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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酒)
氵(물수)변과 酉(닭유)자가 합쳐져 술을 이르는 주(酒)다
유시에 닭이 잠자는 시간(겨울에는 5시 여름에는 7시)
술을 마시되 유시에 마시고 일찍 자고 "닭이 물 마시듯 조금씩 마셔라"란 뜻이다.
오늘도 고주망태로 마시는 분 계시면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나마 고향 의성땅을 밟아보고 상주땅의 부치랭이 고개의 휴게소에 도착한다
지금의 25번 4차선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 사랑받았던 옛 25번 영남대로 국도
편의점이 있으나 손님은 없고 주인장 내외만 있을 뿐 조용히 물 한병 사들고 나와
인증 담고
그동안 참 많이도 걸었다.
국토를 배우는 견습생답게 대한민국을 알아간지도 어느덧 8년 차
몸은 나이란 숫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생각이란 녀석은 나이가 먹은 만큼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상주의 진산이라는 천봉과 그 뒤로 노음산이 보이고
오늘은 천봉산 지척인 상주땅 어느 주막에서 자야 할 텐데... 고단한 몸 좀 쉴 수 있어 좋은 그곳
먼산만 보고도 이렇게 마음이 설레니 상주시 초입에서 공성면 백두대간 웅이산 동쪽에서 발원해 상주땅을 오롯이 적시며
흘러온 맑은 병성천 다리를 건너
웅장하고 멋지게 서있는 경상 제일문을 지나면 상주읍이다
한때는 경주와 함께 경상도 제일의 큰 도시였으며 조선 초기 약 200년 동안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상주하면 3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우복동과 삼백(누애, 쌀, 곶감)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
삼백은 다 아실 테고 그중 하얀 실크를 뽑던 누에고치 생산은 언제부터였을까?
중국 황제의 첫 시작이라는 허원대제의 부인으로 누조라는 여인인데 누애의 신으로 모셔져 있는 분이다
상주는 신라시대 때부터 누애를 키우던 곳 지금도 상주에는 누애를 키우는 곳이 있으며
이곳 상주 바로 옆동네인 의성땅인 저의 고향에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봄, 가을에 누애를 키워
누애 기르는 건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 조금 안다.
상주읍에 들어와 북천을 이어주는 후천교를 지나
북천은 백두대간 지기재 인근에서 흘러오는 맑은 하천
후천교에서 본 북천
"곶감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짐승계의 최종 보스격인 호랭이가 한마디 하지만
곶감이란 녀석은 "호랭아 호랭아 천봉산 호랭아"라며 놀리는듯한 그림이 참 편안하게 그려져 있다.
고양인지 호랭인지 모르겠지만 호랭이 가죽 한장은 한양에서 기와집 한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임란 북천 전적비
임진년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 중앙군 60명과 권길 박걸이 소집한 장정 800명이 왜군 1만 7천 명과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원 순국한 곳
멍청한 장수 한 사람이 지랄을 해서 패전한 전투로
1592년 4월 14일 동래읍성을 포위하여 15일 부산 동래읍성 전투를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
이 무렵 선조 임금은 크게 당황하여 순변사 이일 장군을 경상도 상주로 급히 내려 보낸다.
하지만, 상주로 내려보낼 병력이 없으니... 가보고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말면 말라는 식으로 보내 놓으니
순변사 이일이 모병을 하는데 유생들과 지방 서리,사대부 자식들은 몸이 허약하다거나 공부해야 한다고 다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힘없는 농민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상주시 병성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현, 임란 북천 전적지) 8백여명의 병졸을 만들어 일본군을 대적하는데
4월 중순 어느 날 김천에서 농민이 찾아와 왜놈들이 근처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자 순변사 이일이 "무슨 헛소리로 부하들의
사기를 꺾느냐"며 농민의 목을 베어 버린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일은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도망가고 싸우던 병졸들은 대부분 전사한다.이일은 훗날 탄금대 전투에서도 도망친다. 도망도 싸움의 기술이라지만 이일의 훗날은 어땠을까
이후의 기록을 보면 1601년도에 부하를 죽였다가 살인죄로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는데 임진왜란의 최악의 장수로
신립, 원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장수?로 알려져 있다.
