여 무력 시위를 저질렀다. 이때는 이미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통해 청국의 불간섭 입장을 확인한 후였다. 불법 침입한 일본은 조선에게 오히려 강화도 사건 때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도 더불어 요구하였다. 물론 이 배상 청구는 억지에 불과하다. 강화도 사건 당시 조선의 포대는 사정거리에 못미쳐 운양호에 포탄이 날아가지도 못했다. 게다가 영종도 등에서 전투를 벌일 때도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은 조선측이지 일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경상자 2명 정도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반면 조선 군인은 수십 명이 죽고 민간인도 학살당하는 등 오히려 일본의 불법 침공에 조선이 배상을 요구해야 할 판국이었다. 강화해협은 고려 때 항몽의 마지막 보루였고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강화도는 서울을 지키는 관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경계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 국교가 단절되어 있는 외국 배가 들어올 때 이것은 엄연한 불법과 침략 행위에 해당된다. 따라서 조선의 반격은 당연히 국가 수호를 위한 정당방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키려는 트집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해 권력 기반이 미약한 민씨 정권은 무력 충돌을 우려하여 일본과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민씨 정권은 국내의 권력기반이 취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일본과 쉽게 교섭에 응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민씨 정권의 매국적 행위는 뒤에도 계속된다. 교섭 전부터 일본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민씨 정권이었기 때문에 평등한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이 자기 국가에게 했던 것을 모방하여 조선에 대해 일방적인 이익을 담보해낼 수 있는 조약을 맺었다. 이때가 1876년 2월 27일이었다.(비준은 3월 22일에 끝났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으로서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타율적으로 맺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약 내용을 요약하면, 주요 무역항의 개항, 무관세,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으로서, 당시 세계 정세를 봤을 때도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조선이 자주 근대화를 이루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으며, 조선 역사의 흐름이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 후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일본 상품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 정부는 일본의 권유에 따라 정부조직을 개편, 철폐하면서 근대적인 기구를 신설하는 등 부분적으로 개화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조치는 민씨 정권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달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봉건체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국가의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민씨 정권은 이러한 부분적 개화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조종대로 따랐던 것이다. 여기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었다. 또한 민씨 정권의 매국적, 투항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일본은 손쉽게 조선에 대해 침탈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 직전의 민중 수탈과 폭동의 발발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까지 부산(1876), 원산(1880)의 두 항구가 개방되었다. 인천 항구가 개방된 것은 1883년에 와서였다. 항구의 개방으로 조선은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일본은 조약을 체결하기 무섭게 조선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을 감행하였다. 이는 일본이 서구 자본주의에 비교하여 아직 후진자본주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조선 정책이었다. 1876년을 기점으로 조일간의 무역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불균형 무역 관계를 맺게 된다. 1876년 개항 전까지 조일 무역은 조선의 수출액이 약간 우세를 유지하면서 그런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대해 일방적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이 균형 상태는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하였다. 1876년에서 1884년까지 통계만 봐도 일본 상품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울 정도로 조선의 대일 무역은 엄청난 불균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빠진 데에는 민씨 정권의 묵인 아래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상인들이 서로 나서서 외국 상품 수입에 경쟁을 벌인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임오군란 후 정권을 잡은 대원군이 보부상들의 저항을 염두에 두고 보부상 검속령을 내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은 주로 서구의 공업제품(예를 들면 영국의 면제품)을 싸게 구입하여 그것을 조선에 비싼 값으로 팔고 그대신 조선 민중의 귀중한 곡식인 쌀과 콩 등을 수입하였다. 일본이 쌀을 집중적으로 수입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노동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이들의 식량을 조선에서 싸게 사들인 쌀로 공급하는 등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수출한 품목 가운데 순수한 일본제품은 11.7%에 불과하고, 나머지 88.3%는 서구 열강의 제품이었다. 일본이 이러한 중간 판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챙겼는지 알 수 있는 수치이다. 또한 일본은 수입액의 초과액을 금과 은으로 결재해줄 것을 요구하여 다량의 귀금속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갔다. 이것은 일본이 근대적 화폐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또한 상품가격도 일본이 일방적으로 정해 아무리 조선에서는 귀한 것이라고 해도 일본이 구입하면 엄청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15-18엔이었던 반면 일본이 수출한 사기꽃병은 무려 40엔이나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사기꽃병 하나로 조선 소 2마리를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외국 상품의 침투로 조선의 상공업은 점차 침체 분위기로 빠져들어갔다. 심지어는 농촌까지 파고들어 농촌경제도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외국 면직물이 계속 수입됨으로써 국내 면직 생산이 크게 감퇴되었다. 이러한 상품 침투로 조선의 자생적 자본주의는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혀 종속적 경제체제로 흡수될 위기에 빠져버렸다. 당시 조선 경제는 아직까지도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농촌 생산물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시기였다. 특히 쌀은 민중들의 생계와 직결된 필수품이기 때문에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으로 막대한 양의 쌀이 유입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여 매년 쌀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게다가 봉건지배층이나 지주들은 수입 상품인 사치품을 사기 위하여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은 더이상 국내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이주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1867년에 연해주에 정착한 이주민이 2,000여 명이었는데 매년 그 숫자가 늘어 19세기 말에는 6만 명을 넘고 있다. 이렇게 민중들이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민씨 정권은 사치품 구입에 열을 올리고 국고를 자산으로 여겨 마구잡이로 소비하였다. 심지어 민씨 정권은 관직이나 과거합격증을 만들어 판매하여 그 수입을 사치 비용으로 썼다. 탐관으로 유명했던 민영준은 평안감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고종에게 바칠 정도였다. 특히 민비의 사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민비는 세자로 책봉된 아들(뒤에 순종)의 안전을 기원한다는 구실로 걸핏하면 무당을 불러 궁궐 내에서 굿판을 벌렸고 전국 팔도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아들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물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민중들의 고혈을 짜낸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피폐성을 타파하기 위하여 최익현 등의 유학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던 것이며 이 운동의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들의 큰 지지를 받은 것은 반외세 의식이 전국적으로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인들이 군료를 지급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쌀값은 부르는 게 값인데다가 그나마 있는 쌀도 중간에서 관리들이 빼돌리니 군인들에게 돌아가는 쌀이 남을 리가 없었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인 군료 문제는 이처럼 당시 사회적 모순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인들의 저항은 임오군란이 처음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폭동을 일으킨 것은 임오군란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반일 감정은 민중들 사이에 고조되어 있었고 군인들 역시 민씨 정권하에서 수탈 대상이 되어 이에 대한 저항 차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에 들어 삼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군조직 자체도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초반부터 문제의 심각성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5영이라는 군조직이 있었으나 실제로 번내에 근무하는 군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국가 재정이 심각할 정도로 모자라자 정부는 군포를 내는 대가로 군 입대를 면제시켜 주었던 것이다. 군인을 계속 보유하고 있던 금위영의 경우에도 날이 갈수록 그 숫자가 줄어 근무에 임하는 자의 수보다 군포를 무는 자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따라서 문서상에 등록되어 있는 군인의 수는 1만 6,000명 정도였으나 실제로 근무하는 군인의 수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더 심했다. 승정원이 올린 한 보고서에는 이러한 군 내부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지금 각 군현의 군총은 모두 허위 문건이다. 속오군, 아병은 모두 거짓 이름이다. 군총에 등록된 이름은 모두 죽은 사람이며 군사훈련 대상자도 거의 젖먹이 어린아이들이다.
이러한 군의 병폐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민씨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는 군 전체가 와해될 지경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대원군 정권 때 프랑스와 미국의 막강한 군함을 물리쳤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씨 정권이 들어선 1870년대 중반부터 군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있는 군인들조차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보다는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중앙군의 경우 민씨 정권이 벌인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고, 지방군인들은 그 피해가 더 심해 아예 관청에 소속되다시피하여 강제 노역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군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1881년 4월에 기존의 군조직을 2영(금위영, 장어영)으로 개편, 축소한 뒤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신설하고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훈련교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기존 군조직에 대한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신식군대를 별도로 창설함으로써 구식군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구식군인들에 대한 봉급은 제대로 지급된 적이 별로 없었다. 군정을 통해 거두어들인 군포는 많았으나 이 가운데 대부분을 민씨 정권과 이에 아부하는 지배층들이 중간에서 횡령하기 일쑤였다. 또한 궁내에서 연회가 열리면 따로 경비를 뜯어가는 등 군영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881년에 무기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에서는 갑옷 10여 벌을 만들 돈도 없어 선혜청에서 돌려쓸 정도였다고 하니 군대의 내부 사정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임오군란 때 서울의 빈민들이 대거 폭동에 동참하게 되는데,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군인들의 폭동에 빈민들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이 숨겨져 있다. 16세기 이후 군포법이 시행되면서 영내에 근무하는 군인의 수는 매년 격감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군포를 통해 군인을 모집하는 고용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고용제도는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10리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 실행되었는데, 이때 군인으로 자원한 주민 대부분이 농토를 잃고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빈민들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는 삼정 문란과 지주들의 착취가 심화됨에 따라 빈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고용제도에 따라 군대에 들어오는 고용군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생계가 막연했던 빈민 대부분이 입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만족할 만한 군료가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군료는 쌀로 지급되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소두로 두 말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양이었다. 이에 군인들은 따로 날품팔이를 하거나 고된 부업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양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빈민들의 궁핍함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군들이 이태원과 왕십리를 주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두 곳에 훈련도감에 고용된 군인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여 살던 군인들이 최초로 군인폭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1877년 8월, 군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생계에 막대한 위협을 느낀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은 양용범, 김한문 등을 중심으로 선전문을 작성하여 각 숙소에 붙여 궐기할 것을 종용, 가두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곧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은 군인들이나 빈민들을 조직화할 만한 충분한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인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갔다.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어 구식군인들은 차별 대우를 받자 점차 폭동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별기군이 신설된 지 한 달 후인 1881년 5월, '복심계'라는 비밀조직을 만든 강화도 군인 100여 명은 서울 군인들과 합세하여 일본공사관과 별기군 훈련소를 습격하여 일본 세력을 몰아낸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1881년 8월에 들어서는 좀더 조직적인 봉기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른바 '이재선의 모역사건'이 그것이다. 이때에는 참가 범위도 넓어져서 강화도 군인은 물론이고 경상도, 충청도의 군인들도 합세하여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앞세워 궁궐로 쳐들어간다는 일정을 세운 뒤 거사일은 8월 29일로 잡았다. 이 폭동 계획은 변절자의 밀고로 미수에 그쳤다. 군인들과 빈민들의 항쟁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인 1882년 2월에 임오군란 못지 않은 대규모의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좌포청 포졸들의 토색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평소 하층민들의 단속을 맡고 있던 포졸들이 동대문 부근에서 토색질을 하다가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합세하여 포졸들을 때려 쫓아내었다. 매를 맞고 도망쳐온 포졸들은 화를 참지 못해 동료 포졸들과 함께 동대문으로 돌아와 주민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던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포도대장 집에 가두어 버렸다. 이때 잡힌 군인들과 주민의 수는 합쳐 31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4명은 맞아죽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포도청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훈련도감 군인들은 탁기항을 중심으로 하여 포도청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주민들과 동료 군인들을 구해내고 시체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포도청을 파괴하고 토색을 일삼던 포졸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건은 단순히 포졸들의 토색질 때문에 발생하였지만 그 뒤에는 당시 증폭되어가는 민씨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봤을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군인들의 불만은 이미 무장 봉기할 정도로 고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임오군란은 보편화되어 있던 군인들의 원성이 집약되어 터진 일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민씨 정권도 일련의 군인 폭동 미수사건을 겪으면서 이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구식군인들에게 밀린 군료의 일부를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군인들의 군료는 13개월이나 밀려 있는 상태였다. 1882년 6월 초에 전라도 조미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6월 5일에 도봉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한 달분의 군료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밀린 군료의 극히 일부이지만 군인들은 그나마 받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고 쌀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쌀에는 물에 젖어 썩은 것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었다. 게다가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당시 선혜청 당상으로 있던 민씨 척족의 하나인 민겸호 등이 중간에서 군료를 횡령하고는 농락을 부린 것이다. 군인들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포수 김춘영, 유복만 등이 주동이 되어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하여 시비가 격렬해지자 다른 군인들도 합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직 등은 핑게를 댈 뿐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군인들은 집단으로 그를 때려눕혔다. 당시 궁중에 있다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민겸호는 포졸들을 풀어 김춘영, 유복만 등 주동자를 체포하여 포도청에 가둔 뒤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그 가운데 2명을 처형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 등은 6월 9일 통문을 돌려 군인들의 결집을 호소하는 등 구명운동을 펼쳤다. 통문을 본 군인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위영 군인들은 그 혼란 속에서도 지휘 체계를 존중하여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이경하를 찾아가 사태를 설명하고 억울하게 잡혀간 군인들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이 찾아간 이유는, 그는 대원군에게 발탁된 무장이었으므로 당연히 민겸호와 같은 탐관들을 비난하고 무슨 조치를 취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경하는 자신은 급여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변명한 뒤 서면으로 민겸호에게 건의해보겠다고 하면서 사태 해결에 대해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경하는 넌지시 민겸호에게 직접 가서 따져보라는 여운을 남겼다. 상관에게 배신감을 느낀 군인들은 당사자인 민겸호의 집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민겸호는 집에 없고 경복궁에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그의 하수인들이 있었지만 군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였다. 오히려 모욕적인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군인들은 끝까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김춘영 등에 대한 구원운동을 펼쳤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인들은 더이상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군인들의 폭동은 터지고 말았다. 그들은 먼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여 때려부쉈다. 민겸호의 집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민씨 정권에 대한 도전과 항쟁을 뜻한다. 실제로 군인들은 폭동을 일으키면서 "이왕 죽을 바에야 원한을 풀고 나라를 위하여 거사를 하고 죽자!"라고 소리치며 결의를 다졌다. 이것은 단순히 군료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다음 행동을 보면 이러한 면이 확연히 드러난다. 민겸호의 집을 쳐부순 폭동군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동별영으로 몰려가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접수한 뒤 서울 중심거리인 종로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폭동군들은 기세를 몰아 포도청으로 진격하여 투옥되어 있던 동료들을 구하고 정치범들이 갖혀 있는 의금부를 급습하여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 이후 강경한 어조로 위정척사를 주장하다가 체포된 백낙관을 풀어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폭동군들이 일본과 미국 등 외세의 침략 행위을 반대한다는 면에서 위정척사론자들과 뜻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몸이 된 백낙관은 몰려온 군인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조정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우선 거사를 지도할 지도자가 필요할 것이니 이를 위해 대원군의 지휘를 받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에 찬성하고 대원군이 머물고 있던 운현궁으로 달려가 대원군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대원군 역시 민씨 정권에게 밀려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무장을 한 폭동군들의 지지를 다시 정권을 잡는 데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대원군이 폭동군 대표자들에게 어떤 내용의 밀계를 내렸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후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전 해에 있었던 이재선의 모역사건 당시의 거행 계획을 답습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폭동군들은 대오를 둘로 나누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한 부대는 서대문 밖 경기감영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세 명이 폭동군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무기고를 털어 완전 무장한 폭동군들은 이날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다. 이때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이 군복으로 변장하고 군인들을 지휘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다른 부대는 강화유수 민태호 등 척신과 매국적 고위 관료들의 집을 차례로 습걱하여 모조리 파괴하였으며 민씨 정권이 놀이처로 삼고 있던 '치성터'를 공격하여 부숴버렸다. 또한 이들은 별기군병영인 하도감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안에 있던 별기군 소속 군인들이 폭동군에 호응하여 가담하였다. 폭동군이 몰려오자 교관 호리모도는 도망을 쳤으나 폭동군들의 손에 잡혀 처단당하였다. 6월 9일의 폭동은 일본공사관 앞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모든 폭동군들이 결집하여 일본공사관을 에워쌌다. 그러자 서울의 수많은 빈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 행위가 바로 조선을 망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폭동군들(이제부터는 빈민들이 포함된 상태이다.)은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일반 빈민들은 돌을 던지고 군인들은 활과 총을 쏘아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였다. 폭동군의 공격이 점점 심해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하나부사 공사는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뒤 어둠을 이용하여 마침내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군중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폭동 첫날밤을 무위영 등에서 세우는 동안에 이태원, 왕십리 등에 사는 빈민들이 계속하여 폭동군에 합류하였다. 날이 밝자 무위영, 장어영 소속 군인들은 물론이고 별기군 소속 군인들 대부분도 폭동군에 가담하였다. 서울 시내에서 근무하고 있던 군인들 대부분이 이 폭동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편,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국왕 고종은 자기의 시종군을 동별영에 보내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줄테니 즉시 해산하라는 왕명을 전달케 했다. 그러나 폭동군들이 고종의 권고를 들을 리 만무였다. 그러자 고종은 무위대장 이경하를 급히 불러들여 "동별영으로 즉시 가서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나머지는 즉시 해산시키고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난감한 입장에 처한 이경하는 수행원 몇 명을 데리고 동별영으로 가서 폭동을 중지하고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이미 터져버린 분노의 불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폭동군들은 수행원 가운데 한 명을 처단함으로써 자신들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경하의 회유와 협박이 실패로 끝나자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폭동의 원인 제공을 한 민겸호 등을 파면시켰다. 그러나 이제 폭동군들의 목표는 몇 사람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민씨 정권과 일본 등 외세를 타도하는 반봉건적, 반침략적인 것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중첩된 모순에 의해 폭동 규모는 점차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폭동 이틀째인 6월 10일 사태는 반봉건, 반침략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져 이 해 체결된 조미통상조약의 주역이었던 영돈녕부사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집을 때려부쉈다. 이최응은 대원군의 형으로서 대원군 정권 때에는 등극을 하지 못하다가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중임을 맡아 굴욕적인 개화정책에 주동 역할을 하였다. 그의 행동이 너무 우유부단하여 사람들은 그를 '유유정승'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는 1880년 중앙조직 개편에 따라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유생들의 반발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폭동군들이 이최응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그가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이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데 앞장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미조약은 청국 양무파의 영수인 이홍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조약 이후 조영, 조독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역시 청국 양무파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양무파가 서구식 자본주의를 여과없이 조선에 심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일환에서 이루어졌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과 청국에 의해 서구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최응 살해는 반청 의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청국 어선들은 불법으로 어로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조선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청국에 대해서도 당시 민중들은 반일 의식과 더불어 반청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합하자면 반개화, 반외세 의식이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최응을 처단한 후 폭동군들은 곧바로 창덕궁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민씨 정권의 중추인 민비를 찾아내어 처단하려는 데에 있었다. 궐내로 난입한 폭동군들은 피신처를 찾고 있던 민겸호와 경기감사 김보현을 잡아 살해한 뒤 민씨 정권의 최고권력자인 명성황후(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궁안를 샅샅이 뒤졌으나 이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갑오농민전쟁 때 토벌군을 이끌고 참가한 홍계훈의 본명이다.)