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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반세기만에 이뤄진 선교의 꿈
청석 김의식 장로
아브라함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땅을 떠나 미지의 땅가나안으로 떠난 것처럼 저희 부부가 아브라함이 떠난 나이에 캄보디아에 시니어 자비량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1. 선교지 캄보디아 개황
캄보디아(The Royal Kingdom of Cambodia)는 면적은 18만 1035㎢,(남한의 1.8배), 전 국토의 30%가 산악, 15%가 호수이다.
기후는 열대 몬순 기후, 우기(5월 중 - 11월 중), 건기 (11월 중 - 5월 중)이며 인구는 1500만명 (수도 프놈펜: 150만)에 달한다. 1인당 국민소득(2016 세계은행자료 181위/1,140불)
공용어는 크메르어이고, 종족은 크메르족(90%)·중국인(5%)·기타(5%)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교는 국민의 95%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1863년 프랑스 보호령 1953년 독립하였으며 1975년-1978년 크메르루즈(Khmer Rouge) 공산정권의 집권으로 20세기 국가에 의해 저지러진 최악의 끔직한 학살사건이 일어 났던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나라다.
가난하고 피폐한 이 나라는 총인구중 70%이상이 25세 미만으로, 젊은 기술진과 고등인력의 수요가 늘면서 전역에 학교가 세워지고 있다.
불교인이 인구의 95% 이상이며, 이슬람교인은 2%, 기독교인은 2% 미만, 기타 힌두교인, 유대교인 등이 1%다.
2. 노부부 교육선교의 첫걸음- 시하누크빌 라이프 대학교
(시하누크빌-제2의 도시)라이프대학(Life University)에 교육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캄보디아 캄퐁숌(시하누크빌-제2의 도시)라이프대학(Life University)을 알게 된 것은 구견회 총장의 “불교국가 유일 기독종합大… 한국 기도·후원 절실” 이라는 기사에서 였다.
“라이프대학은 캄보디아 선교의 백년대계를 내다보고 설립된 유일한 기독교 종합대학교입니다. 이 땅에 기독 법조인과 경영인, 정치인과 간호사,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선 한국교회의 기도와 후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라는 기사에서 나는 캄보디아 라이프대학 구견회총장님을 처음 알았다.
그는 한국 독립교단 소속으로 싱가포르 파이스턴 바이블칼리지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캄보디아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분이었다.
캄보디아 선교 100년을 위해 유치원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2000년 유치원을 시작으로 2003년 초등학교, 2005년 중·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이들이 훗 날 이 땅의 복음화의 주역이 될 것을 기도하며 캄보디아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
라이프대학은 2006년 캄보디아 최남단 항구도시인 시하누크빌에서 4년제 종합대학으로 설립되었다. 유치원에서부터 초, 중, 고, 국제학교 까지 학생, 교수 , 직원에 이르기 까지 3,000명이 넘는 대 가족의 학교이다. 대학만 해도 현재 5개 단과대학에 신학과, 한국어과, 컴퓨터학과, 간호학과 등 11개 학과가 설치돼 있다.
매주 채플, 학생상담을 위한 Parenting(양육프로그램)등의 예배와 성경공부를 통해 졸업시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고 있으며 비록 개종이 안된다고 하여도 재학기간동안 기독교 문화를 접하게 되어 졸업후 이들이 이사회에 끼칠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더더욱 일부 사립대는 재정적 지원하에 이슬람 포교를 적극 나서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같은 동남아 국가인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이슬람국교화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진다.
킬링필드를 통해 대부분의 지식층을 학살했지만 새로운 정부에 의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교육 장려정책으로 제2의 교육 혁명기를 맞고 있다. 또 임기 안에 반드시 나라의 가난을 물리치겠다고 선언한 훈센 총리의 의지와 기간 산업 확충으로 매년 7%대의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발전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관광자원의 수입감소와 봉제산업등의 사업악화로 경제성장률의 저하가 예상되면서 사립학교 학생들의 등록금부담으로 인한 학교의 신입생모집과 등록률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3.반세기 전부 터 하나님은 어떻게 선교사로 인도하셨나?
