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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이동을 하여 대성당을 구경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전 San Pietro Basilica】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건립하기 시작해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 때 완성되었다. 바티칸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성당 등급 분류상 최고등급인 대성전(Major Basilica)중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 이어 두 번째이다. 명칭의 유래는 '베드로(피에트로, 피터)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라고 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 최대 성당건축물로, 도나토 브라만테, 라파엘로 산치오, 미켈란젤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 여럿이 건물을 설계했으며 수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쳐 힘들게 완성된 건물이다. 부속된 예술품과 장식들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이에 따라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실 로마 교구의 주교좌성당(Cathedral)은 로마 시내에 있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따라서 유일무이한 교황좌(성좌)가 라테라노 대성당이 가톨릭의 가장 으뜸가는 성당이다. 이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모든 성당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의자는 베르니니가 만든 베드로의 성좌다. 그래도 여전히 상징성 면에서나 각종 예술품과 역사성을 따져볼 때 가톨릭의 중심처럼 여겨지기 쉽다. 흔히 전 세계 성당 중 가장 유명한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이제 교황궁은 더 이상 라테라노가 아닌 바티칸에 있으며, 교황의 주요한 업무나 미사, 전례는 모두 가까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다.
성베드로 성당의 실내 장식은 원래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지금보다는 덜 화려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각과 모자이크 등이 추가되며 바로크 양식으로 변화하였다. 바실리카의 내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걸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그야말로 대성당의 한구석 한구석 모두 예술품이라고 할 만하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Pietà〉, 베르니니가 만든 주제단 위의 천개, 교차부에 있는 성 롱기누스 조상(彫像), 우르바노 8세의 묘, 앱스에 있는 성 베드로 청동상 등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은 1989년까지 그리스도교 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였으나 같은 해 코트디부아르의 야무수크로에 더 큰 바실리카가 새로 지어졌다.(출처 : 나무위키 등에서 발췌)
김대건 신부도 새롭게 모셔졌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의 무덤은 재위 초기부터 계획되었고,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담당하여 옛 대성당의 파사드 안에 작은 예배당을 만들어 안장하였다. 1605년에 석관은 지하무덤으로 옮겨졌다..
2022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13)가 선종하였고, 원래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안장되었다..
우르바누스 8세 교황의 명령으로 베르니니가 1624년에 만든 발다키노로 우르바누스 교황 가문의 문장인 꿀벌이 새겨져 있다.
【발다키노】
이 제단은 우르바누스 8세 교황의 명령으로 이탈리아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가 9년 작업 끝에 1624년에 완성한 발다키노는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 성인의 무덤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설치한 청동 구조물이다. 네 기둥이 상부 구조물을 지지하는 형태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우르바누스 교황이 바르베리니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가문의 문장인 꿀벌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으며, 이 제단 아래의 지하에는 성 베드로의 묘가 있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치를 알리는 표식이자,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교황 제대의 위를 덮은 발다키노는 높이 29m, 무게 63톤에 이르며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의뢰를 받아 1625년 제작하기 시작해 1633년 완성된 바로크 양식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워낙 거대한 구조물이다보니 보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1758년 대대적으로 보수 작업을 한 이래 일반적인 청소를 가끔씩 했던 것을 제외하면 발다키노 전체를 보수한 적은 없었다. 260년 넘게 지나면서 소소한 청소로는 털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먼지가 두껍게 쌓였고, 20세기에 들어와 성당을 일반에 개방하면서 수많은 관람객들이 드나들며 내뿜는 습기와 그로 인한 밤낮의 온도 차이 때문에 발다키노에 사용된 청동과 철이 부식되고 목재가 갈라지는 등 훼손이 누적되었다.
그래서 바티칸 시국에서는 순례자들이 몰려들 2025년 희년을 앞두고 미국의 가톨릭 자선단체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의 후원을 받아 1758년 이래로 약 260년 만에 2024년 1월 11일부터 발다키노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10개월 간에 걸쳐 부식된 구조물을 보강하고 먼지와 녹을 제거한 결과 2024년 10월 27일 보수 작업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된 발다키노는 1633년 베르니니가 갓 완성했던 400년 전의 찬란한 광채를 되찾았다.
