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색의 개천물이 금방이라도 수위를 넘을 듯 넘실거렸다. 봄부터 이상기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다. 재난정보를 알리는 메시지가 복잡한 머릿속을 더 헝클어 놓았다. 나는 세찬 비를 뚫고 필사적으로 운전을 했다. 들이붓는 빗줄기 때문에 와이퍼는 무용지물이었다. 젖은 도로가 흡수해버린 빛으로 라이트조차 제 몫을 하지 못했다. 아내를 찾아야 했다. 가랑비만 내려도 온몸을 떨며 싫어하던 여자였다. 비 오는 날이면 아예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던 아내가 집에 없다. 저녁을 먹은 빈 그릇들은 설거지가 되지 않은 채였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그동안 오가던 이웃과 아내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빗속에 가긴 어딜 갔겠어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든가 아니면 급히 필요한 게 있어 상가에 갔겠지요.
막 저녁상을 받던 참이었다. 아내의 머리가 고무줄로 질끈 묶여 있었다. 뭔가 불안할 때면 아내는 머리를 묶었다. 반찬이 놓인 접시들을 상에 놓으면서도 건성건성이었다. 아까부터 울리던 압력밥솥의 딸랑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누구집 밥 탄다며 농담조로 한마디 던졌더니 그때서야 가스레인지는 소화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자꾸만 텔레비전 화면 쪽을 힐끔거렸다. 채널마다 속보로 기상변화와 수해장면만 반복하고 있었다. 아내는 밥알을 세고 있었다. 반찬 쪽으로는 도통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젓가락을 잡은 손마디를 바르르 떨기도 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도 그저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비 때문이겠지. 내 아내는 비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몽골의 어느 승마체험 캠프장에서였다. 몽골여행을 결정한 데는 나름대로의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완성하지 못하는 인생의 중간보고서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그곳은 몽골 동부의 빈데르 마을로 올혼강이 흐르는 초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초원과 강, 그리고 습지와 고산지대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초원이었다. 지평선을 향해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푸릇한 광장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가 돌연 흥분시키기도 했다. 바람의 방향과 속도는 풀과 꽃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수종이 몇 되지 않는 산지는 유치원생이 그려놓은 그림처럼 엉성했다. 나무 아래 돋은 시금치 잎을 닮은 풀이 차라리 풍성했다. 우리는 올혼강을 따라 트래킹 코스를 잡았다. 돌산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옛사원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강을 따라가다 노천 온천을 발견했다. 물이 흐르는 강가의 자갈 틈에서 솟는 온천수를 티브이에서 본 것도 같았다. 온천이라기보다 동네 목욕탕 작은 욕조 하나를 옮겨 놓은 듯했다. 강변에 흔한 돌무더기 사이에서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자 전신이 나른해졌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노련한 스텝들은 짧은 시간에 캠프를 완성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관광객이며 스텝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노천온천을 즐겼다. 일상을 떠나 이국땅에서 만난 낯선 풍경과 움직임이 느린 수증기는 일행을 유혹했다. 유일하게 스텝 중의 한 여자만 온천에 입장하지 않았다.
비교적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승마체험장에서 사라체첵은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이도 국적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승마체험을 위해 날아온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가 동포임을 알게 되었다. 사라는 비교적 정확한 발음을 위해 애쓰는 빛이 역력했다. 승마체험을 하기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여행객들은 여자 가이드를 못미더워 했다. 하지만 곧 그들의 불신은 봄눈처럼 힘없이 사그라졌다. 여행객들의 미덥잖음이 쌓인 눈이라면 그녀의 한국어와 승마실력은 내리쬐는 봄 햇살이었다. 말 방귀 냄새를 한국의 김치냄새와 비교하는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온천욕을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일행들의 저녁식사를 준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작고 조용했다. 이미 노숙에 익숙한 듯 작은 동선만으로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모자를 벗어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노을빛에 염색될 것 같았다. 그녀가 서 있는 위치와 나의 시선과의 각도에 따라 여러 색깔을 보여주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거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강가 돌무더기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하수처럼 보이는 별들의 모둠이 흩뿌려져 있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맑은 밤하늘에 떠있던 달은 지상과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만유인력의 작용이 없다해도 서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 같은 거리감이었다. 우리 팀의 가이드 사라체첵도 달을 보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시선은 주지 않았다.