나는 대대로 불교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어머니의 돈독한 불심따라 절기때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수시로 절에 가서 공양을 드리곤 했다.
초등학교시절 교사가 되겠다는 꿈의 일념으로 초등학교에서 극히 소수의 인원만이 입학할 수 있는 사범병설중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중졸로 학업을 마쳐야만 했다. 청소년 가장이 되어 홀 어머니와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낮에는 먼산에 나무길로 ,밤에는 밤이 이슥하도록 새끼꼬아 가마니 짜기 등으로 3년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 친척의 권유로 진학에 대한 줄기찬 설득에 의하여 동기들보다 3년이나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주말에는 절에 가서 “마하반야바라밀다“ 심경등 불경강좌에 심취한 때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에는 발 한번 들여 놓지 않은 상태이다. 불교 신자가 교회가는 자체가 위로부터 강한 벌이 내려 지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에서 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전도로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조이(JOY)선교회에서 주님을 만난 후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을 깨닫고 죄에서 자유함 받은 구원의 감격 때문이었다, 결혼도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던 중 선교를 위해 영어를 잘하는 배우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후 학교생활도,군대도, 직장도....,어디를 가든지 내가 있는 그곳이 바로 선교지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군생활중 휴가 때에는 쪽 복음을 가지고 교도소, 산간벽지 등에서 복음을 전하는 어느 은퇴 장로님을 만나 함께 전도하기도 했다. 대학생활중에는 제자훈련, 상담훈련, 캠퍼스 전도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때부터 나를 선교에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직장에서는 신우회 회장도 하게 하시고 교회에서는 교회학교와 선교부에서 섬길 기회를 주셨다.
금융기관 재직중에도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경영학박사 학위를 갖게 되어
은퇴후에도 이곳에 오기까지 15년이상을 줄곧 대학강의를 할 수 있었다.
한창 공부 할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늦깎이 공부를 한터에 공부에 한(限)이 되어 나이와는 상관없이 사이버대, 방통대 등 지속적인 학습을 한 것이 노년의 나를 선교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낼수 있었던 것에도 한몫을 하게 되었다.
선교단체에서 만난 아내는 7남매의 맏딸로 생후 2개월 때 부모님을 따라 남하하여 어려운 형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종합출판사 등에서 아르바이트와
미 2사단등에서 찬양봉사를 하면서 산 영어를 접하게 되었다.
이어 한국 외국어대 영어과에서 영어연극 주연도 하고 졸업후 한국 기독선명회에서 8년동안 통, 번역부 일을 하면서 합창단과 장기 해외순방등 외국인과 생활전선에서 영어를 연마하게 되었다. 이후 설교통역봉사, 영어학원경영등을 하면서 줄곧 하나님께서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해 왔다.
사실 선교사는 젊은 나이에 파송받아 현지어를 익히는 데 현장에서 철수 할 나이인 70대 중반 노부부가 선교지로 나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을 것이다. 이제 100세 시대가 목전에 다달았고 선교의 패러다임이 많이 바뀐 환경에서 은퇴후 선교지로 나가는 시니어 선교의 중요성에 도전 받았다.
나이 때문에 주저 한다면 그동안 자나 깨나 기도하고 열망해 온 반세기 동안의 세월들이 헛될 것임을 생각할 때 다소 조급한 마음 까지 들었다.
특히 장로 은퇴후 3년전부터는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교육부와 선교부를 섬겨 오면서 교육선교에 대한 전체의 틀을 이해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게 하였다. 선교지 선택을 위해 아프리카, 러시아 ,필리핀등 기도해 오던중 작년 하반기에 저희 부부가 함께 선교하기에 최적지라고 생각되는 라이프 대학교에 (사)외항선교회와 (사)시니어 선교한국에서 자비량선교사로 파송받아 오게 되었다.
