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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초인의 길
#1. 우주력 9세기 후반. 어느 방랑자의 수기
…그때에 우리는 은하연방의 수도가 있는 시리우스 제2항성의 한 행성인 ‘제2지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인류의 고향 지구별이 속한 태양계를 멸망시킨 전쟁을 마지막 기억으로 하고 사라진지 2세기, 우리는 문득 우주선에 올라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해적선 신천지호였다. 마스트 끝의 해골깃발을 보면서 우리는 돌연한 출현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언제인가의 시기에 우리는 서로 자신을 죽여 고향별이 속한 태양계를 멸망시켰는데, 영문 모를 돌출의 경과로 다시 돌아와 현실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현상화한 이유를 살필 겨를도 없이 무작정 관성에 몸을 맡겨 스스로 세류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건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는데, 은하연방의 수도 제2지구에 머물러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그 하나였다. 행위를 위한 행위의 한 수순으로 우리의 앞을 막는 은하연방의 집권세력에 총을 겨눈 그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를 자인하게 하려는 수단인 듯했는데, 저항세력이 너무 미약하여 우스울 정도로 간단하게 정권을 장악하고 말았다.
적들의 움직임은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불과했다. 우리는 조용히 움직여 무기를 빼앗는 것만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우리가 ‘이건 과거의 우리와 같지 않다’라고 생각한 것은 그러한 전쟁의 결과 때문이었다.
우리 중의 하나가 ‘통령’의 지위에 올라 새로운 정부를 조직했다. 통령정부에는 과거에 우리의 좋은 적이었던 은하연방 제일의 명문 류우 가계의 사람들이 우리의 하나로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중의 그들은 때마침 전쟁을 도발해 온 성간연맹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통령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가 쿠데타 후에 급조해낸 명분인 자유주의국가 건설과는 거리가 먼 전제국가의 태동이었다.
우리는 통령을 끌고 제2지구를 빠져 나왔다. 들어갈 때처럼 손쉬운 탈출이었다. 처음 우리가 통령에게 떠날 것을 종용했을 때 그는 말했다.
“나는 우리 중의 이기적인 부분의 결정체야. 우리는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인데 너와 나를 나누어 선악을 구별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 걸.”
우리는 그가 말하는 ‘부질없는 짓’을 억지로 행하여 통령을 끌고 우주로 나섰다. 정확하게는 통령에게서 떠나고 싶어 하는 부분만을 끌고 나온 것인데, 통령의 남고자 하는 부분의 저항이 워낙 강하여 끝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여전히 신천지호였다. 우리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돛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올 때 그러했던 것처럼 갈 때도 목표가 없었다.
출발 직후 우리는 우리가 버리고 온 우리 중의 병든 부분이 통령의 직위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이름은 류우510이었고, 한 때 우리가 적으로 삼았던 가계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언제 우리 안에 들어왔을까? 그때의 전쟁 때에? ‘태양계 최후의 전쟁’의 막바지에 태양이 단말마의 비명을 올릴 때, 반물질과 상물질의 충돌로 탄생한 중력방기현상은 원초 우주의 대폭발과 다르지 않은 것인데, 우리는 그때의 폭발로 시작된 요란한 여행에 목숨을 맡겨 오랜 유랑 끝에 이곳에 왔었다.
무슨 필요조건이 그를 우리와 한 가지로 재구성한 것일까? 혹은 원래부터 우리 안에 그가 있었던 것을 그의 말처럼 부질없는 짓을 하여 애써 나누었던 것일까? 우주는 탄생부터가 불가사의라고 하더니 어느새 우리도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어 있었나 보다.
우리는 앞으로도 신천지호를 몰아 우주를 달릴 것이다. 우리 안의 병든 부분을 떨어트려 스스로 면역성을 가질 때까지 세류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도록 하면서. 우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우주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전체가 한 개체이고 부분이 전체가 되는 우주 안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주의 전체임을 확신하며, 우리 중의 상처받은 한 부분을 다스리기 위해 끊임없이 현재를 버릴 것이다.
#2. 위와 같은 시대. 어떤 용병의 이야기
투쟁을 본능으로 갖고 태어난 불완전 지성체의 대표격인 인간들이 가장 도덕적인 양하고 법과 도덕과 윤리를 논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싫어했다. 그들은 본능과 이성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인간 개개인이 이성에 따라 행동함으로 인간계의 전체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상 조류의 하나로 보고 싶을 뿐 특별히 찬성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해 온 것은 고대 지구의 예를 들어보아도 알 수 있는데, 흔히 예의 창시자로 불리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고대 지구 중국에서 충과 효를 부르짖던 성인의 시절에 식인이 상식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에서부터 중세기인 송나라 때까지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적의 팔 다리를 푸줏간의 진열대에 놓고 저울질하여 잘라 파는 일이 범죄가 아니었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우리가 앞선 이들이 뒤따르는 이들을 죽여 식량으로 삼는 우주의 생존 법칙을 탄식하여 총대를 잡음과 어느 쪽이 우월한 윤리인지 묻고 싶다.
우리는 늘 우주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진화의 순서가 늦은 동식물을 식량으로 삼아 생존을 꾀하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불완전 지성체의 횡포를 우주는 울부짖음으로 고발하고 있다. 다 같이 우주의 한 조각으로 태어났건만 우주의 자격을 얻기 전에 먹힘을 당한 후발 생명체의 비운을 탄식함이니 그 원망이 오죽할 것인가.
