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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독주곡
1) 바로크 독주곡
2) 고전주의 독주곡
3) 낭만주의 독주곡
4) 20세기 독주곡
7. 독주곡
독주곡은 말 그대로 기악연주와 혼자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킨다.
독주 악기로 가장 다양한 표정을 낼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며, 낭만주의 시대는 피아노 독주 음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거에 전혀 독주 악기로 쓰지 않던 트롬본이나 튜바, 바순, 더블베이스 같은 악기도 훌륭한 독주 악기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지만 전형적으로 가장 애호되던 독주악기는 피아노 외에 바이올린과 첼로, 플루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악기들이 무반주로 연주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피아노의 반주로 연주될 경우도 중주곡이기보다 독주의 범주에 놓게 된다. 물론 피아노가 단순한 반주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대등한 관계에서 연주하는 소나타 같은 경우는 2중주 실내악곡으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으로 한 가지 악기가 피아노 반주를 수반하여 반주의 비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중요한 선율을 연주하는 경우는 독주곡으로 분류하는 것이 상례다.
1) 바로크 독주곡
독립된 연주곡으로 기악음악이 탄생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라 할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악기만을 위한 음악이 발전하기 시작한 바로크 시대엔 많은 협주곡과 실내악곡이 작곡되었으며, 오늘날의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악기가 이 당시 계량되고 연주법이 개발되었다.
기악곡이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내어 성악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한 이 시대의 독주곡은 당시 악기로 가장 비중이 있었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바이올린, 플루트 등을 위해 만들어졌다.
① 푸가(fuga)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이 가장 정교한 솜씨로 엮어간 악곡이자 형식인 푸가는 주제라고 부르는 하나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기초로 한 다성음악이다.
푸가는 기악이나 성악의 그룹을 위해 작곡되기도 했지만 주로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 같은 건반 악기 작품이 많다.
푸가라는 말의 어원은 ‘도망가다’로서, 한 번 제시된 주제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도망가고 다른 선율이 그것을 뒤쫓아가는 듯한 음악이기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것이다.
푸가 전체에 걸쳐 이러한 주제는(때로는 2~3개일 수 있다.) 3~5개의 선율선(성부)에 걸쳐 모방적으로 반복되며 악곡 전체를 형성한다. 즉, 푸가는 돌림노래의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제를 전개하는 데는 정해진 규칙이 있어서 처음엔 무반주로 주제를 제시하고 그 주제가 성부를 바꿔 반복될 때는 이것을 응답이라 하며 그에 따른 새로운 주제인 대주제가 주제의 위나 아래에서 균형을 이뤄준다.
푸가의 시작 부분에서 주제가 각 상부에서 차례로 제시된 다음, 주제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 또는 어떠한 성부에서 어떻게 조성이 바뀌는가는 전적으로 작곡가의 재량에 따라 결정된다. 이때 주제가 계속해서 성부를 옮겨 다니는 사이에 자유롭게 작곡된 부분이 첨가되는데 이것을 에피소드(episode)라고 한다.
에피소드는 푸가에 다양성을 부여하며 주제가 다시 나타날 때 새로운 느낌을 부각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주제가 연속적으로 겹치는 부분인 스트레토(stretto)와 맨 아래 성부의 한 음이 길게 지속되면서 다른 성부들이 움직이는 지점인 페달 포인트(pedal point) 등이 중요한 음악적 부분이다.
이러한 푸가를 제대로 감상한다는 것은 주제가 여러 가지 짜임새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를 귀로 추적하는 것이며, 따라서 푸가는 매우 지적이고 논리적 감상 태도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바흐와 헨델은 수백 개의 푸가를 썼고 바흐는 생전에 ‘푸가의 대가’로 불렸다. 그의 유명한 푸가 작품으로 ‘오르간 푸가 g단조’와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푸가의 기법’등이 있으며,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푸가의 기법’은 푸가의 기술성과 예술성을 완벽하게 결합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흐 이후로도 푸가는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수학적이고 정교한 음의 건축물로서 많이 작곡되었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생상스, 프랑크 등 고전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들이 이 분야의 걸작들을 남겼다.
② 즉흥적 작품들
푸가는 단독으로 연주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 앞에 즉흥적인 성격을 갖는 곡들과 한 쌍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특별히 세속적이거나 종교적 의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교회 오르간 주자들과 하프시코드 주자들은 도입의 의미를 가지면서 자유로운 음악양식으로 된 즉흥적인 작품들을 연주하곤 했는데, 이들 중에 전주곡(prelude)이 푸가와 결합되는 일이 많았다.
바흐의 건반 작품 중 유명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과 2권은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반음 위에 각각 전주곡과 푸가를 배치시켜 놓은 것으로, 자유롭고 현란한 전주곡과 그 보다는 다소 느리고 조직적 푸가가 대비되며 바로크 시대의 콘체르타토 양식의 미학을 대변해주었다.
또한 전주곡과 유사한 즉흥적 작품으로 토카타(toccata) 역시 푸가 앞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손가락을 가득 채울 만큼 중후한 화음들과 음계를 오르내리는 현란한 독주곡이었다.
의식의 서막을 장식하던 토카타는 원래 어원이 ‘만지다, 건드리다’는 뜻으로, 건반 주자들이 즉석에서 건반 위를 더듬듯 즉흥 연주한 관습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바흐는 북스테후데(1637~1707)를 선두로 하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를 많이 작곡했으며, 이 중에 관현악 편곡으로 더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가 있다.
여기서 ‘환상곡’으로 번역되는 판타지아(fantasia)는 말 그대로 형식이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전개되는 즉흥적인 악상을 가리키는 말로, 바로크 시대엔 토카타나 전주곡과 동의어로 쓰였다.
이 명칭이 등장하던 초기에는 류트 작품과 건반악기 독주곡에 주로 붙여졌으며, 17세기 영국에선 다양한 판타지아가 작곡되었는데, 기악합주용 음악은 따로 팬시(fancy)라 불렸다. 즉흥연주 성격이 강한 이런 경향을 반영한 대표적 곡으로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모차르트의 ‘환상곡 d단조’ 등이 있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슈만의 ‘환상곡 Op.17’ 외에도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독주 작품에 판타지 또는 판타지아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하였다.
