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사냥』 (Whale Hunting, 1984, 감독 배창호)
소심한 병태(김수철)는 짝사랑하던 여대생 미란에 대한 구애가 실패하고 좌절을 느껴, 고래사냥을 외치며 가출한다. 거리를 배회하다가 거렁뱅이 민우(안성기)를 만나 어울린다. 도시를 돌아다니던 그들은 윤락가에서 벙어리 여인 춘자(이미숙)를 만난다. 병태는 민우의 도움을 얻어 춘자의 잃어버린 말과 고향을 찾아주기로 하고, 그녀를 구출하여 먼 바닷가 섬으로 귀향길에 오른다. 굽이굽이 여행 끝에 마침내 춘자는 잃었던 말을 되찾고, 그리운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병태는 고래는 먼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의 누군가를 온몸으로 사랑하는 그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고난 이야기꾼 최인호와 영화장이 배창호가 만나, 꺼벙한 돈키호테 김수철과 청순 요염한 이미숙을 엮어 의뭉스럽고 능청맞은 천생 배우인 안성기가 품고서, 같이 자빠지고 고꾸라지는 로드 무비이다.
이야기를 뒤따르는 카랑카랑한 김수철의 노래 너머로 저렁저렁한 송창식의 「고래 사냥」이 슬그머니 들려온다.
‘우리의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모두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고래 사냥」 중에서)
천생 배우인 안성기가 천상의 별로 떠난 자리.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에 만 5살에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해서, 마지막 작품이 된 「노량: 죽음의 바다」(2023)까지 포함하면 고인은 69년 동안 무려 1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국민배우’라는 이름이 조금도 호들갑스레 들리지 않는다. 1980년대 전국민 우민화라는 ‘3S’(Sex, Screen, Sports) 팡파르 아래로 애마부인의 말발굽이 온통 휘젓고 다닐 때, 그는 선산을 지키는 굽은 솔처럼 늘 푸르렀다.
초창기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부터 평생의 단짝 박종훈과 엎치락뒤치락 『칠수와 만수』(1988),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라디오 스타』(2006)를 톺아보다가 이윽고 인생 마지막 무렵의 「카시오페아」(2022)에 이르렀다.
‘카이오페아’는 북두칠성과 함께 북극성을 찾는 믿음직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별자리다. 묵직한 주연에다 듬직한 조연까지 가리지 않고서, 늘 자기 자리를 지켜온 당신처럼 말이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떡은 떨려서 못 먹고/ 죽은 죽을까봐 못 먹고/ 술은 술술 넘어 간다// 얼씨구 씨구 잘도 한다 절씨구 씨구 잘도 한다/ 어화 품바가 잘도 한다 어허 품바가 잘도 한다.’ (「품바 타령」 중에서)
저 혼자 바쁘고 떨리며 죽도록 어두운 시절, 술술 잘도 넘어가던 당신의 능청스레 넉넉하던 추임새가 벌써 그립다.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갔다가, 이윽고 스스로 신화가 되어버린 당신이. (2026.01.)
첫댓글 영화를 잘 알지 못해도, 이 글이 안성기라는 이름을 조용히 기리는 글이라는 건 분명히 느껴집니다.
고래를 쫓던 이야기 뒤에 남은 것은 한 시대를 묵묵히 건너온 배우의 얼굴이군요.
덤으로 그 영화와 노래가 우리 풋풋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