다음날은 초원지대를 지나게 되었다. 비교적 부드러운 풀이 자라고 온갖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야생화 연구를 위해 일 년에 서너 번은 다녀오는 지리산 노고단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빛나는 모국어로 그녀에게 꽃 이름을 물어보았다. 민들레를 닮은 노란 금불초, 바늘꽃, 엉겅퀴와 비슷한 절굿대꽃, 꿀풀처럼 생긴 꼬리풀, 그리고 솜다리. 솜다리는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녀는 가이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가 말한 꽃이름들은 이미 나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신비한 꽃이름들은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하나하나 새겨 들었다. 빈데르 마을 초원에 쌍무지개가 뜬 여행 마지막 날 나는 그녀에게 한국이름을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사라체첵은 몽골어로 달의 꽃 이라고.
나의 두 번째 몽골 여행 목적은 단순했다. 한국에 돌아와 달을 볼 때마다 사라가 생각났다. 꽃을 봐도 생각났다. 그러다 결국 달과 꽃을 동시에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게르라고 부르는 몽골식 숙소 안에서 나의 여행 목적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달은 숨어버렸고 꽃은 떨고 있었다. 달과 꽃을 동시에 보고 싶어서 왔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어를 내뱉었다. 게르가 살짝 흔들렸다. 원형의 천막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낯선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유목민들의 고유한 음악소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천막은 보기보다 견고했고 비는 생각보다 감각적이었다.
몇 달 뒤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재회했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 이명화는 입국객중 맨 끝으로 케이트를 통과했다. 피로가 묻어났지만 밝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몇 달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입국 게이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인맥을 동원했고 서류를 챙겼으며 여러 번 서명 날인을 해야 했다. 보험에 가입하고 본인확인절차를 거치는 사람처럼 예 라는 대답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절차들이 귀찮거나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사라체첵이 이명화로 내 곁에 서있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과정을 거친 우리는 액자 속에 담긴 결혼사진을 갖게 되었다. 현관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놓이게 되었다. 숟가락과 칫솔도 두 개씩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 그리고 사라체첵 이명화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명화는 한국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늘 긴 치마를 즐겨 입었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발목 어디쯤에서 뿌리가 자라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 들키지 않으려고 꽁꽁 감춰두고 있는 것이라고. 다른 여자들처럼 베란다에 흔한 화초 하나 키우지 않았다. 돌볼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명화는 물을 싫어했다. 씻는 것도 대충이었다. 몽골의 환경 탓이리라 생각했다. 건조한 땅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생존방식이겠거니 했다. 비는 더욱 그랬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예 활동을 멈춰버렸다. 베란다에서 꽃을 돌보는 대신 달을 보고는 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머리를 푼 뒷모습이 수염 틸란드시아 같았다. 치렁치렁 줄기를 늘어뜨리고 공중에 떠서 살아가는 뿌리 없는 식물이었다. 물을 주지 않아도 공기 중에 있는 수분과 양분으로 기생했다. 외래종이었지만 환경에 잘 적응하는 식물이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양을 보지 못한 음지식물은 퇴화된 헛물관을 품고 있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대신 그녀 자신이 꽃이었다. 달의 꽃.