③ 변주곡
바로크 시대의 기악곡들을 들으면 대개 한 악장의 길이가 그렇게 길지 않다.
비발디의 협주곡이나 바흐나 헨델의 모음곡을 들어도 한 악장의 연주시간은 길어야 5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예외가 있는데,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주제와 몇 개의 변주로 만드는 변주곡은 비교적 바로크 시대의 다른 기악곡에 비해 연주 시간이 긴 것이 특징이다.
음악 평론가 마이클 올리버는 변주곡을 가리켜 “천 가지 얼굴을 만들어내는 음의 마술”이라고 했지만, 변주곡은 모든 기악음악의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변주기법을 작곡가가 얼마나 다채롭게 펼칠 수 있는가를 음미할 수 있는 음악이며, 하나의 독립적인 악곡이나 다악장 악곡의 한 악장으로 작곡되었다.
최초로 변주곡이 일반화된 것은 16세기 영국의 버지널리스트(virginalist)들의 건반음악에서다. 버지널리스트란 명칭은 처녀 여왕이던 엘리자베스 1세와 연관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 헨리 8세의 딸답게 음악에 소질이 있던 여왕은 작곡가들이 바친 변주곡을 즐겨 연주했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즐겨 연주한 소형 하프시코드의 명칭이 버지널(virginal)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궁정에 봉직한 일군의 음악가들에게 버지널리스트란 호칭이 주어졌다.
이들은 짧고 간단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가지고 적게는 6개부터 많게는 20개의 변주곡들을 작곡하였다.
주제의 음형을 유지하면서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활기를 더해가는 버지널 변주곡이 유행하면서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 음악, 독일에서는 오르간 음악을 통해 변주곡의 기법들이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변주곡은 모차르트 시대와 달리 베이스의 선율이나 화음을 기초로 변주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4마디나 8마디의 기본 주제를 베이스에서 계속해 반복하는 동안 위의 성부에서 다양한 변화가 전개되는 변주로, 작품 전체를 통해 이런 주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지속적으로 들린다. 이런 변주를 ‘정선율 변주곡’이라고 하며, 샤콘느와 파사칼리아, 그라운드 등의 명칭은 바로 이렇게 정해진 화음 진행이나 베이스 선율을 반복하며 그 위에 다른 선율을 쌓는 변주곡에 붙여진다. 차이가 있다면 샤콘느는 주제를 화음적으로 다루는 반면, 파사칼리아는 선율적인 베이스를 주제로 취급한다. 바흐의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단조’의 2악장 샤콘느는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비탈리의 ‘샤콘느’와 함께 정선율 변주의 대표작이며,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 c단조’역시 베이스 주제를 20번이나 반복하는 가운데 다채롭고 무궁무진한 음악적 상상력이 전개되는 작품이다.
하나의 주제 선율을 여러 가지로 장식하여 변화시키는 바로크 시대의 변주곡 중에 유명한 작품이 연주시간이 한 시간을 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바흐는 주제 선율인 ‘아리아’와 30개의 변주곡을 그의 제자인 골드베르크를 위해 작곡했다.
당시 골드베르크는 자신이 섬기던 귀족이 불면증에 시달리자 바흐에게 수면용 음악으로 연주시간이 긴 변주곡을 의뢰했다. 이 변주곡에는 샤콘느의 요소와 함께 주제 선율을 변주시키는 요소도 들어있어 주제와 변주가 결과적으로 많이 다른데도 우리는 그 속에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읽어낼 수 있다.
* 비탈리 ‘샤콘느’ g단조
비탈리(1663~1745)의 ‘샤콘느’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중 하나일 것이다.
끊어질 듯 가냘프면서도 영혼까지 흔들 것 같이 풍부한 바이올린 소리를 타고 흐르는 그 선율은 너무나 애절하다. 이 ‘샤콘느’의 선율은 열정적이지만 화려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둡다 못해 심오하며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런데 이 선율은 분명 바로크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운 정열은 낭만주의적이다. 마찬가지로 화성도 바로크 시대의 화성이라기엔 너무나 대담하고 진보적이다. 이 곡의 작곡가가 비탈리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누구나 이 곡이 낭만주의 시대에 작곡되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탈리는 1663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태어난 바로크 시대 작곡가다. 시립 아카데미 필하모니카 회원이며 모데나 궁정 교회의 악장을 지냈던 비탈리는 당대에 소나타 작곡가로 유명했으나, 그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다.
비탈리가 이 ‘샤콘느’외에 별다른 명곡을 작곡하지 못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 지독한 낭만성 때문인지 이 ‘샤콘느’는 비탈리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 작품이라는 주장이 아직도 대두되곤 한다.
음악은 바이올린에서 주제가 등장하기 전에 오르간의 베이스가 g - f - e플랫 - d를 느리게 두 번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독주 바이올린이 8마디의 주제를 노래한다. 그러나 이때도 베이스는 g - f - e플랫 - d를 반복하여 연주하고 있다. 이 네 음이 바로 샤콘느의 베이스 라인이다. 이 음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베이스에서 계속 반복되어 전곡의 화성진행을 결정하고 이것을 기초로 위 성부에서 끊임없이 화려한 변주가 이뤄진다. 처음에 독주 바이올린에서 제시된 주제를 오르간의 오른손 성부가 받아 변주한다. 그리고 바이올린은 계속 온갖 기교를 실험하며 풍부한 음향으로 화려한 변주를 펼쳐간다.
④ 소나타, 모음곡, 파르티타
바로크 시대의 가장 대표적 음악 장르인 소나타와 모음곡, 파르티타들은 때때로 용어상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통적으론 빠르기의 대조를 갖는 여러 개의 악장이 하나의 조성으로 묶이는 것이었다.
