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 김동출 수필
“비설거지와 수수 범벅”
아침부터 재난 주관방송사인 KBS-1TV는 <제19호 태풍 ‘솔릭’>으로 서해안 지역 큰 피해!>라는 큼직한 ‘제목’을 화면에 띄우고 재난 대비 생방송을 시작한다. 방송을 책임진 앵커는 본격적인 재난 방송 시작에 앞서 이 시각 현재 ‘재난 당국’이 파악한 제19호 태풍 '솔릭'의 피해 현황을 보여 준다.
태풍 '솔릭'의 직접 영향권에 든 제주 지역에서 실종·부상자가 발생하고 수천 가구가 정전되는가 하면 방파제가 유실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제주 등 전국 9개 공항에서 347편의 항공편이 결항했고 인천 지역 등 전국 곳곳의 바닷길도 막힌 상태다. 자연환경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법은 제각기 다르지만,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다. 피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해의 참상은 하나같이 비참하고 참담했다.
태풍 재난 방송에 몰입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긴장되었던 마음이 풀리자 TV 화면에서 눈을 떼고 커피를 들고 서항(西港)이 보이는 창가로 다가섰다. 마창대교와 <신마산 시가지>가 빤히 보인다. 마산 제2부도 물양장 인근에는 친수 시설 공사의 흔적과 아직도 사업 주체를 찾지 못해 방치된 인공섬을 바라보다, 불현듯 2003년 9월 12일 <제14호 태풍 매미> 때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해 질 녘에 예고 없이 닥친 해일(海溢)이 시가지를 덮쳐 거뭇한 바닷물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생생한 모습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며 경악했던 그 일이 재난 영화의 한 장면같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지하 주차장을 채우고 지상 주차장도 물바다가 되었다. 정전되어 해가 지니 사방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고층아파트 엘리베이터도 멈춰 섰다. 지상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는 물이 차 설비가 합선되면서 마치 불꽃놀이 하듯 번쩍거리고 일제히 요란한 경보음을 내는 광경을 연출하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 가족에게 닥쳐올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꼭대기 층에 살았던 話者의 부부는 그 시간 이후부터 단수 단전이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두 달 넘게 날마다 18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고생을 수없이 했지만, 정작 주민들의 고통은 산 자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 이날의 ‘해일’로 우리 이웃에서 18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순식간에 희생된 큰 아픔을 남겼다.
요즘에는 TV 방송이 새 소식을 알려 주는 중심 매체가 되어 TV로 태풍 소식을 보고 듣는 세상이 되었지만, 話者가 초·중학교에 다녔던 1960~70대 그 시절에는 태풍이 오면 직접 체험하거나 선생님한테서 들어서 알게 되었다. 나라 안팎 소식은 소년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어 알게 되었다. 60~70년대 그 시절에는 TV는커녕 라디오도 귀했던 시절이었다. 대개의 시골 마을에서는 이장님 댁에 라디오방송 수신 장비를 갖추어 놓고, 가정마다 스피커를 연결하여 라디오방송을 들려주거나 긴급한 소식은 동네 한가운데 정자나무에 매달아 놓은 혼 스피커로 알려 주었다.
<아, 아, 아. ◌◌동민 여러분! 내일 새벽부터 우리나라 전역에 ◌◌호 태풍 ‘솔 매’가 닥친다고 하니, 각 가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여 가옥과 농작물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주변을 단디(똑바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흠~~~>. 이렇게 태풍이나 큰비가 올 징조로 샛바람이 살살 불기 시작하고, 비 실은 시꺼먼 구름이 동쪽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면 우리 할아버지는 가족에게 빨리 비설거지를 마치라고 재빨리 이르신다.
우리는 멍석에 널어놓았던 나락을 가마니에 퍼 담아 축담 위에 올려놓고 비료 포대를 씌어 젖지 않게 해놓고, 멍석은 말아서 집 뒤쪽 추녀 아래 덕석 보관 시렁에 차례로 얹어 놓는다. 어머니는 장마 중에 밥을 지을 수 있도록 땔감을 준비하도록 저한테 특명을 내린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손도끼 질 솜씨가 어른 못잖게 실팍짐을 알기 때문이다.