신립 장군은 당대 최고의 장수로 충주 남한강이 흐르는 탄금대에서 한방에 모두 거덜 낸 장수이나 도망은 치지 않았고
원균 역시 한방이 있는 장수로 칠전량에서 모든 걸 한꺼번에 말아먹은 장수다
이일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근무지 이탈(도망)과 무고(誣告)를 일삼은 장수로 알려졌다
아홉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안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중앙군 판관 권길,사근도찰방 김종무,호장박결,의병장 김준신,김일 무명용사 1인의 위패를 모셨다.
상주 북천 전투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순변사 이일장군께서는 부하들이야 죽든 말든 일찌감치 발가벗고 도망쳐서 순국이고 뭐고 없고
이제 해는 넘어가고
상주에서 문경으로 가는 길은 옛 3번 국도인 북상주로 따라 문경으로 향한다.
상주시 외서면에서 도착하니 주막은 거의가 문을 닫는 분위기라 "주모 밥 한 그릇 팔면 안 되나요!"
"어야노! 문 닫을 시간인데..."
일단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 02시 무렵에 일어나 상주시 공면검으로 걸음 한다
야간에 걷는 발길이지만 외롭지 않다.
부산에서 한양은 북쪽 방향이라 북극성의 애처로움과 카시여왕의 거꾸로 된 의자와 북두칠성 그리고 동쪽의 오리온 자리가
맑은 밤하늘을 알려주니 이 얼마나 즐거운 걸음인다.
오래전 선비들이나 이 길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갈 때 길잡이로 밤하늘의 북극성을 보고 외롭게 걸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간에는 눈으로 보는 걸음이라 생각을 깊게 할 수 없었는데 야간에는 어둠으로 인해 눈으로 보는 건 사라지고
대신에 생각이란 녀석이 찾아온다.
과거 보러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보고, 등짐장수의 고달픈 발걸음이 되어보고
실록에 기록된 지식인 4천 명 중 유배를 다녀온 700명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해 보고
썰렁하고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아무도 존중해 주는 이도 없지만 목표를 위해 걸어야 했던 사람들
함창 방면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모두가 발걸음의 대가들이다. 숫자인 0에서 시작해 기 천리길을 밥 먹듯 걸었으니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들 그 모든 게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좋은 날 잠시 천리길 걷겠다고 집을 나선 나 같은 사람은 지천에 널렸을 거란 생각과 빨리 날이 밝아 오기만 바라보고
공갈못 유래비 앞을 지나며
삼한시대의 대표적인 김제의 벽골재,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지와 함께 가장 컷던 저수지중의 하나인 공갈못
멀리 속리산 국립공원 형제봉 지척인 갈령 삼거리봉에서 흘러온 이안천을 지나
이안면을 지나고
넓은 평지의 땅이라 길가의 벚나무 잎은 모두 땅에 떨어져 앙상하며 반바지를 입고 왔더니
한기마저 들어 걸음이 빨라진다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왔더니 함창을 지나고 문경읍에 들어온다.
깨끗한 모래로 유명한 내성천이 흐르는 예천땅 너머로 여명을 밝히는 모습
예천 너머 양반의 고장인 안동땅은 경상 좌도 땅으로 척박해도 학문에 힘쓰는 선비가 많았고, 경상 우도는 성주 인근으로부터
경남쪽은 토지가 비옥하여 부자가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학문에는 게을러 뛰어난 선비가 드물었다는 곳이다
경북은 산 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곳 산지가 많은 경북 북부지역은 땅이 척박해서 먹을게 부족하니 공부만이 살길이고,
평지가 많은 곳은 공부를 게을리해도 등 뜨시고 배 부르니 꼭 학문에 힘쓰지 않아도 된듯하다.
