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원포주(君子遠庖廚)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 한다로 직역할 수 있는데 심성이 어질고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무섭거나 잔인한 일을 하는 것을 해서도 안 되며 봐서도 안 된다는 뜻의 군자원포주(君子遠庖廚)는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편에서 볼 수 있다.
제(齊) 나라 선왕(宣王)과 맹자(孟子)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야기하면서 맹자가 사람은 누구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즉 인자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왕도정치를 하는 발판임을 강조했다.
선왕이 ‘과인 같은 사람도 백성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맹자는 ‘할 수 있으며 신이 호흘이라는 사람에게 들은 말로 왕이 당 위에 앉아 있는데 소를 끌고 당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묻기를 소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하자 그 사람이 피를 받아서 종에 바르려고 한다고 대답했고 왕은 그 소를 놓아 주라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하고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했으며 그는 그렇다면 종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하고 묻자 왕은 어떻게 폐지할 수 있느냐 양으로 바꾸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까’ 물었다.
왕이 있다고 답하자 맹자는 ‘걱정하지 마시고 이것이 바로 인자한 처사로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던 것으로 군자는 금수에 대함에 있어서도 그 산 모습을 보고서는 그들의 죽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 죽는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하기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君子之於禽獸也 見其生 不忍見其死 聞其聲 不忍食其肉 是以君子 遠庖廚也) 이라고 말했다.
맹자가 강조한 것은 왕도정치로 그 첫번째 요건은 마음이 흉포하지 않고 어질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래야만 백성들을 그런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맹자의 유교사상은 우리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그 옛날 법도 있는 집안에서는 남자의 부엌 출입을 철저히 금했으며 살생이 본업인 백정을 천시(賤視) 하기도 했다.
선왕(宣王)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제4대 왕으로 이름은 벽강이며 위왕(威王)의 아들이며 위왕이 지금의 산동성인 마릉(馬陵)의 일전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위(魏) 나라를 패망시킨 후 이를 계승해 중국 동부 제국 중에서 최강국이 됐다.
부왕 때부터 학술과 문화의 융성에 힘써 왔는데 선왕은 이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며 당시의 수도인 임치(臨淄)는 가장 부유한 도시로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선왕은 또 인문(人文)의 애호자로서 많은 자유사상가를 보호해 그들에게 모두 저택과 관작을 주었으나 정치에는 관여시키지 않고 다만 그 학설을 토론시킬 뿐이었으며 이들 학자를 직하(稷下)의 학사라 일컬었으며 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맹자(孟子)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로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출생해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했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됐으며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고 저술도 했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됐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며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됐으며 이는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했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로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했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해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로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는데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해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됐으며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돼 유교를 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됐다.
오늘의 한자
君 : 임금 군, 子 : 아들 자, 遠 : 멀리할 원, 庖 : 푸줏간 포, 廚 : 부엌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