우리의 출진은 우주의 울부짖음이 절정일 때 이루어지곤 했다. 공평이 집행되지 못하고 있다! 공평이 집행되지 못하고 있다!
총을 들어 적의 머리를 노리고 칼을 휘둘러 적의 가슴을 갈라놓는다. 전쟁은 하나의 생존 행위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어찌 죽이는 일을 재촉하지 않으랴! 우리는 우리와 대등한 적을 공평한 접전 끝에 죽였을 뿐, 우리 이하의 적을 놀이 삼아 죽인 적이 없다.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단칼에 심장을 헤쳐 놓는 것은 우리의 자비다. 쓰러진 적의 시신에 한 줌 흙을 뿌려 좋은 최후를 애도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다. 잘 어울린 승부 끝에 대적해 준 상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상대와 나 모두를 존중하는 우리의 예절이다. 대적에 임하여 가진바 전투력을 최후까지 발휘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전쟁예술이다.
우리는 용병이다. 용병이 보수를 받고 전쟁을 치러줌은 상식이다. 용병은 받은 만큼만 일하고 계약한 조건 안에서만 행동한다. 용병에게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있을 뿐 목숨을 걸어야 할 사상이 없다. 용병에게는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있을 뿐 적과 아군이 따로 없다. 고용주가 값을 치르고 봉사를 명령하면 피고용자인 용병은 계약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용병이 전쟁에 임해 적을 살상하는 것은 직업이 그러하므로 불가피한 일이다. 용병은 최선을 다해 일을 할 뿐 결과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용병은 세속의 권력이나 명예를 높여 생각하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 고대 지구에서는 용병 집단에 의해 정권이 바뀐 예가 흔했던 모양이다. 투르크족의 이집트 정복과 게르만족의 로마 정복에 바이킹족의 유럽 정복 등 예를 들기로 하면 한이 없어 보일 정도다. 우리의 선배들이 은하연방 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세웠던 일은 가장 비근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은 애써 세운 통령정부를 미련 없이 버렸다. 용병은 세속의 권력과 명예를 높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변화가 필요한 시대라고 판단되면 혁명적인 상황을 만들뿐인데, 그뿐으로 미련 없이 세속에서의 권력과 명예를 버리는 것이다.
용병이 추구하는 명예는 오직 전쟁예술이다. 전쟁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물로서의 승전보가 아니고 전쟁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쟁전문가가 용병이다. 피 터지는 싸움 끝에 승부를 가른 후 승자와 패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던 고대 지구의 격투기가 그 효시였고,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전투 중에 순간의 눈짓만으로 칼끝을 멈추고 한 잔 술을 나누는 우리 용병들의 우정이 그 완성이다. 용병은 전쟁의 과정을 사랑할 뿐 전쟁의 원인이 되는 사상 논쟁과 전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권력 따위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는, 전쟁예술의 전문가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란의 시대는 우리 용병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시대다. 우리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적당한 직업을 주었고, 우리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또한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이 미친 전란의 시대를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전쟁전문가이고, 전설의 해적선 신천지호 출신 용병들이다.
#3. 앞 장면의 연속. 어느 용병의 이야기, 다른 시각에서의 계속
명령을 받고 출전을 하면서 우리는 함께 수송선에 탄 병사들의 대화를 흘려듣고 있었다.
“제 정신들이 아냐. 후방의 시민들은 굶어 죽는다고 아우성인데 또 개전이라니.”
“무기들을 보라고. 깍듯한 신형들이지. 분자 재구성 공장을 120% 가동해서 얻은 생물무기라지. 식량을 생산하던 곳에서 그런 짓들이니 시민들이 견뎌 나겠어?”
“시민들만 걱정인가. 당장 우리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는데. 이런 생물무기는 구경한 적도 없었어.”
용모가 단정하고 군장이 깨끗한 신병들이 전망 스크린에 나타나는 우주의 풍경에 시선을 집중시킨 채로 신세타령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코웃음을 쳤다. 도시 출신 애송이들이로군. 걱정 말라고. 자네들은 숫자나 채우는 총알받이들이고, 전투는 우리가 하는 것이라네.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고향생각 애인생각으로 찔찔 짜대는 저런 애송이들과 한 배에 타게 했을까. 이제부터는 교전지역인데 적의 기습이라도 있을 시에 방해만 되는 물건들이 저것들이 아닌가 말이야. 요즈음의 장군들은 전쟁을 장기판 위의 숫자 놀음으로 생각하려 드는 경향이 있어.”
“장기 놀이는 그래도 격조가 있지. 차 하나가 졸 열 개를 당하는 것이 장기판 위의 세계니까. 이건 그냥 18급의 바둑놀이라고. 무작정 알을 많이 늘어놓기만 하면 이기는 줄 알았다가 고수의 한 수에 무리죽음을 시키는.”
약간은 전투 경험이 있어 보이는 육전대원들이 신병들을 질책하며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 또한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우리의 눈에는 자네들도 장기판 위의 장수가 되기에는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아마추어로 보인다네.
육전대원들이 우려하던 적의 기습이 시작된 것은 최전선의 후방 소행성지대에서였다. 전망 스크린에 암석의 덩어리로 보이던 소행성들이 갑자기 전투용 우주선의 대함대로 변해 다가오고 있었다. 중진에 해골 깃발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성간연맹이 자랑하는 정예 용병들이 출동한 듯했다. 진작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육전대원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고, 신병들은 허둥지둥 전투 군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제법 대군이지?”