발다키노는 고귀한 인물의 권좌 위에 세우는 천개를 의미한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천개, 또한 사도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있는 교황의 제단 위에 세워진 천개로서, 사도 베드로에서 교황으로 이어지는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베르니니는 옛 대성당의 제대에 세워져 있던 대리석 '솔로몬 기둥'을 본따, 소용돌이치며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네 개의 거대한 청동 기둥을 구상했다. 전설에 의하면,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B.C.10세기에 세워져 B.C.586년에 파괴된 최초의 솔로몬 신전에서 이 12개의 나선 솔로몬 기둥을 가져왔다고 전한다. 발다키노는 9년의 작업 끝에 1633년 완성되었다. 높이 11m에 달하는 기둥들은 세 개의 부분을 따로 만든 후 접합하여 만들었다. 이 작업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청동을 조달하기 위해, 고대 로마 유적인 판테온의 청동 장식물을 뜯어내 사용할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표면에 섬세한 장식이 들어간 청동 기둥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기둥의 굵기는 가늘고 날렵하게 처리해 미사를 집전하는 교황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했고,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디자인으로 인간의 영혼이 천상에 도달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기둥을 지탱하는 네 기단부에는 발다키노를 만들도록 한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1623~44)의 문장을 새겼다. 기둥 위에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가문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 중 하나인 월계수 잎을 들고있는 천사 4위가 실물의 2배 크기로 세워져 있다. 처마에는 물결모양의 휘장이 매달려 있는데, 휘장에도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벌과 월계수가 그려져 있다. 지붕 위에는 베드로와 교황을 상징하는 삼중관과 열쇠를 든 천사상과 바오로를 상징하는 칼과 복음서를 든 천사상들도 함께 장식되었다. 발다키노의 천장 내부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빛이 조각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있는 교황의 제대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1594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1605)가 지금의 제대를 축성하였다. 현 제대 아래에는 1123년에 교황 갈리스토 2세(재위 1119~24)가 축성한 제대가 있었으며, 그전에는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40~604)가 축성한 제대가 있었다.
앱스는 중앙 통로(Nave)의 끝부분으로, 대성당 중앙부와 마찬가지로 베르니니가 전적으로 설계하고 장식하였다
앱스에 있는 '카데드라 페트리(Cathedra Petri)' 는 '베드로(Petri)의 의자(Cathedra)'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캐세드럴(Cathereal, 주교좌성당)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의 의자를 교황권의 상징으로 생각했고, 종교 개혁이 초래한 혼란을 극복하는 교황권의 승리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베르니니는 4명의 교부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웅장한 청동 의자를 만들고, 그 윗편 글로리아에 성령의 상징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는 비둘기를 만들어, 두 개의 기념비가 마치 하나처럼 어우러지도록 만들었다. 성 베드로의 의자는 사도 베드로가 사용했다고 믿어지는 전례용 의자로, 떡갈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만든 의자에 철로 된 띠로 보강되어 있으며, 몇 개의 고리가 달려있어 행렬 때 사용하기 쉽게 되어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베르니니에게 이 의자를 장식하여 앱스에 놓을 웅장한 기념비를 만들 것을 주문하였고, 베르니니는 화려하게 장식된 청동 의자를 나무 의자 위에 덧씌워 1666년 1월 17일 봉헌하였다. 높이 5m에 육박하는 거대한 청동상 4개가 의자의 네 다리를 잡고 서 있다. 앞쪽의 두 사람은 서방교회의 교부 성 암브로시오(St. Ambrose, 왼쪽)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오른쪽)이고, 뒤쪽의 두 사람은 동방교회의 교부 성 아타나시오(St. Anthanasius, 왼쪽)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오른쪽)이다.