다람쥐처럼 몸을 날려 낫을 찾아 들고, 뒤란 감나무 아래 높다랗게 재어놓은 나무 낟가리에서 청솔가지를 넉넉하게 빼내서 곰삭은 가지를 참나무 받침목에 번갈아 얹어가며 손도끼로 한 자 길이로 잘라 가지런히 재어 모은다. 이렇게 자른 청솔가지를 단을 재어 부엌 뒤에 땔감으로 쌓아 놓는다. 그 후 뒷마당 두엄 밭에 매어 놓은 암소를 마구간으로 옮겨 매고 할아버지가 베어다 놓은 꼴 단을 한 아름 안아다 여물통에 넣어 주고 뒤란의 돼지우리에도 새 짚단을 깔아주고 여물통도 깨끗이 청소한다.
아버지와 막내 삼촌은 마루 밑에 넣어둔 마니라 밧줄과 굵은 새끼줄을 꺼내와 지붕의 전후좌우로 촘촘하게 힘껏 당겨 매고(일명 ‘재 넘기’라고 부름), 줄의 끝을 마루 기둥과 댓돌로 쓰는 큰 돌덩이에 단단히 이어 묶는다. 할머니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열어둔 장독 덮개를 닫고 어머니는 가마솥에 저녁밥을 안쳐 놓고 남새밭으로 가서 호박잎을 따와 쪄내고, 껍질을 벗겨 살짝 삶은 고구마 줄기를 곰삭은 멸치액젓에 묻혀 저녁상을 준비한다.
며칠째 장마가 계속되면 불을 지펴 방안에 배인 눅눅한 습기를 말린다. 이럴 때 우리는 대청마루 끝에 제비처럼 앉아 물동이로 퍼붓는 듯이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마당 끝에서 두꺼비가 살금살금 기어들고, 삽짝 밖 무논에서 소나기 타고 하늘로 튀어 오른 황금색 미꾸라지가 마당 위로 툭툭 떨어진다.
태풍으로 바람 불고 장마 들어 비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외부지역과는 완전히 고립된다. 멍멍개와 고양이는 대청마루 밑에서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돼지는 배고프다 꿀꿀대고, 닭장 속의 꼬꼬닭들은 비가 오는데도 추적이며 마당 가를 서성이다 대청마루에 함부로 올라 발 도장을 찍고 할아버지의 곰방대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짐승들조차 이러거늘, 분탕질이 한창 심할 때인 우리 6남매들은 적막강산이 되는 밤이 오면 더욱 답답하고, 석유라고 떨어지는 날이면 밤새 어둠 속에서 제삿날 쓰고 둔 초를 찾아 반딧불이 같은 불을 켜고 답답하게 지내야 했다.
1960~70년대 여름철의 지루한 장마철 이런 날이 며칠 동안 계속되어 좁은 집안에 갇혀 지낸 우리가 지칠 때가 되면 할머니는 우리의 짜증을 녹여 줄 간식을 만들어 주셨다. 호랑이도 무서워했던 ‘수수 범벅’이었다. <수수에다 팥, 강냉이, 빼떼기>를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볶아서 맷돌로 갈아낸 가루를 범벅 하여 가마솥에 쪄낸 ‘수수 범벅’을 먹으며 놀았다.
먹거리가 풍족하여 배고픈 고생 모르고 자라는 지금 세대의 어린이들에게 그 시절을 설명하기조차 하기 어렵다. 70여 년 전 전후 세대인 우리는 그렇게 자랐으니 모두가 가난했던 옛날이야기다. 우리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이 베풀어주신 고마움이 사무쳐 가슴을 흠뻑 적신다. 2018.07.10.
첫댓글 태풍으로 바람 불고 장마 들어 비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외부지역과는 완전히 고립된다. 멍멍개와 고양이는 대청마루 밑에서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돼지는 배고프다 꿀꿀대고, 닭장 속의 꼬꼬닭들은 비가 오는데도 추적이며 마당 가를 서성이다 대청마루에 함부로 올라 발 도장을 찍고 할아버지의 곰방대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짐승들조차 이러거늘, 분탕질이 한창 심할 때인 우리 6남매들은 적막강산이 되는 밤이 오면 더욱 답답하고, 석유라고 떨어지는 날이면 밤새 어둠 속에서 제삿날 쓰고 남은 초를 찾아 반딧불이 같은 작은 불을 켜고 지내야 했다.
눈에 선합니다.
바쁘신 중에 틈을 내어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