이른 아침이지만 주막집 문 연 곳이 있어 들어가 간단하게 먹을 정도만 한 그릇 담아 놓고
여주인께서도 걷는 걸 좋아하시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꿈만 꾼다고 하시며 야야기를 나눈다.
조선시대 한 냥은 5만원 기준이니 1전은 5천원, 1푼은 500원쯤
국밥 한 그릇 2전 5푼이었으니 1만 500원
막걸리 3푼 천오백원
소고기 한 근 7전이니 3만 5천원
닭 한 마리는 2전 3푼이라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대단한 분이 식전 댓바람부터 집에 방문하셨다며 주인장과 아들 두 분이 직접 배웅까지 해주셨습니다.
훗날 이길을 지난다면 꼭 다시 찾아오겠다며 인사 드리고
문경에서 주흘산 아랫 동네인 문경읍으로 가는길에 만나는 보부상의 등짐 그림
그림으로 보면 무게는 대략 20kg는 되어 보인다. 저렇게 짊어지고 문경새재를 넘어간듯하니
보부상(봇짐과 등짐)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시작한 조선시대 때부터다.
전국적으로 1천 개의 시장이 있었으며 대부분 5일장이라 고개 넘어 이 동네, 하천 건너 저 동네를 찾아다녔는데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 농사를 기본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상인은 언제나 천시를 받아왔고
특히 짐도 무겁고 빡쎈 직업이었지만 결국은 돈이 최고가 아니었겠나
고려말 보부상의 시조라는 백달원이 목화솜으로 다친 이성계를 구해준 인연으로 패랭이 모자에 목화솜 한 뭉치를 달았고
이후 중기 때 보부상이 인조를 구해준 인연으로 패랭이 모자에 목화솜 하나를 더 단다
패랭이 모자에 목화솜 하나는 조선 초기, 두 개는 조선 후기로 보면 될 것 같다.
조선후기 너도 나도 국밥집을 열어 장사를 하다 보니 국밥집 천국이고 그와 더불어 보부상도 전국적으로 25만 명이나 되었다.
뭐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민족이니 국밥집이 전국에 12만 개에 부산에서 이곳까지 올라오며 가능한 국밥집을 찾아
맛을 보고자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가 편의점이다.
문경시 유곡마을의 비석거리
유곡역과 관련한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곳으로 모두 19기가 있다
주변의 여러 곳에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비석을 현재의 자리에 모아 놓았고
유곡역은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역도 체개에서도 상주도가 으뜸이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각지로 뻗은 9대 간선도로도 가장 큰 찰방역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객사만 40여 채에 역리 469명, 노비 83명 다수의 마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인근 여덟 고을을 걸쳐 200여 리에 19개의 역을 관장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역과 객사
조선시대 때는 역과 원이 있었는데 전국에 537개나 존재했었고
역의 기능은 관에서 관리를 하거나 지방의 유지들이 관리하는 곳으로 공문서, 세공의 수송과 마필공급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숙식 제공이었다.
광해군 때 대동법으로 쌀로 세금을 내던 것을 공인들이 특산품을 사러 갈 때 화폐로 사고팔면서
본격적인 주막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해 원이나 역의 역할도 차츰 줄어든다.
주막은 민간사업으로 조선후기부터 장사 밑천이 크게 들지 않아 쉽게 돈 벌 수 있어 마을마다 고개마다 생김
비석거리의 비석들
한번 읽어보시고
유곡고개를 넘으며
유곡고개의 잘 생긴 미륵 바위가 있고
불정역으로 가는 길에
문경땅에는 빼어난 명산이 참 많죠
서쪽으로 용추계곡의 대야산과 천년고찰 희양산, 북쪽으로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조령과 부잣집 기와지붕을 닮은 주흘산,
집안을 지키는 성주신을 닮은 성주봉과 명나라 지관인 두사충이 정탁 선생께 명당자리를 잡아준 연주패옥 자리가 황장산
하천으로는 속리산에서 흘러온 쌍용이 노닐던 맑은 영강과 문경새재나 대미산에서 흘러온 조령천이 토끼비리길에서 합쳐
문경으로 흘러온다.
