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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칼럼/ 한강문학 8호, 겨울호
조선은 민주국가였다
지당 이흥규
인류역사상 중세 이후에 한 왕조가 500년이 넘도록 백성들을 다스려온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통치자를 신으로 떠받들던 고대에는 신성이 깨지지 않는 한 나라도 망할 수가 없었기에 고조선은 2000여 년간 지속되었고 로마제국은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들은 한 왕조가 계속된 것이 아니고 나라만 계속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역시 아직 깨우치지 못한 백성들이 왕을 신처럼 받들어 모셨기에 오래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매함에서 벗어난 중세 이후의 세계사를 더듬어보면 왕조는 길어야 300년을 넘지 못하고, 짧으면 100년도 못되어 망한 나라도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어찌하여 최근세까지 518년을 지속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민족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은 근본적으로 노예근성이 있어 혁명도 모르고, 개혁할 줄도 모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서양에서는 산업혁명, 민주혁명이 일어나고 이웃 중국도 명이 청으로 바뀌고 우리가 얕잡아보던 왜(倭)가 정권이 수차례 바뀌고 명치유신으로 개혁을 이루던 시절에도 한 왕조를 대대로 받들어 모시지 않았는가?> 라고. 그러나 우리 민족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가장 영리하고 지혜로운 민족이었다.
그러함에도 조선왕조가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긴 세월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왕들이 민주정치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조선은 이씨왕조가 다스린 군주국이었는데 민주정치를 하였다고?> 하면서 믿기지 않아 의아해 할 것이다. 그 의문을 풀기위해 아래에 조선의 임금님들이 어떻게 민주정치를 하였는가?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밝혀 보고자 한다.
첫째, 정소제도다.
정소(呈訴)란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을 문서로 관청에 요구하고 청원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소는 신분 성별의 제한 없이 모든 백성이 가능 했으며 부녀자와 노비도 할 수 있었다. 한양에서는 주 장관에게,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올리고 그 뒤에도 억울하면 사헌부에,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를 쳤다. 우리는 상소는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이 나라의 정책이나 중대사안에 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임금님께 올리는 글로 알고 있지만 상소는 조선의 백성이면 누구나 직접 임금님과 소통할 수 있는 제도였다. 천민이나 기생도 글만 쓸 수 있으면 편지로 왕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상소제도는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태종대왕은‘억울한 사람은 북을 쳐라.’하고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북을 친 자의 말을 듣고 왕에게 보고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다.
“멀리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찌해야 합니까?”
“왕이 지방에 행차 하실 때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깃발을 흔들어라,”
이리하여 [격쟁(挌錚)]이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격은 칠 격(挌)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다. 꽹과리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면 지방을 행차하시던 왕이 억울한 백성의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이 신문고 제도는 조선의 3대 태종이 설치하여 당대에만 실시한 것으로 알기 쉬우나 조선왕조 내내 이어온 제도였다. 또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형식적인 제도였겠지. 무지렁이 백성들이 감히 임금님과 대면할 수나 있었겠어?’ 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는 제위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이 넘는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더라도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것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해결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아무 날 아무 곳에 모여라’하고 공고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처럼 왕이 직접 백성을 만나 대화하며 나라를 다스린 왕이 있었는가? 혹여 어느 나라 어느 왕이 백성과 직접만나 얘기하고 백성의 호소를 들어 준 사실이 있다면 그 왕은 오래도록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성군으로 존경받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의 임금님들은 날마다 백성을 만나고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 주었다는 얘기다. 이것이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도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바람직한 민주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둘째, 조세제도다.
세종 때 농민들의 토지세 제도에 대한 불만의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어전회의에서 세종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농민들의 상소가 이리 많은가?”
“사실은 고려 말에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농민의 입장에서 개정토록 하라.”
그리하여 개정안을 만들어 세종12년 3월에 조정회의를 열었지만 부결되었다.
“수정안이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싫어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면 농민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게 아니요?”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데 5개월이 걸렸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가 나왔다.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다. 물론 찬성이 많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수자다. 거의 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반대하는 제도를 실시하는 것은 백성들을 위해 옳지 않은 제도다.