이곳 선교지에 와서 채 짐을 풀기도 전 입학식에서 교수임명장을 받게 해주셨다. 꿈인지, 생시인지 설레는 마음을 뒤로 하고 대학시절 주님을 만난후 뜨거운 첫 사랑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은 채 우여곡절 속에서도 50년만의 꿈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선교의 비전을 주시어 보내셨으니 이제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오직 그분만의 뜻에 의하여 살든지 ,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사 43:4,-7 새번역)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4.선교지에서의 반년을 보내고(기도편지)
작년 9월말 사전답사 한번없이 이곳 캄보디아 시하누쿠빌 라이프대학에 온지 꼭 반년이 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70세 중반에 건강도, 경제적인 여건도 , 강단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한 저희들에게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을지, 아내는 7남매의 맏딸로서 95세의 어머니를 두고 함께 온다는 것이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신 그분의 능력만을 믿고 소명따라 순종하는 길밖에 없어 갑작스레 보따리를 쌋습니다. 일년내내 여름이라 여름옷 약간씩만 가지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사 43:4,-7 새번역)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반년동안 나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아내는 영어과목 가르침을 잘 마쳤습니다. 학과별 채플시간과 Parenting시간도 함께 인도했습니다. 이 선교사는 나의 강의시간에, 나는 이 선교사의 강의 시간에 들어가 서로의 역량을 보완해 주는 튜터로서 상호 협력함으로서 영어강의의 어려운 부분들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2월말 학기말 방학을 맞이하여 고국을 방문하려 하였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새학기를 맞아 3과목을 온라인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대체 방학에 들어갔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가르칠 교과목과 학생들을 주신 걸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편16-6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ㅡ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이곳 선교지로 보내셔서 이곳 캄보디아인을 ,학생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들을 섬길수 있음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고온다습인 기후적응과 개미, 모기등 벌레 속에서도 아내에게는 골다공증과 무릎관절을 나에게는 급격한 체중감소와 평소 염려 되었던 심장질환으로부터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께서 반년을 지켜 주셨습니다.
고온다습인 기후적응과 개미, 모기등 벌레 속에서도 아내에게는 골다공증과 무릎관절을 나에게는 급격한 체중감소와 평소 염려 되었던 심장질환으로부터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께서 반년을 지켜 주셨습니다.
이곳에서 한시라도 놓치지 않고 기도하는 제목은 라이프 동산의 믿지 않는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시하누크빌 지역교회의 부흥과 교회지도자들이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고,
자비량으로 헌신할 수 있는 많은 교수요원, 직원들을 보내 주시고 필요한 학교재정(시설확충,장학금등)들이 충족될 수 있도록과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끝으로 저희 부부가 건강한 몸으로 성령충만하여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이곳에서도 하루 속히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어 새학년 신입생모집과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가 늘 함께 하시고 건강에 유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ㅡ김의식,이순희 선교사올림ㅡ
* 킬링필드 (Killing field)
'론놀'의 우익정권이 1970년 노로돔 시아누크의 외유 중 쿠테타를
일으켜 1972년 대통령이 된 이후, 게릴라전을 통해 캄보디아
전 영토를 장악해 1975년 정권 장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가 4년간(1975-1979)의
통치기간 동안 저지른 극도의 비인간적 야만과 살상. 인구 700만
중 약 200만이 죽음. 이때 의료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거의
학살시켰으며 일부 지식인들은 해외 도피할 수 밖에 없는 상황.
50명의 의사들이 살아 남았고 경제, 교육, 보건의료 등
모든 영역이 황폐화되었음.
킬링필드라는 장소는 무수한 양민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의 학살의 장소 로 150 - 200명 단위로 집단학살 매장한 곳. 현재 발굴된 희생자의
두개골로 5층 기념탑을 만들어 위로하고 있다. 아직도 미 발굴된 집단 무덤이 곳곳에 산재 되어 있다함
첫댓글 김장로님, 여러가지로 어려운 가운데 선교사로 가셔서 혼신을 다하시는 모습을 보며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같이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