집안 살림도 곧잘 했고 이웃들과 사이도 원만했다. 외출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뜸하게 국제결혼 이주여성들의 모임에도 참여했다. 외모나 언어 어느 것 하나 이주여성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토박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친구가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이주여성들끼리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상대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서로 정보공유를 할 수 있었다. 모임에 다녀오는 날이면 말수가 늘었다. 조용하던 그녀에게 어떤 정보들은 말 많은 날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도 종종 있었다.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면 그녀의 손에는 어김없이 고무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씻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샤워 후에는 원인 모를 발진이 일어났다. 모기에 물린 것 같은 붉은 두드러기가 생겼다. 금방 가라앉기는 했지만 따갑고 아픈 발진 때문에 불편해했다. 처음에는 환경변화에 적응하느라 물갈이를 하겠거니 생각했다. 사람이 어떤 것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흔한 일이니까. 피부과 의사는 드물게 수성 두드러기 환자가 있긴 하지만 명화의 경우는 다르다는 말 뿐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았다. 의사를 만나고 서적을 뒤지고 국회도서관까지 검색해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습기에 약한 사람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비에 관한 특이체질이나 알레르기에 관한 문헌은 없었다. 원인을 모르는 병엔 약도 없는 법이었다. 비만 내리면 머리를 묶어, 훤히 내보이는 이마에 그늘이 앉았다. 어떤 때는 당당했지만 또 어떤 때는 숙연했다. 대부분의 날들은 씩씩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아팠다. 앓고 나면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했다. 음식을 만들어 이웃에 나눠 주기도 했다. 결혼이주여성들의 모임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요란하지는 않았다. 명화의 나날은 그렇게 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명화는 말 방귀 냄새가 그립다고 했다. 밥상위의 김치를 집다가 내던져진 말 방귀 냄새라는 단어에 한방 얻어맞은 듯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명화가 내뱉은 단어의 의미를 재빨리 파악해야만 했다. 단지 말을 타고 싶다는 뜻인지, 떠나온 곳이 그립다는 뜻인지 판단해야 했다. 나는 영악했다. 문제를 더 쉽게 풀 수 있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해답을 툭 던졌다. 명화야, 너는 머리를 풀어 길게 늘어뜨렸을 때가 제일 예뻐. 명화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이 떠나온 곳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리워한다고 해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잖아. 제아무리 먼 곳에 옮겨 심어졌어도 뿌리를 내리고 무성하게 성장하는 나무들처럼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풀어헤치고 그렇게말야. 심각할 것 없잖아. 나에게 하는 자위의 독백은 명화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그날 밤 명화는 베란다에 나가 오래도록 달을 보았다.
나는 풀과 나무를 옮겨 심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나무와 관련된 직업을 가졌으니 나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씩은 전문가도 어쩌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뿌리부터 잎사귀까지 건강하던 나무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경우가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뿌리내림도 성장도 영 신통치 않다가 새로 터를 잡아 옮겨 심어주면 펄펄 살아나는 녀석들도 있었다. 오래 누워있는 환자의 병상에 새싹재배기를 놓아주면 치료의 예후가 좋아지기도 했다. 정서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토피어리 만들기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우울감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는 허브를 기르게 하면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 일이 좋았다. 관엽 화분이나 축하, 근조 화환 배달이 쉽게 돈 되는 일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어루만지며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식물 잎의 녹색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낙원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색일 것이라고 믿었다. 좁은 실내정원에서도, 물이끼를 입힌 동물모형에서도, 그냥 그릇에 담긴 물 위에서도 식물들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디에 심어지든 적당한 조건만 맞는다면 그것들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자극과 위안을 주었다. 풀과 꽃과 나무가 주는 안식으로 휘파람을 부르던 때였다. 그러나 사랑도 깊으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깊은 가슴앓이는 떠남으로 치유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떠나지 않았다면 명화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움도 본능이었다.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싶어지거나, 어떤 사람을 자꾸 떠올리거나.
내이름을 건 원예치료센터를 내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갈 무렵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신경외과 병동에 토피어리 강습을 나갔었다. 가벼운 강박관념이나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을 외래 진료 후 한 장소에 모아 강습하는 방식이었다. 환자들은 곰토피어리를 만들어 풍란을 심기도 했다. 때로는 백조 토피어리의 긴 목을 마삭줄의 덩굴이 감아 올라갈 때도 있었다. 토피어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바이올렛의 보랏빛 꽃을 피워내기도 했다. 병동에서는 늘 크레졸 냄새가 났다. 식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병원균을 없애기 위한 냄새가 식물들의 호흡을 방해할 것 같았다. 강습이 있는 날과 소독하는 날을 겹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환자들은 이미 익숙해진 냄새에 둔감해져 있었다.