파르티타라는 용어 자체에도 짐작할 수 있지만, 여러 부분들로 나뉘는 음악이라는 뜻의 이 용어는 때로는 소나타로, 때로는 모음곡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바로크 시대에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는 지속저음 반주가 붙는 경우 실내악곡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그것은 지속저음을 담당하는 악기가 두 개 이상인 경우가 많아 앙상블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와 달리 오직 한 악기만을 위하 무반주 작품들은 바흐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바흐의 작품만큼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바흐는 쾨텐 시절(1717~1723)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6개의 소나타와 파르티타’만으로도 바이올린 문헌의 가장 비중 있는 작곡가가 되었다. 이 6개의 곡들 중 홀수번호는 교회소나타로 4악장의 느리고 빠른 구성을 보이며, 짝수번호는 파르티타로 명명되어 춤모음곡의 구성으로 되었다.
크라이슬러와 오이스트라흐(1908~1974) 같은 바이올린의 대가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의 전곡 녹음을 꺼릴 정도로 그의 음악은 기술면에서나 연주 해석 면에서 많은 연주가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이 곡들은 세계 각국의 바이올린 콩쿠르의 과제곡으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단선율 악기인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르간이 낼 수 있는 다성적 음악을 내고자 했던 바흐의 악기는 한계를 뛰어넘어 복잡하고 다층적인 음악을 구사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카잘스(1876~1973)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오래된 악기 상점에서 누렇게 빛바랜 악보들을 발견하고 거의 1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한 뒤 비로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여섯 곡을 세상에 선보였다.
‘무반주 첼로모음곡’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것으로 당시 첼로가 아직 독주악기로 인식되지 않았고, 합주에서 저음을 보강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었던 것에 비추어 분명 획기적 발상에서 생겨난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바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중간에 해당하는 악기를 발명한 적도 있었다지만 당시 쾨텐 궁정에서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한 아벨과 첼로주자인 리히니케를 위해 이 곡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오늘날 이 모음곡 6편은 모든 첼리스트라면 누구나 도전해야 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바흐는 첼로 외에도 ‘프랑스 모음곡’과 ‘영국 모음곡’, ‘인벤션과 신포니아’ 등 건반악기를 위한 독주모음곡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 외 무반주곡으로 중요한 작품은 플루트 또는 바이올린을 위한 텔레만(1681~1767)의 ‘12개의 무반주 판타지아’가 있다.
독주를 위한 소나타 악기로 바이올린과 첼로 외에 쳄발로를 선택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57)는 쳄발로 소나타의 독보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의 아들이며 생애 후반을 스페인에서 보낸 그는 건반 음악에서 탁월한 개성을 보여준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주자들인 바흐와 헨델, 스카를라티가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지만, 이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독창적 작곡가인 스카를라티는 쳄발로의 악기 특성에 맞는 여러 주법들과 생동감 있는 리듬, 예기치 못한 조성의 변화와 화려한 연주 양식으로 당시로는 예외적인 낭만적 음악을 구사하였다.
피아니스트들의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하는 500곡이 넘는 스카를라티의 쳄발로 소나타들은 짧은 곡 속에 놀랄 만큼 풍부한 음악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과 스페인의 격렬한 리듬, 색채 풍부한 음악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과 스페인의 격렬한 리듬, 색채 풍부한 화성, 현란한 쳄발로의 연주기술을 대부분 2부 형식으로 된 단일 악장에 담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 :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로, 1968년 솔제니친 옹호에서부터 1975 조국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미국 망명으로 이어지는 인권문제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독주자일 뿐 아니라 당대 비르투오소들인 코간, 라히테르와의 듀오 등 실내악 주자로 활동하였고,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2) 고전주의 독주곡
고전주의 시대 독주곡들은 대부분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를 위한 주제와 변주, 또는 빠르기나 형식을 제목으로 한 독주곡들로 나눌 수 있다.
독주 문헌에는 오히려 바로크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 수가 많지 않은데, 이유는 이 시대엔 오히려 현악 4중주 등 중주곡과 교향곡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악기 구성에 가장 큰 변화는 1700년에 고안된 피아노가 1775년부터 하프시코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훌륭한 건반 음악 작품들은 바로크 악기인 클라비코드나 하프시코드, 오르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피아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며, 이들 대부분의 피아노곡들은 당시 가장 표준적 음악 구조였던 소나타 형식의 기반 위에 작곡되었다.
① 피아노 소나타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의 직업이 대부분 하프시코드나 바이올린 연주자들이던 것과 달리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근본적으로 피아니스트였다.
그들은 피아노의 개량 방법이 날로 발전하고 있던 시대에 살았고 새로운 피아노가 나오면 그것의 성능에 맞는 기교를 실험하며 주옥같은 피아노 작품을 써갔다. 이처럼 피아노가 이전의 건반악기들을 제치고 대중적 악기가 된 것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수준 높은 작품들과 악보 출판업자와 음악회 문화의 발달, 시장과 대중에 의한 음악의 대량 소비에 의해서이다.
하이든은 교향곡과 현악 4중주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나,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생에 전체에 걸쳐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를 50여 편 가량 작곡했다. 이 소나타들에는 자유분방하고 유머러스한 하이든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중에 35번 C장조가 유명하다.
이 곡은 19세기 중반 피아노 학습자들을 위한 교본에 하이든의 작품을 대표해서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으며, 현재 지휘자로 활동하는 정명훈이 1974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했던 당시 예선에서 연주한 곡이다.
모차르트 시대에 피아노는 주로 여성 애호가를 위한 악기로 인기가 있었으며, 사교 음악의 구실을 했으므로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가볍고 즐거운 성격을 가진 작품이 많았으며 심각하거나 비극적인 내용을 가진 소나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열여덟 곡의 독주 피아노 소나타를 남긴 모차르트는 대부분 3악장 구조로 된 소나타를 작곡했으며, 만년으로 갈수록 소나타의 극적인 성격과 규모를 확대하였다.
베토벤이 남긴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그의 작품 경향이 전 생애에 걸쳐 어떤 변화를 이룩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며, 작품 하나하나가 개성과 다채로운 특징을 지닌다.
청각이 남아있는 순간까지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계속했던 베토벤은 자신의 악기인 피아노를 위해 선배와 동료 작곡가들이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자신만이 부과할 수 있는 독특한 어법을 시도했다.
그의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종종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견주어 피아니스트들에게 ‘신약성서’로 불린다.
