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
미국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매국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완용의 생애는, 일단 관계로 나아갔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이 되어 반민족행위를 계속하면서 잔명(殘命)을 보존하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인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친러파로 변신하여 외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 서리가 되었고, 탁지부대신 서리, 학부대신 서리 등을 겸하는 한편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학부대신, 평안남도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경, 전라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등의 관직을 거쳤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한(1904)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조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한편, 초전에서의 유리한 국면을 배경으로 '화폐정리사업' 등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닦아 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양아버지(養父)의 초상(初喪)을 치르고 이 해 9월에 학부대신이 된 이완용은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친일파로 변신해 갔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열린 어전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는 반대했으나, 이미 일본 쪽에 의해 매수되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일본 쪽이 제시한 조약안 외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이라는 조문 하나를 더 첨가한다는 조건으로 찬성했고, 이에 따라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을 체결했다(1905. 11. 17). 이완용은 조약 체결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다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으로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任善準)을 내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군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학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6월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가운데 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대신들을 이끌고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중앙)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고종을 양위시킨 이토는, 통감이 한국 정부의 시정(施政)을 '지도'하는 권리를 가지며, 법령을 제정하고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할 수 있으며, 고급 관리의 임명, 외국인의 고빙(雇聘)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정미 7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이완용은 이에 응하여 조약을 체결했다(1907. 7. 24). 이 조약의 부수문서에 따라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또한 한국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많은 해산 군인들이 의병전쟁에 가담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의논했고, 그 결과 한국 황제 일가의 1년 세비를 150만 원 지급할 것, '합방' 공신에게는 응분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으로서 공채를 하사할 것, '합방' 공신에 대한 수당으로서 현 수상에게는 백작 작위와 15만 원, 일반 대신에게는 자작 작위와 10만 원, 기타는 남작 작위와 5만 원을 줄 것, '합방'의 소요경비로서는 공채 3000만 원을 발행할 것 등이 결정되었었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합방'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은사금, 총리 퇴관금 등과 함께 일본 귀족으로서 백작 작위와 그것에 따르는 응분의 대우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다시 그 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내선인친목회'를 발기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어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 국왕을 만나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죽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민족에 대한 이른바 [경고문]을 발표했다. 첫번째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조선독립 선동은 허설(虛說)이요 망동"이라면서, 일제 당국이 이 운동을 '무지몰각한 망동'으로 보고 관대하게 회유하지만, 그래도 자각하지 못하면 필경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같은 [경고문]이 발표되자 매국노 이완용을 규탄하는 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이에 대해 그는 "천만인 중에 한사람이라도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경고의 효과가 적지 않은 것"이라 강변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지방에 게시한 [경고문]을 민중들이 모두 찢어버렸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번째 [경고문]을 발표했다. 세번째 [경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강변했다. 3·1 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서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고대 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 동종동근(同種同根)이어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부적당한 것이다, 또한 한일'합방'은 당시의 국내사정이나 국제관계로 보아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 대세에 순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참가하여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조선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우리의 적이다. 가히 민족반역자로서의 극명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했고(1921), 아들 항구(恒九)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丙吉), 병희(丙喜) 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수괴로서의 갖은 '영화'를 누리는 한편,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일찍이 이재명의 의거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만년에 그 집에 함께 기거하던 일족 이영구(李榮九)에 의하여 암살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소문이 있은 지 약 2개월 후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결국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수 있었다. 그러나 8·15 후 그 후손의 손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는 정책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권이 실시한 농지개혁과정에서 그것이 실시되지 않음으로써 그 재산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 강만길(고려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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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정한 대한민국의 리더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africa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