강습실 창가에 누군가 화분을 갖다 놓았다. 식충식물 이었다. 끈끈이주걱에는 간호사들이 흘린 주사액처럼 점액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강렬한 색깔의 꽃이 피어 있는 네펜데스도 있었다. 색보다는 주머니꽃 속 꿀샘이 더 매혹적인 꽃이었다. 강습이 있던 날이었다. 재료를 준비하느라 일찍 도착한 나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관찰에 심취한 그녀는 오직 화분에만 시선이 쏠려 있었다. 문이 열리는 것도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먼저 알은척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있었다. 방해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양손에 든 짐도 내려놓지 못한 채 나도 그녀를 관찰했다. 그 묘한 표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음흉한 위장술 같기도 하고 서늘한 비웃음 같기도 했다.
일찍 왔네요, 재이씨. 내 목소리 톤은 의도적으로 높아졌다. 그녀에게 물 한 컵을 부탁했다. 정수기는 한층 내려가야 있었고 이번에도 역시 의도적이었다. 화분이 놓인 창가로 갔다. 배가 고픈 파리지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끈끈이주걱도 점액을 매단 채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꽃술에 달린 끈끈한 액체가 순간접착제처럼 대상과의 간격을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꽃 주머니를 달고 있는 네펜데스는 쉽사리 내면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길죽한 꽃주머니는 사냥을 위한 내밀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의 공간에는 꿀샘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방파리 두 마리가 있었다. 녀석들은 강한 소화액 속에 발을 담근 채 교미 중이었다.
가끔은 나도 꽃이나 나무가 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담담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건들어 주면 간지럼을 타거나 향기를 내 품는 식물처럼. 그리고 재이는 가끔씩 나를 건들여 주는 손길 같았다. 나는 부끄러워 간지럼을 타기도 했으며 조용하게 품고 있던 향기를 날리기도 했다. 재이의 손길이 강렬해질수록 나는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었다. 그녀의 꿀샘은 익을 대로 익어서 단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너무 뜨거워 녹아내렸다. 어떤 때는 형체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재이의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울증을 앓는 재이에게 울증의 상태가 찾아왔다. 그녀는 어떤 향기에도 감흥 했었고 어떤 소리에도 놀랐었다. 항상 먼저 행동하고 모든 현상에 기뻐했다. 웃음도 많았고 그만큼 눈물도 흔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반대였다. 펄펄 끓어 올라 기화될 것 같던 그녀는 차가운 얼음이 되었다. 사랑이 식었다거나 나를 위해 떠난다는 통속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재이의 표정없는 얼굴이 타고 남은 재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런 그녀를 어찌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옷 벗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간지럼을 타지 않았다. 사막에서 모래를 밟는 것처럼 내 안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아프면 마음부터 살피세요! 사무실 현관문에 써진 문구는 흐릿한 채 너울거렸다. 자동센서 장치가 현관 등을 밝혀 주었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에서 자꾸 빗방울이 떨어져 시야를 흐리게 했다. 명화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잎은 왜 물에 젖지 않을까? 비 내리는 날에는 나도 연잎이 되고 싶어. 폭우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명화가 연잎이라도 뒤집어쓰고 있었으면 싶었다. 그보다는 연구소에 있어주길 간절히 기원했다. 상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옥외 공간에 유리온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순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놀라 움찔했다. 통나무에 걸쳐놓은 틸란드시아를 명화로 착각할 뻔했다. 수염 틸란드시아가 어둠 속에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치마를 입은 명화의 뒷모습처럼. 불안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흙과 퇴비냄새, 나무와 꽃향기, 여러 종류의 냄새가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다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매일 드나드는 실내정원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상실감은 모든 것들을 낯설게 했다.