많은 연주자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을 통해 자신의 연주 능력과 해석력을 평가받곤 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그의 작품세계가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1795년부터 1805년까지 가장 풍성한 음악적 결실을 맺는 중기(이 시기에만 2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썼다)를 기점으로 초기와 후기 소나타로 나뉜다.
그의 초기 소나타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여기도 대담한 조바꿈과 급격한 악상 변화 등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틀을 과감히 부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은 중기에서다.
여기엔 유명한 ‘비창’(8번), ‘월광’(14번), ‘템페스트’(17번), ‘발트슈타인’(21번), ‘열정’(23번), ‘고별’(26번) 등이 포함된다.
이 기간엔 느린 악장의 도입과 즉흥연주식의 자유로운 악장들, 덩어리 화음과 텅빈 화음, 오른손과 왼손을 멀리 떼어 신비한 소리를 자아내는 기법과 모티브나 주제를 끊임없이 확대하여 긴장을 폭발시키는 방법 등, 수많은 시도들이 집중되었다.
이처럼 모험가며 혁명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한 베토벤은 완전히 청각을 상실한 후기에 접어들면서 명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두 악장만으로 곡을 마무리 짓는가 하면 첫 악장에 지극히 서정적인 곡을 놓고 마지막 악장을 푸가로 배치하는 등, 그는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서 멀리 벗어나고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곡들로 ‘함머클라비어’(29번)와 31번, 32번 소나타가 있는데,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를 얻은 위대한 정신의 승리가 이 음악들 속에서 완성된다.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은 피아니스트들에게 힘든 노정을 요구한다.
기록에 의하면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은 “엄청난 힘과 개성, 전대미문의 화려한 기교의 소유자”였으며, “극도로 섬세한 터치와 강렬한 감성”을 지닌 연주자였다.
그는 악기에 대한 이해와 집착이 강해서 새로 개량된 악기가 나오면 곧바로 그 악기로 연주하고자 했으며, 악기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자 노력했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거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며, 그의 음악적 성장과 삶의 흔적을 곳곳에 드리우고 있는 점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작곡가 개인의 섬세한 감수성의 발로이자, 고백적인 성격을 지니는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선구라 할 수 있다.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d단조 Op.31-2 ‘템페스트’ 제 3악장
음악에다 별명을 붙이는 것은 작곡가 스스로 의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작품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아 붙이기도 하고, 대부분 상업적인 의도에서 출판업자들이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의외의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베토벤의 32개의 소나타 가운데 베토벤 자신이 별도의 호칭을 붙인 것은 8번 ‘비창’과 32번 ‘고별’뿐이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이 붙인 명칭은 아니라 해도 ‘월광’, ‘템페스트’, ‘열정’ 같은 작품은 음악이 전달하는 느낌과 제목과의 연관성에 있어 청중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17번을 발표하기에 앞서 친구 크룸폴츠에게 “나는 지금까지의 작품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 이제 나는 새로운 길을 갈 작정이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이 탄생한 1802년을 전후해서 베토벤의 많은 작품에는 새로운 혁신들이 반영되었다. 삶에서 뚜렷한 분수령이 되는 이 해에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죽음에의 충동을 극복하고 선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이며, 영웅적 예술가의 삶을 위해 자신의 작품 속에 혁신적이고 새로운 요소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영웅적 시기’에 속하는 수많은 작품들, 즉 교향곡 ‘영웅’과 ‘운명’, 피아노 협주곡 ‘황제’, 오페라 ‘피델리오’, 피아노 소나타 ‘열정’ 등을 통해 그는 자유로운 인간 의지와 창조적 정신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음으로 웅변하고자 했다.
피아노 소나타 17번 d단조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제자인 쉰틀러가 이 곡을 이해하는 열쇠를 물었을 때 베토벤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으라고 대답했다는 데서 이런 별칭이 붙었지만, 이 곡은 3악장의 연결 구조면이나 각 악장의 특색에 있어 기존의 소나타와 차이가 있다. 우선 1악장의 첫 부분은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단 6마디 사이에 라르고 - 알레그로 - 아다지오로 템포의 극단적 변화를 보인다.
이 부분을 1악장의 서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고 제1주제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1악장은 빠르기의 변화나 극적인 표현에 있어 자유로우면서도 실험적 악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2악장과 3악장 역시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도 이 곡의 새로운 면모며, 특히 3악장은 오른손과 왼손이 바쁘게 16분음표를 이어가는 제1주제와 3박자의 리듬을 교란시키는 제2주제의 특성이 어우러져 시종일관 무궁동(無窮動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기악곡)의 느낌으로 전개되는 아름답고도 역동적인 음악으로 유명하다.
② 주제와 변주
고전주의 독주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나타 외에 작곡가들은 당시 유행하던 선율이나 자신이 만든 주제를 가지고 변주곡을 많이 작곡했다. 이런 주제와 변주는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의 2악장에도 많이 쓰였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피아노 독주를 위한 변주곡들을 많이 썼다.
14편 가량의 변주곡을 남긴 모차르트는 많은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그곳에서 유행하는 선율을 갖고 자신의 다채로운 피아노 기법을 과시했다.
우리에게 ‘반짝반짝 작은 별’로 알려진 프랑스 동요 ‘아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 모차르트의 변주곡들은 주제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음형만을 장식하는 ‘엄격 변주’에 속하는 것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16분음표로 세밀하게 음형을 변화시키고 같은 으뜸음조나 단조로 변화한 다음 뒤에 갈수록 화려하고 피아노의 기교를 과시하는 변주를 하고 마지막에 처음 주제로 복귀하는 형식을 따른다.
모차르트의 변주에 비해 베토벤의 변주곡 형식은 작곡과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의 작곡 노트엔 겉보기에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주제들에 어떻게 옷을 입힐 것인가에 관한 끊임없는 성찰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곡 중에도 소나타 못지않게 실험적 성격이 나타나 있는 것이 변주곡 형식이었고, 그는 ‘자작 주제에 의한 32개의 변주곡’과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을 통해 변주곡 역사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쌍벽을 이루는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의 변주 수법은 주제가 가진 변화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탐험하여 주제의 모습을 대체로 지속하면서 각 변주마다 다른 음악적 성격을 제시하는 이른바 ‘성격 변주’의 형태를 취하였다.