의 도움을 받아 궁녀 옷으로 변장하여 탈출한 뒤였다. 민비는 윤태준의 집에 은신하다가 뒤에 광주, 여주를 거쳐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민비 색출에 실패한 폭동군들은 궁궐을 빠져나와 여러 부대로 나뉘어 다시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나 정권에 아부하는 관료들의 집을 급습하여 부숴버렸다. 이 과정에서 민가의 일족인 민창식도 살해당하였다. 또한 폭동군들은 중인 계층, 특히 역관 부호들의 집도 70여 채 이상 파괴하였는데, 이것은 역관들이 외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군민이 궁궐에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입시를 명하여 "지금부터는 크고 작은 공무는 대원군에게 물어 결정하라"고 말하여 사태 수습을 맡겼다. 이로써 대원군은 군란을 적절히 이용하여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대원군의 정권 장악은 국왕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점은 뒤에서 보게 될 '대원군 납치사건'을 일으킨 청국의 야만성을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폭동군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정의길 등이 이끄는 한 부대는 하나부사 공사를 잡기 위하여 인천에까지 추격하였다. 정의길의 부대는 내려가면서 서울의 소식을 전하고 이에 호응할 것을 호소하였다. 서울의 부대가 인천까지 와서 선동하자 그곳 군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들도 궐기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인천의 군인들이 연합된 폭동군들은 하나부사가 숨어 있는 관청을 습격하였다. 이에 놀란 하나부사는 월미도로 간신히 빠져나왔다가 마침 부근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당시 폭동군들에 의해 일본인 6명이 살해당하였고 부상당한 자가 5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폭동군들은 민씨 정권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부사를 본국으로 추방시킴으로써 불과 이틀 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군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각 지방에서도 여러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평소 일본인들과 가깝게 지낸 자들이 이때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는 개항 이후 조선의 민중들이 갖고 있던 반일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군인들의 거사 덕분에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먼저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군제 개혁을 단행, 5영의 복설을 명하고 또한 통리기무아문의 혁파와 삼군부의 복설도 명하였다. 또한 민씨 정권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하여 명성황후의 상을 공포하였다. 만일의 경우 민비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력을 복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예론을 내세운 원로와 일부 관료들이 대원군의 조치에 반발하여 대원군 재집권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는 제2단계 개혁으로 민씨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여 우선 그의 맏아들인 이재면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에 임명하여 병재 양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영의정 홍순목을 유임시키는 동시에 대원군 자신이 신임하는 신응조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밖에 대원군은 측근들을 주요 문무 관직에 임명, 신정희를 어영대장으로, 조희순을 금위대장으로, 임상준을 총융사로, 조병호를 도승지로 삼았다. 또한 삼군부의 복설에 따른 인사와 중앙의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역시 새로운 인물들을 과감히 기용하였다. 대원군이 등용한 인물들은 대체로 남인에 속하는 노정치가들이어서 측근 기용에 한계를 느꼈다. 이에 대원군은 옥에 갖혀 있거나 유배중인 죄수들을 석방시켜 주요 관직에 임용하여 정권 강화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에서 풀려난 정치범 등의 수가 거의 1천 명에 육박하였다. 이와 같이 대원군은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척족 세력을 제거한 다음에는 제도 개혁 등 주로 민생 복지와 관련된 개혁 정책을 펼쳐나갔다. 우선 각 지방의 미납세미를 거두어 들여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였던 밀린 군료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민폐의 근원이 된 신감채와 해홍채의 징수 금지, 주전 금지, 도가의 민폐 금지 및 무명잡세의 징수 금지 등을 명하여 민심 수습에 주력하였다. 이렇게 단시일 안에 개혁 정책을 펴던 대원군 정권은 불과 33일 만에 무너지고 만다. 그 원인을 간단히 줄여보면, 1)명성황후의 국장 절차를 강행하는 동안 시간을 낭비하여 일본과 청국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해 양국의 출병 의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2)고종 친정 10년간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 대원군 정권이 들어섰을 때 이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하였다는 점 등이다. 특히 이중에 군란 처리를 위하여 청일 양국이 재빨리 출병하였을 때 이에 대한 분석을 하지 못한 대원군의 시대적 한계성이 정권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대원군은 7월 13일에 일본과 청국의 협작에 걸려 납치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경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6월 12일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시에 구조되어 귀국길에 오른 하나부사 일행은 3일 후인 15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조선 내에서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을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타전하였다. 이때 하나부사는 8명의 일본인이 희생당했다고 하면서 부산과 원산에 있는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하나부사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는 다음 날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일부 관료들은 이 군란을 이용하여 군함을 파견하면 조선을 확실히 종속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회의는 강경, 온건 두 파로 의견이 갈려 대립하였다. 이때 주도권을 잡고 있던 육군경 야마가카는 중재에 나서 강경론에 찬성하되 출병 시기는 온건파가 주장하는 대로 담판 교섭 결과를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자는 의견을 제안하였다. 결국 파병을 하되 그 시기만이 문제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과 교섭을 해보기로 하고 총괄적인 책임을 이노우에 외무경에게 맡겼다. 일본으로서도 혼란한 틈을 타 언제 러시아가 남하할지도 모르고, 함부로 군대를 파병하다가는 청국과 마찰이 빚어질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노우에는 즉시 시모노세키로 달려가 하나부사에게 기밀훈령과 훈조를 전달한 다음 그에게 전권을 주어 육군을 인솔, 조선 정부와 교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하나부사에게 전달된 기밀훈령은 모두 9개조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조선 정부에 대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추려보면, 문서에 의한 사죄, 위자료 지급, 범인의 체포 처형, 정부 또는 당국자가 교사한 경우에는 강제 배상도 인정할 것, 조선 정부의 책임이 중대할 경우에는 거제도 또는 울릉도를 할양시킬 것, 일본공사관의 병력 보호, 함흥.대구.양화진의 개시, 일본 공사관원.영사관원의 대륙 여행 자유 보장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은 임오군란을 기화로 자기들의 이권을 챙긴다는 계산이었다. 즉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통상 관계의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밀명을 받은 하나부사 일행은 1개 중대의 호위 병력을 인솔하여 7월 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나부사는 7월 7일에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요구 조항이 적혀 있는 책자를 제출하고 회답 기한을 3일내로 한다고 통고하였다. 이같은 일본측의 일방적인 통고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어나 일부에서는 무력으로 일본 세력을 물리치자는 주장도 비등해졌다. 쇄국정책을 펼쳐 외세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있는 대원군은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일본측이 제출한 요구 책자를 반송하는 한편, 일본 군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인천에 있는 청군에 연락을 취하여 빨리 입경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일본측과의 교섭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청군은 일본 군대보다 뒤늦게 인천항에 도착해 있었다. 청측에서 군란 소식을 알게 된 것은 6월 18일로서 주일본 청국공사 여서창이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에게 보낸,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조선인의 습격을 받아 하나부사 공사 등은 일본으로 도망해 돌아가고 일본은 군함을 파견했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통해서였다. 당시 이홍장은 상을 당해 고향에 가있었기 때문에 장수성이 대신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직을 임시로 맡고 있었다. 여서창의 전보를 받은 장수성은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에 보고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통령수사제독 정여창에게 명하여 쾌선 2척과 군함 1척의 출동 준비토록 하였다. 또한 당시 남하중이던 도원 마건충에게 급히 연락하여 상해에 대기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동안 장수성은 여서창이 보내준 전문 보고를 통해 일본군의 출병 상황과 조선 왕궁의 피습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천진세관장인 주복에게 연락, 당시 천진에 체류중인 영선사 김윤식, 문의관 어윤중과 접촉하여 군란 배경에 대한 조선의 실정을 탐문하도록 하였다. 주복은 김윤식 등을 만나 군란의 배후 인물이 누구인가, 어떻게 하여 일본 공사가 본국으로 쫓겨났는지 등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려 했으나 김윤식은 오히려 내막을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접촉 과정에서 김윤식과 어윤중이 청군을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청국은 이미 조선 출병을 거의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또한 장호원으로 피신해 있던 민비 등이 뒤에서 청군 출병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상태였다. 단지 이들은 정확한 정보 입수를 위해 김윤식 등을 만났던 것이다. 출병은 조미조약 등을 주선하여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던 청국의 대조선 방침을 전면 수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것을 기회로 국제법을 악용하여 조공 관계가 아닌 완전한 종속 관계로 조선을 편입시킨다는 음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청군이 출동하기에 앞서 마건충과 정여창 등은 일단 천진에 돌아가 출병 준비를 완료하고 있던 광동수사제독 오장경과 만나 7월 4일 옌타이를 출발하여 7일에는 인천 남양부에 도착하였다. 청측은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는 대원군이 집권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 정보를 통해 정권 변동 상황에 대해 곧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청군이 인천에 들어오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원군이 보내온 서신을 받아보게 되었다. 대원군은 정도에 문제가 있지만 원래 친청반일적인 외교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일본 군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입경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원군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실수가 되리라고는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건충은 대원군의 요구대로 가창대 200명을 인솔하여 수원을 거쳐 10일에는 서울도 들어갔고 12일에는 모든 청군이 속속 입경하게 되었다. 청측은 대원군이 완전히 중앙을 장악한 것을 알고는 고민에 빠졌다. 청국의 목적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데 있는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대원군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으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고 판단하였다. 이때부터 청측은 대원군을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마건충은 일단 조일간에 중재를 하기 위해 입경 다음 날인 7월 11일에 인천으로 가서 하나부사 공사를 만나 교섭 재개를 종용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폭동군 진압과 대원군 제거 문제도 같이 거론되었다. 일본측은 청국 군대가 들어온 상황에서 유리한 입장을 견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나부사 공사는 다음날 마건충을 방문하여 조선 정부에서 전권대관을 인천에 파견하면 교섭에 다시 응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이러한 일본측 입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마건충은 그날로 상경하여 대원군을 예방하여 조일 분쟁을 해결하여 대원군 정권을 안정시키겠다는 식으로 안심시켜 대원군으로부터 답례 형식으로 오후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대원군은 마건충의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3일 오후 4시경, 대원군은 관료 몇 명과 호위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마건충의 막사로 찾아갔다. 마건충은 대원군을 친절하게 안내하여 야영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원세개의 군인들이 호위병들에게 달려들어 무장 해제를 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대원군은 마건충과 함께 한 시간이 넘도록 필담을 나누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건충은 목소리를 바꿔 강경한 어조로 대원군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마건충의 당돌한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왕은 청국의 황제가 책봉한 것이 아니오?" 마건충은 대원군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렇소." 대원군은 마건충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황제가 책봉한 이상 모든 정령은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하거늘 6월 9일에 있었던 변을 틈타 당신은 마음대로 대권을 장악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불한당을 끌어들이지 않았소? 황제가 책봉한 왕을 물리치고 왕을 속였다는 것은 실로 황제를 경멸하는 행동이 아닌가요?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국왕과 부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어찌됐든 관대한 조치를 취하리다. 이제부터는 천진에 가서 우리 조정에 애원하도록 하시오." 마치 죄인을 앞에 두고 선고를 내리는 듯한 마건충의 말을 듣고서야 대원군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원군은 밖으로 나가 호위병들을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막사 안에는 오장경과 정여창 등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미 때는 늦었다. 대원군은 이날 삼엄한 청군들의 경계 속에서 강제로 가마에 올라 납치당하였다. 청측은 밤을 도와 남양만의 마산포로 호송, 청나라 병선 편으로 대원군을 천진에 이송시켰다. 이렇게 하여 대원군 정권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청국의 입장에서 이제 남은 것은 조선과 일본의 협상과 군란을 일으킨 주동자 처벌 문제 등이었다. 대원군이 납치됨으로써 다시 왕권을 회복한 고종은 7월 14일 마건충의 건의에 따라 일본과 본격적인 협상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고종은 봉조하 이유원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인천에서 하나부사 공사와 교섭을 재개하라고 명하였다. 회담은 일본 군함 히에이호 선상에서 일본군의 삼엄한 무력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양측 대표는 7월 15일 이후 17일까지 3차에 걸친 회담 끝에 제물포조약 6조와 수호조규속약 2조에 각기 조인하였다. 이 제물포조약은 강화도조약처럼 불평등조약으로서 일본이 조선을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한층 더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었다. 우선 제물포조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1.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조선국은 흉도를 체포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 2.일본국 관리로 피해를 입은 자는 조선국이 융숭한 예로 장사지낼 것. 3.조선국은 5만원을 지불하고 일본국 관리 피해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지급할 것. 4.흉도의 폭거로 인하여 일본국이 받은 손해 및 공사를 호위한 육해군비 중에서 50만원을 조선이 부담하며, 매년 10만원씩 지불하여 5년에 완납 청산할 것. 5.일본공사관에 군사 약간 명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병영의 설치.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을 지고, 만약 조선국의 군민이 법률을 지킨 지 1년 후에 일본공사가 경비를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에는 철병을 해도 무방함. 6.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국에 사죄할 것.
어디를 봐도 조선의 입장은 들어가지 않고 완전히 일방적으로 일본의 이익과 요구만을 반영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1조는 조선의 치안주권을 무시한 규정이고, 막대한 배상금 요구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5조에서 군사 약간 명만 주둔시킨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1개 대대를 파견하여 이에 따른 경비까지도 조선에게 부담시킨 조치는 조선의 주권을 철저하게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이 쉽게 체결된 것은 전권대신인 이유원이 민씨 정권의 하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원군과 대립 관계에 있다가 민씨 정권이 들어선 후 발탁되어 일본과 청국을 오가면서 막후 교섭을 담당하는 등 종속적인 개화정책에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굴욕적인 외교가 진행되는 동안에 서울에서는 민씨 정권이 다시 세력을 회복해가고 있었고 마지막 문제인 군인 진압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엔 조선 군대가 직접 진압을 하려 했지만 군사들이 무서워하며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폭동군과 관군 사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압작전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래서 고종은 청군에게 토벌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청군에서는 폭동군 진압에 나설 용의가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군이 조선 내에서 '난당'을 토벌하는 작전을 펼침으로써 조선을 종속국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입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 3,000명은 원세개와 오장경이 나누어 맡고 있었다. 회담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7월 16일 밤부터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원세개는 군대를 이끌고 '난당의 척결'을 구실삼아 왕십리에 출동하여 군란에 참여했던 군민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오장경도 이태원 일대에서 조선측과 접전을 벌였다. 갑작스런 기습에 말린 군민들은 군장비에서나 수적인 면에서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폭동군들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과 육박전을 벌이는 등 끝까지 저항하였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었다. 청측이 자기 정부에 보낸 {마건충동행삼록}이라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기운과 힘이 다해서 잡히리라고는 것을 아는 자는 모두 칼로써 자기 배를 찔러 창자가 드러나게 하는데......이것으로 그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해산하고 있다가 청군의 공격에 당한 군민들은 이렇게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군민 170여 명을 체포하였고 그중 11명을 참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사자는 얼마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앞에서 본 제물포조약 1조에 따라 하나부사 공사는 포도청에서 송치한 손순길, 공치원, 최봉규 등 3명을 효수하였고, 또한 이진학 등 3명은 유배시켰다. 서울은 일본과 청국의 협작으로 일대 피바다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충주 장호원에서 60리 떨어진 국망산 깊은 골짜기에 피신해 있던 민비는 대원군이 납치되고 군인들의 폭동이 완전히 진압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곧바로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다시 민씨 정권이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원군파에 대한 숙청이 단행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고종은 7월 18일에 교서, 20일에는 실정 8항목을 들어 자책하고 유신을 다짐하는 윤언을 내렸다. 이러한 고종의 태도 변화는 친정체제 이후 민씨 척족들의 횡포에서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려는 자구책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유신은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민씨 척족들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오군란이 가져온 여파는 제물포조약으로 끝나지 않았다. 1876년 전후부터 조선 내에서 일본이 경제적 독점을 누리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외교를 펴고 있던 청국은 임오군란을 기화로 아예 조선을 자기들의 속국으로 삼는다는 음모를 구체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조청수륙무역장정 체결이다. 앞에서 청국이 아편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청국은 프랑스가 청국의 속국인 베트남을 1874년에 보호국으로 만듦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누리던 종주국가로서의 지위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버마를 침공하여 인도에 귀속시켰고, 영국의 압력으로 티벳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청국에 조공을 하던 유구인들이 대만에 표류되어 왔을 때 이 가운데 54명을 고산족이 살해하자 이를 핑계삼아 일본이 대만을 침공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여 사건을 마무리지었지만 이후 일본은 유구인들의 청국에 대한 조공을 금지시켰다. 다시 말해서 청국 주변국가 대부분이 조공 관계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중화대국으로서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은 아직 쇄국정책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아 청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과 러시아 세력이 점차 중국으로 몰려오자 양무파 관료들은 조선을 교두보로 삼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청국이 미국과 영국, 독일 등과 교섭하여 조선과 조약을 맺게 한 것도 이러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이제이라는 정책이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그런데 임오군란으로 일본이 자국의 이익 독점을 강화할 기미를 보이자 이에 반발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병자호란 이후 맺어진 전통적 관계를 개선, 근대적인 조약을 통해 조선을 완전한 속국으로 삼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막강한 군대를 몰고 입경한 청측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공작을 펼쳐 자국의 입장을 강화하는 장정을 체결하였다. '장정'이라는 용어는 '조약'이라는 용어와 어떻게 다른가. 조약은 그래도 상대국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할 때 쓰는 것이지만 일방적인 통고를 뜻할 때, 즉 상대국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장정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 게다가 이 장정은 비준서 교환과 같은 공법상의 절차가 아예 무시된 채 체결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한일합방 전까지 외국과 맺은 협정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무역장정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자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아예 장정 전문에서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국가간의 일체 균점하는 예와는 다르다'라고 하여 불평등조약임을 못박고 있다. 이밖에도 무역장정에는,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의 대등한 위치 규정, 청국의 일방적인 치외법권 확대, 청국의 어채권과 연안무역권 인정, 양화진과 서울에서 상점설치권 인정, 청국 병선의 내왕권 등 청국의 일방적인 요구만 가득 실려 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이후 '원세개 정권'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국에 종속화되어 모든 분야에서 청국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으며 무분별한 개화정책이 계속 진행됨으로써 국가의 존립 자체에 큰 위기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무능력하고 사대적인 민씨 정권의 횡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오군란, 최초로 일어난 반봉건.반외세 항쟁
임오군란은 민씨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민의 항쟁이었다. 그러나 의식의 미성숙과 이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군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재집권한 대원군은 왕궁 공사를 중지시키는 등 과거에 범했던 오류를 극복하며 봉건적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지만 이미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일본과 청국의 내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 정책에 의지하여 사태 수습을 하려다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어 다시 반동적인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군 3,000명, 일본군 1대대가 조선에 주둔함으로써 양국간에 대립 양상이 두드러졌고, 무엇보다도 조선이 청국의 내정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전락함으로써 파행 구조가 한층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민중들 사이에는 반일의식은 물론이고 반청의식이 보편화되었고, 이러한 상황 변화는 급진개화파들에게 위기심을 심어주어 '위로부터의 혁명'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ff 18.갑신정변 :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청년들의 혁명
갑신정변을 보는 시각
갑신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갑신정변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최초의 부르조아 혁명', 또는 '근대국민국가를 추구한 변혁'이었다는 평가이며, 다른 하나는 전자와 대립된 견해로서 일본이 뒤에서 조종한 결과 친일 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어난 타율적인 쿠데타였다는 시각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갑신정변 이후 자주적인 개화를 담당할 주도 세력이 거의 정계에서 배제됨으로써 자주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외세의 반복된 침탈 끝에 결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는 책임론적인 시각이 그것이다. 어느 쪽에도 모두 나름대로 역사적 안목과 증거를 제시하여 논점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세 이론이 갈라서는 분수령은 사료의 선택 등에 있다. 어느 사료를 사실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입장 차이는 분명해진다. 가령 갑신정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인 김옥균의 {갑신일록}은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사본만 5-6개가 남아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논쟁에 초점을 둘 필요는 없다. 우선 사료의 고증은 전문학자들의 몫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역사적 흐름 가운데서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역사 발전 과정에서 차지하고 있는 몫이 무엇이며, 나아가 그것이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면밀한 검토라고 생각한다. 우선 시기의 적절성에 대한 시비 문제와 정변의 성패 판단을 떠나서 여기서는 갑신정변이 한국 역사상 '최초의 부르조아 혁명' 또는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혁명'이었다는 시각에서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르조아 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사회와 사상과의 함수 관계가 우선 해명되어야 사건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부르조아라는 개념이 사회의 발전 과정중 근대사의 큰 전환점 구실을 했다고 봤을 때 1880년 전후에 활동한 개화파들이 어느 정도까지 한국 역사 발전 가운데 부르조아적 개혁 사상을 갖고 있었는가가 일단 궁금해진다. 일본 관학자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여 만들어놓은 것중에 하나가 '타율성론'이다. 즉, 조선 민족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개화 마저도 일본이 직접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갑신정변 역시 일본의 사주에 따라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화파를 단순히 친일파라고 몰아부치는 논리의 근거가 이러한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내면에는 엄청난 역사 왜곡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일본 관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조선 식민지화 합리론은 모두 배제하기로 한다.
