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 후원 돌아보기
◇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
- 친정을 하기 전의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10년간 거주한 궁궐
건청궁은 경복궁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은 건청궁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에 거처하던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인 폭도(暴徒)들에 의해 시해된 사건이다. 250칸의 이 궁은 고종이 흥선대원군 집권기인 1873년에 양반가옥을 본 따서 지어 임금의 거처 공간으로 건립하여 1885년의 을미사변 때에도 명성황후 민씨와 머물렀다. 이어서 아관파천(1896년) 때까지 정사를 보던 곳이다.
건청궁 일원은 크게 5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고종이 신하들이나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장안당, 왕비의 곤녕합, 어진과 서책을 보관하는 관문각, 복수당(福綏堂), 외행각이다. 건청궁 일곽의 남쪽 행각(行閣)의 문을 통해 들어오면 첫 번째 마당이 있고, 서쪽으로 초양문(初陽門)을 지나면 장안당 영역이고, 북쪽으로 함광문(含光門)을 지나면 곤녕합 영역이다.
곤녕합은 장안당 동쪽에 깊숙이 조성되었다. 동쪽에 옥호루·사시향루(四時香樓)가 있고, 후면으로 정시합(正始閤)이라고 이름 붙은 침방 4칸이 조성되어 있다. 옥호루 서쪽으로는 전면 퇴(退)를 가진 방이 2칸, 대청이 2칸 연이어 있고, 그 서쪽으로는 서행각과 결합하여 방이 조성되었다. 사방으로 행각이 있어 남행각에 함광문, 동행각에 청휘문(淸輝門)이 있다. 곤녕합의 후면 마당에는 서쪽으로 장안당 뒤쪽 마당으로 연결되는 일각문이 있다. 북쪽으로는 복수당이 있었다.
건청궁 내의 옥호루에서 1895년에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사건이 발생한 이 전각은 본래 기능을 상실하자 1909년에 일제가 철거하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세웠다. 광복 후에 건천궁은 문화재청에 의해 철거된 지 100여년 만인 2006년에 복원했으나 하루 3차례에 한해 관람객에게 공개되었다가 2009년 1월 24일에 전면 개방되었다.
옥호(玉壺)를 직역하면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인데 옥호빙(玉壺氷)의 줄임말로서 ‘옥병 안의 얼음’이라는 의미이며, ‘아주 깨끗한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옥호루(玉壺樓)는 옥곤루(玉壼樓)를 잘못 표기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을미사변의 개요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 민씨 일파의 친러 정책을 시기하고 있었던 일본 정부는 1895년 9월(陽)에 이노우에 공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三浦梧樓)를 신임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시켰다.
미우라는 자기의 심복이며 대리 공사까지 지낸 바 있는 미시무라(杉村濬)와 함께 조선의 훈련대 해산으로 빚어질 시국의 동향에 관한 분석 및 명성황후 민씨 제거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상세한 계획(일명 ‘여우사냥’)을 짰다. 그들은 명성황후 민씨에 대한 보복 일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흥선대원군도 음모에 참여시키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정치 무뢰배 오까모토(岡本柳之助)를 공덕리 대원군 별장, 아소당에 보내어 제휴하도록 교섭한 결과 가담키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조선 군부 내의 전 협판(前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필두로 해산을 앞둔 훈련대의 간부 우범선(禹範善, 제1대대장), 이두황(李頭璜, 제2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제3대대장)들까지도 주구(走狗)로 끌어들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8월 20일(양 10월 8일) 새벽에 일본 보병 수비대와 훈련대 장병 및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운 채 경복궁에 침입하였다. 뒤늦게 변을 알고 달려온 궁중 수비대장 홍계훈(洪啓薰)은 군부대신 안경수(安坰壽)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侍衛隊) 병력을 이끌고, 경복궁 침입을 제지하려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과 10여 분 만에 홍계훈은 전사하고, 어느 틈에 안경수도 사라지니 시위대 군인들은 사산도주(四散逃走)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일본 수비대 군인의 호위를 받은 폭도(暴徒)들은 근정전을 끼고 경회루 동편을 지나 북쪽으로 전진하여 국왕의 편전(便殿)인 건청궁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미국인 군사교관(軍事敎官) 다이(W.Mc.Dye)가 지휘하는 시위대와 다시 한 번 충돌하게 되었으나 이 시위대 군인도 불과 20여 분 만에 패주하였다. 폭도들은 결국 건청궁으로 들어가 국왕과 왕비의 침전인 곤녕전(坤寧殿)과 옥호루(玉壺樓)를 짓밟아 국왕과 왕세자를 끌어내어 위협하고, 이를 저지하려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 밀실(密室)을 샅샅이 뒤지고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면서 명성황후 민씨의 소재를 심문하였다. 폭도들의 길 안내역을 맡고 있던 오까모토는 그의 손을 뿌리친 채 복도를 향하여 쫓아가면서 비명을 지르는 명성황후 민씨를 칼로 허리를 난도질하여 시해(弑害)하였다.
폭도들은 처음에 명성황후 민씨 시신을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내어 비단 이불에 싸서 송판에 옮겨 경복궁 후원 녹원(鹿園) 숲속으로 옮겨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운 뒤에 그 재를 향원지 연못에 버렸다.
