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7가 영도교에서 낙산공원까지 한서린 단종비의 넋을 기리며..>
단종비 정순왕후 청룡사 (2016, 1, 26 방문)
조선 최대의 비극적인 왕후 !
단종비(妃) 정순왕후는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서 60여 년을 홀로 지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며 망부(亡夫)의 한을 안고 서러운 삶을 살았던
절개와 충절의 상징이다.
단종(조선 6대 임금 端宗1452~1454)이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세조에 의해
17세에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자, 궁궐에서 추방당한 정순왕후 송씨부인
(단종보다 1살 위)은 동대문 밖 숭인동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8세에 과부가 된 송씨는 머리를 깎고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 동안 아침저녁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하여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조정에서 마련한 거처도 거절하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지 않고 살았다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서울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한 지봉인 동망봉에 위치한 청룡사(靑龍寺)의 전신이다.
(참고 : 동쪽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 에서 유래)
영조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부터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산이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절벽만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정업원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는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송씨
(定順王后 宋氏, 1440∼1521)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碑)로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유산정보 자료 인용)
관련사진 : 현지촬영 (다복)
조선조 최대의 비극의 왕과 비 단종과 정순왕후
(다녀온 길 / 전철 1호선 동묘 환승 6호선 1정거장 지나 창신역 하차, 오른쪽 언덕 200 m 청룡사)
코스 : 청룡사(정업원) - 비우당 (자주동샘) 청룡사 윗길 우측 300m 쌍용2차 APT 정문 옆 명신초교 원각사 아래)
- 200m 낙산공원 <마을버스 3번>
동쪽방향 >> 청룡사 좌측 200m 동산 - 동망정 - (동묘: 관우사당) 여인시장터 - 영도교(청계천 7가)
청룡사
청룡사 대웅전
정업원 구기
영조친필 현판 "前峰後巖 於千萬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여라.
죽음보다 더 깊은 슬픔에 젖은 정순왕후(송씨부인)을 위로해주었을 듯한 정업원 앞뜰 소나무
동망봉(東望峰)동망정 / 동묘앞역 사거리에서 보임
단종이 죽은 후 그녀는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아침 집근처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는데 그녀의 울음소리가 산 아래 마을까지 들렸고
마을 여인네들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동망정
단종을 그리워하며 동망봉에서 동쪽 영월을 바라보던 절개와 충절의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매년4월 추모제)
지금은 숭의공원 / 체육공원(동망봉 정상)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염색을 하던 곳(낙산공원 방향 200m 청룡사 좌측 윗길)
자주동샘 빨래터
18세의 정순왕후가 이 샘에서 빨래를 하면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단종 비(妃)의 애환이 서린 곳.
뒷 뜰에 자주동샘이 있는 "비우당"
서울 낙산 동쪽 비탈에 위치한 비우당(庇雨堂)이는 조그만 초가집, 근근이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이 집에서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지었다.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집을 들러본 후 청빈함의 사표(師表)로 삼았다고 한다.
가끔씩 재벌가의 재산다툼, 총리, 장관 후보들이 富도 모자라 名譽慾으로 청문회에서
과거 부정하게 치부(致富)했던 치부(恥部)가 들어나 패가망신 !
비우당의 검소한 삶과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
당시 여인 시장터 / 현재 동묘 벼룩시장
숭신초등학교앞 여인시장터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부인이 영원히 이별했다는
영도교(永渡橋)
만남의 의미 오작교의 반대 격 / 청계천 7가, 동묘 아랫길, 다리위에는 잡상인들만 ...
단종과 송씨부인(단종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이별의 장소 "영도교" 다리 아래엔 마침
무심하게 청둥오리 한쌍이 다정하게 유영하고 노니는데...
단종과 송씨부인의 넋이 환생한 것은 아닐런지...
18세 꽃다운 정순왕후의 64년간의 어린 단종(17세)을 그리며
한맺힌 인고의 세월을 보낸후 82세에 눈을 감음 !
영도교와 여인 시장터 (지금은 청계천 벼룩시장) 옆 위치
동묘(東廟) : 전쟁의 신 관우(關羽)사당
남양주의 정순왕후 사릉 (思陵) / 금곡역에서 가까움
평생 단종만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하여 사릉 !
가는길 : 상봉역에서 경춘선 방향 - 금곡역 하차 23번버스
55번 마을버스하차 / 사릉과 전통 수목 양묘장이 있다.
善行者 천지이복 惡行者 천지이벌
★ 세조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두아들이 요절하고,
말년에 악몽에 시달리고 악성 피부병(문둥병)으로 고생하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 !
한명회(韓明澮) / 두딸 요절 / 부관참시
수양대군의 모사(謀士)꾼으로 딸 넷 중에 둘을 왕비로 만들었다.
그 중 셋째 딸은 세조의 아들 해양대군(뒤에 예종)에게 시집갔는데,
예종비가 된 후, 14개월 만에 산후병으로 단종이 승하한 같은 나이, 17세에 요절(夭折)하였다.
또 넷째 딸은 세조의 손자 성종비로 보냈는데 19세에 요절 하였다.
한명회 사후 연산군 때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때에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에서 꺼내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거는 형)를 당했다.
한확(韓確) / 객사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내놓게 한자로, 그 누이는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여동생은 명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갔기에 빛도 되고 한도 되어 가슴 아파 하였다.
그가 외교통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라 우겨서
명나라의 세조 왕위 승인을 받아오는 중도에서 객사해버렸다.
** 권력 앞에선 부모 형제도 친구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실,
교훈 / 惡行者 天之以罰
기타 :
한양도성 사적 제 10호
낙산(駱山)은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125m)이라
불리기도 했다. 낙산은 태조 3년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감싸는 네 산 가운데 하나로, 동쪽 경계인 낙산의
능선을 따라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 성벽을 쌓아 한성을 감싸고 있다.
창신역 - 청룡사 - (비우당, 자주동샘) / 쌍용2차 APT 앞) - 낙산공원 <3번 마을버스>
비우당에서 200m 언덕 정상의 낙산공원에서 본 남산
낙산공원에서 본 북한산
서울 랜드마크 "남산"에 이어 야경 명소 "낙산" (남산, 북악산 인왕산을 볼수있다)
서울의 4 진산(鎭山)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쪽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동쪽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명산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