“일개 별동함대급은 넘어 보이는 것 같군.”
육전대원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그들은 해골 깃발이 선명한 적의 중군에 대해서는 되도록 대화를 피하고 있었다. “저 전쟁 귀신들은 우리의 상대가 아냐.” 하는 투였다.
신병들을 태운 단승 공격기들이 비행갑판을 떠날 무렵 우리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의 차례가 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제 정신이 아닌 전쟁’에 뛰어든 신병들이 얼마나 살아남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적은 기습부대답게 경무장의 함정들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이동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아군이 출동시킨 신병들은 고속의 단승 공격기에 탑승하고 있었으므로 양측은 좋은 적수가 되어 우주는 포화가 난무하는 전장으로 변했다.
신병들로 이루어진 선봉부대의 접전 결과 아군의 대패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졸과 졸의 싸움에서 승리한 적의 선봉부대는 곧 출동한 아군의 육전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아군의 육전대는 정규 전쟁 교육을 마친 일급부대였고, 병사 개개인은 우주의 무중력 무산소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육체가 개조된 제조인간들이었다. 아군의 육전대는 그에 필적할 만큼의 전투력을 갖춘 적군이 대항마로 나올 때까지 통쾌한 살상을 즐겼다.
말이나 코끼리 정도의 장기 알이 움직인 전투가 무승부로 끝날 무렵 우리가 나섰다. 그 옛날 류우 가문의 용장을 모시고 ‘제2차 은하대란’에 참가했던 선배들이 보였던 경이적인 전투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은하연방 우주군 황금전함 전대 출신인 용병대가 출동하자 적군들에게서도 해골 깃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의 해골깃발은 과연 위세가 놀라웠다. 우리는 참으로 통쾌한 전투를 즐길 수 있었다. 적의 해골깃발 부대를 이룬 용병들은 전설적인 해적선 신천지호 출신의 특급 전쟁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좋은 적수가 되었다.
피아간에 서로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끼리의 전투였으므로 양측의 조우는 부대 단위의 충돌에서 곧 단병접전으로 이어졌다. 적의 칼이 아군의 심장을 갈랐고 아군의 창이 적의 등판을 찔렀다. 양측 모두 무중력 무산소의 우주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도록 개조된 육체를 가졌고, 몇 세기에 걸쳐 수십 세대 이상의 전쟁 전문가로서의 혈통을 갈고 닦아온 일류들이었으므로 창칼의 놀림에는 허튼 동작이 없었다. 휘두르는 칼날은 반드시 적의 심장을 갈랐고 내지른 창날은 반드시 적의 가슴 부위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전투가 무르익어 바야흐로 공간에 혈무(血霧)가 자욱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적의 중진에서 깃발 신호가 올랐다. 신호는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어진 양을 모두 채웠네. 그대들은 어떤가?”
거의 동시에 우리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수고들 하셨네. 우리도 고용주에게서 받은 보수에 대한 값을 치른 직후라네.”
전투가 종결되었다. 적의 가슴에 반쯤 꼽히고 있던 우리의 창날이 뽑혔고 우리의 목을 노리고 내려치던 칼날이 피부에 생채기를 남겼을 뿐으로 회수되었다. 적아는 한데 어울려 서로 얼싸안았다.
우리가 서로 축배를 권할 무렵 용케 목숨을 보전하여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신병들이 어이없어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친, 이게 무슨 전쟁이야?”
우리는 그들의 불평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아가들아. 너희도 더 자라면 이러한 전쟁의 의미를 알게 될 게다. 우리의 위치에 오를 만큼 되려면 몇 십 차례 이상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할 터이므로 전장에서 도망친 너희들에게까지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테지만, 죽이기 놀이의 의미만은 교훈 삼아 새겨두기는 해야 할 것이다.
수없이 죽음을 되풀이해 온 우리에게도 죽음 직전의 공포와 고통은 두려운 것이었다. 동료들이 반드시 재생시켜 줄 것을 확신한 끝에 죽음에 임하지만, 칼날이 가슴을 파고 들 때의 고통은 생각만 해도 전율을 느낄 만큼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전투를 치른 직후 우리가 적과 나누어 마시는 축배의 술잔에는, 그렇게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좋은 몸을 남겼다는 데 대한 안도의 뜻이 숨어 있었다.
#4. #1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은하제국 탄생비사
황제의 위에 올라야 한다고 가신들이 말했을 때 나는 먼저 내가 가진 신분과 입지를 생각했다. 나는 은하연방 제일의 명가인 류우 가계의 510번째 당주인 류우510이었고, 폭력으로 은하연방 정부를 뒤엎었던 통령정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물리친 영웅이기도 했다. 나는 은하연방의 시민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황제의 위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 현재의 신분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이 어느 순간에 문득 태어나 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인 재생의 인간이었다. ‘제2차 은하대란’ 말기에 있었던 ‘태양계 최후의 전쟁’에서 인류의 고향 태양계가 절멸할 때 휩쓸려 들었던 당시의 당주 류우459를 비롯한 유력한 일족이 모두 사라진 후, 방계의 친척들 중에서 가장 근사치의 유전자를 취하여 현재의 류우 가계는 재생된 것이었다.
