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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세상을 품고 나가다_각양 은사대로 섬기기
그분(메시아)은 상처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틈에 앉아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상처의 붕대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싸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하나씩 풀었다가 다시 싸매시며 이렇게 혼잣말 하십니다. '어쩌면 내가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그 경우를 위해 나는 한시도 지체치 않도록 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169-170쪽)
* 이 예화는 유대교 사법조직인 산헤드린의 논문에 나온 것으로, 헨리 나우웬이 [상처입은 치유자] 제4장에서 인용한 것을 여기서도 인용한 것임. (박희택)
선지자들에 따르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고난 받는 종이며 상처 입은 치유자이시다(이사야서 제53장 참조). 그분의 자리는 가난한 자들 틈에 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상처는 물론 자기 자신의 상처도 돌보신다. 자기가 필요해질 순간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자들과 종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보살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준비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로 부름 받았다. (170쪽)
은사의 열매가 사역이다
예수님은 검증된 사역 기법들을 써서 무리를 고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마음에서 말씀하셨고, 긍휼로 행하셨으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셨다. 그분이 원하신 것은 딱 하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었다. (...)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며 하나님과 소통하셨다. 하나님과의 그 친밀한 관계에서 모든 사람에게로 능력이 뿜어나왔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내가 하는 일은 너희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것도 하리라(요한복음 14:12)"고 말씀하셨다. (...) "내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같이 너희도 병을 고치고 낫게 하도록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마가복음 16:15-18)."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력을 신뢰해야 한다. 내가 사랑받는 자로 살고 있고 사람들을 향한 긍휼이 내게 있다면, 당장 눈에 띄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신뢰해야 한다. (171-172쪽)
사역은 그냥 되는 것이다. (...) 그냥 일단 기도를 시작하고 성찬을 베푼다. 그리고 누가 오는지 본다. 나는 이혼을 생각 중인 사람의 부부관계를 고쳐주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여자를 설득하여 믿음을 갖게 하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여기 있음은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내게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다른 사람들 곁에 있어주기 위해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역으로 부름 받았다. 그것이 기독교 교회의 전체 개념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들 각자는 나누어야 할 특별한 은사들을 지닌 지체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의 공동체를 함께 부르셔서 세상에서 사역할 능력을 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내가 가면 내 영을 보내리리 내 영이 너희에게 능력을 입혀주실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나도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이다(요한복음 14-16장 참조)"고 하셨다. (172-173쪽)
그리스도의 몸의 사역은 결코 당신이 애써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당신을 많은 일들로 부르지만 말이다. 당신의 은사를 찾아서 당신에게 있는 것을 내놓을 때, 그 열매가 바로 사역이다. (...) 사역이란 당신이 낮에 몇 시간 동안 일하다가 밤에는 집에 가서 쉬는 그런 것이 아니다. (...)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고 있고,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알며, 섬김에 자신을 내어놓는다면, 당신은 사역 외에 다른 것은 하려야 할 수 없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이 곧 사역이다. (173쪽)
사역은 함께 유익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거나 병을 고쳐주시는 일을 혼자 하지 않으셨다. 사역이란 본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것이다. 사역은 나에게 뭔가 있어서 그것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피차 연약한 사람들끼리 베풀고 받으며 함께 유익을 누리는 것이다. 사역은 쌍방적이고 공동체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사역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174쪽)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그분의 오심을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9-10장 참조). 우리는 혼자서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다. 우리는 복음을 공동체로 함께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기를 좋아한다. 나 혼자 있으면 예수님께 참으로 충실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나는 거듭 깨닫곤 한다. 나에게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나와 함께 기도해주고, 당면한 영적 과제에 대해서 나와 함께 이야기하고, 몸과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키도록 내게 도전을 주어야 한다. (174쪽)
*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는 것(마가복음 6:7)은 붓다의 전도선언에 나오는 방식이기도 함. (박희택)
감사와 긍휼은 사역의 핵심이다
사역의 쌍방향성은 감사와 긍휼이라는 두 단어를 특징으로 한다. 신경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와 긍휼의 정신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함께 사역하는 것이다. 당신이 혹 소속할 공동체를 찾고 있다면 이 두 가지 특성을 잘 살피라. (175쪽)