개화파의 형성과 주요 활동 요약 : 한국 역사속에 내재되어 있던 개화사상
- 북학론과 개화사상의 함수 관계 조선의 역사는 이미 18세기를 거치면서 봉건적 질서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은 후 대의명분과 신분 질서를 내세우는 유교적 국가 이념의 한계성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비판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은 멀리는 이율곡이나 조광조의 개혁 사상, 가깝게는 반계 유성원과 성호 이익의 개혁론에 뿌리를 갖고 있다. 본격적인 실학의 개념이 형성된 것은 영조와 정조 때이다. 특히 정조 때에는 이익 계열인 성호학파와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가 활동하면서 현실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말그대로 실학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당시 정치에 크게 반영되지 못하였고 노론 세력의 집권으로 등장한 세도정치의 연속으로 인해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다. 필사본으로 떠돌던 박지원의 저서가 1900년 이후에 와서야 겨우 인쇄본으로 빛을 볼 정도였으니, 당시 실학자들의 사상이 봉건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위정자들에게 얼마나 불온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물론 19세기에 들어와 최한기 등 이른바 후기 실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그들의 주장 역시 현실 속에서 관철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가운데 개화파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북학파의 사상이다. 북학파는 박지원을 중심으로 지구자전설을 주장한 홍대용, {북학의}를 쓴 박제가,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 그리고 이덕무 이서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박지원과 박제가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가히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유림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를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서는 박지원의 사상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껍질만 남은 북벌론의 허구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명분론에 불과한 것이니, 그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 양반들에게 있으니 이들에게도 일을 시켜야 한다는 가히 혁신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의 선교사들을 통해 선진적인 문물을 수용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벽돌로 건물을 짓는 등 자체적인 문명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농업이나 상공업 등 전분야의 발달이 있어야만이 원활한 상품 유통이 형성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이에 따라 국가 재정도 풍부해진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토지 개혁, 각종 수레 창안 등 교통 수단 개발을 통한 물자 교류의 원활화, 분야별 기술 개발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박지원의 개혁 사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의 사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농.공.상의 역할론'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 누구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박지원의 주장은 만민 평등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대적인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북학 사상에 투철했던 인물은 박제가이다. 그는 박지원의 가장 가까운 제자로 성장하여 네 번에 걸쳐 중국을 방문, 새로운 문물들을 직접 접하면서 북학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북학의}에는 모든 방면에 걸쳐 일대 개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조로 깔려 있다. 심지어 그는 중국에 와 있는 선교사를 초대하여 선진 문물에 대한 강의를 하게 하자고 정조에게 건의할 정도였다. 천주교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그들이 지닌 선진 문물은 빨리 받아들일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벌써 개화파들이 주장한 내용들이 이미 북학파에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북학파의 이용후생적인 사상은 개화파의 현실 개혁사상의 밑뿌리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북학파의 사상이 흘러들어갔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갑신정변의 주동 인물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개화사상을 갖게 되기까지에는 개화사상 1세대들의 공이 매우 컸다. 그들이 바로 박규수, 유홍기(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등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박규수가 연암 박지원의 손자라는 점이다. 박규수는 아버지인 박종채를 통하여 자신의 할아버지가 실학의 대가였음을 알게 되었고 일찍이 박지원의 필사본을 탐독하였다. 여기서 그는 청나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고, 실제로 1861년과 1872년 등 두 번에 걸쳐 직접 중국을 방문, 세계의 정치 흐름을 읽어 내어 조선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또한 박규수는 정약용 등의 실학 사상을 섭렵해 나갔다. 처음 중국으로 다녀온 다음 해인 1862년(임술민란의 해)에는 진주민란 사태 수습을 위한 안핵사에 임명되어 진주로 파견되었다. 그는 민란의 진상 파악과 사후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갖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1866년 2월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어 그해 7월에 있었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으면서 서구 열강의 침탈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그는 제너럴 셔먼호의 침략 행위에 대응하여 선박을 완전히 불태워버려 격퇴하였다.) 이렇게 하여 박규수는 조선의 내적 모순과 국제 정세의 긴박한 움직임을 상호 관련 속에서 인식, 부국강병과 자주국가 건설의 시급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실학'을 바탕으로 '개화'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박규수와 김옥균 등이 처음 만난 시점에 대해서는 어느 때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여러 정황을 봐서 1870년 전후였을 것이다. 이때 김옥균의 나이는 20세 전후였다. 그리고 박규수는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1874년 9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박규수는 대원군에게 개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지만 뜻이 통하지 않자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박규수가 주장한 개방 정책은 자주적인 개국을 뜻하는 것이었다. 1868년 일본이 명치유신을 단행한 후에 국왕을 황제라고 칭하는 한편 조선에 보내는 서신의 형식에서 조선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자 정부에서 일본과 국교를 단절할 기미를 보였다. 이에 박규수는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자주적인 개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미 세계 자본주의의 파도가 아시아에도 밀려오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면서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였고 안으로는 근대사회를 추구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세운 정책의 특징은 근대사회 건설의 한 방편으로 아시아 침략을 설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의 입장에서 제일 관심이 가는 나라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아시아 대륙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판단, 명치유신 초기부터 정한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임오군란 편을 참조) 어쨌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던 박규수는 일본이 무력으로 침공,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을 겪기 전에 조선이 먼저 자주적인 개국을 하여 부국강병에 주력을 한다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던 대원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온 박규수는 자기와 뜻을 같이할 동지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개화사상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통하여 박규수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다가 청년층에게는 그가 신사조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랑방에 드나드는 청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때 제동에 있던 박규수의 집에 모여든 인물들이 뒷날 갑신정변을 일으킬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었다.(박규수 문하에는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김윤식 등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유학을 숭상하는 명문 집안 출신들이었다. 박규수가 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은 박지원의 저작물들이었다. 그는 김옥균 등이 유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닦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우선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보는 시각을 교정해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박규수는 {열하일기} 등 박지원의 저서를 강의하면서 화이사상의 허구성을 들추어 나갔다. 물론 박규수를 사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사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지만, 과거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김옥균 등은 아직도 중국의 학문을 중심으로 봉건적 사고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박규수는 스스로 실학과 개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던 김옥균 등에게 체계적인 사상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정약용의 사상을 가르쳐 애민 사상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조선 고유의 실학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박규수는 자주적인 개혁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박규수는 제자들에게 개화사상을 가르쳤으니, 이렇게 하여 개화파의 자주적 성격은 이때 형성되었던 것이다. 개화파는 박규수를 통하여 개화사상에 필요한 기본적인 실학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셈이다. 김옥균 등에게 본격적인 개화사상의 영향을 끼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유홍기였다. 그는 당시 신분상 중인으로서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의학에 종사하면서도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를 '백의정승'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에 나가지 않고서도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예언하는 처사였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청국어 역관으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는 중국 방문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 자주 접하게 되어 유홍기에게 서적을 구해다주는 등 정보통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옥균 등은 실질적인 개화사상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공양학파의 거두인 위원의 저서 <해국도지>를 가져와 김옥균 등에게 주어 탐독케 하였다. 이 책은 아편전쟁을 겪은 중국이 어떻게 자주적으로 개화를 하고 부국강병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쓴 위원의 대표 저작이다. 또한 김옥균 등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봉원사에 있던 개화승 이동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승려였는데 유홍기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김옥균 등은 이동인을 통하여 개화사상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한편 개신 불교적 사상도 배웠다. 이러한 교분 관계가 이어진 때가 강화도조약 체결 전인 1874년 전후에서 1876년초 사이였다. 이렇게 봤을 때 개화파는 박규수를 통하여 북학파 등의 실학을 깨우치고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 등을 통해 중국 공양학파의 신학풍을 배워 자주적인 개화사상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개화파는 여러 선배들을 통하여 세계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자주국가 건립을 위해서는 부국강병, 그리고 만민이 평등한 국민국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의 타율성과 친일성을 강조하는 주장에 꼭 나오는 부문은 개화파 인물들이 일본에 가서 당시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던 후쿠자와 유우쿠치의 조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추종하는 사대적인 사상까지도 배웠다는 내용이다. 물론 김옥균 등이 후쿠자와를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친일적인 행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조금 무리가 있다.(물론 일부 개화파 인물들은 일본에 대해 사대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옥균은 10대에 강릉에서 이미 율곡 이이의 사상을 배우면서 자주적인 사상의 중요성(율곡이나 이황은 중국식 유학에서 벗어나 조선의 유학을 세웠다는 것을 김옥균은 당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을 알고 있었다. 박규수를 찾아가 실학을 배우고 이러한 기본틀을 바탕으로 신사상을 배웠기 때문에 후쿠자와의 사주를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사상성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요약하자면, 개화파는 박규수를 통하여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 사상과 정약용의 목민 사상을 계승하였고, 실제로 중국을 방문하여 세계의 동향을 익히고 온 오경석과 그의 동료인 백의정승 유대치 등에 의해 개화사상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들이 개화사상을 정립,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화사상의 근본 뿌리가 북학론 등 기존의 실학에 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이 있기 전에 개화파는 일본과 가까운 관계가 되지만 사상 자체까지도 일본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었다. 개화파들이 일본을 가까이한 것은 근대화의 참조로 삼으려 했던 것이며 나아가 일본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단순히 결론지을 수 없기 때문에 갑신정변이 있기까지 나타난 개화파의 활동을 먼저 분석해 본 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개화파와 수구파의 정치적 투쟁 개화파는 처음부터 갑신정변과 같은 혁명적인 방법으로 수구파를 타도하고 새 국가를 세울 용의는 아니었다. 단지 가능성으로 남겨둔 것은 사실이었다. 개화파의 본격적인 활동이 있었던 1880년 전후는 그런대로 정세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갈 수는 없었다. 개화파가 형성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혁의 범위와 방법 등을 놓고 두 갈래 나뉘어졌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는 온건과 급진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먼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관료적인 성격을 띤 인물들로 이루어진 온건개화파가 있다. 이들은 현재의 정권을 점진적으로 개량하여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수구파와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력을 동원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급진개화파의 혁명론이 본격화된 것은 수구파와 대립이 첨예화되면서이지만 어쩌면 이들의 행적으로 보아 개화파 초기부터 그러한 의견 대립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김옥균 등이 제도권 내에서 활동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옥균 등은 고종의 신임을 얻어 중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김옥균 등은 일단 제도권 내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우선 그동안 규합해놓은 개화파의 동지들이 관료 기구에 대거 참여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래야만이 고종에게 가까이 가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정부 내에서 개화파가 본격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1882년에 들어와서였다. 개화파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벌여 마침내 1882년 7월 25일에 정부 안에 새로운 기구인 기무처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기무처는 정치, 경체,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안건으로 떠오르는 중요한 문제들을 집약, 협의하여 그 대안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여 의정부를 거쳐 임금의 승인을 얻도록 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 기무사는 정책협의기구인 동시에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이때 고종의 어명에 따라 임명된 기무사의 관리들로서는 김홍집, 어윤중, 홍영식 등 주로 개화파와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었다. 즉 고종 역시 개화파의 개혁 정치에 동조하여 이들을 통해 수구파의 세력을 견제할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두르던 민씨 일파의 수구파는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개화파의 세력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무처가 생긴 지 세 달이 지난 10월 20일에는 재정과 통치기구 조절을 위한 기관인 감성청이 생겼다. 이 감성청의 책임자격인 구관당상에는 온건개화파에 속하는 어윤중이 임명되었고 그 하부 조직에 여러 문인들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명단 가운데 낯익은 이름이 들어 있었다. 다름아닌 김옥균의 스승 유홍기(유대치)였다. 그는 중인 출신으로 잡과에도 합격하지 않았지만 이미 김옥균 등을 통해 고종에게 알려져 있어서 중앙 직원으로 발탁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 고종이 교서를 통하여 사회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겠다고 하였지만 단시일 내에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홍기가 중앙에 진출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제자들이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유홍기는 평직원이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는 등 제도개혁에 온 정열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 달 뒤에는 부사용이라는 종9품직을 받아 정식 직원이 되었다. 김옥균 등을 가르친 스승까지 동원될 만큼 당시 개화파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감성청은 12월 29일에 가서 국가기구에 대한 일련의 개혁안을 작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이 개혁안에는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기구는 모두 통폐합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재 등용하는 데 있어서 문벌이나 출신 성분에 구애됨이 없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500년 동안 지속된 조선의 봉건적 통치기구를 뒤엎는 제안으로서, 개화파의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같은 해 12월 4일에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통리외무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각각 개편 단행하였다. 인적 구성을 보면 수구파와 개화파가 혼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곧 두 파간의 대결이 매우 치열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파의 행동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구파가 아니었다. '감성'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감성청은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구나 제도를 통폐합하거나 폐지시키는 일을 주업무로 하였다. 이에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구파 중심의 관료들이 감성청의 일에 방해를 놓기 시작하였다. 감성청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방해가 매우 집요하여 대부분은 실시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결국 해가 바뀐 1883년 5월 10일에 감성청은 폐지되고 말았다. 감성청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개화파에 대한 수구파의 공격이 본격화된 것임을 뜻한다. 이 즈음에 한성판윤에 있었던 박영효는 광주유수로, 김옥균도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좌천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나중에 파면 조치당하였다. 그러나 개화파의 투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관료 조직 내에서는 투쟁의 한계점이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김옥균 등은 1883년 봄부터 경기도 광주에 특별 군영을 설치하고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이즈음부터 김옥균 등은 무력에 의한 혁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군대의 구성원은 임오군란 때 해산당한 군인들과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청년들로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서 뒷날 정변 때 핵심이 된 신중모, 김봉균, 이인종이 이때부터 김옥균 등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군대는 편성과 훈련 방식을 근대적 방법으로 하여 짧은 시간 안에 다른 군대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갖게 되었다. 김옥균 등은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개혁 단행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1882년 7월부터 1883년 2월까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에 후쿠자와 등 일본의 유명 인사들과 접촉을 가졌다. 앞에서 잠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김옥균의 행동이 갑신정변을 논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후쿠자와는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미국 등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한 이후 해외 여행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1860년 도쿠까와 막부는 약 8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통상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네덜란드 군함인 칸린마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는데, 이 군함을 일본인 선장과 선원들이 직접 운행하였다. 즉 일본은 문호 개방을 하고난 직후부터 서양의 선진 기술을 습득하였다는 뜻이다. 이때 사절단원 중에 바로 후쿠자와도 끼어 있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그는 1835년에 나서 1901년에 죽었다.) 이렇게 20대부터 서양 문물을 직접 접한 후쿠자와는 일본의 국내 사정을 정확히 인식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정립해 나가 급기야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흔히 그가 속한 파벌을 자유민권파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의 사상은 계몽주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서구 열강이 동양을 침탈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아시아 국가들이 이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연대론을 펼쳤다. 특히 1880년 초기까지만 해도 그는 청일연대론을 주장하였다. 그럼 왜 조선을 여기서 빠뜨린 것일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아직 비문명 국가이기 때문에 연대보다는 우선 '개조'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세계를 문명과 비문명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물론 청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청국이 문명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의 강국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결국 후쿠자와의 사상은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동양의 유일한 문명국인 일본이 나서서 아시아가 서구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동양맹주론) 그래서 조선은 문명의 빛을 받아 개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조선을 위해 개조론을 펼친 것은 아니다. 그는 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선을 개조시켜야 하지만 이를 거절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협박해도 상관없다는 데까지 자기 주장을 진전시켜 놓았다. 이는 곧 정한론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 내의 관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그가 주장한 '동양맹주론'은 결국 조선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면 일본도 위험해진다는 우려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들 타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을 위해서, 무로써 보호하고 문으로써 유도하여 속히 문명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러한 후쿠자와를 김옥균이 만났으니 오해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오균이 후쿠자와 등 일본의 정객들과 만난 것은 일본의 개국 과정, 현 일본의 상황, 그리고 조선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갖고 있는가 등을 알아보아 조선 개혁에 그들을 이용할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초기 개화파의 자주적인 외교 활동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후쿠자와를 처음 만난 사람은 김옥균이 아니라 개화승 이동인이었다. 그는 북한산 봉원사 출신이었는데 일찍이 오경석과 유홍기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개화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김옥균을 중심으로 개화파 구성원들은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본의 정세와 근대화 실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동인을 밀사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동인은 정식 출국이 아니라 밀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특히 김옥균은 자기 토지를 팔아 여비를 장만해줄 정도로 이동인의 일본행을 적극 추진하였다. 사실 김옥균이 중심이 되어 이동인을 일본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이때가 1798년 7월 초순 전후였다.(당시 국가의 허락 없이 출국을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는 먼저 부산에 있는 일본 승려들이 지은 절인 본원사(이와 똑같은 절이 일본에도 있다.)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여 밀항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는 교오또에 있는 본원사에 머물면서 일본 정객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이동인은 이 절에서 8개월 정도 머물다가 도꾜에 있는 천초별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 그곳 승려의 소개로 후쿠자와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개화파와 후쿠자와 사이의 첫 만남이었다. 후쿠자와를 만난 이동인은 그를 통해 일본이 어떠한 경위를 밟아 근대화 정책을 수립하고 외국 문물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이동인은 일본이 영국을 모델로 삼고 근대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왕이면 영국을 직접 방문할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고 판단하여 주일 영국공사를 찾아가 사토우 서기를 사귀게 되었다. 당시 사토우 역시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인의 방문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이동인을 만나기 2년 전인 1878년 9월에 군함 에개리아호를 타고 제주도로 가 근해에서 조난당한 바바라 타일러호 문제를 해결한 뒤 부산으로 뱃머리를 돌려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하려다 동래부사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사토우는 이동인에게 한글을 배우겠다고 하였고 이동인은 영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하여 둘은 금방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사토우는 본국에 이동인에 대해 보고하여 그를 조선의 대리인으로 삼아 수교를 재요구하자는 보고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영국이 조선과 교섭을 가지려고 노력한 것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0년대 전후부터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펼치던 러시아는 이리(중국 북방 경계지역)를 중심으로 한 국경선 문제로 청국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는 이미 대원군 집권 때부터 두만강 유역에 나타나 부동항 쟁취를 위해 부단히 국경을 넘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아야 한다는 전략 아래 조선과 국교를 맺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또한 이면에는 일본이 조선에서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저의도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청국의 입장에서 마지막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조선을 러시아 세력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미국 등이 조선이 조약을 맺도록 이홍장은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동인은 이러한 한반도 정세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강화도조약과 같은 불평등조약이 아닌 자주적인 외교를 통하여 대등한 조약을 맺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고종의 정식 밀사가 된 후에 본격화되었다. 이동인이 일본에 머물고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1880년 7월 31일에 김홍집 일행을 1876년에 이어 제2차 수신사로 삼아 일본에 보냈다. 그 목적은 부산의 관세 문제를 조정하는 일과 인천 개항에 대한 조선의 입장 전달 등 조일간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홍집 역시 일본의 근대화 양상을 알아보는 데 더 주력하였다. 그런데 김홍집은 뜻하지 않은 조선인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동인이었다. 천초별원에 유숙하고 있을 때 이동인과 상면한 것이다. 김홍집은 어떻게 해서 이동인이 일본에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홍집이 전에도 이동인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동인의 밀항은 극비리에 진행된 일인 만큼 일본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김홍집은 이동인이 일본어에 능숙하고 세계 정세에 밝음을 알고는 그와 함께 귀국하여 고종을 알현하도록 하였다. 고종을 만난 이동인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해 자기의 독특한 견해를 밝히고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탈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국가와 자주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아직까지 무력 충돌이 없는 영국과 자주적인 조약을 맺어 조선이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미 그가 일본에 머물고 있는 동안 구상된 내용들이었다. 또한 그는 미국과도 교섭을 갖되 '불립교회', 즉 기독교 침투를 방지하고 또한 외국산 수입 품목에 대해 10%의 관세를 적용해야 한다는 구상도 마친 상태였다. 1884년에 김윤식 등이 조미조약을 맺을 때 '불립교회'를 관철시켰던 것도 이동인의 초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러한 이동인을 고종은 조선 개국의 '밀사'로 삼아 다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동인을 밀사로 삼은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다.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청국은 조선과 미국 등이 조약을 맺게 할 방침으로 '친중.결일.연미책'을 골자로 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 내용 가운데 중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땅덩어리는 실로 아시아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다투게 마련이며,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동(중국 본토)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질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강초를 공략하려 할진대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어떠한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이어짐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책략>은 청국의 입장에서 조선을 향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 일본의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청국의 입장과는 별도로 미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책략>을 놓고 정부에서는 격렬한 토의를 벌였고 위정척사론자들은 연일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종은 이동인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동인은 미국과 수교보다는 영국과 수교를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밀사 임무를 마친 후에도 사토우 서기와 계속 접촉하면서 수교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영국과의 수교보다는 미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입장에서는 이동인의 태도를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이동인이 일본에서 막후 교섭을 하고 있는 동안에 국내에서는 조미전쟁을 상기하면서 미국과 수교를 반대한다는 여론과 이를 당분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신중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따라서 아직은 미국과 조약을 맺을 단계가 아니라고 보고 이동인은 어느 정도 임무를 수행한 뒤 한 달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동인이 귀국할 즈음인 1881년 초에 고종은 새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는 등 행정을 개편하여 자주적 개화에 노력하려 하였다. 이때 신설된 것이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창설이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의 정치적 영향을 받은 면도 있다. 어쨌든 이동인은 이러한 개편에 따라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고종은 그에게 신식군대 창설에 따른 신무기와 군함 등의 구입건에 관해 정보를 입수해오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는 1881년 3월 9일에 통리아문의 참획관 이원희와 같이 속히 일본으로 출발하라는 고종의 명령을 받고 분주하게 여행 준비를 하다가 그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일설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누가 이동인을 죽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추측만이 있을 뿐 정설이 없다. 그만큼 당시 개화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암투가 매우 치열했다는 의미이다. 흥선대원군이 자객을 보내 죽였다는 설도 있고, 김홍집이 이동인의 영국 수교에 반대하여 그를 죽였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신빙성이 가는 추정은 민씨 일가의 사주로 누군가 계획을 세워 암살하였다는 설이다.(구체적으로 이최응이라고 지목하는 설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고종과 일부 개화파는 이동인을 밀사로 임명하여 자주 외교를 수행하는 한편, 무기나 군함을 구입하여 부국강병을 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막으려는 매국적 세력에 의해 이동인의 자주적 외교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의 자주국가 건설 의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통해 더욱 분발하여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지속적인 개혁 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자. 이동인은 결국 김옥균과 깊은 상의 끝에 일본 밀행을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개화파(특히 급진개화파에 속했던 인물들) 구성원들은 초기부터 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외교 활동에 발벗고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동인 등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서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만난 것이고 그가 일본의 주요 정객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김옥균은 그를 정치적 목적에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청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은 앞서 임오군란 편에서도 본 바 있다. 따라서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에 대해 내정 간섭을 하며 속국 취급을 하자 일본은 조선에서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격하되었음을 인식하고 개화파에 접근, 친일 정권을 세워야겠다는 기본 전략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이런 시각에서 갑신정변을 접근하면 일본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갑신정변은 일본의 조종에 따라 일어난 쿠데타'라는 주장이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화파를 조종하여 친일 정권을 세울 계획이었다면 어째서 김옥균에게 줄 차관을 취소하였을까. 또한 김옥균의 차관 교섭 등을 왜 일본 정객들은 방해하였을까. 이러한 점이 갑신정변이 지니고 있는 애매모호한 점이다. 그러나 의문점을 그냥 놔두고 넘어갈 수는 없다.