처음 내가 20대 후반의 몸을 갖고 세상에 나왔을 때 일족의 장로들은 내 직계 선대로 류우460을 호칭했던 방계 출신 당주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대표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태양계 최후의 전쟁’에서 사라진 류우459의 분신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으로 믿고, 그를 찾아 정통의 후계자인 류우460을 얻고자 하는 욕심에서였다. 패전으로 인한 전사로 처리되어 공식적으로는 사라진 존재인 류우459의 분신은 그 자체가 원래의 류우459와 기억을 공유하는 신분임으로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보아 반드시 살아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된 진정한 힘은, 장로들의 질시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통령정부가 연방 내 제일 명문가인 우리 가문에 협력을 요청해 왔을 때 우리 일가는 나를 추천해 대표로 삼았다. 나는 일가의 힘에 내 능력을 보태어 통령정부의 둘째 권력자로 부상했다.
통령은 참으로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소수의 용병을 동원해 권력을 쟁취했을 뿐 통치 일선에 나선 적이 없는데, 심지어 두 번째 권력자인 나 역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통령은 내 탄생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내가 고유의 지성을 갖고 세상에 나왔을 때 처음 들린 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살아있음이 반드시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자만이 행복과 불행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니, 원한다면 살아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물었다.
“당신은 내 아버지입니까?”
그는 답했다.
“우리 모두가 그대의 아버지이다. 혹은 그대의 아버지는 그대 자신일 수도 있겠다.”
그 순간 내 지성은 육체를 갖기를 원했다. 나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으로 류우 가문의 510번째 전생테를 달고 배양기를 나왔다.
내가 자신의 신분에 회의를 갖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내가 류우 일가의 정통 유전자가 사라진 류우459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재생된 새로운 류우임은 연방 내의 모든 사람들이 공인하는 바였고, 내 외모와 지적 능력과 주입된 기억까지 류우510에 적합하지 않은 점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는 최초의 탄생 때에 들었던 그 소리로 인하여 내가 반드시 류우510만은 아닐 수 있다고 의문을 갖고 있었다.
“황제의 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아랫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었다. 통령이 내게 정부를 맡긴 후 어느 아침에 문득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은 지 한 해 만이었다. 그 무렵 나는 가장 충성스러운 양하고 황제의 위를 권하는 자들의 속셈을 읽고 있었다. 내가 비운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욕심이었다. 과거의 통령이 모든 권력을 내게 집중시키고 세사에 초연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될 것을 바란 정치 전문가들에 의해 나는 어느새 황제가 되어 있었다.
기실 황제가 필요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 은하연방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우리 류우 가계의 주력이 ‘태양계 최후의 전쟁’에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후, 연방 전역은 중원의 사슴을 쫓는 무리들에 의해 내란 직전의 혼돈 상태에 있었다. 통령 정부의 집권과 성간연맹과의 전쟁 덕분에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기는 했지만 어떠한 비상수단을 쓰지 않으면 내전은 꼭 발발될 것이었다. 나는 그 비상수단의 표상인 셈이었다.
통령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성간연맹과의 전쟁과 군벌들의 발호라는 이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력해 온 나는 통령이 사라진 후의 시대에 가장 황제의 위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통령은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지는 순간도 종적을 남기지 않은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통령의 수하 용병들이 거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와 함께 내가 올리는 보고서도 개봉되지 않은 채로 돌아오곤 했다. 시민들은 쿠데타로 집권한 불법세력 통령정부를 누군가 전복시킨 결과라고 믿고 있는 듯했는데, 그 공로자로 나와 우리 류우 가계의 사람들이 손꼽히고 있었다. 내가 황제의 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임을 자각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정치가들은 새로운 집권자를 과거의 집권자보다 더욱 위대한 인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기특한 속성을 갖고 있었다. 통령정부는 민주국가 은하연방을 무너뜨린 악의 상징이었고, 그 악의 상징을 사라지게 만든 나는 새로운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다. 새로운 영웅에게는 과거의 영웅 이상의 명예로운 월계관이 필요했으므로 통령 이상의 명예로운 직위를 찾은 결과 새로운 영웅은 자연스레 황제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다.
황제가 된 나는 새로운 황제를 만든 공로로 소위 공신의 목록에 오른 정치전문가들을 외딴 항성계의 관리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명목뿐인 직위를 가진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사실상 유배된 그들은 우리 일족이 황제의 위에 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수도인 제2지구의 하늘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암투와 음모를 직업으로 삼던 정치전문가들을 숙청한 후 나는 성간연맹과의 전쟁 수행과 군벌들의 발호를 막는 이대 난제의 해결에 착수했다. 성간연맹과의 전쟁에는 어렵지 않게 해결책이 찾아졌다. 통령정부가 소수의 전쟁전문가를 동원한 전격전으로 은하계 제일의 강국인 은하연방 정부를 전복시킨 실례를 교사로 삼아, 제국 내의 모든 전쟁 전문가들을 후한 보수를 주어 일선으로 내몰았다.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과 정권유지에 위험요소가 될 세력을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뜨릴 난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고뇌 끝에 찾아낸 방책이었다.
군벌들의 발호를 막는 일은 우리 류우 가계 직속의 호위군과 구 은하연방 시대 때부터 한 세력을 형성해 온 보안국 소속 요원들을 활용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십 차례의 전쟁 끝에 군벌 세력은 일소되었다.