의자에는 천국의 열쇠를 주는 장면과 내 양들을 잘 돌보도록 당부하는 장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의자 위에는 두 천사가 교황을 상징하는 삼중관과 열쇠를 들고 있고, 의자 앞에는 월계수를 든 천사들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진행된 가장 최근의 과학 조사 결과, 의자를 구성하는 부분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를 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중심으로, 천사들에 의해 인도되는 은총받은 사람들이 퍼져나가는 영광의 빛 속에서 거대한 구름 위에 떠있다. 비둘기가 그려진 황금빛 타원형 창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니라 대리석의 일종인 설화석고(Alabaster)를 얇게 깎아 유리처럼 비치게 만든 것이다. 한가운데에 묘사된 길이 1.75 m의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고, 비둘기를 둘러싼 3겹의 타원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12 부분으로 나뉜 창은 12사도를 상징한다. 주변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이 배치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무덤(Grottoes) 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들어진 콘페시오, 역대 교황들과 일부 가톨릭 군주들의 무덤, 그리고 작은 예배당들이 있다..
중앙부의 성 안드레아 조각상 오른쪽에 있는 입구를 통해 지하무덤으로 들어간다...
성 안드레아는 사도 베드로의 동생으로,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기 때문에, X자 십자가가 그의 상징이 되었다. 성 안드레아의 유해는 원래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나,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 때 그리스 파트라스로 옮겨졌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재위 1449~53)의 동생이자 모레아의 전제군주였던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재위 1453~60)가 1461년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안드레아의 두개골을 가져와 교황 비오 2세에게 선사했다. 성 안드레아의 두개골은 조각상 위의 로지아 벽감에 소중히 보관되어 오다, 1966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 정교회와의 공존과 화해를 위해 로마에 있는 모든 성 안드레아의 유물을 파트라스의 성 안드레아 교회로 돌려보냈다. 부르고뉴 백작에 의해 십자군 전쟁때 그리스에서 가져온 성 안드레아 십자가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생 빅토르 교회에 보관하다가 1980년에 역시 파트라스의 성 안드레아 교회에 보내졌다.
성 베로니카(프란체스코 모치, 1629)
성 베로니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군중 속에서 그리스도를 지켜보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를 보며 마음이 아팠고, 가지고 있던 베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는데, 그 베일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혔다고 한다.
베르니니, 1631~38
성 롱기누스(B.C.85~42)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로마의 병사이다.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전도에 힘썼다. 149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 조각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재위 1484∼92)에게 선물했다. 바예지드 2세와 술탄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동생 젬(Djem)이 로도스 섬의 성 요한 기사단에게로 피신했고, 이를 전해 들은 인노첸시오 8세는 젬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키기 위해 로마로 불러온다. 이에 바예지드 2세가 교황에게 젬을 그냥 로마에 붙잡고 있어 달라는 의미로 롱기누스의 창을 선물하였다. 성 롱기누스의 창은 성 헬레나의 십자가, 성 베로니카의 베일과 함께 성 베로니카 조각상 위의 로지아 벽감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순절의 다섯번째 일요일에 일반에 공개한다.
변용 제대화로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가 되는 메디치 가의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Raffaelo Sanzio, 1483~1520) 에게 주문한 것이다. 줄리오 데 메디치가 대주교로 있던 프랑스 남부 도시 나르본 성당의 제단화로 주문하였지만, 완성작을 본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결국 프랑스로 보낼 계획을 수정하여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에 걸려 있었고, 1768년에 모자이크로 만들어 이곳 변용 제대에 걸리게 되었다
제대화 상단에는 예수가 산에서 기도하던 중 모세와 엘리아 사이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하단에는 산에서 내려오던 중 귀신 들린 아들을 치유해 달라는 요청에, 제자들은 예수에게 왜 자신들은 아이를 치유할 수 없는지 물었고, 예수가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며,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대답한 장면을 담았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유작으로, 1517년 작업에 착수해, 그가 사망한 1520년에 제자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와 조수 지안프란체스코 펜니(Gianfrancesco Penni)가 완성하였다. 원작은 현재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카에 소장되어 있다. 제대 아랫쪽에는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재위 1676~89)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걸작으로 유명하며,
미켈란젤로가 마리아의 어깨띠에 서명을 새겨 넣은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피에타(Pietà) 】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프랑스 대사인 장 드 빌레르 라그롤라(Jean de Bilheres-Lagraulas) 추기경의 주문으로, 1498~99년에 피에타(Pieta)를 제작하였다. 미켈란젤로가 불과 25세에 만든 작품으로,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예전 조각이나 회화의 주제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예수의 늘어진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애절한 슬픔이 묻어 나온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새겨 넣은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이름을 마리아의 어깨띠에 새겨 넣었다. 이 조각상은 1972년 한 청년에 의해 손상을 입은 이래 유리관 너머로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작품을 완성한 후, 다른 조각가가 작품을 만든 것으로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졌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틈타 성모 마리아가 두른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으며, 이후부터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에 비해 부각되어 있어, 성모마리아가 주인공이냐는 비판이 있었으나,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이 보는 시각으로 피에타를 조각하였다며 논란을 잠재웠다.