감사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알아보고 받으며, 그들의 존재와 기여에 대하여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려는 열망이 있다. 주는 쪽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기쁨은 자기들도 우리에게 뭔가 줄 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나는 평생 장애인들을 돌볼 수 있고,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 큰 기쁨은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자기들의 특별한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175-176쪽)
사역이란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알아보고 받는 것이다. 나는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본다. 당신은 낯선 사람, 죄수, 헐벗은 사람, 굶주린 사람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는 그리스도다. 당신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나눌 특별한 선물들이 당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당신과 당신의 나눔을 통해서 나는 사랑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다. 그리고 당신도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삶의 가장 큰 유혹 중 하나는 원망을 품는 것이다. 원망은 감사의 반대다. (...) 사역은 우리가 원망에서 감사로 옮겨갈 때에 일어난다. 영적인 삶은 감사의 삶이다. 당신은 여태까지 당신의 삶에 있었던 모든 일, 좋은 일들만 아니라,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가? (176-177쪽)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자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원망을 점차 버리고, 고통의 한복판에도 감사할 축복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눈물의 한복판에서 기쁨의 춤이 느껴질 수 있다. 밑에서, 즉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때와 궂은 때, 슬픔과 기쁨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 즉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슬픔과 기쁨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고통이 있는 곳에 치유도 있다. 애통이 있는 곳에 춤이 있다. 가난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 사역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통이 있는 곳으로 간다. 우리가 마조히스트여서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고난 속에 하나님이 숨어 계시기 때문이다. (177쪽)
긍휼은 사역을 통한 섬김을 가능케 하는 두 번째 단어다. 긍휼이란 '함께 아파한다'는 뜻이다. (...) 긍휼은 단장(斷腸)의 마음인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우리가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거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있어주면 때로 그 결과로 고통과 아픔이 덜어질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가 곁에 있어주는 주된 이유는 아니다. 사역이란 병든 자, 죽어가는 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되 그들의 연약함과 우리의 무력함 속에서 용감하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풀 수 없고 그들의 의문에조차 답할 수 없다. (178-179쪽)
* '긍휼'은 '연민'의 뜻이며, '임마누엘'은 불교의 '불보살님의 가지호념'과 상통함. (박희택)
* '그것은 우리가 곁에 있어주는 주된 이유는 아니다'는 의미는 고통과 아픔이 덜어지는 것을 기대하기에 같이 있어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단순히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사역의 본령이라는 의미임(하단 문장들 참조). (박희택)
*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보이되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통의 한복판에 같이 있어줌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것이 사역의 신비다. (180쪽)
우리는 피차의 연약함과 쌍방적인 사역 속에서 감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감사와 긍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문제와 의문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줄 수는 있다. 거기서 기쁨도 얻게 될 줄로 믿으면서 단순히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즐겨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을 성공하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과 같이 너희도 긍휼이 여기라"고 하셨다. 이것은 위대한 소명이다. (179쪽)
순종적인 낮아짐과 자발적인 물러남
사역에서 긍휼과 감사는 순종적인 낮아짐과 자발적인 물러남이라는 쌍둥이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 둘이 함께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사역하는 우리의 소명에 계속 충실할 수 있다. (180쪽)
순종의 자세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신 예수님 /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올라가는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무수한 방식으로 알리고 있다. (...) 우리 문화는 '상향 이동'을 떠받든다. 안전한 출세 가도를 지키고, 현 상태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사업과 정치와 스포츠와 학문과 심지어 영적인 실천에 성공하라. (...) 어두운 세상의 커다란 유혹은 과연 미혹당하여 긍휼의 주체가 아니라, 관심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을 품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은 세상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낮아짐의 길이다. 그것은 줄의 맨 끝으로 가고, 무대 뒤에 남아 있고, 말석을 택하는 것이다! (180-181쪽)
* "맨 끝자리 앉으라"는 [누가복음] 14:10에 있고,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의 영성이기도 하였음. (박희택)