은하제국은 탄탄대로에 올랐다. 일선으로 밀려 난 전쟁 전문가들은 전문성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숙적인 성간연맹군을 격파하곤 했으므로 투쟁의식의 대리만족을 느낀 시민들은 황제의 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전쟁은 하나의 오락이었다. 적인 성간연맹이 동원한 해적 출신 용병들의 전투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승패는 수시로 번복되곤 했지만 정부와 타협한 언론의 도움으로 제국군은 언제나 상승군이었다. 우주는 넓고 정복할 별은 무한히 많았으므로 언론이 상승 제국군의 승전보를 발표할 과제 또한 넘쳐나도록 많았다. 제국군은 작은 패전 끝에는 반드시 커다란 승전보를 보내와 시민들의 기대에 만족을 주었다. 언론이 발표하는 우주도에는 제국군의 깃발이 꼽힌 항성계가 하나 둘 늘어갔고, 시민들은 제국군이 승전한 전적지를 맞추는 퀴즈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로 날 새는 줄을 몰랐다.
나는 성공한 황제였다. 은하 우주의 넷 중 셋을 치하에 둔 절대 권력자로서 권위와 능력이 아울러 합당한 최고의 통치자였다. 시민들은 존경을 해주었고 정치는 안정되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항상 다시 태어나곤 했다. 너는 우리의 아들이지만 너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불완전한 지성체다. 네 아버지는 우리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다. 네가 전수 받은 기억은 물려받은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인데, 기억을 갖기 전의 네가 누구인지 너는 아느냐?
통령의 소리였다. 나는 매번 다시 태어나고 그때마다 스스로 호된 산고를 치렀다. 나는 태어났지만 올바른 나를 갖지 못한 불완전 지성체의 하나였다. 나는 내게 주입된 기억 이전의 나를 찾기 위해 내게 주어진 현재의 나를 버려야 했다.
내가 가진바 기억의 한 부분을 내 분신에게 남기고 떠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를 이어 새로운 황제가 된 류우511에게는 황제로서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만이 전수되었다. 류우511은 직계 선대가 가진 갈등을 이어받지 않고 태어난, 가장 완벽한 류우 가계의 당주였다.
#5. #3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결속
용병이 긍지를 잃었을 때 패잔병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 용병의 긍지는 최상의 전투력이 유지되는 것, 대개의 용병들은 과거에 적이었던 세력에 의해 추격을 받고 있고, 살상한 적의 숫자에 상응하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으므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용병들은 현상금을 노리는 패잔병 사냥꾼의 노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 무리의 용병들이 전투가 끝난 전장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은하연방의 정규군이야. 수집하는 시신은 해적들이고.”
용병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그는 오른 팔이 적의 칼에 의해 날아간 중상자로서 패잔병 사냥꾼들의 합격을 받고 악전고투 중이었다.
“성간연맹 측도 우리를 노리는 것은 마찬가지야. 요행은 바라지도 말라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 절반쯤 사선을 넘고 있는 용병이 대답했다. 그들은 적아에 고루 분포하여 마주 총검을 겨눈 사이였지만 패잔병 사냥꾼의 총부리는 전직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도망쳐! 우선은 살아남아야 해. 저놈들은 우리의 전투력만 살릴 뿐 이성을 남기는 일이 없어. 설마 로봇전사가 되고 싶지는 않겠지.”
“자아를 빼앗긴 내가 좋을 까닭이 있나. 우리 스스로 전생테를 늘리자고.”
무늬만 동료였던 용병이 현상금 사냥꾼의 창검에 찔려 주검이 된 몸으로 수집선에 실려 가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말했다.
“이건 아냐. 우리는 본래 해적이었고 해적은 강한 동지애로 결속되어 피를 흘리는 동료를 보면 더욱 투쟁의식을 불태우곤 했는데, 이건 아냐.”
몇몇 용병이 무리를 이루어 적에게 대항했다. 부상을 당했을망정 한데 뭉친 용병들의 힘은 컸다. 더구나 그들이 해적선 신천지호의 후예들이었음에야!
현상금 사냥꾼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용병들은 한 무리의 집단으로 변했다. 개개의 용병들이 ‘우리’라는 복합명사의 우산 아래 뭉치는 순간이었다.
#6. 앞 장면의 연속. 재기
인사를 나눈 우리는 우리의 인연이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우리는 오신과 코넬과 알렉산더의 후신들이었다. 먼 핏줄의 인연이었고 전생테마저 희미해진 방계의 핏줄을 이은 우리였지만 우리는 분명 그 유명한 해적선 신천지호의 육탄부대를 지휘하던 각 단위부대의 장의 후예들이었다. 직계의 해적들이 ‘태양계 최후의 전쟁’에서 별과 함께 사라진 지 몇 세대가 지난 작금에, 실종 직전까지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가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은 마음의 고향인 해적선 신천지호가 재생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우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우리는 다시 해적단을 조직했다. 그 옛날 신천지호의 위용을 따르지는 못하겠지만 그간 모은 금을 톡톡 털어 장만한 우리의 배는 제법 기본적인 무장을 갖추고 호호탕탕 우주로 날아올랐다. 해골깃발이 선명한 뱃전에 서서 우리는 아득한 옛날 타이탄을 떠나던 최초의 해적선 신천지호가 느꼈을 비장감을 되새겨보기도 하였다.