3) 낭만주의 독주곡
① 성격 소품
19세기를 통틀어 가정음악의 중심이 된 피아노의 인기는 새로운 대중의 기호와 경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엔 연주자 자신이 작곡가를 겸하며 많은 연주회가 살롱(Salon 프랑스어로 거실을 뜻하는 말로 17~18세기에 작가, 시인, 예술 애호가들이 모여 작품을 감상하거나 예술적인 대화를 나누던 장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작곡가들은 주로 피아노 독주곡으로 소나타를 작곡한데 비해,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시적인 정서나 분위기, 인물의 성격, 또는 문학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매체로 성격 소품을 작곡하였다.
성격 소품은 일반적으로 형식에 있어서는 가장 단순한 가곡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서술적인 제목이나 음악외적 제목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성격 소품들은 춤곡에서 유래한 것들(왈츠,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행진곡, 폴카 등)이나 시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음악(녹턴, 발라드, 랩소디, 엘레지, 무언가, 판타지 등), 즉흥연주의 느낌을 주는 음악(스케르초, 전주곡, 즉흥곡, 음악의 순간, 기상곡 등), 회화적 이미지와 연관되는 음악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대부분 표제음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성격 소품들은 작은 형식들 간의 더 큰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몇 개씩 묶어 출판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토벤의 ‘바가텔’, 슈만의 ‘사육제’, ‘나비’, ‘환상소곡집’, ‘어린이의 정경’, 멘델스존의 ‘무언가’ 등이 그 예다.
성격 소품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린 쇼팽(1810~1849)이다. 쇼팽은 거의 전적으로 피아노곡만 작곡했으며, 대중 연주회장보다 살롱을 중심으로 한 친숙한 모임의 성격을 같은 음악회를 위해 녹턴, 전주곡, 왈츠, 마주르카, 발라드 등 주옥같은 피아노 소품을 작곡하였다.
그는 피아노를 노래하는 악기로 다루었으며, 정교한 소품들 속에 가냘픈 우수의 느낌부터 영웅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자신은 직업적 독주 피아니스트지만 리스트처럼 압도적 효과를 지향하는 연주가가 아닌 만큼 음을 지속시키는 피아노의 페달을 최대한 이용한 레가토 주법과 팔레트 위에 물감을 섞는 듯한 미묘한 화음들, 그리고 선율의 리듬적 융통성을 발휘하는 루바토를 사용하여 낭만주의 시대에 가장 개성적이고 독창적 작곡가가 되었다.
루바토란 템포 루바노의 준말로 쇼팽 자신의 설명처럼 한 악구 안에서 오른손 성부가 약간씩 밀고 당기는 동안 왼손 반주는 정확한 박자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의미는 ‘숨겨진’이란 뜻으로, 연주할 때 전체의 기본 템포를 변화시키지는 않으면서 한 악구에서 각 음표의 길이를 밀고 당기는 자유로운 연주법을 의미한다.
루바토의 전통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19세기를 통하여 즉흥 연주의 성격을 더욱 강조하며 연주자의 자유를 최대한 구가하는 의미로 확대된다. 쇼팽은 이러한 분위기와 속도의 변화를 통해 지극히 짧은 피아노 독주곡 안에서 한층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을 얻어낼 수 있었다.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 작품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고독과 개인을 높이 평가했다.
작곡가들은 멜랑콜리, 동경, 어렴풋하고 환상적이며 일상적인 실제와는 거리가 먼 이상적 세계를 추구하였다.
* 쇼팽 마주르카 제41번 c샾단조, Op. 673-3
마주르카(또는 마주레크)는 쇼팽의 음악 중에서 폴란드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낸 음악이라 할 수 있으며, 쇼팽이 사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곡한 작품은 두 곡의 마주르카다.
자신의 힘으로 악보를 다시 베껴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을 순간에 조국의 음악을 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쇼팽은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모두 50곡이 넘는 마주르카를 작곡하였을 뿐 아니라, 마주르카풍의 협주곡과 발라드, 왈츠, 폴로네즈 등에 덧붙여진 리듬에 관한 수많은 인용과 암시를 통해 폴로네즈의 경우보다 더 개인적이고 가깝게 폴란드와 자신을 연결시켰다.
마주르카란 원래 마조비아 지방에 기원을 두고 있다.
보통 3/4박자로, 두 번째 박자 또는 세 번째 박자에 강세를 두기 때문에 같은 3박자 계열의 왈츠나 미뉴에트와는 느낌이 매우 다르며, 점 리듬의 특성이 더해지면서 생기발랄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준다. 또한 마주르카는 원래 헝가리풍의 증2도와 3도의 도약이 빈번하나, 쇼팽은 이에 더하여 증4도와 장7도 등 불협화적인 음정들을 사용하여 미묘한 화성을 추구했으며, 마주르카 본래의 상투적 리듬에 다양한 변화를 주어 향토색 짙은 시골의 춤을 고상한 피아노 소품으로 변모시켰다.
쇼팽은 자신의 몇몇 마주르카를 연주할 때면 둘째 박자를 너무 강조해서 마치 4박자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리듬에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는 쇼팽의 템포 루바토를 매우 낯설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반응은 마주르카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쇼팽은 생전에 41곡의 마주르카를 출판하였으며, 그 외에도 번호 없이 출판된 몇 곡이 남아있다. 마주르카 41번 Ctiv 단조는 번호가 붙여진 마지막 작품으로 3부 형식으로 되었으며, 유명한 왈츠 Op.64 No.2번과 같은 조로 되어 있다.
아름다운 주제 선율(악보)은 두 번째 박자를 길게 끄는 마주르카의 특성을 반영하며, 특히 코다부분에서의 옥타브의 카논 진행이 매우 인상적 느낌을 준다.