좌측의 비석은 영남의 이름 있는 유생의 비석으로 추정하며
정욱재 송덕불망비다.
꿀떡고개나 토끼비리길로 가려면 속리산 천황봉 동쪽 계곡에서 흘러온 영강을 건너야 하는데 징검다리는 지난 홍수 때 떠내려
가고 없고 물도 상당히 많아 조금 더 올라가다가 된섬교 다리를 건너 절벽으로 향한다.
선비들은 맨발을 보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 큰 물일때 그리고 한겨울 차가운 얼음물일때
업거나 목마를 태우거나 짐이나 가마를 들고 하천을 건네주는 월천꾼이라는 특별한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큰 물에 미끄러지면 어쩌나... 돈은 고사하고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직업인 월천꾼
아마 이곳 영강에도 선비들을 건네주던 월천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된섬교에서 본 영강과 오정산 모습
8세기 중엽 당나라 청원선사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란 선화가 생각나게 하고
3번 국도와 진남교 모습
부산에서 문경새재까지 과거 보러 올라오는 동안
낙동강을 지척에 두고 양산천
밀양의 밀양강을 건너 청도로 들어와 밀양강의 지류인 청도천
대구 팔조령을 건너오면 대구의 신천과 금호강이 기다리며
칠곡으로 넘어오면 한천
경북 의성땅에 들어와 낙정에서 낙동강을 건너야 하고
삼백의 고장인 상주로 들어와 병성천과 북천 그리고 이안천을 건너
문경땅으로 들어와 영강을 건너 토끼 비리길로 오른다.
이곳까지 큰 물길과 작은 물길을 수 없이 지나 마지막 물길인 조령천만 건너면 새재에 도착한다.
기존의 토기비리길은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흔적마저도 안 보이고
자칫 삐끗하면 저 아래 영강으로 곤두박질할 것 같은 모습으로 위태롭다.
어느 과객이 집에서 기다리고 처자(妻子)를 생각하며 돌 하나 올리고
두 번 다시 이 길을 걷지 않게 과거에 급제하도록 산신께 빌었을 돌탑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듯 많이 허물어져있다.
나도 돌 하나 더하며 소원을 빌어본다.
삼국,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며 토끼 비리길은 맨질 맨질 하게 닳아있다.
이 길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녔을까
내 노라 하는 학자들이 끝없이 다녔을 길이며 등짐장수의 고단한 어깨에 무게를 더하던 뚱뚱이 장독까지
토끼비리길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경사면의 비탈진 길에 만들어진 잔도길이며
영남대로중 가장 험난한길이다.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왕을 도우러 갈 때 이곳에서 길이 막혔는데 토끼가 이곳을 지나는 걸 보고 진군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왕건이 이 길을 지나 지금의 대구 팔공산 전투(927년)에서 대패하고 겨우 살았다
토끼 비리길 안내판
진남문 고모산성
산은 백두로부터 줄지어 흘러온 자리이며 물 또한 백두로부터 아래로 흐르며 만든 곳에 자리하는 오래된 산성이다
생사를 가르는 절망적인 순간에 돌 하나, 하나 쌓아 올렸을 위대한 유산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살고자 했던 간절한 희망이었을까
절박했던 마음과 절실했던 마음이 녹아둔 산성
신립 장군이 이곳 진남에서 1차 방어선을 펼치고 조령과 주흘을 주 방어 기지로 했다면 좋았을 텐데
조선 최고의 명장이던 신립장군도 종사관 김여물 장수의 충언을 무시하고 백두대간의 험준한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로 흐르는 남한강과 달천, 충추천이 만나는 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조선군 신립과 왜놈 소서행장의 육군대 육군으로
맞짱을 뜨지만 질퍽이는 논바닥에서 말 달리는 전투를 하다가 조총 사격으로 몰살당한다.
