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에 기쁨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 놓는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기쁨이 있습니다. 곧 기독교에는 세상이 모르는 독특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기쁨을 알면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고, 이 기쁨을 알면서도 잘 누리지 못한다면 병든 신앙이고, 이 기쁨을 전혀 모른다면 아직도 기독교의 신앙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제이니" 학장은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가 매일 천국에 갔다오는 줄 알 정도로 늘 행복한 얼굴빛을 한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그처럼 날마다 행복해 보이는지 그 이유가 궁급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의 깃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에 깃발이 나부낄 때는 왕이 성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얼굴에는 항상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게 되는 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할 것을 권면하면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5:16)고 말씀하였으며 성령안에서 의무적으로 맺어야 할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희락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희락"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인 2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소스"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카라"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마소스"는 세상적인 기쁨을 의미합니다. 술을 먹어서 기쁘거나 돈을 벌어서 기쁘거나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갖고 싶었던 것을 갖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 바로 "마소스"입니다. 이런 기쁨은 매우 조건적인 기쁨으로서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들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면 함께 사라지게 되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런고로 술을 먹어 기쁘다면 술에서 깨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마약에 취해 있을 때는 세상이 모두 내 것 같고 황홀함과 극한 행복을 맛보게 되지만 마약에서 깨어났을 때 느끼는 허무함과 비참함이 그들을 더욱 큰 어둠으로 몰아 넣는 것처럼 이러한 기쁨은 결국 우리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헛되고 헛된 것에 불과한 일시적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카라"는 조건이 없는 기쁨입니다.
"카라"는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실 때에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기쁨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성령 안에서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고 또한 성도들을 향해 항상 기뻐할 것을 권면했던 일이나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의 박해로 돌에 맞아 죽는 고통의 순간에도 그의 안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과 희락을 누렸던 것처럼 "카라"는 현실의 조건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열매로 말씀하는 "희락"은 바로 이 "카라"가 가지는 무조건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카라)은 어떤 기쁨일까요?
1. 구원의 기쁨입니다.
시편 35편 9절에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눅10:17-20,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딤후2:10-12,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빌3:19-21,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기쁨보다 구원의 기쁨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눅10:20)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에서 크게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은퇴하시는 "임 동선" 목사님 은퇴 예배에 참석한 분들이 모두가 축하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답사 순서가 있었습니다. 70세에 은퇴하시는 목사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지 궁금하였습니다. 임목사님은 강단에 마지막 서신 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70 평생에 가장 기쁜 것은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나를 구원시켜 주셨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원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신령하고 영광스런 몸으로 영원을 살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소중한 선물(영생)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모 신문에 연재하는 부산대 "길원평"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고 다시 한번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유물론 사상에 젖어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가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교수가 되어서 부산대학으로 돌아왔는데 지금도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죽지않고 영생을 할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하고도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쾌락과 기쁨은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나오는 웃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주는 기쁨이야말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가끔 새벽에 일찍 잠이 깰 때가 있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워서 '나는 이제 영원히 사시는 주님,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그 나라에서 보낼 존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몰라서 자기 몸을 꼬집어 본다고 합니다. 얼마나 흥분되는지, 얼마나 황홀한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합니다.
