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觀其所由 “그가 말미암은 바(행한 이유나 동기)를 살펴보라.”라고 하셨다. 觀, 比視爲詳矣. 由, 從也. 事雖爲善, 而意之所從來者有未善焉, 則亦不得爲君子矣. 或曰: “由, 行也. 謂所以行其所爲者也.” 관이란 보는 것에 비해서 더욱 상세한 것이다. 유는 따른다는 것이다. 일은 비록 선을 행할지라도 뜻이 따르는 바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역시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길, 由는 행한다는 것이니, 그가 행한 바를 행한 까닭을 말한다고 하였다. 朱子曰 爲善底人 又須觀其意之所從來 若本意以爲己事所當然無所爲而爲之 乃是爲己 若以爲可以求知於人而爲之 是意所從來已不善了 如齊桓伐楚 固義也 然其意所從來 乃因怒蔡姬而伐蔡 蔡潰遂伐楚 則所爲雖是而所由未是也 주자가 말하길, “선을 행한 사람은 또한 반드시 그의 뜻이 따라온 바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본래부터 자신을 위한 일을 당연히 행할 바라고 생각하고서, 어떤 것도 위함이 없이 행한다면, 마침내 이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만약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것을 행한다면, 이것은 그 뜻이 따라온 바가 이미 선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제환공이 초나라를 정벌한 것은 본래 의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뜻이 따라온 바가 도리어 채희에게 노하여 채나라를 정벌함으로 인한 것으로서, 채나라가 무너지자 마침내 초나라를 정벌한 것이라면, 행한 바는 비록 옳다고 할지라도, 말미암은 바가 옳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察其所安 “그가 편안히 여기는 바를 관찰하라.”라고 하셨다. 察, 則又加詳矣. 安, 所樂也. 所由雖善, 而心之所樂者不在於是, 則亦僞耳, 豈能久而不變哉? 찰은 곧 또 더욱 상세한 것이다. 안은 즐거워하는 바다. 말미암는 바가 비록 선하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즐기는 바가 여기에 있지 않으면 또한 그런 척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능히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厚齋馮氏曰 穀梁傳曰 常事曰視 非常曰觀 觀詳於視也 易曰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察密於觀也 후재풍씨가 말하길, “곡량전에 이르길, 일상적 일은 본다고 말하고,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면 살펴본다고 말하니, 관이 시보다 자세하게 보는 것이다. 주역에 이르길, 하늘을 우러러보며 天文을 살펴보고, 아래로 굽혀 지리를 살펴본다고 하였는데, 찰이 관보다 정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視其所以 觀人之大槪 察其所安 心之所安也 정자가 말하길, “그가 행하는 바를 본다는 것은 사람의 대강을 살피는 것이고, 그가 편안해하는 바를 살펴본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편안해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意所從來處旣善 又須察其中心樂與不樂 安是中心樂於爲善 自無厭倦之意 若中心所樂不在是 便或作或輟 未免於僞 주자가 말하길, “그 뜻이 따라온 곳이 이미 선하다면, 또 반드시 그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느냐 즐거워하지 않느냐를 살펴야 한다. 편안해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니, 저절로 싫증 나고 권태롭다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바가 여기에 있지 않다면, 곧바로 혹은 행하다가 혹은 그만둠으로써 거짓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以是察人 是節節看到心術隱微處 最是難事 亦必在己者 能知言窮理 使心通乎道 而能精別是非 然後能察人 如聖人也 曰 於樂處便是誠實爲善如好好色如惡惡臭 不是勉强做來 若以此觀人 亦須以此自觀看 自家爲善果是爲己果是樂否 누군가 묻기를, “이로써 사람을 살펴보면, 마디마디 다 심술의 은미한 곳까지 볼 수가 있지만, 제일 어려운 일은, 역시 반드시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말을 알고 이치를 궁구하여 마음이 道에 통하도록 함으로써, 시비를 