개화파 축출 위기와 혁명 전단계
앞에서 급진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정변을 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급진개화파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을 속국 취급하는 데 발분하여 자주근대국가 건설 계획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혁명을 준비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혁명 준비를 한 것이 1884년 봄 전후였다고 한다면 임오군란 이후와 1884년 봄 전후까지 급진개화파는 변혁을 향한 마지막 합법적인 활동을 벌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청군 주둔, 대원군 납치, 민씨 정권 재수립 등으로 청국은 다른 열강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조선 내정을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 주둔한 오장경과 원세개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은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이홍장이 천거하여 파견한 뮐렌도르프는 해관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권까지도 침해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민씨 일가가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친청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조청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재정고문 진수당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을 공공연하게 남대문에 써붙일 정도로 당시 조선은 청국의 식민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청국은 조선 정부에 대해 "무릇 외교에 관한 일은 모두 청국에 문의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청장 오장경은 조선 국왕 고종 면전에서 협박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서울에 주둔한 일반 청군들의 행패도 극심하여 민중들 사이에는 반청 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갑신일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을 탄압하고 방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청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개화파의 목적이 자주국가 건설에 있으니 당연히 자기들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청국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면서 급진개화파를 정계에서 내몰기 위한 계략을 세우는 등 김옥균 등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청국의 대조선 정책을 등에 업고 민씨 일가는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활동은 쉬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다. 급진개화파가 혁명을 선택한 데에는 한반도 국제 정세의 긴박한 움직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4년 여름 이후 안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개시되었고 이 틈을 타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존립 자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급진개화파는 청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조선에 전선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본격적인 혁명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또한 수구파는 급진개화파를 정계에서 축출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고 뮐렌도르프는 아예 드러내놓고 김옥균을 제거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지금 조선을 위해서 해독을 없애는 일은 당오전에 있지 않고, 마땅히 급히 김옥균을 제거하는 데 있다. 백 가지로 임금님께 무함하여 그대들에게 해가 되게 하는 자는 곧 김옥균 한 사람 뿐이다. 그대들은 어찌해서 해독이 되는 근본을 생각지 않고, 그 말단만을 다스리려 하는가.(중략) 청컨대, 그대들은 서로 화합해서 국가의 제일 폐해가 되는 자를 없애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뮐렌도르프나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는 전부터 김옥균의 외교 활동이나 개화파의 국내 개혁 활동을 교묘한 수법으로 탄압해왔다. 김옥균은 점진적인 개혁에 소요되는 자금에 쓸 외국의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동분서주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가 재정은 민씨 일가의 횡행으로 바닥을 보인 때였고 더군다나 급진개화파의 개혁 활동에 그들이 재정을 지원해줄 리가 만무였다. 1882년 말에 김옥균은 요코하마 은행에서 17만원의 차관을 얻었지만 일본정부의 농락으로 17만원 중에서 제물포조약에 따른 50만원 배상금 가운데 1차 지불액 10만원에서 우선 5만원을 공제하여 실제로는 12만원을 차관받게 되었다. 이 자금도 정사 일행의 여비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개화파 청년들의 학비에 충당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당시 일본에는 훗날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등이 유학중이었다. 민씨 일가가 민중들을 수탈하여 모은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있을 때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농락을 감당하면서 차관을 얻어 쓰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물론 개화파는 상인들에게 모금 형식으로 자금을 마련한 적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개혁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너무나 모자랐다. 또한 김옥균은 다른 국가에게 차관을 빌릴 계획도 세워보았지만 국제 정세의 복잡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개화파는 차관의 위험성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차관을 얻으려 했던 것은 일본의 자본을 이용하여 개혁을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임시 방편이었다. 개화파가 창간한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제2호에 이러한 전술적 태도가 분명히 나와 있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어서 내정을 혁신코자 함은 임시 방편으로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집트와 같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찌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을 것이랴.
이러한 뚜렷한 취지를 가지고 김옥균은 거금을 차관하기 위하여 1883년 6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전에 미국의 외교관 푸트가 일본에 유학중이던 윤치호의 통역 안내로 서울에 들어왔을 때 윤치호는, 일본 외무성 소속의 외무대보 요시다가 "그대는 내 말을 김옥균에게 전하라. 만일 국채위임장을 얻어 가지고 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한 말을 김옥균에게 전해주었다. 김옥균은 이 전언을 듣고 곧바로 고종에게 사실을 고하여 수구파의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위임장을 얻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전에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동안에 위임장 문제가 거론되어 이것이 있으면 차관을 허락하겠다는 일본 외무성의 동의가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위임장을 보여주면서 약속한 300만원 차관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어이없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는 김옥균이 외채 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뮐렌도르프에게 사촉하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싱이찌로를 설득, 김옥균이 가지고 간 위임장이 위조 문건이라고 본국에 보고하도록 책동하였다. 차관에 실패한 김옥균은 후쿠자와의 주선으로 다시 일본 제1은행에서 급한대로 20만원을 차관하려 했으나 이것 역시 일본 여야 정치세력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기본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에게 차관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분명 일본 정부는 개화파를 통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할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가 감추어져 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개화파를 사주하여 친일 정권을 세우자는 논란이 일고 있었다. 청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 일본이 조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에 대륙 진출을 위한 정책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1882년 10월에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는 대조선 정책 방향을 세 가지로 나누어 기초한 적이 있다.
1.관계 열강들과 협력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시킬 것. 1.조청 '종속' 문제에 관하여 청국과 직접 교섭할 것. 1.조선의 개화파에 원조를 주어 자발적으로 독립의 성과를 올리게 할 것.
일본이 일부 차관을 허락한 것은 세번째 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급진개화파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 정책이 조선의 부국강병을 노리는 데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기본 전략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개화파에게 차관을 줄 수도 안 줄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당시는 청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 전이기 때문에 김옥균 등이 과연 세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뒤에 개화파가 정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협조적인 자세로 돌변한 일본의 태도를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한론을 주정책으로 삼고 있는 일본 정부로서는 김옥균에게 차관을 해줄 경우 오히려 역이용 당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자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식민지로 삼을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봤을 때 급진개화파와 일본 정부 사이에는 교묘한 신경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옥균 등은 이러한 신경전에서 일본 정부의 이중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내부의 힘만으로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급진개화파가 혁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수구파의 정치적 탄압에 있었다. 수구파는 급진개화파의 인물들을 차츰 정계에서 축출하여 지방 한직으로 보내거나 아예 관직을 박탈시켜 버렸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박영효도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로 쫓겨갔고 김옥균은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좌천되었다. 또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급진개화파들이 자체 양성한 군대를 수구파가 접수한 일이다. 수구파는 박영효를 파면시킴과 동시에 그가 훈련시키고 있던 신식군대 약 1,000여 명을 민씨 일가에 아부하며 권세를 누리고 있던 윤태준, 한규직의 군대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또한 급진개화파의 핵심 참모인 신복모를 해방총독의 자리에서 쫓아내었다. 그러나 신복모는 실망하지 않고 부평으로 내려가 정변에 참여할 군인들을 계속 양성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급진개화파는 계속 노력하였지만 무력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1884년 음력 9월 17일에 김옥균은 비장한 어투로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수년 동안 평화적 수단으로 고생을 이겨내면서 모든 힘을 다하였으나 이에 따른 성과는 없을 뿐 아니라 오늘은 이미 죽을 지경에까지 빠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적들을 눌러버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의 결심에는 오직 한 길이 있을 따름이다.
또한 청불전쟁이 발발할 즈음에서 민중들 사이에 반청의식이 더욱 고조되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만행과 청국 상인들의 비행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민씨 정권에 대한 원성도 더욱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최초에는 오히려 깨우쳐 주면 알더니 중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이미 개시됨으로써 인심이 점점 갈라지고 거동이 점점 달라져서 비록 백 가지로 타일러 인도하여도 하나도 듣지 않으니 조석으로 초조하여 침식을 다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1884년 3월, 청국 내부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친왕과 이홍장의 정책에 반기를 든 반대파의 실력 행사로 공친왕이 물러나고 광서황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이 집권하는 정변이 일어난 후 바로 청불전쟁이 터졌다. 이렇게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자 오장경은 조선 주둔군 3,000명 가운데 1,500명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 상태였으므로 원세개는 위기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급진개화파가 무력 혁명을 결정한 것은 1)수구파의 위협과 탄압 2)청불전쟁에서 청국이 연패를 거듭하므로 청국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 약화 3)러시아의 남하 등 한반도 정세의 위기 고조 등 국내외로 얽힌 모순을 타파하고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본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청국과 접전을 벌일지도 모르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조선은 전쟁터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하므로 정변을 서둘러 계획한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급박한 위기가 곧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폭풍전야, 혁명을 위하여
9월 17일, 무력 혁명을 결정하고 그 방법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때 나온 의견은 대략 다음과 같다.
1)민영목, 한규직, 윤태준 등을 암살한 뒤 그 죄를 민태호, 민영익 부자에게 전가하여 민씨 일가 타도 2)일본공사관 낙성식 때 위 세 사람을 죽이고 똑같이 사후 처리를 함 3)민비의 조카인 경기감사 심상훈을 이용하여 홍영식의 별장인 백록동 취운정에서 연회를 차리게 한 뒤 수구파 일당을 처단 4)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낙성식 때 수구파 요인들을 제거 5)북악산 아래에 새로 지은 김옥균의 별장 신축 낙성연에서 수구파 요인 암살 이러한 의견을 놓고 토의한 결과 네번째 의견인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은 추후 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날 이후부터 혁명 결사의 모임은 은밀한 가운데 계속 이어졌다. 9월 21일, 김옥균은 청군과 민영익 등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인종을 시켜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는 한편, 다음 날인 9월 22일에는 서광범의 집에 모여 군대 동원 문제와 이에 따른 부수 사항에 대해 토의하였다. 전에 박영효가 양성하던 군대가 윤태준 등의 휘하로 강제 편입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 박영효에게 속해 있던 군인들과 연대할 것을 거론한 것이다. 또한 1883년 1월 함경남병사로 임명된 윤웅렬은 이미 북청에서 5백여 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군대로 양성해 놓았는데 1884년 10월 경에 그중 250명이 친군영 후영에 편입되어서 갑신정변의 무력으로 동원되었다. 여기에 김옥균 등이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이 1884년 7월에 귀국해 있었으므로 이들을 주요 지휘관으로 배치하는 문제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밖에도 갑신정변 당시 끝까지 싸운 충의계라는 비밀결사는 신복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을 개화파로 완전히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김옥균은 고종을 자주 찾아가 독대한 가운데 청불전쟁의 전망이나 국제 정세에 대해 말하고 청국에 의존하는 것은 곧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고 역설하면서, 변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국가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조정에는 간신들이 가득차서 청나라 정부와 결탁하여 권세를 농락하는 등 국가에 한심한 일이 한둘에 그치지 않으니.....마땅히 힘을 다하여 정치에 힘써 안으로는 제도를 혁신하여 백성들의 힘을 기르고 밖으로는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 문을 열어 새 지식을 흡수하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입니다.
김옥균의 말에는 변혁을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김옥균은 앞으로 있을 정변에 고종이 당황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옥균 등은 청군과 민씨 일가의 경계가 강화되고 급진개화파의 잦은 모임에 의구심을 갖자 10월 13일과 14일에 연속으로 모여 마침내 거사일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로 정하고 당일에 있을 행동 방안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하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갔던 일본공사 다케소에가 9월 12일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전날과 달리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김옥균은 다케소에가 서울로 돌아온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혹시 거사를 그르칠까봐 근심하였다. 다케소에는 김옥균에게 앞으로는 모든 일에 협조할 것이라고 하면서 매우 우호적인 자세로 나왔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다케소에 개인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대조선 정책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8월에 들어 청국의 푸젠 함대가 격파되는 등 청불전쟁의 전세가 청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이를 틈타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는 여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유민권파 쪽에서 먼저 주일 프랑스공사 상크위치와 접촉하는 등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원조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다케소에를 급히 조선에 보낸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 등은 이러한 일본의 조삼모사 식의 태도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김옥균 등은 일본 주둔군이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말 것과 다케소에 자신 역시 경망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그런데 다케소에는 이러한 당부를 무시하고 새벽에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가뜩이나 긴장되어 있던 서울 거리에 난데없이 총소리가 들리자 온갖 소문이 나돌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고종은 김옥균에게 명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하였다. 김옥균은 즉시 다케소에게 달려가 항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마트면 급진개화파의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될 뻔하였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조선군과 청군이 계엄 상태에 있어서 일본군들이 오해를 한 모양이라고 보고하여 불리한 입장을 모면하였다. 이렇게 일본측은 급진개화파의 거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 등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전, 특히 일본과 청국의 모순 관계를 역이용하기로 결정, 비록 150명밖에 안 되는 일본군대지만 이들이 만일 거사에 참여하여 주요 거점을 지킨다면 청군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략을 세워 일본군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가 있기 10일 전인 10월 7일에 김옥균은 영국과 미국측 공사를 찾아가 가까운 시일 내에 정변이 있을 것이니 놀라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다음 날엔 일본공사를 찾아가 똑같은 말로 일본측의 협조를 구하였다. 10월 9일에는 외지에 나가 있는 동지들을 속히 서울로 집결토록 조치하고 거사에 대한 세부 계획을 점검하였다. 10월 12일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종을 다시 찾아가 정변의 불가피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10월 13일에는 우정국 낙성식에 초대할 명단을 점검하고 10월 14일에는 사관생도들까지 모여 당일에 있을 행동 지침을 최종 결정하였다. 만일 10월 17일에 비가 오면 거사일을 다음 날로 연기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거사의 신호로 국왕의 아들이 혼례식을 올린 별궁을 방화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비가 올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도면밀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거사일을 맞게 되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다 : 3일간 지속된 혁명 정부
- 혁명 첫날,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 정권 장악에 성공하다 이날 오후 7시경, 전동에 있는 우정국 연회장 안으로 각국 공사들과 수구파의 대표들인 민영익, 한규직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낙성식에는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낙성식이 있기 몇 시간 전인 4시쯤에 김옥균은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해 잠시 우정국에 들렀었다. 우정국에는 홍영식 등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홍영식은 일본공사 다케소에는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오지 못하고, 독일 영사도 병이 나서 못온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수구파 핵심 인물들은 참석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윤태준은 야간 근무이기 때문에 궁내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옥균은 어차피 궁안으로 들어갈 것이니까 그리 걱정이 안된다고 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고종 곁에 시중을 들고 있는 내시 변수가 일부러 고종이 낮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쌓인 결재 서류를 계속해서 올렸다. 이것은 거사 후 고종을 개화파 수중에 넣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연회는 서양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옥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요리사들에게 천천히 음식을 내오라고 은밀히 지시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별궁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김옥균 등은 시간을 끌면서 침착하게 행동을 취했다. 그런데 민영익이 개화파의 거동이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김옥균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연회에 참석한 여러 공사들과 환담을 나누는 척 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김옥균에게 다가오더니 집에서 사람을 보내 찾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김옥균은 뭔가 일이 잘못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문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행동대원인 박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김옥균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박재경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급히 말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별궁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죠?"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한 것은 이 궁이 왕의 아들이 혼례를 올린 장소로서 매우 중요한 사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불이 나면 수구파 대신들이 모두 모여들 것이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모두 현장에서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자칫하다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울 판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침착하게 박재경에게 다른 지시를 내렸다. "걱정하지 말게.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우정국 가까운 초가에 불을 놓도록 하게. 빨리 움직여야 하네."김옥균의 지시를 받은 박재경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옥균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일본공사관 서기인 시마무라가 김옥균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와 물었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시마무라의 질문에 김옥균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시마무라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자 김옥균은 다른 조치를 취했으니 일정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다시 밖에서 김옥균을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김옥균은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행동대원 유혁로가 허겁지겁 김옥균에게 다가왔다. "두어 곳에 불을 놓아보았지만 또 실패했습니다. 별궁에 방화를 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지금 사방에 포졸들이 깔려 있습니다. 차라리 이곳을 직접 습격하면 어떨까요?" 유혁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우정국을 직접 칠 경우 외국 공사들이나 참석자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김옥균은 유혁로의 의견을 거절하였다. "자네 의견도 옳지만 그렇게 되면 외국 공사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졸들의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아 다시 시도해보게." "알겠습니다." 유혁로는 힘차게 대답을 하고 다시 돌아갔다. 김옥균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민영익 등은 김옥균이 자꾸 들락거리자 무슨 일인가, 하고 경계의 눈초리로 자꾸 쳐다보았다. 김옥균은 그래도 모르는 체하고 술잔을 들었다. 다시 차와 과자가 나올 무렵이었다. 이때가 10시쯤이었다. 밖에서 "불이야, 불이야!" 하는 절박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창가로 몰려갔다. 마침내 방화에 성공한 것이다. 김옥균은 북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열어제쳤다. 그러자 벌건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연회장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한규직은 불을 끄러 가야겠다고 하면서 문을 나서려 하였다. 그때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쓰러졌다. 외국 공사들은 그를 보고 당황하였다. 민영익은 불이 나자 심상치 않다고 판단,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행동대원들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행동대원들은 불을 보고 달려온 포졸들과 부닥치지 않으려고 우정국 안에 숨어 있다가 민영익이 나오자 죽이려고 공격했던 것이다. 민영익의 비명 소리에 놀란 요리사 등이 문으로 몰려 나가고 다른 수구파 대신들도 거기에 묻혀 우정국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더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침착하게 행동대원들을 데리고 나가 일정대로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는 예정대로 모두 행동하라고 지시하고는 일부 행동대원들을 경우궁에 재배치한 뒤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김옥균 등은 금호문을 통해 왕궁으로 들어가 변수의 계획대로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던 고종을 만나, 지금 청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민영익이 죽었고 왕궁도 위태로우니 빨리 피해야 한다고 거짓 보고하였다. 그때 사전에 계획한 대로 생도들과 궁녀들이 설치해 놓은 화약이 폭발하여 사방에 굉음이 진동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비, 대왕대비 등은 김옥균이 하자는 대로 따라 나섰다. 김옥균은 윤경완을 불러 당직군사 50여 명을 인솔하여 고종 등을 경우궁으로 모시라고 지시해놓고 서광범 등과 함께 뒤따랐다. 이렇게 개화파는 국왕과 왕비 등을 창덕궁에서 이끌어내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옮겨 자기 수중에 넣음으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경우궁 경비를 강화한 뒤 고종에게, 청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일본군의 보호를 받는 것이 상책이라고 설득하여 왕명으로 일본군을 경우궁 주변에 배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사후 대책으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군사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등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들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또한 수구파의 거물인 민태호, ,민영목 등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고 개화파를 배신했던 환관 유재현도 살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비를 뺀 민씨 일가와 수구파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옥균 등은 이내 밤을 새워 신정부 내각을 짠 뒤 고종의 윤허를 받아 다음날 세상에 공포하였다.
