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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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고델리바(Godeliva)
축일 7월 6일
성녀 고델리바는 아무런 죄 없이 고난 받는 자의
상징이자, 플랑드르(Flandre) 지방에서는 순교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8세 때에 플랑드르의 귀족인 베르툴푸스
(Bertulfus)와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녀를 멀리하고, 터무니없는 모욕을 주곤
하였다. 그녀의 부친과 그 지방 주교의 압력에 굴복한
남편이 아내에게 돌아왔으나 태도는 전과 같았다.
한번은 남편이 출타하면서 다른 이를 시켜 아내를
살해하고는 자연사를 가장하라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남편은 유죄판결을 모면하였다.
그녀의 사후, 남편은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베르쥬-생-위녹 수도원에서 여생을 눈물로 지내다
죽었다.
고델리바가 죽으면서부터 남편 베르툴푸스
(Bertulfus)는 회개하였는데, 그의 맹인 딸이
고델리바에게 기도하여 시력을 회복한 기적은
그 당시의 사회를 크게 감동시켰다.
1084년 그녀의 유해가 성당에 모셔지자마자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는데, 순례자들은 그곳에 있는
그녀의 우물의 물을 먹으면 치유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고델리바가 순교자로 공경을 받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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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아르(Goar)
축일 7월 6일
성 고아르는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본당 사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은수생활에 이끌리어 오베르베셀 근방의
라인 강변에 은둔소를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참으로 고요한 생활을 하였고,
그의 성덕이 높아짐에 따라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인근에 사는 농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성덕과 인내심 그리고
놀라운 기적들이 수 없이 일어나, 한시도 조용히
생활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일부 성직자들이 무고로
인해 그 지방의 주교에게 소환되었지만, 곧 그의
결백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왕인 지그베르트 1세
(Sigebert I)는 그의 덕행에 큰 감명을 받았다.
후일 그의 수도원은 순례의 요충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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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도미니카(Dominica)
축일 7월 6일
성녀 도미니카는 서방교회에 널리 알려진 성녀이지만
정확한 생애는 잘 모른다. 다만 로마 순교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캄파니아에는 동정 순교자인 성녀 도미니카가 있다.
도미니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우상의
파괴자였다. 따라서 그녀는 맹수에게 던져지는 형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으므로,
결국은 참수되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성녀의 유해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의
트로페아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관리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에서 태어났고,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고통을 당하였고, 그녀의 시신은 천사들에
의하여 트로페아로 옮겨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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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물루스(Romulus)
성 카리시무스(Carissimus)
성 둘치시모(Dulcissim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축일 7월 6일
성 로물루스(Romulus)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에
의하여 개종한 로마인 제자로 이탈리아 피에졸레
(Fiesole)의 초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성 카리시무스(Carissimus)와 둘치시무스
(또는 둘치시모) 그리고 크레스켄티우스
(Crescentius)와 더불어 순교하였다.
로물루스는 원래 루체르나(Lucerna)의 서자로서
유기되었으나 이리가 그를 길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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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치아(Lucy)
성 릭시오 바로(Rixius Varus)
축일 7월 6일
전설적인 이야기이지만 로마 순교록은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출신의 순교자
성녀 루치아(Lucia)와 같은 날에 그녀를 고문하고
괴롭혔던 지방장관 성 릭시우스 바루스
(Rixius Varu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루치아 성녀를 통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갔으며 그녀와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로마 순교록은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성 릭시우스 바루스에 대해 많은 참조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고 또한 그의 회개
이야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성 릭시우스 바루스는 릭시오바루스(Rictiovarus)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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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고레티(Mary Goretti)
축일 7월 6일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코리날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6남매 중의 맏이였다.
1896년 그녀의 집안은 갈리아노 교외의 콜레 지안투르코로,
그 다음에는 페리에레 디 콘카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직후에 부친은 말라리아에 걸려
운명하니, 남은 식구들은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아는 상냥하고 침착하였고
또 예의바른 아이였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기도,
순명 및 죄악에 대한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12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꽤
성숙한 편이었다.
1902년 5월 29일 그녀는 첫 영성체를 하였으며
그해 7월 어느 날 오후, 그날도 그녀는 집안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알렉산데르란
청년이 자기 셔츠를 기워달라는 부탁을 하여,
그것을 손질하면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이때 18세 된 알렉산데르가 올라와서 계획대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끌고 침실로 가려고 하였다.
그녀는 소리치며 완강히 버티었다.
그녀가 끝까지 항거하자 그는 이성을 잃고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그녀의 몸에는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약 24시간 후에 운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사제가 성체를 영해주면서 알렉산데르를
용서하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천국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정결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 몇시간 동안 착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여 주는 단순한 동정심을
드러냈다. 자기 어머니의 잠자리를 걱정하고,
살인자를 용서했으며(그녀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그의 가족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종할 때는 성체를 영하는 경건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참변을 당한지 약 24시간
만에 죽었다. 살해범인 알렉산드로는 30년형을
선고받고서도 오랫동안 참회하지 않았고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는 마리아가 꽃을 모아서
그에게 주는 꿈을꾸었다. 27년 후 그가 석방되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마리아의 어머니께 용서를
청하러 간 것이었다.
