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세조실록]
1. 수양대군의 정국 전복과 왕위 찬탈
※ 정난공신(靖難功臣)
조선 단종 때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준 훈호(勳號).
1453년(단종 1) 10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이른바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반대세력인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어 이 거사에 가담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록할 것을 요청하여,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1등에는 수양대군·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12명,
2등에는 신숙주(申叔舟)·양정(楊汀)·홍윤성(洪允成) 등 11명,
3등에는 성삼문(成三問)·이예장(李禮長)·홍순로(洪順老) 등 20명으로 모두 43명이 책록되었다.
계유정난 직후 김종서의 당여(黨與)로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있던 이징옥(李澄玉)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으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3등공신에 책록된 성삼문은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되었고 훈호(勳號)가 추탈되었다. [출처] 이버 백과사전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 구도는 왕족의 대표격인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대신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 두 파의 내부에는 또 다른 작은
세력권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즉,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왕족 세력 속에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안평대군이, 재상 정치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대신들 속에는 김종서와
황보 인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왕을 중심으로 한 왕도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였다. 때문에 정치
세력은 언제나 왕족을 등에 업거나 또는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는 대의명분을 얻기가
힘들었다. 특히 단종 시대는 왕이 너무 어린 관계로 왕권 자체가 유명무실했고 왕을 대신할
실질적인 궁중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왕족 중에 한사람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안평대군이었다.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선택한 까닭은 한마디로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 신권이 강해지는 한편, 왕위를 노리는 왕족들의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신들은 왕족들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되었고, 그래서 비교적 힘이 약한
안평 쪽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당시 왕위를 노릴 만한 힘을 가졌던 인물은 수양과 안평 두 사람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세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길러오다가 문종 때에
와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없는 단종이 들어서자 이를
노골화한 것이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는 대단해서 고명대신들이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수양대군의 위세가 높았던 것은 그가 왕족의 대표로 단종을 보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 왕족 대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필하도록 부탁했는데,
가장 가까운 직계 혈족의 최고 어른인 수양과, 수양의 네 번째 동생이었지만 일찍이 태조의
여덟째 아들 방석의 양자로 입적되어 촌수로 따지면 수양의 당숙이 되던 금성대군이
선택되었다. 하지만 금성대군은 성격이 곧기는 하나 세력이 없었고 정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수양대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고명대신들에게는 이러한 수양의 세력 팽창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은 본래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족점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왕권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그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은 곧 대신들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김종서와 황보 인을 위시한 고명대신들의 숙고 끝에 수양대군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은 육진을 개척할 때에 김종서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인물인데다가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학문과 문예도
뛰어나 선비의 낭만적인 면모도 있었다. 말하자면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수양에 비해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고명대신이 안평과 손을 잡자 수양대군의 기세는 다시 위축되었다.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과 견줄 만한 대표적인 왕족 세력인 안평대군과 힘을
합침으로써 그야말로 힘과 대의명분을 다 쥐게 된 까닭이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이에 대한
타계책을 모색하게 되고, 결국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의 이 거사는 단종 즉위 초부터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있었던 듯싶다. 그것은 수양이
1452년 7월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음주를 함께 편찬하던 집현전 교리 권람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그는 이 거사를
단행하기 6개월 전에 사뭇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
것을 자청한 일이다. 1452년 9월에 명나라가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정에서는 이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할 사은사를 보내기로 했는데, 수양은 이 일이 종친의
의무임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수양의 수하들은 그를 만류했다.
수양이 없는 틈을 타서 대신들이 세력을 팽창시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은 이 일을 강행한다.
그 후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의 거사 계획은 급진전된다. 수하에 신숙주를
끌어들였는가 하면, 김종서를 철퇴로 죽인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무사들을
수하에 두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양성한다. 따라서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수양의 명나라
행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김종서 일파의 경계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거사 계획을 짜는 한편, 그들의 경계를 늦추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수양이 김종서,황보 인 등의 조정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났다. 수양은 그 동안 진행해온 계획을 실행할 결심을 하고 우선
조정 최대의 권력가이자 정적인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간다. 김종서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뛰어난 문인이자, 육진을 개척하는 등
무인적인 역량까지 발휘한 비상한 인물이었다. 여하튼 계획에 따라 김종서를 살해하고 나서
그 길로 입궐하여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 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이미 작성된 '생살부'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 인, 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수양에 의해 이렇듯 정난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 출신들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게 동조했다. 이들은 비록 유교적 비전제
정치를 내세워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 황보 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수양 역시
이들을 애써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양이 집권한 뒤에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 복위를 기도하게 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단종 복위 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중종 대의 사림파들은 왕을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또한 이때
세종에게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이중 남효온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