* 쇼팽 연습곡 Op.25-11 a단조 ‘겨울바람’
쇼팽이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 테크닉을 익혔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렸을 때 고향 바르샤바에서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던 선생은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그나마 어려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쇼팽은 피아노 연주상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의 24개의 연습곡은 바로 이런 쇼팽의 숨은 노력의 과정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리스트에게 헌정했던 Op.l0의 12개의 연습곡에는 1번의 손을 10도까지 넓게 벌리는 연습, 2번은 말을 듣지 않는 넷째 손가락을 부드럽게 만드는 연습, 5번은 검은 건반 전체를 사용하는 연습, 8번은 엄지손가락 연습, 10번은 펼침 화음 연습 등, 그가 해결하려 했던 피아노 테크닉 상의 문제들을 명시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연습곡들은 단순히 새로운 피아노 테크닉을 개발시킨 차원을 넘어 선율, 화성, 리듬에 대한 연습은 물론 감정 표현에 관한 연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의 연습곡들이 피아노 연주회용 곡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음악적이고 또 극적이며 예술적으로 완벽한지 모른다.
특히 ‘겨울바람’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Op.25의 제11번 a단조 연습곡은 용솟음치는 듯한 정열이 느껴지는 화려한 피아노곡이다. 마치 행진곡 같은 주제가 한번 오른손에서 느리게 제시되고, 다시 양손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이것을 왼손이 되풀이하는 동안 오른손에선 반음계로 휘몰아치는 패시지가 펼쳐진다.
② 비르투오소
19세기에 이르러 대중 연주회가 문화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쇼팽을 비롯한 작곡가들이 자신의 음악을 직접 연주함으로써 명성을 쌓아갈 무렵, 감정을 극대화해서 표현해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강박관념은 새로운 음악가 집단(대개가 여성인 관객들 앞에서 뽐내듯 연주하며 도덕적 청렴성이 다소 미심쩍은 명인들)을 불러냈다.
이들은 거액의 입장료를 요구했고 관객으로 가득한 공연장에서 당대의 우상으로 성장했다.
요즘도 청중들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에게 광적인 환호를 보내지만, 19세기 청중들은 기교와 예술적인 완성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술가에게 비르투오소(virtuoso)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그들에게 비싼 입장료를 기꺼이 지불했다.
원래 비르투오소의 사전적 의미는 덕(德)있는‘이라는 뜻으로, 예술이나 도덕성에서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의미했다지만, 오늘날엔 음악에 있어 예술적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음악회를 인기공연으로 만든 이들 비르투오소 중 첫째는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1782~1840)다.
쇼팽의 음악만큼 깊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파가니니는 불길해 보이는 외모와 범접하기 힘든 태도, 보헤미안적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바이올린에 대한 초인적 능력으로 인해 종종 귀신들린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검은 얼굴에 빼어난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먹지 못한 사람처럼 야윈 그가 바이올린을 구부정하게 들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연주장을 가득 메웠다.
파가니니는 작곡가보다 연주가에 더 가까웠으나, ‘카프리치오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3번은 단순한 전시용 작품을 넘어선다. 특히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연주사상 비길 데 없는 거장성을 가지고 바이올린 연주의 모든 가능성을 찾아내어 연주회를 화려하게 장식한 곡으로 유명한 ‘카프리치오 1번’은 바이올린의 표현 기교를 빠짐없이 구현하면서 24곡 전편에 걸쳐 풍부한 음악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원래는 바이올린만 연주하는 무반주곡이지만 때때로 피아노 반주가 붙여지거나 관현악으로 편곡해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으며 리스트와 슈만,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 작곡가들이 24곡으로 된 이 연습곡들을 가지고 변주곡이나 협주곡 등으로 편곡하였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난 뒤 비르투오소의 길을 결심했다고 하며, 파가니니와 리스트에서 비롯된 비르투오소의 전통은 요아힘(1831~1907)과 클라라 슈만(1819~1896)을 거쳐 라흐마니노프와 호로비츠(1904~1989)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작곡가들은 이러한 거장 연주가들을 염두에 두고 현란한 독주곡과 협주곡들을 만들 수 있었다.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1944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다이내믹하고 개성 강한 연주로 호평 받았으며,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의 곡 해석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③ 편곡 작품
19세기 중반에는 거장 피아니스트라면 반드시 파리에 기거해야 할 분위기였는데, 무수한 파리의 피아니스트들 중에 단연 화제의 중심은 리스트(1811~1886)였다.
쇼팽 다음으로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에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리스트가 부다페스트에서 연주회를 하고 난 뒤에 헝가리의 귀족들은 그에게 보석이 박힌 칼을 선사하고 연주회가 끝난 후 수 천 명의 군중들이 그를 숙소에까지 호위하며 횃불 행렬을 벌였다고 하니 가히 그 열광의 도를 짐작할 수 있다.
리스트는 음악을 가리켜 “신비로운 음의 언어”라고 주장했으며, 피아노를 통해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고와 연주의 초인적인 기교를 융합시키며 새로운 음향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의 ‘헝가리 랩소디’ 15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초절기교 연습곡’, ‘순례의 해’ 등 수많은 피아노 독주곡들은 대담하고 화려한 무대 매너와 명인다운 풍채, 섬세함과 혁신적인 면모를 고루 갖춘 리스트의 대표작들이다.
리스트는 공개 연주회에서 악보를 외워서 연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며, 청중과 먼 거리에서가 아니라 대화하며 혼자서 음악회를 이끌어간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그는 1840년 자신의 연주회에 ‘리사이틀(recita)’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리사이틀이라는 말은 ‘낭송’이라는 뜻으로 연주자가 혼자 무대에 나와서 마치 시를 읊듯이 음악을 들려준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실제로 리스트는 자신의 연주에 열광하는 귀부인들 틈에서 연주 중간 그들과 담소를 나누고 간간이 차도 마시면서 음악회를 진행해나갔다고 하니 요즘의 ‘대화가 있는 음악회’같은 공연들의 원조가 아닌가 한다.
리스트 이후로 여러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경우에는 콘서트, 독창회나 독주회는 리사이틀로 구별하고 있다.
