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now Man | Wallace Stevens
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
To regard the frost and the boughs
Of the pine-trees crusted with snow;
And have been cold a long time
To behold the junipers shagged with ice,
The spruces rough in the distant glitter
Of the January sun; and not to think
Of any misery in the sound of the wind,
In the sound of a few leaves,
Which is the sound of the land
Full of the same wind
That is blowing in the same bare place
For the listener, who listens in the snow,
And,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the nothing that is.
눈사람 | 월러스 스티븐스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하네,
서리와 눈송이 얼어붙은 소나무 가지를
각별하게 보려거든,
오랫동안 추위를 느껴봤어야 하네,
얼음 보풀 덮인 로뎀나무와,
거친 가문비나무 저 멀리 1월의 태양 아래
눈부신 걸 보려거든, 그리고 바람 소리,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 소릴 듣고
비참함을 떠올리지 않으려거든,
그 소린 바로 헐벗은 곳에서 불고 있는
바로 그 바람 가득한
땅의 소리
눈 속에서 경청하고, 그 자신이 무無이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無와 존재하는 무無를
응시하는 자를 위한.
[작품읽기]
영국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작품 중에 『눈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겨울날 한 아이가 온종일 정성껏 만든 눈사람이, 자정이 되자 아이를 찾아와 함께 놀다가 아이를 데리고 겨울밤을 날아 아름다운 여행을 한 후 새벽녘에 돌아온다. 늦잠을 자버린 아이는 깨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눈사람을 보기 위해 마당으로 뛰어나가지만 녹아내린 눈사람만을 발견한다. 얼핏 생각하면 작가의 상상력이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통해 눈사람을 움직이게 만든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야기의 마법은 반대방향으로 작용한다. 즉, 작가나 아이의 동심이 환상의 세계를 빚어낸 것이 아니라, 바로 눈사람의 세계, 눈사람의 꿈이 작가와 아이를 통해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월러스 스티븐스의 「눈사람」은 쉽지 않은 시고, 그 난해함은 이 시가 눈사람에 관한 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런 시간의 지연은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피조물을 냉정하게 객관화하는 데 익숙해진 인간에게 주체와 객체를 역전시켜 보는 겸손함과 너그러움이 사라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눈사람이 자신을 만든 창조자에게 감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한, 독자는 영원히 시의 핵심을 비껴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눈사람」은 제목이 매우 중요한 시라는 뜻이다. 이 제목을 무시하면 시적 화자의 정체가 시인으로 한정되면서 시가 궁구하는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전달되는 메시지의 구체성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이 시의 제목이 ‘눈사람’이고 그 눈사람의 명상적 선언이 시의 내용을 이룬다는 사실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좀 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시의 주된 메시지 중의 하나가 현상을 통해 본질을 짐작하는 것과 본질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차원이 다른 경험임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전자가 편리하고 익숙한 인식의 방법이라면, 후자는 불편하고 고달픈 방법이다. 시적 화자인 ‘눈사람’은 정확히 후자의 태도를 인간에게 촉구한다. ‘서리,’ ‘눈송이,’ ‘얼어붙은 소나무 가지’ 등과 같이 겨울이 인간의 오감에 물리적으로 현시하는 것들은 겨울의 현상이지 겨울의 본질이 아니다. ‘겨울의 마음’으로 표현되는 겨울의 본질에 대한 수고스런 침잠沈潛 없이 그 현상을 제대로 음미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당혹스런 것은 ‘겨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본질이 과연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며, 언어로 표현되는 본질이 본질일 수 있을까. 그래서 화자는 단지 ‘겨울의 마음’이 상당 부분 ‘추위’와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할 뿐이다. ‘겨울의 마음’은 인간과는 다른 정적, 수동적 생명체의 추위 경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공동체 의식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겨울 하늘 아래 소나무, 로뎀나무, 가문비나무와 함께 오랫동안 떨어보지 않고서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겨울 풍경을 논할 자격이 없다. 추위를 함께 견딜 수가 있어야 비로소 ‘겨울의 마음’이 존재를 추위로 끝장내는 모진 마음이 아니라 존재의 생명력을 고이 보존하는 마음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광야같이 헐벗은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저 절망의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땅의 소리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 연은 독자에게 강한 파토스(pathos)를 여운으로 남긴다. 청각화한 겨울의 소리를 치열하게 경청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눈사람이다. 인간은 눈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려고 한 적도 없다. 때에 따라 만들어지지만 자연의 따사로운 파괴력에 언제나 기꺼이 몸을 맡기기에 눈사람은 그 본질상 무無이며, 그 무無가 응시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 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브릭스의 ‘눈사람’이 잠시나마 운동성의 마법을 부여받은 상냥하고 친절한 겨울의 친구라면, 스티븐스의 ‘눈사람’은 한겨울의 마당에 발이 얼어붙은 채, 녹아질 자신의 존재를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있을 나무를 걱정하며, 또 그 나뭇가지를 매섭게 스치는 바람소리의 고향을 명상하는 품위있고 근사한 눈사람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로 눈 보기가 점점 힘들어 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올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눈사람이 아이들을 ‘납치’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만, 사색할 수 있는 눈사람이라면 아이들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작가소개]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
미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 학교 공부를 마친 후 인생의 대부분을 보험회사에서 보냈다. 30세 중반에서야 주목할 만한 시들을 처음 발표했고 불혹을 넘겨서야 첫 시집 『하모니엄』을 출간했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키웨스트에서의 질서의 개념」, 「항아리의 일화」, 「검은새를 보는 열세가지 방법」 등의 시가 잘 알려져 있다. 난해한 이미지와 메타포로 상상력과 실재와의 존재론적 긴장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스티븐스 시의 큰 특징을 이룬다. 시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로버트 프로스트와 다투고,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주먹다짐을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퓰리처상과 볼링겐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