내가 가꾼 나무와 꽃과 풀과 이끼들까지 내게 등을 돌리는 것만 같았다. 명화를 숨겨놓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초원을 수놓은 야생화의 이름을 큰 비밀이나 되는 것마냥 내게 말해주던 명화가 없다. 누군가 내게 무슨 비밀이나 되는 것처럼 명화가 있는 곳을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딱히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허탈했다. 유리온실에 내리치는 빗줄기가 그대로 유리창을 뚫을 기세였다. 몽골의 게르안에서 사라체첸과 듣던 빗소리가 떠올랐다. 영혼을 깨우는 듯한 음악 같던 그 빗소리, 달의 꽃을 떨게 했던 그 소리. 상담실을 통해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송민준 원예치료센터 LED간판이 쉴 새 없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나는 두려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녀와 나란히 누워 자던 침대가 무서웠다. 네 개의 모서리조차 싫었다. 잔잔한 꽃무늬로 프린트된 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스위치를 내렸다. 차라리 어둠이 편했다. 인천공항에서 마중한 그날 이후 명화와 떨어져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어 들어올 것 같은 생각에 청각이 곤두섰다. 실종신고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날이 밝았다.
그래 처음부터 시작 하자,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이 가장 빠른 법이니까. 나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정성들여 그릇들을 닦고 행구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내 아내는 설거지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 다음엔 뭘 하지? 아, 티브이를 켜고 아침뉴스를 볼 것이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안일을 할 때도 티브이를 켜놓고 뉴스를 들었다. 화면을 보지 못해도 청각은 열어 놓고 일을 했다. 아내가 했던 것처럼 티브이를 켰다. 그 순간 번뜩이며 스치듯 기억이 떠올랐다. 어젯밤 뉴스였다. 밥상을 차리면서 온통 정신을 팔던 그 뉴스를 생각해낸 것이다.
프로그램 다시보기를 할 수 있는 티브이가 있었다. 다시보기를 이용해서 찬찬히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 그 안에서 아내를 움직이게 만든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타방송사보다 한 시간 빠른 뉴스를 전한다며 앵커는 주요 사건 사고 타이틀을 소개하고 있었다. 어느 정치인의 뇌물수수 혐의와 모기업 총수의 해외도피 문제는 이미 여러 날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상기온으로 기후변화가 심해 천정부지 뛰어오른 채소류 값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요동치던 날씨가 급기야 북한 동포들을 수재민으로 만들었다는 보도가 외신을 통하여 전해졌다고 했다. 깡마른 소년이 스티로폼 한 장을 붙들고 불어난 흙탕물 위에서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을 배경화면으로 쓰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아내를 폭우 속에 내몬 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것도 같았다. 휴대폰 번호를 알아둘걸 그랬어, 때늦은 후회를 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이주여성단체 사무실은 분주했다. 인근에 있는 세 개의 시군을 관할하고 있어서 늘 일이 많았다. 갖가지 타이틀을 단 교육프로그램에서 이주여성들을 위한 각종 행사까지 맡고 있었다. 그 중에서 명화와 관련이 있는 프로그램도 두어 개는 될 것이다. 상담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의 출입도 빈번했다. 한 여자가 사무실 직원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다른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서툰 한국어는 도무지 의사소통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검푸른 멍 자국이 찍혀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의식해서인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처벅처벅 걸어 들어갔다. 제법 부른 배가 걸음걸이를 어색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부른 배에 비해 여자의 앙상한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모질고 질긴 생명체가 여자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사무장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목례를 했다. 사무실 분위기상 큰 목소리로 인사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는 뜻인 듯했다. 그녀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와 마주했다. 단체 행사에 동참하느라 몇 번 본적이 있고 식사도 두어 번은 같이 한 사이라 허물없이 내게 물었다. 혼자 웬일이세요? 혼자라는 말이 우주 공간에 버려진 미아처럼 한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나는 대답과 질문이 동시에 내포된 말을 던졌다. 명화가 사라졌습니다. 내 말에 그녀도 어지간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비가 많이 와서 명화씨가 힘들겠구나 신경 쓰이던 참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진심보다는 실마리였다. 내게는 앞뒤를 재고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그녀는 아는 명화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단순한 부부싸움이 아닙니다. 