우주는 저토록 크고 넓은데 우리는 이렇게 작고 초라한 조각배를 의지하고 길을 떠나는 나그네에 지나지 못할 뿐…… 우리는 본시 우주의 주민으로 어울리지 않는 하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발버둥이질의 반복이 오늘의 결과를 낳았을 뿐인데, 이러한 현실은 과연 행복의 한 종류인 것일까. 우리의 떠남은 그런저런 사건의 주역이 우리였던 까닭을 풀기 위한 거사일지도…… 열심히 갈 뿐…… 그저 의문을 담았음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떠날 뿐인데……
우리의 그러한 감상은 이내 새로운 감상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보고 싶다. 그리운 사람들……
선장 김진욱과 재생 의료 전문가 파란눈 간디, 요리 담당의 왕선생, 돌격대의 지휘관이자 신천지호의 항해일지를 기록하는 서기 역을 맡아 하던 오덕양, 그리고 부하 해적들과 온갖 별에서 따라 나섰던 착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리운 사람들이었다.
우리 몇 사람이 다시 뭉친 것으로는 해적선 신천지호의 부활은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해적선 신천지호는 모든 구성원이 한데 모였을 때만이 전설의 해적선 신천지호로서 재생될 것이었다.
#7. 앞 장면의 연속. 절망
우주가 드리운 장벽의 거대함을 절감한 것은 그때였다. 최초의 신천지호가 우주로 날아오른 후 900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왔고, 최후의 전쟁 때에 이르기까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900년 이상의 세월을 찾아 헤맸어도 하나의 대상을 찾지 못했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야 그 모든 사람을 찾을 것인가. 우주는 저토록 터무니없이 넓은데 우리는 너무 작구나…… 우리는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절망을 느낀 이유는 또 있었다. 우리가 다시금 해적이 되겠음을 선포하고 용병부대의 군적을 이탈했을 때 보내던 동료 용병들의 원망과 염려의 시선이 현실로 변해 추적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동료를 주축으로 하는 성간연맹군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
연맹군은 우리와 전투력이 별다르지 않은 용병대를 내세워 우리의 진로를 막았다. 같은 해적 출신이기는 하지만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린 당대 재생의 용병들은 과거의 동료를 향해 총구를 나란히 하고 진격을 해왔다. 보수를 받은 만큼만 싸움을 하는 것을 지주로 하던 용병의 신분은 얼마 전의 우리의 모습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과거의 동료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능력이 같은 용병 대군과의 대결은 분명 힘겨운 것이었다.
대적에 임하여 최선을 다하고 고통의 시간을 짧게 하여 패자를 죽여주는 것은 용병의 예절이었다. 용병의 본류인 해적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용병대 쪽이 계약한 만큼의 살인을 다할 때까지 우리는 피 튀기는 접전을 벌였다.
우리의 인원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간혹 우리의 뜻을 존중하여 따라주는 이들이 있었으므로 배에 머무는 선원의 기본 숫자는 대차가 없었으나 정작 전투가 있을 때 제몫을 해줄 육전대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줄고 있었다. 우리는 탈주의 명분으로 삼은 해적행위를 해볼 여유도 없이 추적자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도망치기 바쁜 초라한 집단으로 전락해갔다.
우리의 그러한 도피행각은 과거에 ‘해적의 별’이 있던 우주 공간을 찾았을 때 끝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옛 동료들이 사라진 장소에 한 조각 단서라도 있을까 하고 작전을 벌이던 중에 매복하고 있던 은하제국군에게 포위된 것이었다.
그때쯤 우리는 성간연맹군과 은하제국군 모두에게 표적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해적선 신천지호의 재래를 선포하고 있었으므로 전설의 해적선 신천지호의 잔당을 잡아 공을 세우고 싶은 장군들이 용병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소수의 유랑 무리로 전락한 우리를 포위한 적은 일개 연합함대급 이상이었다. 우리는 적이 과거에 신천지호와 연관이 있던 성간연맹 측 용병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알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 죽기로 작정을 하였다. 과거에 우리의 선대가 무덤으로 삼았던 ‘해적의 별’이 있던 곳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음을 위로로 삼을 생각이었다.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도 열심히 싸웠지만 적도 전쟁을 업으로 삼던 전문가의 집단이었으므로 우리는 차례로 최후를 맞았다. 우리는 비겁하지 않았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적의 대군을 상대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의 창끝이 가슴을 뚫는 순간 나는 한 생애가 마감되는 것을 느끼며 서러운 마음으로 먼저 간 동료들의 뒤를 따랐다.
#8. 앞 장면의 연속. 해후(邂逅)
내가 다시 눈을 뜬것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시대였다. 내 눈앞에는 간디080의 커다란 머리통이 있었다.
“깨어났군.”
그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음을 알았다.
“자네가 마지막 생환자라네. 우리는 다시 뭉쳤다네.”
김진욱101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신과 알렉산더의 모습도 보였고 오덕양095의 앳된 얼굴도 보였다. 왕선생이 음식을 가득 담은 쟁반을 번쩍 들고 들어오는 양도 보였다.
“우주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일세. 자신의 안에서 일어난 병든 세포의 반역을 불가사의한 생명력으로 치료하여 끊어진 역사를 재생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후일 내가 코넬099로 전생테를 확립시킨 후 간디080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태양계 최후의 전쟁’으로 인해 우주 밖으로 날아갔던 영혼들이 우주의 불가사의한 생명력에 의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는 뜻이었다.
“불행한 것은 우리에게 전쟁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일세. 우리는 해적선 신천지호의 승무원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엮어 나가야 하는 고독한 처지에 있다네.”