- 혁명 둘째날, 10월 18일(양력 12월 5일) : 신정부 수립과 청군의 대응여러 차례에 걸쳐 내각 변동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및 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우참찬 이재면, 호조참판 김옥균 등으로 결정지어 공포하였다. 물론 이것은 차후 변동될 수 있는 과도정부의 성격이 강했지만, 신정부 각료의 구성은 주로 개화파 인물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국왕 종친의 연립 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영의정 자리에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을 추대함으로써 기존 관료들의 거부감을 일소하여 정치적 안정을 고려하여 개혁 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조치한 것은 혁명 주도 세력으로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주동 인물인 김옥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재정을 담당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요 요직은 모두 개화파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의정 다음인 좌의정에 홍영식을 추대하여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주도할 수 있게 하였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특히 재정과 군사권을 혁명 주도 세력이 차지함으로써 정변 이후 개혁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음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다음 단계로는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각 외국 공영사에 알리는 일이었다. 신정부는 이날 아침 8시경 미국공사와 영국영사, 독일영사 등에게 각각 군사 30여 명을 보내 안전하게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고종은 이들을 접견하고 새 정부가 들어섰음을 통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왕의 이름으로 신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민씨 일가의 영수인 민비는 이날 아침, 신정부 구성 내역을 본 뒤 정변의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리고 김옥균 등을 제거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미국인 알렌의 치료를 받고 있던 민영익을 통해 김옥균 등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판단한 원세개는 개화파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을 경우궁 안으로 들여보내 민비와 연락을 취하는 등 반격에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이에 신정부가 자기 세력을 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 민비는 안에서 내응하여 청군의 공격을 유리하게 해주기 위하여 동궁까지도 동원, 경우궁은 너무 좁아 불편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이 고종 등을 경우궁으로 옮겨놓은 것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파의 소수 병력으로는 방어에 극히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비의 책동에 말려들 수는 없었다. 김옥균은 며칠만 참으면 국정 쇄신의 기초 작업이 끝나는 대로 다시 환궁 조치하겠다고 하여 고종을 설득, 경우궁 옆에 있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으로 왕가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은 편이지만 창덕궁보다는 나아 소수 병력으로도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종이 나서 다케소에에게 대왕대비의 뜻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청국 사람이 갑자기 변고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대궐이나 여기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이때 김옥균은 홍영식 등과 함께 사후 계획을 짜기 위해 다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종의 하교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케소에는 김옥균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창덕궁을 탐지한 뒤 환궁해도 좋다고 고종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왕가가 환궁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옥균이 달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김옥균은 다케소에의 경솔한 행동을 책망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옥균은 이전부터 다케소에에게 고종이 아무리 하교를 내리더라도 방어에 불리하여 환궁을 할 수 없다고 아뢰어 단호히 거절하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김옥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본공사 다케소에가 자기의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국왕의 명을 거절할 수 없어 김옥균은 할수없이 박영효를 시켜 창덕궁의 내부를 정찰케 한 다음,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그런대로 방비에 유리한 관물헌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이때가 오후 5시경이었다. '환궁'이 이루어짐으로써 혁명 세력은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이것이 갑신정변이 무산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왕 환궁이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김옥균은 창덕궁 경비를 강화하여 만전을 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개화파의 장사들로서 오랫동안 뜻을 같이해온 충의계 사람들과 사관생도, 그리고 주로 박영효가 훈련시킨 전영 가운데 날랜 군사를 뽑아 왕궁 내부 경비를 맡게 하고 그 밖으로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또한 각영 군대들을 돈화문, 홍화문, 선인문 등에 배치하였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내위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 약 50명), 중위는 일본군(약 150명), 외위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 영병(약 75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도록 한 셈이다.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날이 빨리 저물자 김옥균은 모든 궐문을 굳게 잠그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이 워낙 넓기 때문에 이 정도의 병력으로 외부 침입을 감당하기에는 극히 불리한 입지적 조건이었다. 한편, 원세개는 임오군란 때처럼 합법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기 위한 방안을 짜내기 위해 궁리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있는 원세개에게 수시로 보고하면서 명령을 하달받은 뒤 창덕궁 내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서서히 공격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청장 오조유 부대는 혁명군의 전력을 탐지하기 위해 이날 저녁 선인문으로 와서 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혁명 세력은 즉시 전투를 벌이자고 하였으나 김옥균은 아직 군장비도 정비하지 못한 등 그들과 싸울 준비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우선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실제로 청군은 이 선인문을 제1차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밤이 깊어가자, 신정부는 진선문 안방에 승정원을 두고 제반 정사를 처리하면서 다음 단계로 새 정부의 정강을 짜기 위한 토의에 들어갔다. 이날 회의는 식사도 거른 채 밤을 새워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김옥균을 중심으로 이재원,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신정부의 주요 각료들이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 결의된 것을 우승지 신기선이 정리한 다음 홍영식이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마침내 신정부의 정강이 마련된 것이다.
- 혁명 세째날, 10월 19일(양력 12월 6일) : 실패로 끝난 혁명 이날 아침 9시경, 신정부는 국왕의 전교 형식으로 정강을 공포하여 서울 시내의 요소에 내어붙였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의 정책을 민중 앞에 게시한 것이기도 하다. 후속 조치로서 같은 날 오후에 고종은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 공포한 정강을 실시하겠다는 선언을 내렸다. 신정부의 정강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어 다른 사료(예를 들면 서재필의 자서전)에는 80여 개의 조항이 넘는다고 나타나 있으나 여기서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적혀있는 14개 조항만을 거론하기로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도 협의하여 폐지할 것. 2.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여,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고르지 말 것. 3.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탐학한 관리들을 근절, 백성의 괴로움을 구제함과 동시에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4.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5.그동안 간사한 짓을 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6.각 도에서 거두어 올리는 환상제도를 영구히 폐지할 것. 7.규장각을 폐지할 것. 8.순사제도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9.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10.그동안 유배, 금고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면죄 석방할 것. 11.4영을 합쳐 1영을 만들고 그 가운데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 12.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일괄 관리하며 그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13.대신과 참찬 등은 합문 안에 있는 의정소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후에 왕의 비준을 받은 다음 정령을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 14.정부 6조 외에 일체 불필요한 관청을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이러한 혁신정강 14개조는 신정부의 정치개혁 의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정부의 정강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간략히 규명해보면 이렇다. 첫째,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조공제도를 폐지한다고 밝힌 것은 조선의 자주권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당시 내정 간섭을 일삼는 청국 세력을 축출하고 자주국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의사 표명이기도 하다. 둘째, 봉건적 신분 질서를 폐지하여 민중의 평등권을 실현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세째, 부패한 각종 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상공업을 육성하여 자본주의에 입각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양반 중심의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정치.사회 분야에 민주적 제도를 도입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정강에는 봉건적 국가 질서를 타파하고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부르조아적인 개혁 정치를 실행하겠다는 신정부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이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해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주제 등 고질적인 봉건적 병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신정부는 점차적인 개혁을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세계사 발전 단계로 봤을 때 시대적인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혁명 세력은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천명한 뒤 내각을 구성하고 정강을 발표함으로써 외형상으로는 근대적인 신정부를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하였다. 신정부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군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김옥균은 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내 전날 청군 부대가 남의 나라 궐문을 닫지 못하게 한 무례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차후에 이러한 행동을 또 한다면 단호한 조치를 내리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사관생도들을 각 영에 보내 녹슨 총칼을 정비하여 신식정예군대를 편성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갑신일록}에 따르면, '영내에 있는 무기는 거의 녹이 슬어 아무리 급한 일을 당한다 해도 탄환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조선군대의 허술함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라 할 것이다. 이럴 즈음 전날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하며 일본군들에게 밤을 새워 보초를 서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던 다케소에가 갑자기 철군 의사를 밝혀왔다. "일본군이 궁내에 주둔하고 있으면 각국, 특히 청군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오늘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려 합니다." 다케소에의 말에 김옥균은 매우 심기가 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군이 철수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는 다케소에에게 혁명군의 형편을 설명하면서 철군을 말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 군만 가지고도 방비가 가능하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십시요. 지금 각 영에 있는 총칼을 점검해보니 총은 녹슬어 탄약이 나가지 않고 칼날은 무디어서 마치 두껍기가 종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급히 총을 분해해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이런 마당에 공사의 군대가 철수한다면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3일만 기다린 뒤에 귀국 군사들이 철수한다면 차츰 나아질 것입니다. 그후에는 우리 사관생도들이 군사들을 가르쳐 경비를 하게 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다케소에는 김옥균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김옥균은 내친김에 전에 얻지 못했던 차관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다. 그러자 다케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김옥균은 자금 문제도 차츰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케소에의 태도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것인지는 김옥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케소에는 사실 청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청군 1,500명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또한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본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것도 없었다.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원세개 진영도 공격을 서두르기 위하여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원세개는 고종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적이나마 군사 출동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우의정을 지낸 적이 있는 심순택을 시켜 민씨 정권을 대표하여 정식으로 군 출동을 요청케 하였다. 청군측에서 군 출동 결정이 늦어진 것은, 원세개와 오조유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즉시 무력 간섭을 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장하였고, 오조유, 진수당 등은 일본군이 조선 국왕을 호위하고 있으니 사태 추이를 봐서 결정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론은 원세개의 주장대로 하기로 하였지만,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김옥균이 일본군을 이용한 전략이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무력으로 신정부를 몰아내겠다고 최종 결정한 청군측은 심상훈을 다시 입궐시켜, 민비에게 청군이 곧 들어가니 빨리 대왕대비, 세자 등을 데리고 궁을 빠져나와 북쪽 청군 진영으로 피신하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이렇게 사전 준비를 마친 청군은 마침내 창덕궁으로 몰려들었다. 고종이 대개혁 정치 실시의 조서를 내린 오후 3시경, 원세개는 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오조유는 500여 명을 동원하여 북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비원 일대를 포위하는 등 청군은 양동작전으로 혁명군을 공격해 들어왔다. 나머지 군사 200여 명은 후위를 담당하였다. 원세개 군대의 공격을 받은 전.후영 조선 군사들은 무기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청군의 군사력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차 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이 와중에서도 신복모가 이끄는 정예요원 100여 명은 날이 저물도록 저항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민비는 대왕대비와 세자 등을 데리고 청군 진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지만 일본군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수해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3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충의계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 1천 명이 넘는 청군과 대응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기 때문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도 김옥균 등은 끝까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물헌을 빠져나와 후원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무수한 총탄이 떨어지자 다시 후원 태극정 부근으로 고종을 피신시켰다. 고종은 더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대왕대비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고종마저 청군 수하에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혁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국왕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수없이 김옥균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모여서 움직이면 전부 희생당할 우려가 있으니 몇 패로 나누어 움직이자고 제의하였다. 그래서 홍영식, 박영교 등은 고종을 데리고 빠져나가기로 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으로 가 거기서 일본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의 손에 살해당했으며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 7명은 간신히 일본행 선박을 얻어타 일본 망명길에 오르고 말았다. 그뒤에 국내에 남아 있던 급진개화파들은 민비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었다. 이렇게 해서 흔히 말하는 대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던 것이다.
자주근대국가 건설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미리 말하자면, 갑신정변은 제도권 내에서 개혁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김옥균 등은 정변이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고 혁명을 주도했는지도 모른다. 역으로 말해서 무력 혁명을 감행해야 할 만큼 당시 조선의 내외 정세는 급박한 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책임론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갑신정변 이후 정계에 수구파만이 남아 자주국가 건설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주장하지만, 갑오농민전쟁 같은 대규모 혁명도 실패로 끝난 것을 감안할 때 갑신정변 이후 벌어진 정국 불안을 급진개화파들의 무모한 정변에만 돌리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혁명은 지식인과 민중이 결합되었을 때 이루어지지만 당시 의식 수준이나 국내외 정세로 볼 때 이러한 형태의 혁명을 바란다는 것은 더욱더 무리이다. 일면 이러한 혁명이 일어나지 못해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하지 못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갑신정변의 한계점을 논할 때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지만 당시 개화파가 처한 상황에서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일반에서는 외세를 무조건 반대하는 성향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고, 게다가 개화 자체를 매국으로 여기는 배외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그렇다고 민중 스스로 조직력을 갖고 외세와 싸울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날로 위기로 치닫는 중에 급진 개화파로서는 민중을 조직해낼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앙 정권을 장악하고 청국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점 자체가 갑신정변이 갖고 있는 시대적 한계성임은 부인하지 않는다. 결국 갑신정변은 오직 구국의 일념에서,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하루 바삐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불타는 청년들의 신념에서 비롯된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부분적으로 주동 인물들이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해 일반 민중의 중요성을 간과한 면이나 외세에 의존한 면은 이 정변의 한계성으로 지적되어야 마땅하지만, 이 정변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후대에 인식시켜 주었다는 점만 들어도 그 한계는 상쇄되리라 본다. 즉, 역사상 최초의 부르조아 혁명으로서 차후 일어나게 되는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갑신정변은 높이 평가받아도 될 것이다. 청군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더욱 외세의 자주권 침해에 시달리고 제도 개혁은 다시 답보 상태에 빠져들어갔지만, 이러한 내외 모순의 심화로 인해 오히려 민중의 의식은 한층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 경제제도 개혁의 차원을 넘어 봉건체제 타파와 외세 척결이라는 당대의 민족적 요구를 수렴하는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갑오농민전쟁이 터진 것이다.
@ff 19.갑오농민전쟁 : 민중 항쟁의 총결산
중첩된 내외 모순 : 강화된 봉건적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민씨 정권의 외세 의존성이 강화되어 조선은 열강의 침탈에 더욱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 내정 간섭을 받는 가운데 특히 경제적 침탈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 처해 있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일본과 청국은 조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청국의 경우 임오군란 이후 맺은 무역장정을 통해 얻은 여러 특권을 십분 활용하여 일본과 마찬가지로 농촌에까지 경제 침투를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구 열강까지 끌어들여 조선은 그야말로 열강의 이권 다툼 각축장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아직 농촌경제의 틀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조선경제는 쌀이 헐값으로 일본에 유입됨으로써 국내 쌀값은 갈수록 폭등하였다. 이것은 아직 지주전호제가 철폐되지 않은 상태에서 봉건적 모순을 더한층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주층은 농민들을 수탈하여 거두어들인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대신 사치품과 서양제품을 받아들여, 조선의 경제 구조는 기초부터 서서히 무너져갔다. 임술민란에서도 보았듯이 이렇게 농촌에 침투한 화폐경제는 고리대적 수탈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아 농민층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분화되어 수많은 빈농과 저임금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빈민이 생겨났다. 정부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방곡령을 내려 쌀 수출을 막으려 하였지만 지방 통치가 미약한 상태에서 방곡령은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결국 지주들과 부농층 및 악질 상인들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빌붙어 스스로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가 조선의 자생적 자본주의 경제 발달을 뿌리부터 짓밟고 말았다. 여기다가 어윤중과 김홍집 등 온건개화파 인물들마저 중앙에서 몰아낸 민씨 정권의 외세 의존성이 한층 강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따른 배상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은 바닥을 보이게 되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새로운 조세 종목을 만들거나 당오전을 남발하였다. 이에 따라 높은 인플레 현상이 일어나 경제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봉건적 수취체제는 군현 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총액제였기 때문에 생산담당자인 농민에게 그 부담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지방 관리들의 탐학은 날로 심화되었고 정부의 지방 통제가 극히 약화되어 중간에서 횡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이렇게 1)민씨 정권의 봉건적 수탈과 2)지방관들의 탐학, 그리고 3)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제국주의적 경제 침탈 등으로 당시 조선은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중첩된 내외 모순을 척결하기 위하여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1885년 3월에 고종에게 올린 한 상소문을 보면 당시 빈농과 빈민, 유랑민들로 구성된 반란군의 활동 상황과 규모 등을 짐작할 수 있다.
근일 화적(당시 지배층은 농민 반란군을 이렇게 불렀다.)의 폐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하루도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특히 호남지방이 가장 심합니다. 바람같이 모여 무리를 이루는데 그 수가 대략 만 단위에 이르고 있습니다.(중략) 심지어 포교들도 피해를 입고 고을 원들도 때때로 난을 당하여 화를 입어도 고을 원들은 이를 방관하고 다스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특히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1884년 이후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봐도 매년 전국에서 농민들이 항쟁을 벌이고 있음을 다음 표를 통해 볼 수 있다.
*1885년 - 1893년 지역별 봉기 현황
연도 민란이 발생한 주요 지역명 1885 황해도 토산, 경기도 여주, 강원도 원주 1886 충청도 음성 1888 함경도 고산, 북청, 영흥, 길주, 초원 1889 강원도 정선, 인제, 경기도 수원, 전라도 전주, 광양 1890 경상도 함창 1891 황해도 평산, 강원도 고성 | 1892 평안도 성천, 함경도 함흥, 덕원, 회령, 강원도 황천, 경상도 예천 | 1893 평안도 함종, 중화, 황해도 재령, 철도, 경기도 개성, 인천, 충청도 황간, 전라도 전주, 익산, 고부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조선전사(근대1)> 참조
위의 표는 대표적인 민란만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 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갑오농민전쟁에 가까이 갈수록 점차 항쟁의 빈도수가 높아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893년에는 실제로 이 표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갑오농민전쟁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으며, 날로 가중되는 내외 모순을 척결해야 한다는 민중 의식이 한층 고양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술민란과 마찬가지로 1893년의 농민 항쟁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이것을 조직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철두철미한 조직력과 고취된 반봉건, 반외세 의식의 이상적인 결합은 갑오농민전쟁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 : 고양되어가는 반봉건.반외세 투쟁의식
동학의 발생과 교조신원운동의 배경
갑오농민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학의 발생 배경과 성격, 그리고 교조신원운동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쟁이 동학 세력이 주도한 동학혁명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농민군이 동학의 조직력을 이용한 면이 많고 또한 동학 사상이 농민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동학과 농민전쟁 사이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에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동학(천주교, 즉 제국주의 침탈의 선봉 역할을 한 서학의 대립 개념으로 만들어낸 용어이다.)이라는 새로운 종교을 만들게 되었다. 삼정 문란 등 봉건적 수탈에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동학을 만든 것이다. 이후 최제우는 당시 조선사회를 왕조의 기운이 쇠하고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고 규정하고 1861년부터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주문을 만들고 강령을 지어 대중적인 성격을 강화했다. 누구든지 한울님을 모셔 군자가 되어 그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서학이 내세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이 땅에 개벽을 이루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보국안민 사상을 내세워 동학을 현실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종교로 만들어나갔다. 지상천국의 이상을 추구하는 동학은 급속도로 민중 계층 사이에서 번져나갔는데, 특히 삼남지방에서 동학교도의 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최제우의 사상은 당시 봉건지배층의 경계를 받아 결국 불온한 사상이라고 낙인찍혀 그는 1864년 1월에 혹세무민죄로 체포되고, 같은 해 3월 10일에 처형당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유교 이념에 위배되는 사악한 이단으로 규정된 셈이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이렇게 이단으로 규정된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다.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나아가 동학이 사악한 이단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 동학교도들로서는 시급한 선결 과제였다. 그러나 이 운동 과정에서 지도부와 일반 신도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민씨 정권하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받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은 점차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애초부터 무력 봉기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1870년을 전후하여 4차례(진천, 진주, 영해, 문경 봉기)에 걸쳐 일어난 이필제의 반란 그것이다.
이필제의 반란 기록에 따르면, 이필제가 동학에 입교한 것은 임술민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63년도이다. 그는 최제우가 혹세무민죄로 잡혀 처형당하자, 무력 봉기를 통하여 교조신원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하였다. 물론 이 봉기는 반봉건 투쟁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향반 출신인 그는 충청도 진천에 살면서 임술민란을 통해 드러난 봉건적 모순을 직시하고 동학의 조직력을 통하여 교조신원운동을 펼침과 동시에 반봉건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는 입교 직후부터 교도들을 규합해 나갔는데, 최제우 처형 이후 정부가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이필제와 같은 강경론자들에게 일제히 체포령을 내리는 바람에 그는 1869년 말에 진천을 떠나 농민 항쟁이 일어났던 경상도 진주로 피신하였다. 그는 진주민란을 통하여 이곳의 농민들이 상당히 반정부, 반봉건적 기질이 강하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주성칠이라고 자기 이름을 바꾸고 다시 동학을 통하여 농민들을 규합해 내었다. 그는 마침내 1870년 7월에 이곳에서 민란을 일으켰으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심문 기록에 따르면, 이필제는 중국으로 들어가 새 왕조을 세우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갖고 정만식, 장경로 등과 함께 농민을 규합하여 진주 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 후 금병도라는 섬을 거점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필제는 한국 고대 역사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어서 백제의 옛땅을 찾겠다는 신념으로 그러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 이필제가 북벌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사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필제의 뜻이 정리되어 나타난 민란은 흔히 '이필제의 반란'이라고 불리우는 1871년 3월 10일에 일어난 영해 봉기이다. 이 날은 바로 최제우가 처형당한 날이다. 동학교도들은 이 날을 원일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필제는 진주작변 이후 경상북도 영해로 피신, 잠복중이었는데, 이 해 2월에 최시형(그의 본명은 최경상이다.)이 박사헌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이필제는 최시형에게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형, 나는 한번 선생(최제우)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할 뜻을 갖고 있소.....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니 그 날에 거사하겠소. 다시 다른 말없이 이를 따르시오.
이 말에 따르면, 이필제의 북벌론을 단순히 황당무계한 말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반봉건 투쟁을 통하여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다소 이상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필제의 강경한 말에 최시형도 동감하여 봉기할 것을 결심하였다.(일설에는 이필제의 무력 봉기에 최시형은 반대해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시형은 이필제의 북벌보다는 교조신원에 비중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필제 등은 치밀한 계획을 짜고 동학교도 500여 명을 모아 천제를 지낸 뒤 게릴라 전법에 따라 야밤에 영해관부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부사인 이정을 문책한 뒤 처단하였다. 동학군은 성을 완전히 점령한 후 소를 잡아 나누어 먹고 탈취한 돈을 풀어 헐벗은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성을 빠져나와 영양 일월산으로 퇴각하였다. 이러한 게릴라 전법은 임꺽정의 경우를 빼고 기존에 일어났던 민란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였다. 따라서 "이는 어떠한 도적들인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며 봉건지배층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으며, 이필제의 동학군들을 두려워한 영해 주변 고을의 수령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도망칠 정도였다. 이필제의 반란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동학을 믿는 신도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화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같은 해 8월 2일에 문경에서 정기현 등과 함께 다시 봉기를 계획하였다. 봉기 거점으로 삼은 지역은 정확하게 말해서 문경조령초곡으로서, 이곳은 지리상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이면서 소백산맥의 준령이었다. 따라서 난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험준한 산중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필제는 문경읍을 습격하였다가 이에 대해 미리 알고 있던 관군의 역습에 말려 체포당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에서는 이필제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셈이다. 이필제의 반란은 1)교조신원운동, 2)반봉건 투쟁, 3)중국 정벌 등을 목표로 해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또한 임술민란에서 나타난 농민들의 경제적 투쟁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 일어날 갑오농민전쟁의 맹아가 이 안에 담겨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필제가 북벌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필제의 게릴라식 항쟁이 모두 실패로 끝난 후 정부는 동학을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뒤에서 보듯이 최시형이 무력에 의한 항쟁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도 이필제의 반란 실패 후 받은 탄압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교세가 확장되기도 전에 그 뿌리까지 뽑힌다면 동학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집단 행동 방식을 동원하여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삼례집회에서 본격화되었다.