이에 세종께서는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만들라고 하여 새로운 안을 만들어 회의를 붙인 결과 또 부결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제도 역시 백성들이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서 3년을 시범실시 한 결과가 매우 좋아 조정회의에서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하였으나 또 부결이 되었다.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에 따라 생산량의 차이가 있으니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질이 다른 여러 곳에서 시범 실시를 해보고 조정에서 토론을 거친 후 세종25년 11월에 드디어 토지마다 차등을 둔 토지세의 새로운 안을 공포했다.
백성을 위해서 만든 세제개정안을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국민투표를 하고, 시범실시를 해보고, 토론을 하고, 13년 만에 공포하여 시행했던 것이다. 왕이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바꾸기 어려운 조세제도를 먼 장래를 내다보고 어느 구석에 하자는 없는지, 혹여 가난한 백성에게 어려움을 주는 부분은 없는지 살펴서 확인 한 후에 공포하는 이 정신이야말로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민주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계 각처에서 전제군주가 제 마음대로 백성을 다스리던 600년 전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이미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상징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리고 제도 하나도 백성의 편에서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세금제도는 세종 때만 적용된 것이 아니고 조선왕조 내내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기 쉽다. 이처럼 민본, 민주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린 조선은 백성이 주인인 민주국가 분명하며 집권자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기는 조선이 500년이 넘는 왕국을 이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셋째, 삼심제도다.
조선시대에는 삼권분립이 아니어서 작은 송사는 지방의 사또가 판단하여 곤장 몇 대로 벌을 주었지만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형수의 재판은 맨 처음(1심)에는 고을 사또가 하고, 두 번째(2심) 재판은 관찰사(조선 8도 도지사)가 하고 마지막 재판(3심)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다. 중대한 사건이 아니면 간혹 어명을 받아서 조정 대신이 재판장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왕이 직접 심문하였고 사관이 심문한 내용을 옆에서 기록했다.
이 기록을 정조대왕이 [심리록(審理錄)]이란 책으로 출판했는데 현재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심리록(審理錄)]은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심문한 내용으로 사형수의 범죄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이 그 내용의 골자다. 혹여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닌가를 밝히는 것이 심문의 핵심으로 왕은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를 계속 따져본 것이다. 그래서 이 삼심에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다.
이처럼 왕이 백성의 편에 서서 ‘혹여 한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은 없는가?’ 살피고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듣고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것이 조선의 법이요, 왕의 통치였다. 이는 곧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민본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런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민주정치인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국가에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왕과 죄인의 소통이다.
넷째, 과학제도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자전에 대한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다. 증명하지 못하는 주장은 당시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허구였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이다. 종교법정에서 지구의 자전을 부정하고 나오던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을…….’ 하고 탄식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동양에서는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각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라고 생각한 이론을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한다. 고대의 무덤이나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이 이 모형이다.
그런데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 1432년에 지구는 둥글며 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람이 세종 때의 과학자 이순지(李純之)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고 돈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관리들이 ‘그렇다면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날 그 시각에 월식이 일어났다.
또한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어 우리가 열람해 볼 수 있다. 세종은 이순지를 서운관(과학을 연구하던 관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1435년)이었다. 세종 임금 재위 초만 해도 조선에는 자체의 책력이 없어서 동지상사라 하여 동짓달 중국에 온갖 진귀한 선물들을 바치고 책력을 얻어왔다. 세종 임금은 이 책력을 보고,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다른 중국의 책력이 우리나라에 맞을 수 없다고 여겨 이순지에게 수학자와 과학자들을 모두 서운관에 모아 조선의 책력을 만들 것을 명했다. 세종 임금과 스물아홉 살의 당하관이었던 이순지가 주고받은 대화를 들어보자.
“우리 조선의 실정에 맞는 책력을 만들라.”
“전하! 이는 불가(不可)하옵나이다.”
“어인 까닭인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서운관에는 인재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서운관은 승차(진급)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른 부서보다 승차가 빠르도록 명을 내리겠노라.”
“그래도 아니 되옵니다. 서운관은 봉록이 너무 적습니다.”
“그럼, 봉록을 올려주면 되겠느냐?