내 안의 모든 것은 올라가길 원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낮아짐은 내 성향과 주변 세상의 충고와 내가 속한 문화에 완전히 대치된다. 라르쉬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해지는 길을 택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선택에 대하여 칭찬받기를 원한다. (...)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그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오직 그분만이 온전히 가난해지고 겸손해지는 길을 자유로이 완전히 택하실 수 있다. 성육신의 위대한 신비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의 하나가 되셨고, 일단 우리 가운데 오시자 다시 사형선고를 받고 완전히 버림받는 자리로까지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여정의 중대한 고비들마다 예수님은 순종의 자세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셨다. (181-182쪽)
1세기 기독교에는 그리스도의 이 하향 길에 대하여 이미 부르던 찬송가가 있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삶의 사다리에서 아래쪽 방향을 권하고자 그것을 빌립보서에 담았다(빌립보서 2:5-8). 그는 이렇게 썼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 간결하면서도 아주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더없는 극빈의 자리로까지 점점 더 내려가는 길이다. 범죄자 신세가 되어 목숨을 빼앗기는 극빈의 자리로까지 말이다. 예수님의 내려가는 길에서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가 탄생하다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을 가슴속 깊이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예수님의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려는 열망이 당신 안에 점점 자라갈 수 있다. (182-183쪽)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신의 고통과 한계를 깨닫는 자발적인 물러남 / 우리는 사역의 하향 길로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그리고 비록 '원치 아니하는 곳(요한복음 21:18)'일지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으로 가도록 부름 받았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편한 곳을 떠나야 한다. 내 편안한 곳 바깥으로 가야 한다. 영적이 물러남이 요구된다. (...) 나 자신보다 큰 무엇이 나를 새로운 방향이나 존재상태로 이동시키면 물러나게 된다. 물러남이 진정한 훈련이 되려면 자발적이어야 한다. 자발적인 물러남은 우리가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의 그물에 갇히지 않게 해준다. 이것은 우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우리의 가장 큰 선물인 감사와 긍휼을 잃지 않는 데에 꼭 필요한 훈련이다. 자발적인 물러남은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환상을 벗겨주고, 더 깊은 영적 실체의 맛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 자신의 상처와 깨어진 모습,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에 눈뜨게 된다. (183쪽)
영적인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다. 직업을 소명 자체로 취급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평범하고 당연한 곳'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 토머스 머튼에게 물러남은 대학교를 떠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에게 물러남은 수도원을 떠나서 개혁가가 되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물러남은 안전한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가 나치의 포로가 되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게 물러남은 흑인의 '평범하고 당연한 자리'를 떠나서 민권운동을 이끄는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에게 물러남은 수녀원을 떠나서 캘커타의 '가나한 자들 중에 가장 가난한 자들'을 돌볼 기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장 바니에에게 물러남은 학계를 떠나 라르쉬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러남이란 대단할 것 없는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충실히 인내하는 것이다. 거창한 망상을 버리고 시장터에서 자신의 사역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유로운 사역을 위해서 자발적인 낮아짐의 행위로서 자신의 직업과 안전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184-185쪽)
물러남과 낮아짐이 맺은 긍휼의 열매
물러남과 낮아짐의 놀라운 역설은 거기서 공동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는 사회의 평범하고 당연한 자리를 떠나서 자신의 옷을 찢고 혼자 외딴 동굴에서 살았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몸만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깊은 상처까지 드러낸 것이다. 그의 물러남은 깨어진 존재라는 인간의 기본조건과 하나님 은혜의 필요성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서 그의 청빈한 삶에 동참했다. 곧 프란시스코 수도회가 탄생했다. (185쪽)
누군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물러나면 예언자적 공동체가 생겨날 때가 많다. 베네딕트, 프란시스코, 이나시오, 조지 폭스, 존 웨슬리, 테레사 수녀, 로저 형제의 예처럼 그들의 생전에 그렇게 될 때도 있다. 반면 샤를르 드 푸코, 디트리히 본회퍼, 토머스 머튼,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예처럼 그들이 죽은 후에 그렇게 될 때도 있다. 물러남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상처 입은 상태에 눈뜨게 되고 고난 받는 타인들과 함께 있어줄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공동체는 긍휼의 열매들이 가사화되는 첫 자리가 된다. (185-186쪽)
기도는 내 온전함과 '자아실현'의 가식을 허물어준다. 무릎 꿇고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라고 기도는 나를 부른다. 기도 중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도록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귀향길을 찾는다. 공동체 안에서 돌보고 돌봄을 받는다는 내 소명을 발견한다. (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