리스트가 리사이틀의 곡목으로 택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신작이나 기존 작곡가들의 작품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스스로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작품들이다. 리스트는 슈베르트의 가곡과 베토벤 및 베를리오즈의 교향곡, 베르디나 도니제티의 오페라 등 37명의 작곡가와 각 장르에 걸친 작품에서 150곡 가량의 피아노용 편곡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편곡 작품 창작은 자기 과시 욕구가 강했던 리스트의 성격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어려움에 처한 다른 작곡가들을 돕는 의미도 컸다고 한다.
사실상 오늘날과 같은 전파 매체가 없던 당시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빠른 속도로 유럽에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리스트의 공이 컸으며, 슈베르트의 가곡과 베르디의 오페라 작품들도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리스트의 손에 재탄생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 유명한 것은 슈베르트의 가곡을 편곡한 ‘마왕’과 ‘돈 조반니의 회상’, ‘리골레토 패러프레이즈’, 베토벤 교향곡 전곡의 편곡들이다.
* 리스트 ‘파가니니 대연습곡’ 제3곡 ‘라 캄파넬라’
리스트의 많은 피아노 작품 중에서 화려하고 난해한 테크닉과 열정을 필요로 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12곡의 고난도 연습곡’ 흔히 ‘초절기교 연습곡으로도 불린다’이나, ‘파가니니 대연습곡’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들은 리스트가 1831년 파리에서 바이올린의 귀재인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자신도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고자 한 열망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다.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초견과 즉흥연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암기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한 번 들은 선율은 그것이 복잡한 관현악곡이라 해도 즉시 피아노로 옮길 수 있었다. 게다가 파가니니에 필적하기 위해 하루 14시간을 연습에 쏟아 부었으며, 청중을 경이롭게 할 만한 피아노 음악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연주 스타일은 물론이고 작품의 성향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파가니니의 곡을 가지고 자신의 언어로 재창조하고 싶은 열망은 편곡에 능했던 리스트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파가니니 대연습곡’은 파가니니의 대표작인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24곡의 카프리치오 Op.1’ 중에 5곡,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3악장 주제를 차용한 ‘작은 종’을 포함하여 모두 6곡의 연습곡을 포함한다. 리스트는 3년 후 이 곡을 다시 손질하여 ‘파가니니의 작은 종에 의한 화려한 대환상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비록 그 재료는 파가니니의 것이지만 원작과 리스트의 편곡을 감상하면 근본적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라는 매체가 갖는 차이를 넘어 리스트만의 개성과 강렬한 표현력을 맛볼 수 있다.
6/8박자로 된 바이올린의 론도 주제(악보)를 가지고 화려하게 변주시켜 나간다. 여기서 종소리는 파가니니의 원래 곡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이 종소리 주제 뒤에 등장하여 더욱 화려하게 이어지는 선율(악보)은 듣기에는 너무 아름답지만 그 빠른 질주와 도약을 위해 매우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선율이다.
④ 현악기를 위한 소품들
비록 낭만주의 시대에 피아노 작품이 주를 이루었지만 독주를 위한 악기로서 바이올린과 첼로의 존재는 여전히 작곡가들에게 매력 있는 것이었다.
파가니니의 작품만이 아니라 이 시대 비르투오소 연주가들도 기교적이고 선율적 소품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스페인 출신 사라사테(1844~1908)의 ‘지고이네르바이젠’, 폴란드 작곡가 비에냐프스키(1835~1880)의 ‘모스크바의 추억’과 ‘전설’,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드보르자크의 ‘4개의 낭만적 소품’ 등 바이올린을 위한 주옥같은 소품들이 만들어졌으며, 브루흐(1838~1920)의 ‘콜 니드라이’(신의 날로 해석), 포퍼(1843~1913)의 ‘헝가리 랩소디’ 등의 첼로 명곡들도 탄생했다.
4) 20세기 독주곡
20세기의 제반 음악들이 음악 양식상의 변화를 겪은 것과 발맞추어 독주곡에도 이전과 다른 다양한 주법과 새로운 화성들이 개발되고, 작곡가들은 개인적 양식 안에 민속음악과 대중적 요소들을 포함하기 시작했으며, 실로 다양한 원천들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었다.
특히 작곡가들은 서양음악의 실제에서 벗어나 있는 비관습적 리듬과 음향, 선율 패턴 등에 매료되었으며, 악기의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연주법을 통해 20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알 수 없는 불안과 심적인 고통 등 내면의 울림을 음악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독주곡들은 보다 더 작곡가의 개인적 어법과 새로운 음향을 추구하는 매체가 되었으며,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피아노 독주곡에서 이런 실험적 시도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피아노 독주곡 분야에서 작곡가들은 여전히 소나타 형식을 선호했으며, 낭만주의 성격 소품들도 꾸준히 작곡되고 있었으나, 20세기 피아노 독주곡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 작품들은 프랑스 작곡가들에 의해 탄생하였다.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은 ‘새로운 울림의 창조’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는 피아노 악보에 댐퍼 페달의 사용을 지시해서 피아니스트가 건반에서 손을 뗀 다음에도 울림이 계속되도록 했고, 이로부터 안개에 덮인 듯한 몽롱한 느낌을 연출했다. 또한 그는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본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음악에 영향을 받아 피아노로 종소리를 모방하기도 하고, 화음을 하나 이상 섞는 등 종래에는 들을 수 없는 새로운 음향을 창조하였다.
그의 주요 피아노 작품들로는 ‘영상’ 1집과 2집, ‘전주곡집’ 1권과 2권, ‘기쁨의 섬’, ‘어린이 세계’,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등이 있으며, 플루트 독주를 위한 ‘시링크스’는 35마디의 짧은 곡이지만 플루트라는 악기의 표현 기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작곡된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이다.
드뷔시의 영향을 받은 라벨(1875~1937) 또한 전통적인 형식의 틀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매혹적인 화성을 통해 ‘물의 유희’, ‘밤의 가스파르’, ‘쿠프랭의 무덤’ 등 훌륭한 피아노곡을 남겼으며 바이올린을 위한 ‘치간느’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필적하는 기교적인 작품으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애호하는 연주곡 중 하나다.
20세기 바이올린 음악을 거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연주가 겸 작곡가가 빈 출신의 크라이슬러(1875~1962)다.