아무 말 없이 어젯밤 그 빗속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말이든 좋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아내를 찾아야만 합니다. 사무장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내게는 희망의 변화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야 실마리를 줄 것이다. 하지만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규정상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든지 상담내용을 공개해서는 안 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머나먼 타국에 와서 살면서 아픔이 많은 분들입니다. 수치와 고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건 명화씨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그녀는 규정을 말하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사무장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결코 한 인간을 아프게 하는데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명화를 살리는데 쓰겠습니다. 나는 간절해졌고 사무장은 허물어졌다. 연변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이주여성단체 사무장이 지키지 못한 비밀은 대신 명화를 지켜줄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비밀의 문을 열었다. 연길 공항은 비교적 한산했다. 공항에서도 시내 어느 곳에서도 사용하는 문자 체계는 한글과 한자의 혼용이었다. 앞에 한글이 먼저 그 다음이 한자였다. 전혀 이질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간판과 안내 문구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불안을 덜어 주었다. 적어도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아직 명화의 국적은 중국이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2년이 지나야 한국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명화의 나라에서 내 나라 말로 그녀를 찾아 나섰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갑시다. 하면 그만이었다. 어느 정도 시내를 벗어나자 끝없는 콩밭이 펼쳐졌다. 가고가도 콩밭이었다. 명화가 보고 자랐을 푸른 평원이 바람에 너울대며 춤추고 있었다. 고단한 나에게 창밖의 콩밭 풍경은 어느 정도 위안이 돼 주었다.
택시 기사가 가리킨 곳은 마을 앞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주뼛주뼛 웃자란 것처럼 키 큰 미루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동네 어귀는 한국의 농촌마을 어귀와 다르지 않았다. 택시 기사는 작은 구멍가게 앞에 나를 내려놓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복색이 추레한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몇 가지 생필품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혹시 이명화를 아십니까? 뜬금없는 이방인의 느닷없는 질문에 주인 여자도 술 마시던 남자도 시선을 돌렸다. 주었던 시선을 거두며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죽은 년은 왜? 짧은 한마디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죽다니 내 아내 명화는 아닐 것이다. 그래 명화라는 이름은 워낙 이쪽에서는 흔한 이름이니까. 그러나 내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명화를 아십니까?
상점의 나무 의자는 불편했다. 널빤지를 이어 붙여 대충 만들어 좁고 딱딱했다. 그래도 나는 의자에 앉아 오래 버텨야 했다. 지폐 몇 장을 쥐어 주자 주인여자는 문을 걸어 잠갔다. 술과 안주도 주문했다. 그러나 술과 안주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오랜 노동으로 손가락 마디마다 딱지가 앉아 있었다. 남루한 행색과 예의 없는 남자의 태도에서 명화와의 어떤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남자였다.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나는 지폐 뭉치를 남자 앞에 내밀었다. 탁자 위에 놓인 거래조건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작은 눈이 더 가늘게 째지면서 돈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남자는 벌건 콧잔등을 때가 낀 손등으로 쓱 닦았다. 명화를 만나려거든 동네 뒷산으로 가보라이, 거기 묻혀 있구마는. 또 한 년, 그 계집아이는 몽골로 떠났제이. 몇 잔의 술이 더 비워지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았다. 두 명의 명화를 동시에 확인해야 했다. 내 아내와 그리고 또 다른 명화를.
명화가 처음 남자의 집에 오던 날은 비가 내렸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남자는 동네 뒷산에 동생을 묻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낮에 운명을 달리한 여동생을 밤에 묻어야 했다. 때마침 비까지 내려주니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폐결핵을 오래 앓던 동생 이름은 이명화였다. 그날 밤 강을 건너 온 여자 하나가 남자의 집으로 왔다. 그날 밤부터 강을 건너 온 여자는 이명화가 되었다. 명화는 비를 맞아 오들오들 떨면서 차에서 내렸다. 명화의 옷소매에서 면도칼이 떨어졌다. 두만강을 넘을 때 잡히면 쓸 생각으로 숨겨온 것이었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에서는 그때까지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명화를 데리고 온 브로커와 남자 사이에 거래가 오고갔다.