정밀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한 연후에, 사람 살피는 일을 성인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즐거워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곧바로 정성스럽고 진실하게 선을 행하는 것이니, 마치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이로써 사람을 살핀다고 한다면, 역시 반드시 이로써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이 과연 자기를 위한 것인지, 과연 즐거워하는 것인지 여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所以是所爲 所由是如此做 所安是所樂 譬如 讀書是所爲 豈不是好事 然其去如此做 又煞多般 有爲己而讀者 有爲名而讀者 有爲利而讀者 須觀其所由從如何 其爲己而讀者 固善矣 然或有出於勉强者 故又觀其所樂 소이는 행하는 바이고, 소유는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고, 소안은 즐거워하는 바이다. 비유를 하자면, 책을 읽는 것은 행하는 바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가서 이렇게 하는 것에는 또한 대단히 많은 종류가 있는데, 자신을 위하여 읽는 사람도 있고, 명성을 위하여 읽는 자도 있으며, 이익을 위하여 읽는 자도 있는 것이니, 반드시 그가 말미암아 따르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은 본래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간혹 억지로 함에서 나온 자도 있기 때문에, 또다시 그가 즐거워하는 바를 살펴보는 것이다. 問聖人於人之善惡 如見肺肝 當不待如此著力 曰 這也爲常人說 聖人固不用得如此 然聖人觀人也著恁地詳細 如今人說一種長厚說話 便道聖人 不恁地 只略略看便了這箇 若不見敎徹底善惡分明 如何取舍 누군가 묻기를, “성인께서는 사람의 선악에 대하여 마치 폐와 간을 보듯이 환하므로, 이와 같이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보통사람을 위하여 말한 것이고, 성인은 본래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께서 사람을 살펴볼 적에 힘쓰기를 그처럼 상세하게 하셨는데, 지금 사람들은 일종의 장후한 설화를 말하기만 하면, 곧바로 성인은 이렇게 하지 않고 이런 것을 그저 대충대충 보고 끝내버린다고 말하곤 한다. 만약 선악 구분을 명확히 함에 철저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취하고 버릴 것인가?”라고 하였다. 問觀人之道也 有自善而入於惡 亦有事雖惡而心所存本好 曰 這箇也 自可見 須是如此看 方見 好底鐵定 是好人 不好底鐵定 是不好人 又曰 初間纔看善惡 便曉然 到觀其所由有不善 這又勝得當下便不是底 到察其所安有不善 這又勝前二項 人不是到這裏 便做不好人 看他只是 不是他心肯意肯 必不會有終 누군가 묻기를, “사람을 살펴보는 방도에는 선으로부터 악에 들어가는 것도 있고, 또한 일이 비록 악하기는 하지만 마음에 보존된 바는 본래 좋은 것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스스로 알아볼 수 있지만, 반드시 이와 같이 살펴봐야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좋게 확정하면 좋은 사람이고, 좋지 않게 확정하면 좋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처음에 조금이라도 선악을 살펴본다면, 곧 깨우쳐 알 것이다. 그가 말미암는 바를 살펴보아서 불선이 있음에 이르더라도, 이것은 또한 당장 곧바로 옳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가 편안해하는 바를 살펴보아서 불선이 있음에 이르더라도, 이것 또한 앞 2항보다는 나은 것이다. 사람이 여기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곧바로 좋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를 살펴보아 그저 옳기만 할지라도, 그가 마음으로 뜻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좋은 끝맺음이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所安是他平日存主習熟處 他本心愛如此 雖所由偶然不如此 終是勉强 畢竟所樂不在此 次第依舊又從熟處去 如平日愛倨傲 勉强敎他恭敬 一時之間亦能恭敬 次第依舊自倨傲了 心方安 편안해하는 바란 그가 평소에 마음을 보존하고 주안점을 두며 익혀서 무르익은 곳이다. 