간디080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나는 내게 새로운 운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나는 재생 전의 기억을 잃은 젊은 해적이었다. 간디080은 “우주가 병든 세포를 치료하며 남긴 최소한의 상흔”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9. 황제 류우에 관한 어떤 사가의 기록
우주력 887년부터 899년까지 은하 우주의 셋 중 둘을 지배했던 은하제국의 등장과 소멸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 신비스러운 행적으로 인해 이설이 많다. 전신인 통령정부로부터 별다른 정변 없이 권력을 물려받은 점도 그렇지만, 한창 위세를 떨치던 중에 소리 없이 사라진 점도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은하제국이 전신인 통령정부와 마찬가지로 우주사에 비물리적인 어떤 현상의 하나로 비쳐지고 있음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은하제국의 역사는 황제 일가 개인의 역사라고 할 만큼 황제의 비중이 컸다. 초대 황제인 류우510이 통령정부의 대리인의 신분으로 권력을 잡고 등극한 이래 3대의 황제가 모두 명군으로 꼽히는 인물들이었는데, 그들이 이룩한 내치 외정의 업적이 후신인 은하연방의 영화로 이어져 오늘날의 우주를 지구계 인류의 생활 터전으로 만든 근간이 된다.
초대 황제인 류우510이 내치의 안정에 주력하기 위해 용병들을 활용한 국경 정비를 서둔 반면에 2대 황제인 류우511은 대대적인 원정으로 숙적인 성간연맹을 멸망에 가까운 상태로 몰아넣는 전과를 거둔다. 그는 성간연맹이 수도로 삼던 마젤란 성운계 내의 한 항성계에 속한 행성 ‘제3지구’에 대군을 상륙시키고 친히 군정을 펴서 적국의 시민들을 진심으로 신복하게 만든다. 그의 위대한 점은 정복자로서의 치적보다 위정자로서의 폭넓은 소양에 있었다. 그가 성간연맹 원정 말기에 적지의 수도에 호위 없이 상륙하여 옥쇄를 부르짖던 적 수뇌부를 항복시킨 일화는 진심으로 전란을 종결시키기 위해 노력한 명군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례로 알려져 있다.
3대 황제인 류우512는 사가들 간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부른 사람이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어떤 종교의 비의(秘意)에 심취되어 스스로 승려가 되는 일면 전 우주에 사원을 짓는 등의 기행을 보인 끝에 출가를 위해 왕관을 버리고 마는데, 그의 출가가 황제 일가의 몰락으로 이어져 다시금 민주국가 은하연방이 들어서게 됨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은하제국 황제 3대의 생애와 존립 이유 등을 연구한 사가들은 특히 마지막 황제인 류우512에 주목하고 그가 옥좌를 버릴 만큼 몰두했던 종교의 비의에 대해 많은 연구 성과를 남기고 있다. 필자는 여러 가지 설 중의 하나인 허무주의론에 동조하는 사람인데, 그와 관련된 예의 종교의 기록들 중에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끈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저 우주 안의 생물체 중 으뜸은 인간이라, 인간 되어 태어남을 가장 큰 인연의 결과로 보노라.
무릇 인간 된 자는 알지니 인간이란 신의 버금이요 대리자이니 인간 된 구실을 다하여 우주 질서를 집행할 의무를 지노라.
그대 깨달았거든 구실을 다하라. 깨달음은 곧 의무를 말함이요 해방이 아니니 얻은바 깨달음을 나누어 모든 이에게 경지를 주고자 함이노라.
한데 어찜이뇨. 그대 떠나려 하는도다. 맡은 바 의무가 헐함을 의심하여 더 많은 번뇌를 사려 하니 그 속된 집착을 어이할꼬.
작은 집착을 버리는 이는 더 큰 집착을 취함이니 깨달음이 해방이 아님은 이 까닭이라.)
필자는 류우512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싫증을 느껴서 옥좌를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의 으뜸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에 허무를 느껴 더 큰 집착의 대상을 찾아 세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축에 든다.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에 집착을 가진 황제의 모습보다 한 여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연적의 뒤를 쫓던 선대의 모습에 더 큰 집착을 갖고 그를 추구하여 출가를 강행했다면 무리한 추측일까?
류우 가계 512세대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황제 류우512의 최후의 모습은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필자는 최근에 한 난파선에서 발견된 황제 복장의 시신에 주목하고 싶다. 예의 시신은 난파선의 조종실 좌석에 정좌한 채로 전망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고전극 속에 등장하는 황제의 정장을 하고 있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연구로 그가 류우512일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신의 경지를 얻어 떠난 것으로 믿고 있는 종교인들과, 그의 행적에서 신비성을 잃을 것을 염려한 일족의 반론으로 찬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필자는 예의 시신을 류우512의 것으로 믿는 축으로 그의 그러한 최후를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때 황제였던 이가 그리던 무언가를 찾아 우주를 떠돌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임했을 때 한 시절의 영화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등으로 그러한 최후의 모습을 남겼으려니 생각하면 그 인간다운 애처러움에 가슴이 아릿해 지곤 한다.
필자는 그가 옥좌를 버린 이유를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우주를 헤매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향수로 결론을 내린다. 이는 그의 필생의 적 김진욱과 그의 부하 해적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은데, 류우512의 경우 빼앗긴 여인이 연적을 택했음을 알고 있는 경우의 방황이었으니 그 고독의 깊이는 짐작하기에 남음이 있을 것이다.
#10. 방랑자 황제
끝없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별들의 세계 속을 한 척의 난파선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동력을 잃은 지 오래였으므로 마지막 동력이 남긴 관성이 유일한 추진력이었지만 본시 선체가 완벽하게 설계된 덕택에 본래의 속력인 아광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빛의 속도를 돌파하면 신의 경지가 보인다고 믿고 끝없이 과속을 추구하던 시대로부터 자연 본래의 모습이야말로 신이 내린 은혜의 표상인 것으로 믿음이 환원되기까지 수없이 거듭해 온 시행착오의 결과가 동력을 잃은 난파선에게 아광속의 여행을 허락하게 했던 것이다.