오랜 병치레를 하던 주인 탓인지 비 탓인지 방은 눅눅했다. 오늘부터 명화의 이불, 명화의 소지품, 명화의 신분증은 모두 강을 넘은 여자의 것이었다. 예전 방주인이 앓던 병까지도 거짓으로 앓아야 했다. 강을 넘은 여자는 비만 내리면 정말 아팠다. 머리를 한 갈래로 단단히 묶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눅눅한 방을 지켰다. 명화라는 이름이 귀에 익을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그저 건성이었다. 홍수에 뿌리째 뽑혀 떠내려 온 나무 같았다.
출생자와 사망자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였다. 서슬 퍼런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도강을 한 대신 망자의 이름 하나를 얻었다. 이름과 함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명화는 자유롭지 못했다. 남자의 여동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동생의 장례를 두 번 치르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생기 없이 말라가는 명화의 모습에서 동생의 그림자를 보았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남자는 결단을 내려주었다. 명화는 다시 한 번 국경을 넘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몽골이었다. 명화와 나의 접점을 찾은 것 같았다.
남자는 오를 대로 오른 취기로 눈동자가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잠깐 몸이 기울어지면서 중심을 잃을 뻔했다. 아직도 그년 비만 오면 앓아눕나? 강 건너 두고 온 아우 때문이지. 비로 불어난 물살에 누이를 먼저 보내고 강을 넘지 못했다지. 남자의 특유한 억양 때문인지 강원도 오지의 사투리를 듣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의 조부는 아니면 조부의 조부는 한국 땅 어느 산골이 고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왼쪽 다리를 끌며 걸어갔다. 균형을 잃은 걸음걸이 때문인지 구부정한 어깨도 수평을 잃고 흔들렸다. 남자의 발길은 뒷산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탑승할 때 들고 온 신문을 펼쳐 보다가 그만 접어버렸다. 옆 좌석에 앉은 사람과 보이지 않는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무가 듬성듬성했던 몽골의 고원을 떠올렸다. 남자의 여동생이 잠든 연변의 동네 뒷산을 생각하기도 했다. 운해가 흐르는 상공을 지날 때는 몽골의 올혼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명화가 건너야 했던 검고 거친 강물도 보였다. 강 건너편에 남아야 했던 소년을 생각했다. 소년은 아직도 스티로폼에 의지한 채 몸의 반쯤이 물에 잠겨 있을 것만 같았다. 살아 움직이는 형상이 되었다가 다시 앨범 속 흑백사진처럼 고요해지기도 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사람들은 소지품을 챙기느라 부산했다. 선반에서 짐을 꺼내드는데 낯익은 가방이 시선을 끌었다. 내가 명화에게 사준 체크무늬 가방이었다. 바로 뒷좌석에 명화가 앉아 있었다. 통로 쪽에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면서 떠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먼저 나온 나는 뒤따라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체크무늬 가방이 보였다. 긴 머리의 낯선 여자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발견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사무실로 향했다. 대낮이었지만 LED간판의 전원부터 올렸다. ‘송민준 원예치료센터’ 조명기구들이 쉴 새 없이 깜박였다. 시차를 둔 깜박임은 문자가 되어 움직였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굳건히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름이 있었다. 온실은 습기로 가득했다. 숨이 막혔다. 명화의 몸에 두드러기가 돋을 만큼의 습도였다.
명화가 사라진 날 밤 나를 놀라게 했던 수염 틸란드시아가 보였다. 세워 놓은 통나무 위에 걸쳐진 줄기는 무성하게 가지를 치며 머리카락처럼 거꾸로 자라고 있었다. 낮에 보는 틸란드시아 줄기는 제 색깔을 보여주었다. 밤에는 어둠의 색에 묻혀 검게 보였다. 하지만 낮에는 허옇게 센 수염 같았다. 허연 수염 같은 볼품없는 줄기는 땅에 뿌리내리지 못해도 어디서든 살아남았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금방 생기를 되찾아 땅을 향에 자라났다.