이 전투로 인해 선조는 비 오는 날 저녁 도성을 버리고 본격적인 도망을 시작하였고
뭐 한다고 달천 평야에서 질퍽한 논바닥에서 말 타고 싸운다고 고집했는데...
신립, 장군은 원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장수?로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의 장수로 충주 남한강이 흐르는 탄금대(달천평야)에서 한방에 최정예 8천 병사들 모두 거덜 낸 장수이나
도망은 치지 않았지만, 원균 역시 한방이 있는 장수로 칠전량에서 모든 걸 한꺼번에 말아먹은 장수다.
두장수의 공통점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한 고집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닮았다
꿀떡고개가 앞에 있고
복원한 주막터
고모산성이 있는 곳이며 우리 선조들께서 이고개를 넘어 하늘재(신라 제8대 왕 156년 무렵)나 문경새재(태종 14년인 1,414년 개통)를 넘어 한양으로 발걸음을 옮겨간 곳
그 옛날에도 이곳을 지나는 이는 꼭 성황당에 들어 무사안녕을 빌었을 터이다.
아주 오래전 이고개를 지나는 길손에게 떡을 팔던 부녀가 살았는데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딸이 어찌해서 꽁냥 꽁냥 연을
맺고 선비가 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젊은 선비가 오지 않아 상심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성주산과 백화산 방향
꿀떡고개를 내려오면 북쪽으로 멋진 조령산과 주흘산이 지척에 있고
구도로와 신도로를 경유해 마성면을 지나면 서쪽에 백두대간길에 만나는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백화산 자락의 다섯 손가락인
성주산과 옥녀봉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 마성면은 산과 들이 잘 어울려 평탄하면서도 맑은 조령천이 흐르고 기상 넘치는 산의 기운이 느껴진다.
주흘산 모습
오래전 자기가 태어난 땅이 한양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는 북한산이라는 더 아름다운 산이 있어 한양을 등지고 서 있다는
전설 있을 정도로 문경시 마성면에서 보면 주흘산의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왜군들이 고모산성을 너무 쉽게 통과 한 후 이 길을 지나 조령이나 주흘을 지나며 각 고을을 도륙했으나
명산들 중 강원도 오대산, 단양 소백, 합천 가야는 왜적이 이르지 못해 삼재가 들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고
강원도 금강, 경남 지리, 덕유, 충청 속리산은 왜적이 침입한 걸로 알려졌다.
주막에 들렀으니 잔치 국수에 맥주나 한잔하고 카드로 2전을 긁고 나온다
백두대간의 중심 문경
문경새재 옛길 보존기념비
문경새재를 코앞에 두고
예로부터 어전 앞으로 흐르는 한강과 영남인의 젖줄이라는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정도로 표현했다.
문경읍 상초리 입구에 들어서면 관문이 보인다 곧 문경 새재를 넘을 수있을거란 희망이 생기는곳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1관문인 주흘관 그리고 2관문인 조령관 마지막 대간길 높은 곳에 3관문인 조곡관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고
제1관문 주흘관을 지나며
18세기 무렵의 조선 10대간선도로
1로 의주대로 의주에서-평양-개경- 한양
2로 경흥대로 경흥-서수라-경흥-회령-경성-북청-원산-회양- 한양
3로 평해대로는 동해안으로 오는 평애-울진-강릉-진부-원주- 한양
4로 영남대로(좌로)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새재-충주-음성-용인-한양
5로 영남대로( 우로) 통영-고성-함안-현풍-성주-상주-영남대로와 동일
6로 통영대로 통영-고성-함양-운봉-전주-삼례-공주-차령-천안-수원-과천-동작나루-한양
7로.삼남대로의 삼남대로 제주-해남-나주-장성-노령-정읍-전주 이후는 통영대로와 동일
8로 충남 보령 오천항- 예산(신례원)-천안-한양
9로 강화대로는 강화도에서 김포를 지나 한양이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인데 조선초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전국 주요 도로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X자로 이루어 진다.
