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스무 살 청춘의 기억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 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1981년 제1시집 이 시대의 사랑 중에서
귀신처럼 피었다 꽃이 진 자리가 서늘하게 녹음 지는 5월의 끝자락 저녁,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 명치끝이 아려온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35년 전, 이렇게 30세를 노래한 시인은 65세가 된 지금도 현실로부터 자신을 추방하고, 그 도피로 오는 간극을 정신적 고통으로 메우고 있다. 한때 행려병자로 거리를 떠돌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201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2016년 5월 현재 김수현 드라마에서 인용될 정도로, 70대 중반에 이른 냉소적인 드라마 작가의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시인이 아직 건재하다는 루머를 공중파를 통하여 전하고 있었다.
1983년 필자는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 곧 판금 조치를 당할 것이라고 했던 문병란 시인의 ‘땅의 연가’를 빌려 보면서도 시인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과감히 ‘돈’을 주고 샀다.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충격이었다. 시인의 시집은 스물두 살 어린 필자에게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 비극적 격렬함은, 문학세계라는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젊은 청년에게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니 당연히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결국 그렇게 장렬히 전사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일깨워 주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 매독 같은 가을 /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개같은 가을이)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 마른 빵에 핀 곰팡이 /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일찍이 나는)
어설픈 청춘 1983년, 그해 가을 내내 춘천은 어두운 안개로 아득하였다.
1986년 원주에서 병장 계급을 달고,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를 벼룩의 간(肝) 사병 월급으로 ‘현금’을 주고 샀다. 병장쯤이면 사제 책을 읽어도 누가 간섭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술 대신 시집을 산 군기 풀린 병장은 비극적으로 행복했다.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신경숙 소설가가 차용했다는 詩,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누군가 “더 나아갈 데가 없을 만큼 강렬해진 비극성”이라고 했다. 그해 11월 초순 원주 반곡동이 아침마다 안개에 휩싸이면, 좀 더 교만해진 말년 병장은 노트에다 새벽이면 빛보다 안개가 먼저 찾아온다, 라고 써 놓고 그걸 비극이라고 폼 잡았다.
소설가 백영옥은 스무 살 무렵에 이 시를 헌책방 화장실에서 읽었다고 했다. 누가 서점 화장실에 이 시를 핏빛 화인火印으로 새겨 놓은 모양이었다. 어린 문청文靑은 서점 주인에게 물어서 구석 책 더미에서 이 시집을 구하고는, 하루 종일 청파동을 헤맸다고 고백했다. “못내 서러웠고, 나도 모르게 울었다.”면서 스무 살, 상실의 풍경을 설명했다. 그로부터 십 수 년 후 서른 중반 무렵 먼 길을 돌아 온 그녀는 제4회 세계문학상을 받는다. 스무살, 그 상실의 계절에 최승자 시인에게 진 빚을 백영옥은 ‘서른’이 넘어서 갚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천명을 넘어선 필자는 33년 전 최승자 시인에게 진 빚을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다. 상기도 그 푸른 언덕 청파靑坡는, 나에게 슬픈 청춘의 기억으로 막막할 뿐이다.
그래, “벼락처럼 왔다, 정전처럼 끊어지는… 이 시대의 사랑이여”
오늘도 나는 내 슬픈 청춘에 바치는 송가頌歌를 마치지 못하였네.
"넋두리 한판 쏟아놓은 기분".. 최승자 시인 '빈배처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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