삼례집회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1
1892년 11월 3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참가한 삼례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의 결의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 앞으로 소장이 보내졌다. 조병식과 이경식은 평소 동학교도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신도들을 잡아 가두었고 때로는 뇌물을 받고 풀어주기도 했다. 당시 동학교도들에 대한 재물 약탈이 상당히 심했는데 두 사람은 일반 농민들조차 동학교도로 몰아 착취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동학이 계속 확장되자, 두 사람은 '동학의 금령'을 내려 더 심한 탄압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리들의 탄압에 맞서 동학의 중간 직책을 맡고 있는 서병학, 서인주 등은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펼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고, 그는 처음엔 만류하다가 이를 받아들여 삼례집회를 열도록 한 것이다. 이경식 등에게 보내진 소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교조신원을 통하여 포교 활동을 공인해 달라는 것이다. 동학이 계속 이단으로 몰린다면 동학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종교의 자유를 달라는 요구이다. 이와 관련된 주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맹의 도를 하는 자가 양묵(양자와 묵자)을 가리켜서 이단이라 하고, 양묵의 도를 따르는 자가 공맹을 보고 이단이라 한다. 그러므로 공맹만이 정이고 양묵이 사는 아니다. 대개 이단이라는 것은 그의 도와 나의 숭상하는 도가 같지 않다는 바의 명사일 뿐이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볼 때 반드시 명칭의 다르고 같음을 가지고, 그 마음의 사정을 분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학은 유학과 동일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의 정통성 강조는 당시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던 유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따라서 동학은 유교를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이며 종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부당한 가렴주구를 즉시 중단하라는 것이다. 동학교도들은 상대적으로 더 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지방 관리들은 정부에서 동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리자 이에 편승하여 동학교도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탈취해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장에 실었던 것이다.
우리 도(동학)를 서학여파(천주교와 다를 바 없는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미 천주교와 기독교는 1880년대 초에 서구 열강의 압력에 의해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공인받았다.)로 지목하고, 샅샅이 조사하여 잡아 가두고, 재산을 쳐서 빼앗고, 사상자가 연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지방의 호민 또한 따라 듣고 침학하여 집을 헐고 가산을 빼앗지 않는 곳이 없다. 도인(동학교도)이라고 이름붙은 자 모두가 유랑하여 안정된 가정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일면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막아 기본 생존권을 쟁취하려는 항의에 그치는 것 같지만, 가렴주구를 일삼지 말라는 청원에는 당시 보편화되어 있던 관리들과 지주층의 착취를 중지하라는 반봉건적 의식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두번째 항의 내용은 점차 하층 교도들의 주요 투쟁 목표가 되어 갑오농민전쟁의 반봉건적 성격에 유입되었다. 이러한 내용의 소장을 받은 이경식 등은 11월 6일, 동학의 금령은 지방장관의 권한 밖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죄를 짓지 말고 해산하라고 회유문을 보냈다. 그러나 삼례에 모인 교도들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경식의 회유문에 더욱 격분하여 "지금 각 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탄압이 물보다 깊고, 불보다 맹렬해서 수령에서 서리, 군교와 향간, 토호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가산을 탈취하고 자기 집의 소유처럼 생각하며, 살상.구타.능학하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렴주구를 즉시 중지하라고 이경식에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이경식은 당황한 나머지 일단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편법으로 부당한 착취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각 읍에 내리는 한편, 교조신원에 대해서는 상부와 의논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일반 신도들은 가렴주구 반대라는 반봉건적 투쟁을 내세운 반면 상층 지도부는 교조신원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동학 내부에는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계층과 정치적, 사회적 투쟁을 벌이려는 두 가지 흐름이 이미 이때부터 대립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빈농과 빈민, 천민으로 구성된 일반 신도들의 반봉건적 성격은 삼례집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소운동과 반외세 벽보운동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2
삼례집회가 끝난 후 약속과는 달리 동학교도들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삼례집회를 주동한 인물로 서병학 등을 지목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자 서병학과 서인주 등은 다시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펼치자고 주장하였다. 최시형은 고민 끝에 서울로 올라가 국왕에게 직접 상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서병학 등은 무력 봉기를 통하여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 투쟁을 병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들은 "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혀 군대와 협동하여 정부의 간당을 소탕하고, 조정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최시형 등 동학 지도부 내의 보수파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병학 등 급진파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삼례집회를 통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급진파와 일반 신도들을 따돌린 최시형, 손병희 등 보수파 40여 명은 1893년 2월, 각기 과거보는 선비 차림을 하고는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3일 동안이나 엎드려 '포교 공인'을 골자로 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정부는 정식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상소를 거절한다고 통고하였다. 그리고 "정학을 높이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이며, 따라서 이단을 내세워 수작을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고 국법에 따라 처형할 것"이라는 국왕의 전교를 내렸다. 당시 정부는 유림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상소를 사학 집단인 동학교도들이 올렸으니 변괴라고 여기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러한 전교가 내려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서 상소의 내용이 단순히 종교의 자유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보자. 최시형 등 보수파는 이필제의 반란 후 겪은 탄압을 교훈 삼아 무력을 동원한 동학운동을 반대해왔다. 결국 보수파는 정치적 투쟁 구호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입장은 일부 급진파 접주들과 일반 신도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광화문 앞에서 상소가 벌어질 즈음에 수만 명의 신도들이 속속 서울로 상경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급진적 동학교도들의 반외세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 외국 공영사관과 외국인 거주 지역, 그리고 교회와 학당 등에 격문을 붙여 하루 속히 조선을 떠나라고 협박하였다. 제일 먼저 프랑스 공사관에 붙은 격문 내용을 보도록 하자.
너희들은 우리나라에서 금하는 법을 어겨 가면서 교당을 짓고 선교하고 있다. 만약 행장을 꾸려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3월 7일 우리 당이 너희 공사관으로 들어가 박살낼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척양운동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 붙은 격문에도 이와 똑같은 성격이 표출되어 있다.
천도는 지극히 공정하기 때문에 선은 도와주고 악은 징벌한다. 너희는 비록 오랑캐이지만 천품 받음이 대략 같음을 아는가, 모르는가?......망령되이 탐욕의 마음을 가지고 남의 나라에 웅거하여 공격을 장기로 삼고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끝내는 무엇을 하려는가?......해를 당하고 안 당하는 것은 너희들이 결정할 일이니 후회하지 말라. 우리는 두말하지 않겠으니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활동에 당시 정부와 외국 공영사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들을 잡으려 물샐틈없이 수색 작업을 하였지만 극히 일부만 잡혔을 뿐이었다. 이들은 신출귀몰하여 심지어는 외국 선교사의 집에까지 격문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도꾜 아사히 신문은 동학교도들의 활동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리해 놓았다.
동학당의 과격파는 드디어 외국인 척양운동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고, 그 일착으로서 조선 고래의 관행이었던 격문을 동대문, 남대문 및 서울 시내의 선교사 집에 붙이고, 하루가 지난 다음 다시 외국 종교를 공격하고, 또 외국 교도로서 음력 3월 7일까지 조선을 물러나지 않으면, 비상 수단을 써서 죄상을 들어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배포했다.
다른 날 실린 기사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음력 3월 7일은, 동학당이 만일 그 날까지 외국인이 퇴거하지 않을 때에는 크게 결심한 바 있다고 성명한 날이다. 외국인 등은 물론 공갈이라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날의 형세를 염려하고 있다.
동학교도들의 격문을 읽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동학교도들의 정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만큼 이들의 투쟁 활동은 상당히 조직적인 것이었다. 당시 민비의 미움을 사서 지금의 당진군에 유배되어 있었던 온건개화파인 김윤식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외국인들은 변을 당할까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거나 심지어는 여차하면 조선을 떠나려고 인천으로 몰려갈 정도였다. 서울의 주민들 중에도 짐을 꾸려 시골로 피신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학 내부의 보수와 급진의 대결이 표면화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신문에 이러한 분열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 대목이 있어 이목을 끈다.
동학당 중의 과격파는 상소의 효과가 없게 된 이래 은밀히 서울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토벌 계획을 세웠다. 한편 온건파는 계속 이를 만류하면서 다시 한번 국왕에게 상소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내의 논의가 쉽게 결정되지 못하고 그 기세가 약간 위축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울 시내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동학교도들의 반외세 투쟁을 주도한 인물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것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벽보운동을 하다가 잡힌 일부 신도들의 문초 내용을 볼 때 흔히 북접이라고 부르는 충청도 중심의 동학교도들이 아니라 남접인 전라도의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뒤에 갑오농민전쟁이 주로 남접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급진파의 벽보 투쟁은 외세에게 큰 위협을 주어 외국 군함이 인천에 입항하여 조선 정부에 대해 무력적 압력을 가하였고, 원세개는 종주국의 입장에서 사태를 우려하여 조선 정부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할 정도였다. 이렇게 조선 내외에 큰 자극을 준 급진파의 투쟁은 일단 멈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일어날 농민전쟁을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번은 무사히 끝났지만, 멀지 않은 앞날에 동학당은 반드시 천지를 뒤흔드는 큰 변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고 조선 정부는 떨고 있다.
보은집회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3
보은집회는 서울에서 벌인 벽보투쟁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열렸다. 1893년 3월 10일 충청도 보은에는 각지에서 모인 동학교도들로 들끓었다. 이들은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물리치기 위하여 의로운 투쟁에 나서자)라는 다섯 글자가 적힌 깃발을 앞세우고 외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때 선무사로 파견되었던 온건개화파 어윤중은 "집회 이후 물이 골짜기에 흐르듯이, 불이 벌판을 달리듯이 하루에 수천 명씩 밀려드니 막을 도리가 없다"고 증언하였듯이, 보은집회는 이제 단순한 집회 형식을 떠나 반봉건 반침략 투쟁 시위로 번질 기미를 보였다. '포교 공인'이라는 종교적 구호는 어느새 사라지고 '외세 척결'이라는 정치적 투쟁 구호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일반 동학교도들은 더이상 종교적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실질적인 현실 변혁을 통하여 존폐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한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윤중이 보고한 장계에는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다.
재능은 있어도 뜻을 이루지 못한 자, 욕심을 내고 더러운 짓을 하는 자들이 횡행하는 데 격분하여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각오한 자, 외국 침력자들이 우리의 재부를 빼앗아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겨 망녕되게 큰 소리를 외치는 자, 서울과 지방에서 죄를 짓고 피신하고 있던 자, 감영과 고을의 아전들로서 쫓겨난 자, 농사를 지어도 죽 한 그릇 먹을 수 없고 장사를 하여도 한 푼의 이익도 얻을 수 없던 자, 고리대업자의 빚 독촉에 견딜 수 없던 자, 상민이나 천민으로서 그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원하던 자들이 여기에 가담하였으며 온 나라의 불평 불만이 규합되어 하나의 큰 집단이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두에서 밝힌 내외의 중첩된 모순에 의해 기본적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민중들이 모여들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집회가 비록 동학이 주도한 모임이지만 이중에는 근래에 입교한 자들이나 동학을 통하여 맺힌 원을 풀려는 자들도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즉 국가와 관리들, 그리고 지주와 상인들의 착취에 시달림을 받던 소외 계층들이 동학의 변혁 사상에 호응하여 집회에 참석하였다는 것이다. 동학의 신도수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도 이러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동학의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학을 매개로 민중의 변혁 의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점 역시 이 보은집회가 갖는 의미중 하나이다. 보은집회에 당황한 정부는 급히 군대를 출동시켜 집회를 해산시키라고 명하였다. 선무사로 내려온 어윤중이 호유문을 반포하고 교도들의 뜻을 국왕에게 전하겠다고 하자 일부 보수파 지도층은 이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또한 최시형 등은 4월 2일 밤을 이용하여 잠적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군대까지 동원한 정부의 강제 해산에 보은집회는 별다른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도 보수적인 상층 지도부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보은집회는 민중들 사이에 퍼져 있는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식을 고취시켜 갑오농민전쟁 당시 인력 동원을 수월케하는 전초적 구실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그런데 보은집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 전라도 원평에서는 또다른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원평과 금구는 남접의 중심지였다.) 이른바 원평집회를 뜻하는 말인데, 이 집회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전봉준이다. 최제우가 죽은 후 동학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이고, 다른 하나는 서장옥이 주도한 남접이 그것이다. 따라서 보은집회가 표면상 북접 대표인 최시형이 주최하였다면, 원평집회는 서장옥계열인 전봉준 등이 개최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봉준은 주로 배후에서 조종하는 차원의 활동만 하고 있을 때였다. 교주의 자리는 최시형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최시형의 온건적 사상에 반대하는 남접의 활동이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평집회는 우선 보은집회 상황을 살펴가며 진행되었는데, 군대가 출동하여 보은집회가 막을 내리자 원평집회 참석자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이 집회는 집회에 대한 정부의 반응을 살펴보고 나아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성분을 분석하여 훗날 민중 봉기의 가능성을 점쳐보려는 의도에서 뿐만 아니라 북접의 온건성에 대립하여 남접을 별도의 세력으로 성장시키려는 뜻에서 개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삼례집회-상소운동과 벽보투쟁운동-보은.원평집회 등 3단계를 걸치면서 일반 신도들은 종교적 테두리를 벗어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식을 결집시켰고 이러한 전단계를 밟은 후 치밀한 계획 아래 본격적인 무장 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고부민란 : 갑오농민전쟁의 신호탄
보은.원평집회가 끝나자 일손이 바쁜 농번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동학교도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추수기에 접어들자 다시 농민들의 항쟁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893년도에는 '민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주요 민란만 따져도 15회가 넘는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추수기와 가까운 8월 이후에 집중되어 있어 봉건적 모순의 누적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이 해에는 흉년까지 들어 농민들의 생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상태에서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지주들의 수탈은 조금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부민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 전봉준의 행적을 뒤쫓아 볼 때가 된 것 같다. 전봉준(1855-1895)의 본관은 천안이고 자는 명숙, 호는 해몽이다. 키가 작은 편이라 사람들은 그를 녹두라 불렀고 뒤에 전쟁 녹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전봉준의 생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와 고창군 덕정면 당촌리가 가장 유력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봉준이 눈부신 활동을 폈다는 점이다. 매천 황현이 쓴 {동비기략초고}를 보면, 전봉준은 집안이 가난하고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방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지사를 불러 장지를 고른 적이 있는데, 그때 말하기를 "만일 크게 잘 될 자리가 아니면 원컨대 아주 망해서 자손이 없을 자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지사가 이상하게 여기자 그는 "오랫동안 남의 밑에서 살면서 구차하게 이름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 쾌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전봉준이 실제로 이러한 말들을 했다면 얼마나 현실에 대해 비통한 심정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봉준은 태인 산의리 동곡 마을로 이사한 후에는 다섯 명의 식솔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까스로 세 마지기의 전답을 얻어 농사를 지었으나 이것으로서는 식구 전체가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전봉준은 마을 아이들을 모아 훈장 노릇을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전봉준 스스로가 당시 피폐화된 농촌경제를 직접 체험하면서 당대의 구조적 모순에 점차 눈떠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니, 보국안민을 내세우는 동학에 입교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전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대해 소장을 내어 저항하다가 모진 매를 맞고 한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이때가 1892년(또는 1893년)이었다고 한다. 전봉준이 부친의 억울한 죽음의 자극을 받아 민란을 주도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현실 체험을 통하여 그는 일찍이 무장 봉기에 뜻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실제로 무력 봉기의 전단계인 등소(마을 사람들이 연명으로 관청에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법적 절차)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등소운동은 임술민란에서 언급한 향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1893년 11월에는 40여 명이, 12월에는 60여 명이 고부군수 앞으로 등소를 내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탐관이었던 조병갑이 이러한 농민들의 평화적인 저항에 응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저항하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매로 다스리는 등 더 심한 탄압을 일삼았 뿐이었다. 전봉준이 이 등소운동을 표면에 나서서 주도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1890년(또는 1892년)경에 이미 동학의 접주가 된 그는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에 등장(등소할 적에 제출하는 민원 서류)를 작성해주었다는 것이 '전봉준 공초'를 통해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전봉준은 이미 다른 방법을 통하여 반봉건 투쟁을 벌일 것을 내심 결심하고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동학에 관련된 여러 증언을 보면, 전봉준은 인근 지역에서 많은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손화중이나 김개남 등과 수시로 접촉하여 비밀리 내통하고 있었다. 또한 돌아다닐 때에도 혼자 다니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그는 낮에는 주로 생업에 종사하다가 밤만 되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여 뭔가 은밀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즈음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은 극에 달해 있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의 조카였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여러 지역의 수령을 지내는 동안에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탐학을 자행하였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때는 1892년 4월이었다. 따라서 1893년 연말에 이르러서 이 지역 농민들의 불만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이 해에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세를 징수하고 부농들을 잡아족쳐 2만 냥의 재물을 탈취하였고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를 위해 만들 공덕비에 쓸 비용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면세를 약속하고 개간을 허락하고서는 가을에 가서 전세를 징수하고, 현미 12말씩 받아야 할 대동미를 정미 16말씩 돈으로 환산해 받아서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조병갑과 같은 탐학은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횡행되었다. 이러한 착취를 견디다 못한 전라도 농민들은 유리걸식하거나 도망가기 일쑤여서 열에 아홉은 고향을 등져 마을은 텅텅 빌 정도였다고, 전라감사 군사마를 지낸 최영년은 진술한 적이 있다. 조병갑의 탐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 고부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만석보의 개수 때문이었다. 그는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구보 밑에 새로 보를 쌓게 한 뒤 추수기에 수세를 거두어 700여 섬을 착복하였다. 이렇게 심한 탐학을 횡행하는 조병갑을 타도하고 반봉건 투쟁을 벌이기 위한 결사 모임이 속행되었다. 급기야 11월에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봉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주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일 2.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일 3.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리를 쳐 징치할 일 4.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일
여기서 놀라운 것은 전봉준 등이 세운 계획이 기존의 민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즉, 전봉준의 계획이 고부항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서울로 진격한다는 것이 그 요점이라고 봤을 때 이미 전봉준은 농민전쟁을 주도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단순한 민란의 형태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무력 항쟁으로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벌이겠다는 의도이다. 따라서 고부민란은 장차 일어날 갑오농민전쟁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짜놓았는데 갑자기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때가 11월 30일이었다. 따라서 전체 계획을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근을 간지 39일 만에 그는 다시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어 부임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고부 농민들을 대상으로 수탈 행위를 자행하였다. 전봉준의 입장에서는 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목표물이 다시 생겨난 셈이었다. 마침내 이듬해인 1894년(갑오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정월 10일 밤을 기점으로 봉기의 횃불을 들어 올렸다. 정월에는 풍속에 따라 걸립패들이 마을을 돌며 액맥이 풍물 한마당을 펼쳤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들은 걸립패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마련이어서 봉기를 위한 집결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1)봉기를 위해 주도면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놓았고, 2)임술민란에서도 보았듯이 우리 고유 전통의 풍습이 얼마나 대동단결을 하는 데 용이한 매개체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호 작용을 통해 고부민란은 투쟁의식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다. 걸립패 주위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자, 전봉준은 전면에 나서서 호령하기를 "아녀자와 노약자 외에 이곳을 탈출하는 자는 처단하리라." 하고 경고하여 내부 단결을 촉구하였다. 이때 모인 장정 농민 수가 무려 1,000여 명을 넘고 있었기에 조직적인 통솔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전봉준은 봉기군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진격하게 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영원 길을 거쳐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다. 농민들은 미리 준비한 죽창을 손에 들고 11일 새벽 동헌으로 들이닥쳤다. 그런데 조병갑은 어느새 전주로 도망치고 자리에 없었다. 봉기군은 억울하게 갖힌 죄수들을 풀어주고 토지문서와 노비문서 등 봉건적 수탈의 법적 기반이었던 제반 문서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동시에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탈취하였다. 또한 아전 등 평소 탐학에 앞장섰던 관리들을 처단하고 창고를 열어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와 더불어 봉기군은 탐학의 상징이었던 만석보의 재보를 허물어버렸다. 3일이 지난 1월 14일에는 봉기군의 수는 벌써 만 명을 넘고 있었다. 한편, 전주감영으로 도망간 조병갑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봉기군을 처단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김문현은 일단 사태 추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군교 정석진과 부하 몇 명을 현지로 보냈다. 한편 전봉준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해산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정석진 일행이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이들을 수상히 여긴 봉기군에게 붙잡혀 부하들은 죽고 정석진은 도망을 쳤다. 그런데 고부민란이 일어나기 전에 다른 지역에서도 민란이 발생하였다. 전주, 익산 등지에서 관리들의 탐학을 규탄하는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부민란이 일어났고, 앞에서 본 결의문의 내용이 번져나갔는지 고부 봉기군들이 곧 서울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고부민란 소식에 접한 인근 지역 농민들도 이에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실제로 소규모의 봉기가 일어난 곳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김문현은 어쩔 수 없이 서울 의정부에 장계를 올렸다. 이때가 2월 15일경이었다. 이에 정부는 긴 논의 끝에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할 것을 명하는 한편, 김문현에게는 가벼운 견책을 내리면서 조병갑을 잡아들여 문책하라고 하달하였다. 그런데 1차 목표를 달성한 봉기군은 1월 22일을 기하여 자진 해산하고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따라서 안핵사가 내려왔을 때는 이미 고부민란이 끝난 뒤였다. 그러나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고부민란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사태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들에게 돌리면서 이를 핑계로 농민들을 약탈하고 살상도 서슴치 않고 행했다. 한편, 김문현은 전라도 각 진영과 금구 정읍 등 11개 지역에 관문을 보내 군사를 징발하여 방비할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정부의 탄압이 다시 조여오자 농민들은 백산으로 모여 재궐기한 후 고부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무장한 뒤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이용태의 탄압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드디어 본격적인 무력 항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차 갑오농민전쟁의 시작, 3월 봉기
전봉준은 먼저 무장에 수천 명의 농민군을 집결시키고 군량미를 모아 봉기에 필요한 사전 준비를 마친 뒤 선전포고문을 띄웠다. 그리고 이웃 고을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모두 분연히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규모의 농민 봉기로 발전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창의문 가운데 주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이 정의를 내걸고 여기에 이르른 것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에 있지 않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구제하고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함이다. 안으로는 탐욕에 물든 관리를 베어 죽이고, 밖으로는 횡포를 부리는 강적들을 축출하기 위한 것이다. 양반과 토호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민중과 방백과 수령들의 발밑에서 굴욕을 받고 있는 소리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깊은 원한을 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지금 곧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놓친다면 그때는 후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창의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이다. 보국안민은 말그대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뜻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뜻이 강했다. 이것은 통치 수단으로 외세를 끌어들인 정부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을 타도하자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창의문에서 볼 수 있듯이 농민 봉기의 구호는 종교성을 벗어나 정치적, 사회적 이념으로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1893년에 벌였던 반봉건, 반외세 운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동학의 접주 등 조직은 이 봉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실제로 농민군에 합세한 동학교도의 수는 상대적으로 일반 농민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와 같이 농민전쟁 초기 단계부터 전쟁의 목표를 종교적, 환상적인 것에 두지 않고 당대의 실질적인 요구에 두었기 때문에 많은 농민을 비롯한 난민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봉준은 무장을 떠나 고부와 태인 등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고부의 무기고를 털고 줄포에 있는 세곡 창고를 털었다. 그리고 고부의 백산에 진을 쳤다. 그러자 정읍,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으로 와서 합세하였다. 위의 창의문을 발표한 곳도 바로 백산에서 각 세력이 연합한 직후였다. 그 명의는 전봉준이 아니라 '호남창의소'였다. 물론 그 밑에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순으로 서명이 되어 있다. 그리고 민폐를 방지하기 위하여 4개 강령을 발표하였다.