영남대로.삼남대로.통영대로.의주대로.경흥대로는 거의 천리길이며 나머지는 거리가 조금 짧다
그외 29개의 주요 지선도로가 있었다.
신도비와 불망비 선정비가 나들이 객들을 반긴다.
맨 앞의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상도 관찰사를 하시다가 중앙에서 도승지와 예조, 호조, 형조판서를 역임했던 분의 비석이다.
드라마 촬영장이 보이고
조령원터
고려때와 조선시대 때 출장 가는 관리들이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물이다.
한양이나 영남으로 오고가는 길손들의 중요한 이동 통로였으며 이곳 조령과 주흘산 사이에는 이곳과 신혜원 그리고 동화원 같은 원터가 전해진다
역의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소지왕 9년에 서방에 우역을 두고 소사에 명하여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만큼 역이나 원의 역사는 꽤 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官) 주도로 하는 숙박시설인 만큼 일반인들이 이용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막집에 들렀으나 주모는 없고 텅비어 있다.
저녁이라면 마루에서 자고 가도 될 정도로 고요하고 아담한 초가집이다.
그나저나 무릎팍에 테이핑을 했더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영 아니올시다
교귀정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 인계하던 교인처로 1470년 경이니 성종 때 건립되었는데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아라시 공사관으로 피신할 무렵인 때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99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좋은 길 옆으로 한 사람이 지날 정도의 옛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다시 임도로 이어진다.
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면서 나들이객들의 움직임도 줄어들고
참고해서 보시고
새재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옛 선인들께서 이곳 새재를 지나면서 흔적을 남긴 것들을 다시 비석에 옮겨 적은 것들이 많이 보인다
그중에 사대부와 기생의 사랑으로 유명했던 분들 중 한 분인 종 1품의 좌찬성을 역임했던 소세양의 흔적이 보인다.
전라도 전주에서 유명했던 소세양은 친구들에게 송도로 가서 그렇게 빼어나다던 황진이와 30일만 살다가 오겠노라며
송도로 가서 황진이와 30일간 살다가 다시 돌아오려는데 황진이가 누대에 올라 시를 읊었다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이 높이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 사대부와 기생의 애틋한 사랑으로
퇴계와 두향(퇴계 선생이 돌아 가시자 곡기를 끊고 죽음)
최경창과 홍랑(최경창이 죽자 무덤에서 3년 시묘살이 후 자결)이 대표적이다.
새재로 오르는 엣길에 낙동강 발원지 초속이 보인다.
부산에서 272km지점인 백두대간의 새재 조곡관
백두대간길이며 수많은 대간꾼들이 이 길을 통해서 남으로 북으로 올라갔던 길이며
사계절이 뚜렷했던 자연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았던 영조 때의 산경표와 철종 때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백두에서 시작되는 산줄기가 바다까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데 산줄기가 물을 만나기까지 생명력 있게 이어지는
맥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산줄기는 끊어지면 안 될 뿐 아니라 생기가 가득해야 한다
음지에 사는 생명 그리고 양지에 사는 생명
꽃이 먼저 피는 녀석이 있으면 잎이 먼저 피는 녀석들은 다른 듯 하지만 결국 산속에 함께 살며 생명력을 나누며 살아간다.
산경표에는 산 이름으로 된 백두와 장백
지방 이름으로된 해서와 호남
강 이름으로 11개의 정맥이 있는데 강과 관련하여 산줄기 이름을 정한 것은 산줄기가 분수령(分水嶺)이 되고
산이 곧 강을 이루는 수원이 되기에 이에 따라 유역권이 형성된다는 생각으로 강이름으로 정맥을 정했다.
대간길에 서니 마음이 요동친다.내년에도 긴 시간을 만들어 다이랙트로 한번 더할까 그럴까!...
바이러스는 숙주 없이 못 살고 산꾼은 산 없이 살아가지 못하니 어디 내년에 다시 한번 더 기약해 보자
그나저나 부산에서 이곳까지 길을 잘 알기에 쉼 없이 왔다만 이제 충청도와 경기도 땅은 또 어떻게 이어 가야 하나
그리고 오늘밤은 또 어디서 잠시 묵을까?