“그래도 아니 되옵니다.”
“왜 그런고?”
“서운관은 중인들이 일하던 곳이어서 학문을 하는 사대부들이 안 옵니다.”
“그럼 공조의 노비 장영실을 면천하고, 서운관에서 일하는 중인들과 함께 벼슬을 주어 양반신분을 만들어 주면 되겠느냐?”
“그래도, 서운관 관장의 위엄이 없으면, 연구가 진척되지 않습니다.”
지엄한 왕명에 잇달아서 토를 다는 이순지에게 세종임금은 나지막이 물었다.
“허면 서운관 관장이 누구여야 하는고?”
“전하의 측근으로 강한 사람을 보내주소서.”
“그가 누군데?”
“영의정 정인지 이옵나이다.”
이렇게 하여 당대 학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영의정 정인지가 전례에 없는 세종임금의 파격인사로 졸지에 천민과 중인들이나 드나들던 하급기관인 서운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영의정 정인지의 막강한 후광을 받아 이순지는 마음 놓고 인재들을 모아 천문을 관측하고 이론을 정리하여 드디어 1444년에 조선의 책력(칠정력)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순지가 칠정력을 설명한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다. 지금부터 600여 년 전에 1초 차이가 나게 계산을 해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초등학교 때 지구가 둥글고 돈다는 이론을 갈릴레이의 지동설만 배우고 우리의 위대한 과학자 이순지를 언급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이 이처럼 노비를 면천시켜 천문을 관측케 하고 해시계 물시계를 만들고 측우기를 만들어 비가 오는 양을 측정하며 우리가 사는 곳에 맞는 달력을 만든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가? 이는 백성들이 때에 맞추어 농사를 잘 짓고 모든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함 이였다. 이러한 정신이 곧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민주요, 이처럼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는 나라가 바로 민주국가인 것이다.
다섯째, 기록제도다.
우리 민족은 모든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은 518년 동안 왕들의 하루 일과를 빼놓지 않고 기록한 것이다. 왕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자마자 사관이 곁에서 만나는 사람 대화하는 내용 모두 기록하고, 심지어 몇 시에 화장실에 가셨다는 운신의 모든 것을 승하하시는 순간까지 기록하였다. 공식근무 중 사관 없이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다. 인조는 사관이 너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느 날 대신들에게 어느 방으로 모이라고 하여 사관을 따돌리고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지필묵을 들고 그 방에까지 쫓아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하고 나무라니까 사관이
“전하, 조선의 국법에는 전하가 계신 곳이 어디든 사관이 없으면 아니 되옵니다.”
그리고는 그런 말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인조는 그 사관이 너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붙여서 귀향을 보냈다. 그 다음 날 즉시 다른 사관이 와서 적었다. 이렇게 518년을 기록했다.
사관은 종9품에서 종7품의 관리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와 비교 해보면 주사보 이하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행정서기나 주사보가 대통령의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군주국가에서 그야말로 사관과 왕은 하늘과 땅인데 그런 사람이 왕을 따라 다니며 사사건건 다 적는다고 생각해 보면 숨이 막힐 일이다. 이 518년의 기록을 사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승하하시면 한 달 내에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중차대한 기록은 사실여부를 확인 하였다. ‘영의정, 임금님과 이러한 논의를 한 사실이 있소?’ 하고 확인한 후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 쓰는 것보다 비경제적 이지만 사람이 쓰면 오탈자가 나오기 마련이며 4부가 각각 다를 수도 있기 까닭에 돈이 들어도 목판활자, 후에 금속활자 본을 만든 것이다. 이 조선왕조실록을 유네스코에서 조사 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이 얼마나 사실적인 기록이냐가 문제다.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태종실록 이였다. ‘아버지의 행적을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맹사성이 나섰다.
“보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다. 몇 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이를 거울삼아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이번에는 황 희 정승이 나섰다.
“전하, 보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이 간언에
“그대 말이 맞도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
는 교지를 내렸다.