1.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함부로 잡아먹지 말라. 2.충성과 효도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3.서양인과 일본인을 쫓아내어 성도를 맑게 하라. 4.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다 멸하라.
네번째 사항은 고부민란 사전 계획 때 결의했던 '서울 진격'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농민군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은 현 민씨 정권과 외세를 모두 축출한다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행동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동시에 전봉준은 이렇게 거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우선 그는 조직 강화를 위해 모인 농민들을 여러 부대로 편성하고 마땅한 책임자를 임명하였으니 총사령관 격에는 전봉준이 되고, 손화중, 김개남은 부대장격인 총관령을 맡았다. 봉기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농민군은 3월 29일경에 금구, 원평 등지로 쳐들어가 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전초 기지를 마련하였다. 또한 다른 부대는 부안, 태인 등지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전라감영에서는 급히 포군을 이 지역으로 급파하였다. 농민군은 작전상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포군과 맞설 채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토현전투
포군을 주축으로 한 관군을 이끈 장군은 이곤양, 정창곤, 김경호 등이었다. 이들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원평과 부안 등을 거쳐 백산을 향해 진격했다. 이 토벌군 안에는 돈을 주고 동원한 보부상 등 일반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일설에는 관군보다 보부상 부대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관군들은 가는 곳마다 노략질을 일삼고 백성들에게 밥을 지어 나르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살상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다. 이런 관군들의 횡포는 뒷날 주민들이 뒷날 농민군에게 지지를 보내는 역효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4월 6일 경, 백산에 도착한 관군들은 신식총을 쏘아대며 농민군의 진지로 돌격하였다. 많은 농민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급히 후퇴하고 말았다. 봉기 이래로 관군들과 가진 첫 접전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농민군이 오합지졸로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작전이었다. 농민군들은 싸우는 척 하면서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부안읍으로 향하는 들판의 작은 길로 접어들고, 다른 패는 고부읍 쪽 큰 길로 후퇴했다. 대장기는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관군들은 그 깃발을 보고 계속 추격하며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대오는 한순간에 흩어졌다. 그러나 흩어졌던 농민군은 황토현 중봉에 올라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맹추격을 하던 관군들은 일시 걸음을 멈추고 항토현에서 5리쯤 떨어진 손소락등에 진을 치고 농민군의 동태를 살폈다. 이미 밤은 깊어 간간히 포 소리와 총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관군들은 기습에 대비하여 소나무를 잘라 진영 사방에 불을 놓아 대낮처럼 밝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가 자욱히 깔리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4월 7일 새벽, 관군의 동태를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던 농민군들은 일제히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농민군들은 남쪽 한 면만을 비워놓고 세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관군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농민군들은 돈으로 산 민병들은 다치지 않게 하면서 정규군들만 골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곤양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관군들은 농민군들이 없는 남쪽으로 도망을 쳤으나 별로 살아남은 자들이 없었다. 황토현전투는 농민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중앙군과의 숨박꼭질, 장성전투
3월 봉기 이후 농민군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은 농민들도 지역별로 산발적인 봉기를 하고 있었다. 봉기는 점차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라도의 급박한 사태에 접한 정부는 황토현전투가 있기 며칠 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그에게 정예부대인 장위영 군사 팔백여 명을 주축으로한 경군을 주어 급파하였다.(홍계훈의 본명은 홍재희이다. 임오군란 때 내전별감으로 있던 그는 군인들이 궁궐에 들어와 민비를 찾아 살해하려 하자 궁녀로 있는 누이동생이라고 속여 민비를 등에 업고 장호원에 숨겨주었다. 이 공으로 그는 포천현감으로 승진되었고 뒤에 자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는 민비를 구해준 공로로 어느새 병마절도사 자리에까지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부대는 4월 5일에 군산을 거쳐 일단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이 부대에는 청나라 병사도 십여 명 끼어 있었는데 이들은 최신식 대환포를 다루는 포병들이었다. 그밖에 기관포 2문까지도 가진 막강 전력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여기다가 얼마 후에는 강화도를 지키는 심병도 이 부대와 합류하게 되었으니 농민군으로서도 함부로 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문현은 이에 힘입어 지방군과 민병대를 동원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전력상 열세인 농민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전주성 공략을 뒤로 미루고 중앙군과 대적할 만한 군사력을 키울 필요를 느낀 것이다. 한편으로는 북접의 호응을 기다려 양면 작전으로 중앙군과 접전을 벌일 계산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북접은 오히려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의 거사를 방해하였다. 전봉준의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의 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농민군은 남진하면서 정읍을 장악하고 고창, 홍덕, 무장 등도 점령하였다. 이곳에서도 농민군들은 관청을 습격하여 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주고 무기를 몰수하였으며 탐학한 관리들을 처벌하였다. 전봉준은 전열을 다시 가담듬은 후 홍계훈의 부대에 면밀한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정면 대결은 아직 시기 상조라는 것을 알고 부대를 여러 패로 나누어 다른 길로 북상케 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홍계훈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4월 18일이 지나서였다. 아마 홍계훈은 농민군을 얕보고 천천히 진압을 해도 늦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진을 해도 농민군과 만날 수 없었다.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시대로 중앙군을 피해 북진하여 장성에 이르게 되었다. 반대로 중앙군은 영광까지 깊숙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두 군 사이에 숨박꼭질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가 4월 22일 경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싸움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장성에 도착한 농민군은 삼봉에 진을 쳤다. 그런데 홍계훈은 자신이 농민군에게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농민군이 삼봉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급히 부대를 그쪽으로 보냈다. 이 부대의 대장은 이학승이었다.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아 삼백여 명 정도 가량이었지만 정규 훈련을 받은 중앙군이라는 점에서 섣불리 대적할 상대는 아니었다. 또한 이 부대는 신식총으로 무장한 것은 물론이고 야포와 기관포도 갖추고 있었다. 홍계훈은 이 부대를 일단 보내놓고 뒤를 따라 북진할 계획이었다. 이학승의 부대는 삼봉과 마주한 위치에 있는 황룡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관례대로 농민군을 회유하는 호유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학승은 그 답이 오기도 전에 농민군을 향하여 포탄을 퍼부었다. 포탄은 월평 장터에 떨어져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농민군 수십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장터의 농민군들은 삼봉의 아군과 합세하였다. 전봉준은 즉시 학익진을 펼치라고 한 다음 관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살펴보았다. 그 수는 수백에 불과했고 게다가 후방에는 지원군이 전혀 없었다. 전봉준은 전략만 잘 세우면 싸울 만하다고 판단하였다. 문제는 관군의 신식무기를 어떻게 퇴치하느냐였다. 전봉준은 고민 끝에 손재주가 있는 농민군을 시켜 묘한 방어용 무기를 제작하였다. 관군은 강을 건너 삼봉으로 향해 진격해왔다. 이때 갑자기 위에서 큰 대나무로 만든 장태 수십 개가 굴러내려왔다. 농민군은 장태 겉에 날카로운 칼을 여러 개 꽂고 바퀴를 달아 밑으로 밀어내렸던 것이다. 당황한 관군은 총과 활을 쏘며 산을 오르려 하였지만 장태 때문에 허사였다. 그 장태 뒤로 농민군이 3면을 포위한 채 관군을 공격하며 내려왔다. 관군이 쏘는 총알이나 화살은 모두 장태에 꽂힐 뿐이었다. 관군은 할수없이 강을 건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군은 끝까지 쫓아가 관군들을 대부분 섬멸시켰다. 이학승도 북쪽으로 도망가다가 전사하였다. 관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더이상 쫓지 않고 이학승의 목만 베어 월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관군의 대포 2문 등 여러 신식무기를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중앙 관군과 싸워 얻은 첫승리였다. 이 승리로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관군과의 싸움에서도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애초부터 계획했던 전주성 점령 작전에 돌입하였다. 장성전투 후에 잠시 쉬고 있는데 홍계훈의 부대가 북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전봉준은 부대를 재정비한 다음 4월 24일에 장성의 갈재를 넘어 바로 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는 태인을 거쳐 전주와 근접한 삼천에 이르렀다. 이날은 전주 서문의 장날이었다. 이런 가운데 농민군은 관군을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선전관 이주호와 초토사를 따라 왔던 종사관 일행 5명을 잡아 처단하였다. 처음으로 중앙 관리를 잡아 죽인 일이었다. 그만큼 농민군은 정부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성 점령, 무혈 입성
장날에 맞춰 도착한 농민군은 4월 27일 새벽 일찍 장꾼으로 변장하여 시장에 은밀히 잠입하였다. 점령 작전 개시는 정오경이었다. 한편 중앙정부는 장성전투에서 관군이 비참하게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아연실색하였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중앙군이 무너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부는 응원군을 보내야겠다는 절박감에 4월 27일 이원희를 양호순변사에 임명하여 천여 명의 병사와 함께 전주성으로 급파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주성전투는 예고되어 있었다. 정오가 되자 용마루고개 쪽에서 요란한 포소리와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와 동시에 이미 잠입해 장꾼으로 변장하고 있던 농민군들이 일제히 관군을 공격하였다. 안과 밖에서 기습을 하자 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당시 전주감사 김문현은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사전에 성 주위의 민가 수천 호를 불태웠다. 홍계훈의 부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주감영의 주력부대마저 이미 황토현전투에서 섬멸된 상태였기 때문에 김문현은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한 응원군이 전주에 도착할 날은 아직 멀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전주성은 비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기습 공격에 말린 김문현은, 이미 홍계훈이 성 안의 거의 모든 군졸들을 동워하여 나갔기 때문에 억지로 관노 등을 동원하여 막아보려다가 소용이 없자 간신히 성을 빠져나와 떨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 변장하여 용진촌으로 도망갔다. 성 안의 주민들도 농민군에게 호응하는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농민군은 무혈 입성과 다를 바 없이 전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전주성에 입성한 전봉준은 선화당을 본부로 삼고 성의 방비를 강화하라고 명령하면서 "우리는 보국안민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벼슬아치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고 거역한다면 베어버리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성 안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갔다. 전주성 점령은 봉기 이래 가장 큰 전과였다.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전쟁은 황토현전투와 장성전투 등에서 승승장구 하면서 농민군의 수는 벌써 수만 명을 넘고 있었다. 농민군은 승리의 결과로 얻은 관군의 신식무기로 재무장하는 한편 훈련된 기병대도 조직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전투 경험과 훈련을 통하여 농민의 티를 벗어나 점차 정예 군대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따라서 전주 점령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 외곽 지원부대를 사전에 마비시킴으로써 전주성 무혈 입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전봉준의 전략과 전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는 결코 감정적으로 농민군을 이끌지 않았다. 전봉준은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이에 필요한 대처 방안을 고안해냈다. 처음엔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농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관군 못지 않은 군사가 되었고, 전봉준은 특유의 용병술로 농민들을 지도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주 입성은 이러한 농민군의 변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전주 점령은 각 농민군들에게는 커다란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군이 지방 군현 등은 점령한 사례는 역사 이래로 많지만 봉건체제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도시를 차지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농민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전주를 점령하자 중앙정부와도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이것은 뒷날 서울 점령작전에 고무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전주가 함락되자 전라도의 행정체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중앙정부는 전주 함락 소식에 접한 후 통치 체계에 큰 혼란을 갖게 되었고, 청나라나 일본 등 외세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긴장을 하고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홍계훈 부대와 접전, 그리고 화약
홍계훈은 전봉준의 전술에 속아 농민군의 뒤를 밟은 꼴이 되어 전주성이 점령된 다음날인 4월 28일 아침에야 간신히 전주 남문 밖에 있는 완산 철봉에 도착하였다. 그는 장성으로 오다가 뒤늦게 전주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온 것이다. 홍계훈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너무 농민군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하다가 기습에 말린 것이다. 만일 전주성을 다시 찾지 못한다면 중앙정부에서 중징계를 내릴 것이 뻔했다. 홍계훈은 우선 경군과 전라도 일대의 지방군을 총동원, 전주성 근처의 주요 산지에 배치하여 사방에서 에워쌌다. 특히 홍계훈이 처음에 자리잡은 완산은 전주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요지로서 매우 유리한 거점이었다. 여기서 관군은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성 안으로 마구 총과 포를 퍼부어댔다. 이에 농민군 수백 명이 장태를 앞세우고 서문과 남문을 나와 관군 진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성루에서는 포를 쏘는 등 지원 사격을 하였다. 관군은 성을 벗어난 농민군을 향해 집중적으로 포탄을 터뜨렸다. 그래도 농민군은 계속 전진하며 관군 진영을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간신히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장태는 장성전투처럼 고지대에서는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산을 향해 밀고 올라가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농민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가자 관군들은 뒤를 쫓아와 서문 밖에 있는 애ㄲ은 민가 구백여 호를 불태워버렸다. 다음날인 29일에 농민군은 전날과는 반대 방향인 북문을 나와 황학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에도 별다른 성과없이 성 안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날 전투는 전날에 비해 치열해서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으로 그쳤다. 하루를 쉬고 농민군은 5월 1일에 다시 남문으로 나와 접전을 벌였으나 이 때도 사상자만 내고 성안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날 전투는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는지는 상상할 만 하다. 5월 3일 오후, 재차 관군을 공격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던 김순명과 어린 용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복용 등 귀한 인재들만 잃은 채 싸움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 날에는 홍계훈 부대의 요지인 완산을 쳤다. 북문을 통해 나와 우회하여 용머리재를 공격하였다. 이때 농민군들은 사기 진작을 위해 옆으로 늘어서서 진격하였다고 한다. 앞만 보고 전진했기 때문에 아군이 쓰러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옆 사람이 쓰러져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군은 계속 밀고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정순명, 이복용 등 맹장들이 잇달아 죽자 농민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전주성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복용의 부대원 이백여 명이 거의 전사하는 등 농민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 농민군이 분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자 주변 농민들이 대거 봉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농민군 부대는 운평을 거쳐 완산 철봉 근처에 진을 쳤으며 또 한 부대는 임실을 거쳐 완산 동남쪽에서 관군을 지켜보았다. 또한 충청도, 경상도 일대의 여러 고을에서는 산발적인 농민 폭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 전주성 내의 농민군을 원격 지원하였다. 이런 가운데 몇 차례에 걸쳐 선제 공격에 실패한 농민군은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감을 얻은 관군은 계속 성 안을 향해 포를 쏘아대고 사다리를 이용하여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전주성 주변의 농민들이 외곽에서 힘을 모아 관군을 공격하기 전에 전주성을 빨리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홍계훈으로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또한 전주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본관지이며 경기전(이성계의 위패를 모신 곳)이 있는 곳이다. 이토록 왕실과 관련이 깊은 성이 점령되었으니 홍계훈으로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전주성을 수복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관계로 관군의 공격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반복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성내에 있던 일부 농민군은 전주성이 곧 함락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으며 일부 간부들은 전봉준을 잡아 자수할 결심까지도 하였다. 이렇게 성내의 농민군 사이에 동요가 일게 된 원인은 사방을 포위한 채 관군이 계속적인 공격을 한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먼저 외국 군대의 개입을 들 수 있다. 전주가 점령당한 이틀 후인 4월 30일 중앙정부는 일부 관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청국의 원세개에게 군대를 공식적으로 출병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외국 군대 동원은 1893년 보은집회 강제 해산 과정에서 고종이 청군을 동원하자고 했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장차 민족의 앞날에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는지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청군 동원을 빌미삼아 일본도 군대 개입을 하였고 곧 청일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의 공식 요청을 받은 청국은 망설일 필요없이 조선을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5월 1일 직예제독 엽지초, 산서태원진총병 섭사성, 북양해군제독 정여창에게 출병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1,500여 명의 청군은 5월 5일에서 9일 사이에 충청도 아산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상륙한 청군 일부는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태를 탐지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3월 봉기 이후로 기대했던 최시형 중심의 북접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일 북접이 수도권과 충청도 등에서 호응을 하였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전주성에 있던 농민군은 외부와의 연락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먹을 식량마저 모자란 형편이었다. 그리고 전봉준은 여러 번에 걸친 전투에서 머리와 다리를 다쳤다. 이런 연유로 농민군의 사기는 점차 떨어져 승패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홍계훈의 입장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군들도 수차례의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관군들도 몸을 사리게 되었다. 이미 관군 가운데는 도망친 자가 절반이 넘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청군이 들어오고 일본 군대마저 들어왔다는 소식에 접한 홍계훈은 곧 정계 개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떤 형태로든 전투를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전주 인근 지방 농민들이 외곽에서 관군을 조여들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양면에서 밀고 들어와 결국 관군은 쫓겨가게 될 상태였다. 홍계훈은 자기의 신변 안정을 위해 이미 중앙정부에 과장되게 보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진다면 홍계훈은 처벌을 당할 입장에 놓여 있었으니 이러한 외곽 농민군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양쪽 모두가 나름대로 불리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소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화약이 맺어진 것이다. 그런데 화약을 맺게 된 배경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홍계훈이 이끌고 온 부대는 서울을 지키는 주력부대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울을 지킬 관군이 부재하여 통치에 허점이 생겨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 상태였다. 그래서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임시방편으로 농민군과 화해할 것을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전에 전봉준이 죽었다느니 전봉준을 잡아오면 상을 주겠다는 등 소문을 퍼뜨렸지만 농민군 내부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화약을 내걸자는 여론이 비등해졌던 것이다. 이 화약을 직접 하달한 사람은 김학진이었다. 김학진은 전주로 내려오기 전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고집을 부려 편의종사(감사나 장수 등이 현지에서 어명과 관계없이 자기 임의대로 일을 처리하는 대리 권한을 말한다. 이것은 주로 전쟁 등 비상시에 쓰이는 제도라고 한다.)를 받아내었다. 김학진은 중앙에서 정국이 기득권층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더이상 농민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즉 김학진은 전주로 내려오기 전부터 농민군과 화약을 맺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고종이 농민군을 물리치라는 말에 편의종사를 받아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김학진의 말은 홍계훈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진퇴양난의 길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는 5월 6일 간절한 어투로 농민군에게 효유문을 보냈다.