한양까지 150 km정도 남았는데 진도가 많이 빠른 편이라 한 탬포 늦춰도 될 것 같다.
어렵사리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한다면 임금님 앞에서 꼭 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상전하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멱살 잡히더라도 이 말은 꼭 해보고 싶어진다
예전에는 이길은 논두렁 둑길보다 못했다는데
지금은 차한대 지날정도로 넓어졌다
영조때 이중환 선생이 쓴 택리지에 보면 조선 선비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다 적었는데, 새재를 넘어오니 충청도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며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 마을에 도착한다.
고사리 마을의 유래는 문경과 괴산 고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고사리 마을이라고 부른다는설과
예전부터 3관문 주위로 모래가 많이 난다는뜻의 고사리(古沙里)란 두가지 설이 있는데
위의 고사이가 더 친근감이 있고 그럴듯한 설이라 생각해본다.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니 멀리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난 껍질을 벗어 놓은 듯한 신선봉이 보이고
원두막에 걸터앉아 잠시 쉬며 있으니 오늘 신선봉으로 산행 가셨다던 맥가이버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잠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충청도란 말은 충주에서 청주까지를 뜻하는데 1356년에 고려 공민왕 무렵에 탄생을 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경상, 전라, 충청은 각각 좌도와 우도로 별도로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이어오던 조선 팔도는 약 5백년동안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불리우다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아관파천 무렵 (1896년대에 이르러 친러 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
사관으로 옮긴 사건때) 팔도를 남과북으로 나누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소조령에서
새재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첫 번째 만나는 고개
대안보
신라 소지왕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대규모로 정비되었으며
마패는 관품에 차이가 있는데 병조에서 마문을 발급하면 상서원에서 마패를 내주었다.
이곳 안부역참은 충주 연역원 14개 중 하나였으며 대마와 기마, 복마가 15마리, 역노 106명, 역비 28명, 역리 25명을 뒀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해질 무렵의 맥가이버 님
오랜 인연 감사합니다. 제가 이곳 인근을 지나면 언제나 찾아오시는데 이번길에도 많은 도움이 있었으며
제가 갈길을 미리 아시고 정보를 주셨죠
첫댓글 저 어릴때도 누에 많이 길렀죠.
뽕나무 참 많이도 땄습니다.
천봉산과 임란북천전적지 저번주에 다녀왔었는데
이리보니 더 반갑네요.
문경대간 토끼비리길도 걷고
고모산성도 둘러보시고 알차게 걸었군요 ㅎㅎ
맥가이버님도 반갑네요.
한양 가는길이라 2부로 마무리가 안되는군요..
잘보고 가며
3부도 기대해 봅니다.^^
훌룽하신 방장님의 후기 덕분에 공부 많이 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친구님 덕분에 비석의 한자들 많은 공부가 되었답니다.
후일에 삼남대로길을 걸을때 친구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을것 같습니다.
라면이라도 끓여 주신다면 고맙겠구요 친구님 덕분에 발걸음이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배병만 예로부터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 하였지만
밥보다 라면을 더 좋아하신다면야. ㅋ
주상전하 뵙기가 쉽지않네요 다음주는 되어야 그것도 급제를해야.....
영남길은 어느 정도 알겠는데 다음 갈 길이 삼남대로 길이라 그 마져도 공부하느라 쉽지 않습니다.
과거 급제를 못해서 삼남 지방으로 한번 더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지부장님 이번주에는 단풍 구경하러 가시겠죠
@배병만 예 순창으로 갑니다
하루 시간내어 이른새벽
장원급제 가장높은 곳에서 부봉지나 주흘산 정상에서 올라 오는길 가늠하고 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신선봉 정상에서 세상 편안하게 누워 기다리면 이것 저것 비우는 시간도 되었지요
수고와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