그가 본래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비록 말미암는 바가 우연히 이와 같지 않을지라도, 결국에는 억지로 하는 것이니, 필경은 즐거워하는 바가 여기에 있지 않기에, 차례차례 옛날과 같이 또다시 익숙한 곳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컨대 평소에 거만하고 오만함을 즐겨 하였다면, 억지로 그에게 공경하라고 가르친다 할지라도, 일시지간은 또한 공경할 수 있겠지만, 차례차례 옛날과 같이 스스로 오만하고 거만해야만 마음이 비로소 편안한 것이다. 勉齋黃氏曰 視其所以 兼君子小人視之 觀其所由 則先之爲小人者 不復觀之矣 所觀者君子也 察其所安 則君子所由之未善者 亦不復察之矣 察其所由之善而欲知其安不安也 蓋所以旣爲小人 何必復觀其所由 所由旣未善 何必復察其所安 면재황씨가 말하길, “그가 행하는 바를 보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다 함께 보는 것이다. 그가 말미암는 바를 살펴보는 것이라면, 먼저 소인으로 여긴 자는 더이상 살펴보지 않으니, 살펴보는 자는 군자인 것이다. 그가 편안해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라면, 군자 중에 말미암는 바가 선하지 못한 자는 역시 더이상 살펴보지 않는 것이다. 그가 말미암는 바를 살펴보아 선하다면, 그가 편안해하는지 편안해하지 않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대체로 행하는 바가 이미 소인이라면, 어찌 반드시 다시 그가 말미암는 바를 살펴볼 것이며, 말미암는 바가 이미 선하지 못하다면, 어찌 반드시 다시 그가 편안해하는 바를 살펴봐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勿軒熊氏曰 所由言意之所來 所安言心之所安 意是發端處 心是全體處 물헌웅씨가 말하길, “말미암은 바란 뜻이 유래한 바를 말하고, 편안해하는 바란 마음이 편안해하는 바를 말한다. 뜻은 단서를 드러내는 부분이고, 마음은 온전한 몸이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
4 | 人焉廋哉 人焉廋哉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 焉, 何也. 廋, 匿也. 重言以深明之. 焉은 何이다. 廋는 감춘다는 말이다. 거듭 말함으로써 깊이 밝힌 것이다. ○ 程子曰: “在己者能知言ㆍ窮理, 則能以此察人如聖人也.” 정자가 말하길,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말을 알고 이치를 궁리할 수 있다면, 능히 이로써 남을 살피기를 성인처럼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洪氏曰 此夫子觀人之法 聽其言觀眸子 人焉廋哉 此孟子觀人之法 孟子之法 非有過人之聰明者不能 夫子之法 人皆可用 亦可以自考 홍씨가 말하길, “이는 공자께서 사람을 살핀 방법이다. ‘그 말을 들어보고 그 눈동자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맹자가 사람을 살펴본 방법이다. 맹자의 방법은 남보다 뛰어난 총명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의 방법은 사람마다 모두 활용할 수 있으니, 또한 이로써 자신을 고찰할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在我者不明 則亦何以察人 集註引程子之言以補本文之意 知言如孟子我知言 能知人言之是非 窮盡事物之理 則心如明鏡 方能如聖人觀人之法以察人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나에게 있는 것이 밝지 않으면, 또한 무엇으로써 남을 살피겠는가? 집주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본문의 뜻을 보완하였다. 맹자가 ‘나는 말을 안다’고 한 것처럼 말을 알면, 남이 한 말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한다면,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되어서, 비로소 성인께서 사람을 살피는 법으로써 사람을 살핀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論語古今註』曰: “以, 因也. 由, 經也. 安, 止而不遷也. 凡觀人之法, 每作一事, 須觀其始所因者何故, 中所經者何道, 終所止者何處, 則人無所匿其情也.” 논어고금주에 이르길, “이는 인이다. 유는 경이다. 안은 그쳐서 옮겨가지 않는 것이다. 무릇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에 있어서, 매번 한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모름지기 그 처음이 인하여 시작된 이유, 그 중간이 경유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또한 끝이 그치는 곳이 어디인지 살핀다면, 사람은 제 실정을 숨길 곳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