류우512는 자신을 또 다른 객체의 위치에 놓고 죽음 후의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사체의 주인은 죽을 때 산 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았군. 아름다운 죽음이란 죽은 자가 남길 수 있는 최대의 예의일 텐데 이런 추한 모습이라니 재생이 못된 것은 당연한 벌칙이었겠군.
나의 주검의 모습은 그들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생전에 은하 우주 제일의 인물이었던 사람다운 멋스러운 죽음이라고 할까. 황제였던 자가 황제였던 시절을 최후의 모습으로 남긴다는 것은 세속의 인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경멸을 보내는 이도 없지 않을 것 같은데, 차라리 한 이름 모를 선원으로 죽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죽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그들에게 류우 가계 최후의 인물은 결코 세속의 영화에 연연하던 이가 아니었노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황제의 복장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세간의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을 터이지만 그들은 알 것이다. 그는 결코 화려했던 시절을 그리워해서 그러한 주검을 남긴 것이 아니고 자신들에게 어떤 비의를 전하기 위해 남긴 모습일 것이라고. 그들은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일 것이다.
좋은 적은 좋은 친구와 통한다고 했지만 나는 영원히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므로 친구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역시 나는 그들의 친구이고 이는 최초의 만남 이후 90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의식해 온 사실이다. 한때의 믿음과 지난 세월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미움의 세월은 내가 그들에게 보낸 못난 질투의 산물이었을 뿐 그들이 스스로 친구의 예를 잃은 적은 없었다. 그들은 나의 친구가 아니었지만 나는 영원히 그들의 친구인 것이다. 그들은 알 것이다. 내 질투는 한 여인의 사랑을 잃은 데 대한 분노일 수도 있지만, 한때의 친구들로부터 소외된 데 대한 외로움이 더 큰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최후가 오고 있다. 몸 안의 에너지는 바닥이 난 지 오래고 영혼만이 생기를 잃은 지성을 지탱하여 최소한의 의식을 유지시켜 주었다. 이제 그마저 버릴 때가 되었다. 죽음은 영원한 평화라고 하는데, 사랑도 미움도 우정도 다 버린 어떤 안정된 경지일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내 몸에 제재를 가하여 다시는 이 기억으로는 재생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류우512는 영원히 죽는다. 아울러 류우 가계의 과거 기억들도 이것으로 단절된다. 나를 친구로 알고 있을 좋은 적들이여. 그대들도 오라. 나 먼저 왔던 곳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11. 앞 장면의 연속. 어떤 사가의 기록. 한 시대의 종말, 그 결론
최후의 황제 류우512의 실종 이후 은하제국 시대가 마감되고 의회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은하연방이 다시금 성립된 후 은하 우주는 하나의 중앙 대국과 변경의 군소 국가군으로 나뉘어 역사상 보기 드문 평화를 이룬다. 은하제국은 은하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전쟁이 없는 시대를 만든 후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다.
은하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은하연방은 은하 우주 유일의 강대국으로 확고한 자리 매김을 하고, 과거에 은하 우주의 패권을 놓고 세력을 다투던 성간연맹은 변경의 군소 국가들의 연합체로 전락하여 명목뿐인 국체를 유지한다.
이 무렵의 해적선 신천지호는 은하 우주 유일의 이질적인 존재로 은하연방군과 성간연맹군 모두의 추적 대상이 된다. 양국은 관과 군의 전력을 동원하여 해적선 신천지호를 뒤쫓는데, 이 시기의 언론기록을 보면 시민들이 집단격투기 경기를 관람하듯 추적상황의 중계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전설의 해적선 신천지호의 말류를 추적하여 한 장을 엮으려 한다. 지구계 인류가 고향별을 떨치고 나와 우주를 누벼 엮은 우주사 1000년은, 신이 빚은 순환의 한 고리에 불과함을 이야기할 텐데, 궁금한 독자들은 하회를 보시라!
삭제된 댓글 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구계 인류가 고향
을 떨치고 나와 우주를 누벼 엮은 우주사 1000년은, 신이 빚은 순환의 한 고리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인류의 역사 흐름의 시간에 비추어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이고 문명의 발
이 급속히 이뤄지는 미래의 인류에게는 특히 장구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 지구를 떠나 우주 
과 공간을 방랑하면서 수 차 소멸 후 재 복제로 탄생하는 반복적인 삶을 통하여 지구방위군과의 전쟁을 하고 사랑과 탐험을 해나가는 신천지 호 해적선의 주요인물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역동적인 삶은 지구차원을 벗어나 범 우주차원의 전쟁스토리로 공상과학 소설의 한 지평을 열어갈 것이라 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시고 좋은 충고 말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회에서 끝을 맺을 텐데, 모든 은원을 마감할 초이성적인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네요. 용두사미가 될 지라도 그러려니 하시고 웃어주세요.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 글이 재미있네요. 고맙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광속의 결과에 대한 의견들이 많더군요... 새로운 아광속의 의견이 새로웠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생 ... ^^
읽어 주시고 좋은 말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읽고갑니다.
좋아요
잘 읽고 갑니다
잘읽고갑니다
대단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5.18 12:58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