그의 연주는 빈의 분위기와 프랑스의 우아함이 결합된 것으로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찾아보기 어려운 감미로움과 풍부한 표현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무대 위에서 자주 연주되는 그의 소품들로는 ‘빈 카프리치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등이 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며 작곡가를 겸한 사람들은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과 리스트, 라흐마니노프를 들 수 있지만, 20세기 피아노 문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바르토크다.
바르토크는 새로운 음악기법을 시험하기 위한 악기로 피아노를 적극 활용했으며, 헝가리 민속음악의 자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과 가장 간결한 수법으로 가장 다양한 음악 재료들을 수용하는 데에 있어서 그를 능가하는 작곡가는 드물었다.
바르토크에게 있어 민속예술은 음악의 장식적 요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순수함’을 되찾는 수단이었다.
바로토크의 음악은 서양 사람들이 모르는 정교한 리듬과 모티브의 잦은 반복에 의한 역동성을 바탕으로 피아노라는 악기를 선율적이거나 화성적인 것만 아니라 타악기적으로 다루었다.
어려운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 여섯 권의 피아노 교본으로 153곡이 수록되어 있는 ‘미크로코스모스’는 교육적 가치뿐 아니라, 바르토크의 음악적 양식의 변화를 요약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20세기의 주요 독주곡들은 그라나도스의 ‘12개의 스페인 춤곡’이나 파야의 ‘안달루시아 판타지’ 같이 각 나라마다 독특한 민속적 색깔을 담아낸 작품들, 스크리아빈(1872~1915)의 ‘불꽃의 시’나 메시앙의 ‘새의 카탈로그’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매’ 등의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작품들,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 래그 뮤직’이나, 거쉰의 ‘3개의 전주곡’ 등 재즈의 요소를 도입한 작품들, 타레가의 ‘알함브라의 궁전’이나 퐁세(1882~1948)의 ‘기타 소나타’ 같이 기타를 위한 독주곡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 엘가 ‘사랑의 인사’(Salut d'amour)Op.12
영국은 전통적으로 음악의 불모지로 알려져 왔다.
헨리 퍼셀과 헨델 이후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작곡가는 별로 없다.
헨델도 독일 태생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영국 음악의 맥은 퍼셀 이후 중단 되었다.
이처럼 200년에 가까운 오랜 공백기를 메우며 20세기 전반에 영국음악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작곡가가 엘가(1857~1934)다.
엘가는 영국의 전형적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기사 작위까지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엘가의 부친은 작은 악기점을 경영하며 조율도 하고 마을 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던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운 엘가는 독학으로 여러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고, 독일로 유학을 가고자 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사무실을 그만 두고 프리랜서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작곡을 하면서 지방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하고 틈틈이 레슨도 하던 엘가는 그 레슨을 통해 평생의 연인을 만난다. 시골 음악가에 불과한 엘가에 비해 엘리스는 기사 가문의 딸이었다. 이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은 1889년이었는데, 엘가는 자신보다 9년 연상인 엘리스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통해 풍요로운 창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그의 작품은 가곡이나 짧은 행사곡에 불과했으나, 결혼 직후 대규모 연주회용 서곡 ‘프로와사르’를 시작으로 그는 일련의 기사도적이고 영웅적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예술음악 작곡가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귀족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등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엘가는 결혼과 함께 런던으로 이사한 뒤 작곡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이전에 자신이 연주할 목적으로 써 두었던 많은 바이올린 소품들을 출판사에 헐값으로 팔아넘긴 적이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동시에 바이올리니스트였기 때문에 일생 동안 바이올린 소품을 많이 작곡하였다. 이 중에 엘리스와 결혼하던 해에 작곡한 달콤하고 매력적인 소품이 ‘사랑의 인사’다.
처음에 피아노곡으로 작곡하여 이듬해 관현악곡으로 편곡하며 널리 사랑받게 된 이 곡은 엘가의 다른 살롱 소품인 ‘세레나데’, ‘아침 노래’, ‘한숨’, ‘밤 노래’등과 함께 단순하고 소박한 화성과 매력적인 벨칸토 멜로디로 대중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아내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훈훈하게 스며나오는 정감 있는 선율로 바이올린과 첼로곡 등 다양한 편곡으로 연주된다.
* 드뷔시 ‘달빛(Clair de lune)'
드뷔시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달빛’은 많은 영화음악의 소재로 사용됐는데, 그 중에서 알 파치노와 미셀 파이퍼 주연의 영화 ‘프랭키와 쟈니’(1991, 브로드웨이 연극의 원제는 ‘달빛 아래의 프랭키와 쟈니’)에서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중녀 남녀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으면서 사랑을 일궈가는 이 작품의 끝 부분에서 쉽사리 상대의 마음 문을 열지 못하던 남자 주인공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드뷔시의 ‘달빛’이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그 음악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청한다.
DJ는 프로그램을 마치며 사랑의 결실을 기원하는 바람으로 전례를 깨고 ‘달빛’을 다시 틀어주고 둘은 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서로의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드뷔시는 “음악은 색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음악가들 못지않게 많은 시인, 화가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면서 문학이나 회화작품에서 그의 영감의 원천이 될 아이디어들을 빌려왔다.
드뷔시의 작품들 대부분이 암시적이고 요사적인 표제들을 갖고 있는 것은 당대에 그가 교류한 예술가들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인상주의 회화가 주로 낮의 빛을 소재로 삼은 데 비해 독창적이고 탁월한 피아니스트인 드뷔시는 피아노의 음역이나 주법, 페달 사용에 있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낮보다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밤까지의 분위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미묘하고 특이한 색깔과 분위기,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이기도 한 안개가 덮인 듯한 몽롱한 느낌을 연출했다.
‘달빛’은 드뷔시의 초기 작품으로 네 개의 소품으로 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제3곡에 해당한다.
첫머리에 제시되는 아름다운 선율(악보)은 적막한 가운데 비추는 달빛을 묘사하고 뒤이어 피아니시모로 전개되는 연속적인 화음과 아르페지오를 통해 달빛의 다양한 영상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