이 왕조실록은 어찌 보면 역사와 백성들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아마 숨이 막힐 것이다. 감옥에 갇혀있는 것보다도 더 답답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혹여 그릇되지 않나 늘 돌아보고 행동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조선왕조실록은 백성들이 왕을 올바른 정치를 하는 임금이 되도록 감시하고 유도하는 한 방법 이였다고 봐야 한다. 소위 민주국가인 오늘날에도 백성들이 통치자의 비리를 척결하지 못하고 가슴만 치고 있는데 군주국가에서 백성이 왕을 성군으로 만드는 나라! 이 나라가 민주국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왕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이뿐만 아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다. 승정원은 오늘날 청와대비서실로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다. 이 최고 권력기구가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지만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 아니면 80년 후에나 이루어진다고 한다.
왕들에 대한 기록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로 왕들의 일기이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다. 정조는 이 일기를 나라를 다스리며 실천한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으로 조목조목 나눠서 썼다.
이처럼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이는 조선왕조만이 간직한 역사의 기록이다. 조선 왕조 518년 동안 왕들이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백성의 안녕과 행복한 삶을 위해 나라를 다스린 결과가 이처럼 방대한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이 외에도 조선이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나라! 즉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밝혀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왕들의 정치가 모두 백성을 위한 정치였지 왕이나 벼슬아치를 위한 정치가 아니었다.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까닭도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도록 쉬운 글자를 만든 것이다. 흉년에 국고를 열어 구휼미를 나누어주었다든지, 구황촬요(救荒撮要)나 각종 언해 등 책을 언문으로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읽게 한 것도 그 근본은 민주주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 아테네의 신전 등 세계의 불가사의를 볼 때마다 유적에 대한 장엄함보다 ‘이 유적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강제로 끌려와 피땀을 흘리고 죽어갔을까?’란 안타까움이 앞섰다. 융성한 나라치고 밑바닥 백성들은 노예처럼 산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면서 아내(왕비) 한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의 노역으로 몰아넣은 현장이라 생각하며 우리나라에 이처럼 거대한 유적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었다. 정조 때 쌓은 수원 화성만 보더라도 왕의 민본정신을 알 수 있다. 백성들에게 일반 품삯보다 더 주어 일꾼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세계만방에 자랑할 만한 선조들의 유산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역사의 흔적들이 수없이 많다. 다만 다른 나라의 유산과 다른 점은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려서 만든 유산이 아니라, 기록유산이요, 과학유산이요, 예술적인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 역시 우리는 고대국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상 대대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요, 나라의 주인은 백성들 이였다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발자취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백성들이 투표하여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민주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해방 후, 국민들이 직접선거로 뽑은 대통령들이 또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주인으로 여긴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오늘날 국민을 개돼지로 여긴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고위공직자도 있지 않은가? 진정한 민주국가는 투표권의 유무로 따질 일이 아니다. 바람직한 민주국가라면 집권자들이 백성들을 얼마만큼 주인으로 여기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집권자나 국가공무원들이 국민을 주인으로 여기는 나라라야 진정한 민주국가가 아니겠는가?
요즈음 위정자의 그릇된 처사로 나라가 매우 어지럽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 백성들은 자중하여 묵묵히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하게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다. 지금 정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모두 백성들에게 밝히고 죄가 있다면 상응하는 처벌을 감수하여 이 나라가 선장과 항해사가 없는 선박으로 좌충우돌하여 난파되는 일이 없이 순항의 길로 나아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전남 영광 홍농읍 출생, 호 ; 日洋, 芝堂
※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 광주광역시 교원연수원 강사, 무등도서관 문학강좌 강사
※ 한강문학 동인회장, 문학동인 죽란시사회 회장 역임
※「우리문학」시 추천 등단, 국보문학 소설 당선
※ 전남 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 새싹회 글짓기 지도교사상, 경향신문 글짓기 지도교사상
※ 국제문화교류회 문화교육상, 광주전남아동문학상
※ 대통령표창 2회, 녹조근정훈장 수훈
※ 시집 ; [달빛 낚기] 외 4권, 소설집 ; [도시의 불빛]
※ 남도 사투리 서사시집 ; [어머니의 편지]
※ 시창작론 집 ; [시는 아름다운 마음의 거울]
※ 산문집 ; [생각나들이] 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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