이것이 일본 침략주의자의 터무니없는 보복 대상으로 삼은 명성황후 민씨의 시해 사건인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 태원전(太元殿)
- 역대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
경복궁 서북쪽에 깊숙이 자리 잡은 태원전은 고종 5년(1868)에 건립되었다. 이 전각은 태조 이성계와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셨고, 신정왕후(조대비)·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 쓰였다가 후에 각국 공사의 접견실로도 사용되었다. 빈전은 빈소(殯所)의 높임말로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던 곳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후 고종은 복위의 조서(詔書)를 내려 명성황후 민씨의 빈전을 이곳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홍릉(洪陵)에 모셨다.
이 전각은 일제강점기인 1910~1920년에 훼손 · 철거된 것을 광복 후 2005년 말에 복원하였다.
함화당 · 집경당은 고종 27년(1890)에 후궁과 궁녀들을 위해 건립된 건물이다. 한때 고종의 정사(政事), 경연(經筵), 외국공사의 접견 등의 장소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주변의 행각(行閣)을 철거하고,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이 일대는 1980년 12.12 이후부터 수도경비사단 소속의 30경비단의 본부로 사용하다가 이전하자 2008년 1월 24일부터 일반에 개방되었다. 문화재청은 2008년 12월에 기존건물의 보수와 주변 행각(行閣) 복원을 완료하였다.
◇ 향원정(香遠亭)
- 경복궁 후원 연못 향원지의 누각(樓閣) (보물 제1761호)
조선말에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고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향원정은 6각형 평면의 정자로 목조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향원정’의 현판 글씨는 고종이 직접 썼다. 20세기 초반까지는 흰 바탕에 짙은 글씨였으나 어느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향원정의 명칭은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라는 구절을 따서 지은 것이다.
향원정의 시초는 1459년(세조 5)에 세운 취로정(翠露亭)이다. 조선 초에 세조(1455~1468)는 경복궁 후원에 백성들이 농사짓는 수고와 고달픔을 알기 위해 후원에 논 2~3이랑을 개간해서 농사의 길흉을 가늠해 보기 위해 연못을 파고, 취로정을 세웠다.
향원정은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으로,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 ·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공포는 내외일출목(內外一出目)이며, 일출목의 행공첨차에 소로[小累]를 두었고, 외목도리(外目道里) 밑에 장설(長舌)을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에 별다른 장식은 없다.
향원정은 해체 및 복원과정에서 1881년과 84년 벌채된 목재가 확인되면서 향원정의 조성시기를 1885년 무렵으로 추정됐다. 또 정자 안을 따뜻하게 데웠을 온돌시설의 전모도 파악했다.
향원정을 건너는 다리인 취향교(醉香橋)는 6.25전쟁 때 훼손되었던 것을 1953년에 복원했다. 이 당시 관람객들의 편의 등을 이유로 처음 설치했던 자리가 아닌 향원정 남쪽에 세웠는데 다리 모습도 조선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이리하여 잘못된 향원정과 취향교를 바로잡기 위해 2018년에 공사를 벌여 3년 만인 2021년 11월에 복원되었다.
향원정이 세워진 향원지(香遠池) 연못은 1887년 3월 6일, 아시아에서 최초로 전등을 건청궁에 시설했을 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배수시설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러나 향원지의 수온이 올라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때 전등을 설치한 회사는 에디슨의 전기회사였다.
당시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는 안상궁(1936년)의 회고담이 재미있다.
“건청궁 앞 연못(향원정)에 설치된 쇳덩이(기계)를 서양인이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끓는 소리와 우레와 같은 굉음이 났다. 얼마 뒤 궁전 내의 가지 모양의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건달불(乾達火)’이라고 얄려진 건청궁 내의 발전 설비는 16촉광의 전구 750개를 켤 수 있는 시설이었다.
또한 향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케이트장이었다.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이웃나라들》에 따르면, 1894년 겨울에, 서양 선교사들이 얼어붙은 향원지 연못에서 피겨 스케이팅 시연회인 ‘빙족희(氷足戱)’를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 앞에서 열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 고종은 선교사들이 미끄러질 때마다 엄청 웃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명성황후 민씨는 이성끼리 서로 손을 잡았다 놨다 하는 것을 못 마땅해했으나 얼음판 위에 놓인 의자를 훌쩍 뛰어넘는 곡예를 부릴 때는 어린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전한다. 이후에도 몇 번 더 향원지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으며, 1895년 1월에는 아예 두 차례에 걸쳐 스케이트 파티를 열었는데 서울에 살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모였다.
향원지는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건청궁 옆 녹산(鹿山)에서 태운 뒤 남은 재를 버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 경복궁 열상진원 (洌上眞源)
- 향원지의 연못물을 채우는 샘물
북악산의 지하수가 이 곳에서 솟아나 향원지(香遠池)의 물을 채운다. 샘물 주변을 덮는 돌과 뚜껑은 화강석이다. 이 샘물은 조선초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으나 뚜껑은 조선말의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들었다.
‘열상진원’은 「한강(洌上)의 진짜(眞) 근원(源)」이란 뜻이다. 열수(洌水)는 한강의 다른 말이며 ‘열상’은 ‘열수’로, 즉 ‘서울’을 의미한다. 편의상 열상을 열수와 같은 뜻으로 쓴 듯 하다.
비록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이지만, 왕궁에서 발원한 물이 한강으로 흐르기에 상징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샘물은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지로 들어가게 했고, 특히 연못과 만나는 부분은, 동그란 홈에 물이 고이게 하여 향원지의 수위보다 아래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했다. 이는 한 번에 물이 내려올 때 생길 수 있는 연못의 파동을 최대한 줄여 향원지의 물을 잔잔하게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샘물을 이렇게 설계한 것은 연못의 물고기가 놀라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설과 연못에 비친 향원정과 여러 꽃, 나무의 그림자들을 흔들림 없이 보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