"존.바르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입으로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예수믿는 자를 조롱하며 지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를 믿는 사촌형제가 있었는데 그가 "존"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어느 주일에 교회에 가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를 하였습니다. 돈이 필요했던 "존.바르사"는 돈을 받기 위하여 교회에 처음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 나가다가 1842년 3월 어느 주일 뉴욕 라파에트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는 더 이상 돈을 받지 않고도 교회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 기뻐서 집으로 친구들과 함께 돌아오면서 그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를 구원하신 참 구원자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해서 주님처럼 자신도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요, 또한 주님의 영원한 나라가 자신의 영원한 처소가 될 것임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영접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교회, 저교회에서 잃어버린 양(믿다가 낙심하여 믿지 않고 있는 자)들을 찾아 전도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며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양을 지키는 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는 군에도 들어가서 군인들에게 전도하다가 스파이로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기를 재판하는 군사재판소에서 재판장인 "스튜어트" 장군에게, "장군님,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하고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석방되어 그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전도하며 일생을 보내었습니다. 한번은 학생들이 그에게 직업을 물었을 때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던 그는 거리의 선교사로 일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2. 헌신과 봉사의 기쁨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것은 부모에게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이것을 고통이나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을 위하여 받는 고통은 결코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라”(고후12:10)고 말하였습니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폴 칼슨"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치료하여 주면서 선교하였습니다. 아프리카는 의료 시설이 부족하여 병을 앓으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곳이 많은데 의사가 왔다는 소리를 들은 주민들이 구름떼와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폴 칼슨"은 도무지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격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급기야 피곤이 겹쳐서 큰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 때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환자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기에 피곤을 전혀 느끼지 못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를 위해 행하는 모든 헌신과 봉사, 희생과 고통조차 기쁨으로 여기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 안토니오"(St. Anthony)는 어릴 적에 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느 추운 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거지가 떨고 서있습니다. "추우시지요. 아버지께 옷을 드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말합니다. "옷을 구걸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오는 다시 말합니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군요. 어머니께 말씀드려 음식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배가 고프거나 음식을 구걸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때 안토니오는 거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거지가 말합니다. "당신의 심장을 원합니다. 심장을 주십시오". 안토니오는 깜짝 놀라며 물러섰습니다. 심장은 가장 중요하고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장을 드리면 죽을 겁니다." 그때 거지는 어깨에 매고 있던 자루를 내려 몇 개의 심장을 꺼내 보이며, "이것은 바울의 심장이고,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심장입니다. 이것을 나에게 준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비로소 안토니오는 앞에 서 있는 거지가 예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안토니오는 일생동안 심장을 주님께 드리듯 생애를 바쳤습니다. 주께서 심장을 원하심은 힘을 다해 수고하며 희생하기(헌신하며 봉사하기를)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힘을 다해 헌신하며 봉사한 사도바울과 막달라마리아의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기쁨이 차고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시는 또 다른 기쁨은 이처럼 헌신과 봉사를 통해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사실 기쁨이라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가 생기거나 유익이 될 때 얻게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란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오히려 수고하고 나누어 주고, 손해보고 베풂을 통해 생겨나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교회를 섬기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함을 통해 얻게 되는 이러한 참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때로는 핍박이 있고, 모욕이 있으며 큰 손해가 있고 어려움이 있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모든 어려움을 능히 감수하면서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희락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3.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요7:37-39,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이처럼 희락(기쁨)의 영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면 그 어떤 환난과 고통에 처해 있을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이 있어도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그것은 쓴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초가삼간에 살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요 기쁘고 행복한 곳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늘 만족하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도바울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늘 기꺼하며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어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성령충만하여 예수님에게 만족한 사람은 감옥같은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환경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만족하는데 있고, 불행은 불만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결국 주안에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데 있습니다.
4.기쁨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레스토랑에 옷을 잘 차려입은 손님 하나가 갑자기 기분이 나쁜 듯 테이블에 놓인 잔을 노려보았습니다. 웨이터가 상냥하게 웃으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달 전에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일억 팔천만원의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건 기분 나쁜 일이 아닌데요” “그렇죠 하지만 지난달에는 저의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1억원 상당의 주식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손님은 그렇게 불행한 표정으로 앉아계십니까?” “왜냐하면 이번 달에는 저에게 한 푼이라도 유산을 남겨준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축복 속에서도 기가막히게 슬퍼하고 절망할 일들을 일부러 찾아 그것을 억지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기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기뻐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자만이 어떠한 순간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락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불평을 제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국 "펠로우 오브 조이" 교회을 담임했덤 "제임스 메리트" 목사는 “종종 감사는 고된 일상에 기쁨을 연결시키는 사슬의 잃어버린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은 당신이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의 배터리에서 기쁨이라는 에너지를 고갈시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속적인 기쁨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불평과 불만을 제하고 감사의 제목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인생은 결코 기쁠 수가 없습니다. 기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감사하고자 노력하여야 합니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이며 우리 안에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은 참 어려운 고통 중에 늘 감사했습니다. 자녀가 여럿인데 한 아이는 집을 가출했다 들어왔다 합니다. 또 어떤 아이는 공부가 밑바닥을 돌아서 말썽입니다. 이쯤 되면 으레 죽느니 사느니, 별소리가 다 나올 법한데 그 집사님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가 고백했습니다. “저는 본래 창녀였습니다. 성병까지 얻어서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지금의 남편이 구해주었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귀한 자식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신 결과입니다. 남편을 볼 때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은혜 앞에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무엇을 불평하겠습니까? 항상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두 번째 열매인 희락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희락과 기쁨은 성도가 반드시 맺어야만 하는 열매입니다. 참된 기쁨은 결코 감정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선택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성령을 통해 기쁨과 희락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감사를 통해 기쁨을 지속시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