어린 순교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생겨났으며,
갖가지 기적이 일어났고 죽은 지 50년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시성되었다.
1947년 그녀의 시복식에서 그녀 어머니(당시 82세)와
두 자매 그리고 남동생이 교황 비오 12세와 함께
성베드로 성전의 발코니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3년 후 그녀의 시성식에는 66세가 된 알렉산드로
세레넬리가 25만 명의 군중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설명 ; 마리아는 교리를 배우는 데는 몹시 힘이
들었는지 모르나 신앙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주님의 거룩함,고결함,순결,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온전한 신뢰였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그녀의 신앙은 단순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특권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이다. 순결의 미덕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녀는 정결한 사람이었다.
인용 ; 설혹 그녀가 순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일상 생활이 너무도 거룩했기 때문이다.
(사로티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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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섹스부르가(Sexburga)
축일 7월 6일
이스트 앵글리아의 국왕 안나(Anna)의 딸이며
성녀 에텔드레다(Etheldreda, 6월 23일),
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10월 11일),
성녀 비트부르가(Withburga, 3월 17일) 그리고
성 에르콘발두스(Erconvaldus, 4월 30일)와
형제지간인 성녀 섹스부르가는 640년에 켄트
(Kent)의 왕 에르콘베르투스(Erconbertus)와
결혼하여 성녀 에르멘질다(Ermengilda, 2월 13일)와
성녀 에르콘고타(Ercongota, 7월 7일)를 낳았으나,
만 4년 뒤에 남편과 사별하게 되자 셔피 섬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녀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엘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중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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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조에스(Sisoes)
축일 7월 6일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이후 이집트 사막에 살던
은수자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분이 곧
성 시소에스이다. 이집트 태생인 그는 젊어서
세상을 등지고 스케테(Skete) 사막으로 은거하였다.
나일 강과 거의 인접한 지역까지 들어가서
성 안토니우스가 서거하신 산 속에 은신하였다.
그는 여기서 저 위대한 선배 은수자의 큰 덕을
본받으려는 일념으로 끝까지 항구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는 늘 안토니우스 성인이 자신에게
말씀하시고 지도하시는 듯 현장감 있는 생활을
하였던 만큼 그의 엄격한 보속행위, 철저한 침묵
그리고 열렬한 기도 정신은 인근 은둔소에 널리 알려졌다.
악습을 이기려는 그의 노력은 처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과오를 저지르면 꾸짖거나 타이르지
않고 인내와 온화함으로써 대하여 큰 감명을 주곤
하였다. 한번은 어느 은수자가 그를 찾아와서
“스승님, 저는 주님 면전에 있기를 항상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고 입을 열자, 그는 “모든 창조물
앞에 겸허하게 엎드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
그것도 아주 겸손하게…”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보라, 저기 우리 주님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그는 성 안토니우스 산에서 적어도 62년간을
은수하다가 429년경에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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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사야(Isaiah)
축일 7월 6일
"야(훼님)는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성 이사야(Isaias)는 기원전 760년경 아모스라는
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사 1,1). 이밖에 그의
가족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체나 언어 기법,
도시인들이 즐겨 쓰는 은유, 또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때문에 그를 이 도성 출신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시찰
나갔을 때 그가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음으로
보아(7,3), 귀족이었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귀족처럼 왕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없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소명 환시를 근거로
이사야가 사제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6장의 배경은 성전 안팎이 다 될 수 있다.
6장의 환시를 보기 위해서 이사야가 굳이 사제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격조 높은 문체를 구사하고 강력한 웅변력을 발휘하는
이사야가 평범한 집안 이상의 출신으로 고급
교육까지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사야가 임금이나 조정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의 종교, 정치, 사회 정책을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출신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이사야에게는 아모스나 호세아처럼
‘광야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집트 탈출 등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알지만
별다르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가 시나이 계약과 함께 선택된
민족의 양 기둥을 이루는 다윗 계약(2사무 7장)을
강조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왕실과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생활은 그의 사명 수행과 관련된
사항만 몇 가지 간략히 제시된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는데 두 아들에게 모두
상징적 이름을 붙인다(7,3; 8,3).
자식들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8,18). 이렇듯
이사야는 혼인과 가정 생활까지 통틀어 온몸으로
하느님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
(기원전 740년)에 소명을 받고(6,1) 그 뒤
세 임금의 치하에서 활동한다(1,1).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이사야가 므나쎄 왕 시기
(기원전 687-642)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며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순교했다는
전통은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 에녹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왕 시기에는 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므나쎄 왕은 온갖 외국 종교 관습을
끌어들였고, 야훼 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이사야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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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알필드(Thomas Alfield)
축일 7월 6일
토마스 알필드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고, 이튼(Eton)과
케임브리지(Cambridge)의 킹스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성장했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하여 1576년에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갔다.
그는 여기서 사제 수업을 받고 1581년에
랭스(Reims)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즉시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과
더불어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러나 1582년 봄에 그는 이미 런던탑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활동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85년 7월 6일에 런던의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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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트란퀼리노(Tranquillinus)
축일 7월 6일
로마의 사제 성 트란퀼리누스(또는 트란퀼리노)는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1월 20일)의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첫댓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본당수녀님의 축일입니다. 오신지 4일 되셨지만 축하드리고 묵주50단 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