사람의 기억은 때로 그 사람을 아프게 한다. 물이 남긴 기억은 그것을 잊기 위해 도망칠수록 명화의 몸으로 반응했다. 기억 속에 내리는 비는 피할 수 없었다. 명화는 온몸에 붉은 두드러기 꽃을 피우며 달 아래 서있었고 나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밤이 와도 달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구름에 가려 달을 볼 수가 없었다. 명화는 달이 숨어버린 날이면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구름 저편에 숨어 있을 달그림자가 희미했다. 검은 구름은 이내 굵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빗줄기 사이로 걸어나갔다. 살갗에 소금꽃처럼 소름이 돋을 때까지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끝〉
|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빙하의 새’ 당선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당선 이후 소설 창작 ▲녹원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수상 ▲대표작 ‘돈황의 사랑’‘원숭이는 없다’ ‘협궤열차’‘가장 멀리 있는 나’‘새의 말을 듣다’ 등 다수. |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달의 꽃’ 과 ‘모자이크 알갱이들’ 두 편이었다.
‘모자이크 알갱이들’은 꼼꼼한 글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갈대밭과 갯벌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섬세하게 이용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솜씨가 눈길을 끌었다.
‘달의 꽃’은 상대적으로 느슨해 보였다. 몽골의 평원에서 잉태하여 한국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 자칫 산만해 보일 위험이 있었으나 작가는 원예치료센터라는, 일견 낯선 소재로 그 위험을 비껴갔다. 낯설고 물 선 땅에 온 아내는 유독 물을 싫어하는 특성을 보이며 이 땅에서의 삶을 힘겨워한다. 비단 이주여성에게 뿐이겠는가, 결혼이란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니 누구나 뿌리 째 옮겨심긴 나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처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남편이 식물을 가꾸고 돌보듯 물을 기피하는 이주여성인 아내를 보살피는 그 애틋함이 심사위원들을 움직였다.
식물들의 특성을 고루 열거하며 아내의 상태와 병치시켜 나가는 서술 방식도 읽는 재미를 주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이견 없이 ‘달의 꽃’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썩 높은 편이라 할 수는 없는 작품이나 소설의 공간 안에 인물들이 체온을 얻어 살아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이점은 다른 응모자들이 유념해야할 사항 중 하나이다. 재판정, 5.18의 광주, 집수리, 환상소설 등등 본심 대상작 15편은 저마다 특색 있는 주제를 선택하고 있으나 대체로 인물들이 지나치게 작가의 손 안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움직이는 인물들은 소설을 갑갑하게 만들며 소설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작가가 소설 전체를 장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인물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일은 보다 필수적이다.
잦은 줄 바꾸기와 대화의 연속, 접속사의 남용, 등 최근 인기를 끄는 서술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변칙은 때로 즐거움을 주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획득하지 않으면 가볍게 보일 수밖에 없다. 문장 하나, 글자 하나의 선택에도 신중을 기하는, 촌스러운 글쓰기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아울러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성찰이 있어야한다는 사실도 병기하고 싶다. 당선의 영예를 안는 것, 작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나 그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좋은 소설은 결코 쓰여 지지 않는다. 내게 소설은 무엇인가, 다른 이들에게 내 소설은 또 무엇인가, 미련하게 고민하고 고민하기를 바란다. 결국 문제는 울림이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좋은 작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또한 탈락한 이들에게는 낙담하고 꿈을 접는 일이 없기를, 재능을 의심하며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재능이란, 쓰고 쓰고 다시 쓰며 계속 쓰는 그 작업을 일컫는 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
▲경상북도 영천 출생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 1994년 소설 ‘그림자 외출’ 등단 ▲제10회 한무숙문학상 제2회 백신애문학상 등 수상 ▲대표작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라벤더 향기’ ‘비밀’, 장편소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등 다수 ▲경희대 국문과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