효유가 이렇게 간절한데도 너희들이 끝내 의혹을 풀지 않는구나.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에 의심을 두고 이를 좇지 않으니 어찌 그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너희들이 살기를 원한다면 속히 성문을 열 것이요, 그리하여 흩어진다면 쫓아가 잡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각 고을에 명을 내려 결코 너희들을 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금 이것은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것인즉 내가 어찌 거짓말로 너희들을 속이겠는가.
그런데 이 이면에는 무서운 노림수가 있었다는 것을 전봉준을 비롯한 지휘자들은 알고 있었다. 양호순변사로 도착한 이원희는 전봉준에게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와 있어 3국간에 어떤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농민군을 해산하라고 종용한 적이 있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외국 군대의 개입을 확인하게 되었고 김학진 등이 시간을 끌어 청군이 전주에 도착할 시간을 벌 작정이라는 것도 파악하게 되었다. 김학진의 입장에서는 화약을 맺어도 그만이고 청군이 와서 전주성을 함락시켜도 그만이었다. 이렇게 외국 군대의 개입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전봉준과 지도부는 오랜 토의 끝에 화약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만일 청군이 온다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관군들은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 전투 과정에서 조금은 거리낌을 갖고 농민군을 대했지만, 그들은 외국 군대이므로 서슴치 않고 살상을 일삼을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또한 청국에게 조선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전봉준이 화약을 맺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민족의 앞날에 대한 근심 때문이었다. 아직 외국 군대와 맞설 군사력이 없는 상태에서 명분에 얽매여 싸움을 계속한다면 외세에게 내정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꼴이 되므로 일단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전봉준은 판단했다. 이러한 전술적 후퇴는 다른 항쟁에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봉기의 목적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는 화약을 맺는 조건으로 27개조를 홍계훈에게 제시하였다. 그 골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성들을 탐학하는 탐관오리를 척결할 것. 이와 더불어 중앙 관직에서 매관매직을 일삼는 관료들을 쫓아낼 것. 둘째,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을 것. 세째, 협잡을 통하여 농민들을 우롱하는 상인들에게 법적 조치를 강구할 것.
여기에서도 새삼 농민군의 봉기 목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폐정 개혁을 통하여 봉건체제의 모순을 척결하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 요구조건 27개조는 집강소 설치 후에는 12개조로 축약한 폐정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주성 화약은 이루어진 것이다. 홍계훈은 약속대로 성을 나오는 농민군을 체포하지 않고 물침표를 발급하여 누구도 체포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1차 갑오농민전쟁이 막을 내린 셈이다.
반봉건 투쟁의 핵심, 집강소 설치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은 전주를 떠나 각지로 떠나갔다. 홍계훈은 이후 총제병영 삼백여 명만 전주에 남겨두고 서울 방비를 위해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이원희가 이끌고 온 청주의 진남병영마저 동원되었다. 이어서 김학진은 신임 전라감사가 되어 전주 선화당을 차지하였다. 전주를 벗어난 농민군들이 흩어진 곳은 각자의 고향인 무안, 고부, 김제, 태인, 금구 등이었다. 이들은 전주성의 화약이 승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전주성에 계속 주둔할 상황이 아니었을 뿐이다. 중앙정부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고 당당하게 전주성문을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고향을 향하면서도 승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북을 치고 칼춤을 추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개인별로 움직이지 않고 동향 사람들끼리 수십 명씩 모여 움직였다. 전봉준은 직접 고른 정예요원 기마대 20여 명을 이끌고 태인, 금구, 김제 지역으로 갔다. 손화중은 전라도 여러 지역을 거쳐 남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전봉준과 합류하였다. 한편 중앙에서는 홍계훈의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농민군이 패배했다고 믿고서는 일본군의 철수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으로서는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호기였던 것이다. 전주성에서 나온 농민군에게 남겨진 과제는 화약 당시 제시한 폐정개혁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당시 제시한 요구조건은 단순히 전주성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는 봉기의 정당성을 알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봉기는 무위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정부에게 구체적인 실천을 바라며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혁안이 정부의 손에 의해 실시될 것이라고 믿는 농민군도 없었다. 따라서 농민군들 사이에서는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에 따라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역사상 최초의 농민대표 행정기관이었다. 집강소 설치 이후에도 농민군은 전라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을의 수령들을 비롯한 관리들이 이미 도주한 뒤였기 때문에 모든 행정이 마비되어 있었다. 농민군은 향임 등의 협조를 얻어 농민 스스로 행정을 수행하였다. 고조선 이래로 봉기군에 참여한 농민들에 의해 자치 행정이 이루어진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도 지방 행정을 이끌어 간 계층은 중간 계급이나 지식층이었다. 아직 점령되지 않은 지역에는 여전히 관청이 있긴 하였지만 농민군은 그곳에도 집강소를 만들어 폐정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실질적으로 전라도 일대를 농민군이 점령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앙에서 봤을 때 전라도 일대는 무정부 상태였다. 비록 관청이 있는 곳이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농민군의 세력에 밀려 관리들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양호순변사 이원희의 조치에서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는 음력 5월 19일에 발표한 효유문에서 농민군에 참여했거나 집강소 활동 등 폐정 개혁에 앞장선 농민들을 박해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은 요구 사항이 있으면 집강을 통하여 관청에 제기하라고 하였다. 물론 집강소 활동 중에 일부 농민군들이 그동안 쌓인 원한이 깊어 양반들에게 횡포를 부리거나 노략질을 일삼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이 순회를 돌면서 이러한 부정을 제지하여 점차 집강소는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집강 활동을 통해 제일 먼저 쇄신된 것은 역시 고리채나 부채 문제였다. 삼정 문란으로 빚을 지고 살지 않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농민군은 집강소 설치 직후부터 부당하게 지고 있는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하고 관련 문서를 소각시켰다. 대지주들의 토지는 모두 빼앗아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집강소는 5월 중에만도 50여 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찰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나주, 남원, 운봉 등의 수령들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면서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에 김개남은 남원으로 가 군수를 죽이고 전라좌도를 담당하였고 최경선은 나주에 가서 항거를 진압하였다. 집강소 조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고책임자를 집강이라고 하였으며 하부조직원으로는 성찰, 동몽, 집사, 서기 등이 있었다. 성찰은 대체로 질서 및 치안 유지를 맡았으며 동몽은 교육 담당으로 주로 청소년층 계도에 주력하였다. 집사는 재정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집강소는 관청 못지 않은 조직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집강소는 기존 관청 건물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이렇게 농민군이 행정 체계를 갖추어 실질적으로 전라도 일대를 다스리자, 위기감을 느낀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7월 들어 중앙에는 개화정권이 들어서서 전주화약에서 전봉준이 제시한 폐정개혁의 내용이 갑오개혁으로 수용되었고, 이어 청일전쟁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또 9월에 들어서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개화정권과 연결되어 나라의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재봉기의 도화선, 청일전쟁
이미 1890년대에 들어와 조선을 강점하며 나아가서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할 계획 밑에 전쟁 준비를 끝낸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조선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나 청군이 출병하자 이것을 조선 출병의 구실로 삼아 중국을 반대하는 본격적인 전쟁을 도발하려고 서두르게 되었다. 실제로 농민전쟁이 터진 후 일본은 정보요원들을 조선에 긴급 파견하여 정세를 탐지하게 하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동원 준비에 착수하였고 정부에 출병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술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농민전쟁이 확대되고 청군이 조선에 출병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은 4월 29일에 소집된 내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무장 간섭을 단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원병 요청을 정식으로 제기하기 하루 전에 취해진 조치였다. 일제의 조선 출병조치는 거류민 보호나 청군의 조선 출병에 대한 대응 조치가 아니라 침략의 발판을 삼자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본이 조선 정부의 철군을 거절한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계속 대륙을 넘보며 청국과 대립 관계를 가져왔지만 아직 청국을 물릴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피해왔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력은 1890년대에 들어 급격히 증강되었던 반면, 청국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우위를 확보한 일본은 임오군란 이후 계속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청국 세력을 완전히 조선에서 몰아낼 계산이었다. 일본은 청국에게 같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청국은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라도 내정개혁을 이룬 뒤에 철수하겠다고 버티었다. 일본은 내정개혁 제의를 청국이 거절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일본은 교묘한 수법으로 청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마침내 일본은 7월 23일에 왕궁을 포위하여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킨 뒤 친청적인 입장을 보인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모양을 갖추기 위해 이미 노쇄한 대원군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이 생긴 것이다. 이어서 일본은 7월 25일에 아산만, 29일에 성환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뒤 8월 1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때 미국이나 영국 등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했지만 뒤에서는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일본을 통하여 자국의 국제적, 경제적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었다. 서구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본은 청군과 일대 전쟁을 벌였다. 청군은 9월 15일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게 밀려 모두 조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청일전쟁은 두 달도 안 되어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청국 세력을 몰아낸 조선은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이라는 야욕을 드러내어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전봉준 등은 일본이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삼키려 한다고 보고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것을 결심하였다.
2차 갑오농민전쟁 : 대일본 전쟁
농민군은 마침내 재봉기를 결의했다. 그러나 상대는 일본이었다. 이미 근대화 과정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싸움은 관군 때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고 농민군 지도부는 인식하였다. 청군을 물리칠 정도의 군사력이라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충청도 농민군과의 연합이었다. 9월 중순 경 전봉준은 삼례로 나와 각지 책임자들과 봉기에 대하여 의논을 거듭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북접의 최시형도 처음으로 무장 봉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중간 간부들의 설득에 설복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재봉기를 결의한 전봉준은 각 지역에 통문을 돌려 동원령을 내렸다. 그는 4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에 도착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남쪽을 친다는 정보에 따라 손화중과 최경선을 광주로 보냈다.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북상을 거듭하여 공주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조선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일본군은 1,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막강한 화력을 갖춘 정예부대였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양군 사이의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것은 공주 외각인 우금치에서 벌인 접전이었다. 이곳에서 무려 4,50여 회에 이르는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점점 남쪽으로 퇴각하여 일단 논산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때가 11월 초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주에 있던 김개남의 부대도 일본군에게 밀려 붕괴되고 말아 농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농민군에는 몰락양반, 유생 등도 끼어 있었는데,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들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도망치거나 전쟁 초기부터 있었던 민병대인 민보군 등에 가담하여 오히려 농민군을 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점차 전세가 불리해져 갔지만 농민군은 끝까지 일본군에 저항하여 논산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태인, 원평 지역으로 밀려났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최후의 항전을 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농민군의 패배로 전투는 끝나고 말았다. 강원도에서도 수천명의 농민군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여 주동자들은 대부분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재기하기 위해 흩어진 농민군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부하의 배신과 한신현의 밀고로 12월 30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뒤 이듬해인 1895년에 처형당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항쟁은 이제부터이다 : 면면히 계승된 갑오농민전쟁의 정신
갑오농민전쟁은 홍경래의 반란-임술민란-1893년까지의 각종 민란 등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민중들의 항쟁을 결집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다. 비록 갑오농민전쟁이 전면적인 봉건체제 타도를 주장하지는 못했지만 집강소의 활동에서도 보았듯이 '만민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가히 진보적인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876년 이후 심화된 외세 침탈에서 국가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한다는 기치 아래 무력 봉기함으로써 반봉건, 반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갑오농민전쟁은 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전쟁 이후 잠적한 농민들은 영학당, 활빈당으로 활약하거나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투쟁에 가담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이 지닌 반봉건, 반침략 정신을 후대에까지 면면히 계승시켜 주었다. 무엇보다도 2차 봉기에서 민족독립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전쟁이 갖고 있는 세계사적인 의의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갑오농민전쟁의 성격은 1910년 일제에게 합방된 후에도 반일 투쟁속에서 나타났고, 해방 후 독재정권과 종속적 정치 구조에 대항하는 민중운동 속에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ff 후기 : 반란과 혁명의 갈등구조
타락한 신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민중과 호족이 연합하여 국가를 건설한 '궁예의 반란'에서 시작하여 반봉건, 반침략 전쟁인 갑오농민전쟁까지, 1천 년 동안 일어난 반란과 혁명, 그리고 민중 항쟁의 현장을 되돌아본 기나긴 여행을 마쳤다. 그러나 이 여행을 마감한 뒤에도 역사는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열강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이 한층 가중되는 가운데서도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은 민족 자존을 지키고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였다. 독립협회운동이나 만민공동회 등과 같은 부르조아적 자강운동을 비롯하려 유생들과 농민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의병 투쟁, 활빈당이나 영학당과 같은 게릴라식 투쟁 등 날로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는 일본 제국죽의에 맞선 항일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1910년 합방 후에도 항쟁의 역사는 끊이지 않았다.
역사를 발전으로 보느냐, 아니면 순환이라고 보느냐, 또는 나선형 발전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은 엄청난 편차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논의는 역사철학의 몫이지, '역사'라는 구체적인 텍스트를 대상으로 오늘의 현실과 미래를 예견하는 작업에서는 먼저 고려될 사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연역법적 접근보다는 텍스트(역사)를 먼저 분석, 종합하는 귀납법적 접근이 역사학에서는 선행되어야 할 태도라는 시각에서 '반역의 한국사'를 정리하려 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상층부인 정치권이 있고 이들의 통제를 받는 민중(또는 백성, 국민), 그리고 사회경제적 변동과 국제 정세의 변화 등 하나의 사건에 얽힌 역사적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아무리 그 대상이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지탄을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위에서 제시한 모든 요인을 동원하여 분석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협한 인식에 머물 위험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궁예의 반란'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은 궁예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난폭성과 정신질환적 행태를 부각시킴으로써 그를 폭군으로 규정, 이 반란이 갖고 있는 시대적인 특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고려사} 등 봉건적 질서 개념을 갖고 있는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료에만 주로 의존한 결과이다. 즉 중세시대에 접어들어 편찬된 여러 역사 서적은 당대의 왕권과 이념에 따라 선대의 역사를 서술한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정치적 의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때 편찬된 왕조실록은 후대의 학자들, 또는 앞선 임금을 타도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도 역사 왜곡 현상은 나타나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역사의 고대나 중세를 논할 때 사용되는 사료 선택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여러 전란과 내분을 겪으며 귀중한 사료들이 소실된 상태에서 한정된 사료만을 가지고 한국역사를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벌써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 복원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사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한국역사를 이끌어온 정치적 특성이 무엇이며 내적 동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설정한 후 접근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역사는 계급간의 갈등, 사상적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부언해보기로 한다.
고려는 초기부터 고구려의 옛 강역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에 힘써 왔다. 고조선 이래로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지금의 중국 동북 지역과 해안 지방을 주활동 무대로 삼았던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고 고구려의 일부 지역만 배당받음으로써 그 영역은 대폭 축소되었다. 고려는 이렇게 날로 쇠퇴되어가는 국운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북진정책을 수립하여 이를 끊임없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러한 북진자주정책은 이미 궁예의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을 때 당시 백성들이 그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의 정기를 끊어버린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어 원래의 강역을 회복, 민족의 자주성과 자존을 되찾자는 의미이다. 그러나 궁예에게는 이런 정책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경륜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 사명은 왕건에게 돌아갔다. 그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평양(서경) 등을 오가며 민족의 활동 영역을 고구려 시대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후대 왕들에게도 계승되어 활동 영역이 한때는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왕들이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고 기회를 엿보았다는 것은 일면 왕권 강화의 수단이라는 의도도 있지만 이와 더불어 서경을 중심으로 할 경우 민족의 활동 무대는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북진자주정책이 계속 있어 왔기 때문에 묘청의 서경 천도론은 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청의 반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궁예와 왕건 이래로 계속 이어진 북진자주정책은 사대주의 세력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패배는 고려 정치사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개경 문벌귀족들의 득세로 왕권은 극히 미약해져 사회적 모순은 날로 중첩되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은 초근목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서경 세력이 아무리 개경 세력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서경천도론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개경 세력의 독주로 고려의 국운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개경 귀족들에게 반발하여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며 국정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던 무신들은 서로 유혈 투쟁을 반복하였을 뿐 누적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무신정권 때 전국에 걸쳐 각종 민란이 발생한 것이며 이러한 반발에 부딪혀 무신정권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바로 원나라의 침입이 무신정권 말기부터 시작되어 6차에 걸쳐 고려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항몽 투쟁을 벌였지만 정통성이 없는 정권하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고려는 원제국이 스스로 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명나라 성립과 원제국의 몰락으로 겨우 숨통을 튼 고려는 공민왕이 다시 북진정책을 부활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왕권 강화의 기틀을 잡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문벌귀족들이 득세하였다. 이때는 이미 모든 사회경제 제도가 와해되어 권세가들의 대토지 경영 등으로 중세사회의 기반인 농촌경제가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제반 문제에 대해 최영 등은 고려를 계속 유지하며 개혁할 것을 주장한 것이며 이성계 등 신진 세력은 역성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 발전된 봉건국가를 재건설한다는 목적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두 세력간의 갈등은 대외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를 거의 속국 취급하다시피했다. 그래서 원제국이 차지했던 곳은 무조건 자기들의 땅이라고 우겼다. 심지어는 제주도도 자기들 영토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부당한 조공을 계속 요구하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원제국이 점령하였던 요동을 넘본 것이고 이에 대해 고려는 격분하여 요동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즉 고려 초기부터 계속된 북진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여기에 반발하고 말머리를 돌려 역성 혁명을 단행한 것이다. 그의 4불가론 처음에 나오는 사대주의와 최영 등의 북진정책이 부딪혀 결국 사대정책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물론 조선에 들어와 세종 때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대하였지만 그 이북 지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어 소중화로 자처하는 등 사대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의 대외 정책은 사대주의였다. 또한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이념이기도 하다. 결국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고려의 북진자주정책은 사라지고 국내 개혁에 우선을 둔 이성계의 등장으로 중국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게 되었다. 자주정책과 사대정책에서 승리는 후자의 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세종을 거치면서 중앙정권이 안정되고 또한 여진족과의 문제만 빼놓고는 영토 문제도 과도기를 거쳐 한반도를 국토로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치에 우선을 둔 정책이 수립되어 각종 사회제도와 경제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봉건적 질서 위에 실행된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 초기가 왕권 강화의 시대였다면 중기로 접어들면서 보수와 개혁 사이의 대결이 첨예화되었다. 특히 세조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사화가 일어났고, 결국 사림들이 중앙을 점령한 뒤에는 붕당정치 시대가 열려 파벌간에 당쟁이 격화되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권세가들이나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고려시대와 비슷한 양상으로 재현되어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꺽정과 정여립의 반란이다. 두 반란은 정계 개편이 일어날 정도로 국가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모순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역사는 붕당정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고양된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고, 농업기술 발달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변동이 일어나 신분제 붕괴 등 봉건적 질서가 해체될 조짐을 보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차츰 성리학적 이념의 허구성을 깨닫게 됨으로써 밑으로부터 봉건적 질서가 붕괴될 전조를 보였다는 뜻이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이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 쟁취를 위해 일어난 정변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 사이의 알력과 대립이 감추어져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지만 훈구파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으며 인조 후에도 보수와 개혁 사이의 알력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후기로 오면서 민중항쟁적 성격을 지닌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홍경래의 반란을 시작으로 19세기 중엽까지는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민란이 수차례 일어났고, 1862년 임술민란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외세의 침탈이 내적 모순에 중첩되면서 항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안으로는 봉건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외세를 배척하는 양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세계 질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자주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적으로 몰려야 했고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강제 개방되는 수모를 겪었다. 경제 침탈을 시작으로 강대국의 이권 쟁탈전으로 전락해간 조선은 민씨 일가라는 투항주의적 정권의 손에 넘어가면서 더욱 암담한 현실을 맞아들여야 했다. 종속적 개화정책으로 인해 조선 경제는 밑뿌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정치권은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사치와 방종을 일삼기 바빴다. 이런 와중에서 종속적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빈민 세력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임오군란은 단순한 군인폭동이 아닌 당대의 모순을 척결하려는 민중 항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청국 등 외세의 개입으로 이 군란은 실패로 끝났다. 임오군란 후 조선은 청국의 속국으로 전락해갔다. 청국은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하였고 경제적 침탈을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은 긴박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지식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청국의 불법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민중과의 고리가 없었던 급진 개화파의 변혁 의지는 3일 천하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항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1894년, 마침내 그동안 고양되어온 민중의 의식을 반영하는 사건이 터졌다. 바로 갑오농민전쟁이다.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은, 1차가 주로 반봉건 투쟁이었다면 조선 점령 야욕을 드러낸 일본에 대항하여 일으킨 2차 투쟁은 반침략, 독립전쟁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중첩된 모순인 부패한 봉건 질서와 외세 침탈을 동시에 척결하려는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이상에서 봤을 때 우리의 역사는 크게 1)북진자주정책과 사대정책의 대결(주로 고려까지) 2)보수와 개혁의 갈등(주로 조선 중기까지) 3)봉건체제 고수와 자주근대국가 건설 투쟁(조선 후기) 등 3단계를 지나면서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3단계를 관통하는 흐름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한국 역사는 민중(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절대 진리를 향해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온갖 반란과 쿠데타, 민중항쟁이 일어났음을 '반역의 한국사'를 쓰면서 발견한 셈이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며 거기서 어떠한 교훈과 미래의 모습을 발견할 것인가라는 과제라고 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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