1972년 정신이상자가 14번이나 망치로 가격하여 피에타를 손상시킨 일이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코, 왼쪽 눈꺼풀과 목, 그리고 머리에 쓴 베일의 일부도 날려버렸으며, 또한 왼쪽 어깨를 쳐서 팔꿈치가 부서졌고, 손바닥을 쳐서 손가락들을 부러뜨렸다. 약 50여 개의 부서진 대리석 파편을 모아 복원하였고, 그 이후로 피에타상과 관람자 사이에는 방탄유리가 설치되었다.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 Chapel of St. Sebastian 제단화로 1625~31년에 그린 도메니키노(Domenichino, 1581~1641)의 원작을 1730~36년에 다시 모자이크로 제작하였다. 원작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성당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의 중앙 통로..
대성당의 중앙 통로(Nave)를 따라, 양쪽 아치 위에는 교회의 권위(Ecclesiastical Authority), 정의의 여신(Devine Justice), 순결(Virginity), 순종(Obedience), 겸손(Humility), 인내(Patience), 정의(Justice), 불굴의 정신(Fortitude)등의 알레고리 조각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를 둘러본 후 바깥으로 나와 쿠폴라(돔)으로 올라갔다. 쿠폴라(돔)으로 올라가는 비용은 15유로(엘리베이터+ 231 계단)/10유로(계단 551개)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5유로 차이에 320개 계단만 더 올라가면 되니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성베드로 광장..
엘리베이트를 타고 나오면 볼 수 있는 모습..
대성당 중간 부분에서 내려다본모습..
쿠폴라(돔)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했으나 그가 죽은 지 23년이 지난 후 제자들이 완성했습니다..
쿠폴라(돔) 복도에 벽화들이 있습니다..
돔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는 로마 시내와 바티칸 시국의 모습..
쿠폴라돔에서 본 천국 열쇠 형상의 성 베드로 광장 Piazza di San Pietro..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67)는 대성전이 권위만 있고, 사람들을 품에 안는 푸근함이 없다며 광장을 비울 것을 요청한다. 이에 베르니니는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La Galerie)를 포함하여 성 베드로 광장을 건설하게 된다. 광장은 그 폭이 248m, 광장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 300m에 이르며, 광장의 평면은 베드로를 상징하는 열쇠 구멍 모양으로 되어 있다.
로마는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높이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로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광장에서 성천사 성까지 뻗은 대로..
해질 무렵에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쿠폴라(돔)을 구경한 후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다시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갑니다..
이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한참을 쉬었다 갑니다..
베드로 대성당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
바티칸 대성당의 TV 모니터가 삼성전자 제품으로 교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벨리스크 Obelisk..
칼리굴라 황제는 칼리굴라 전차경기장의 중앙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운반해 왔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이 오벨리스크 만은 계속 대성당 옆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대성당이 공사 중이던 1586년에 교황 식스토 5세의 명으로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으로 옮겨졌고, 이후 성 베드로 광장을 장식하고 있다. 높이 약 25m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중 두 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20톤이다. 기원전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독특하게도 오벨리스크에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아 최초 건립자와 경위를 알 수 없다. 오벨리스크를 옮겨올 때, 꼭대기에 예수가 못 박힌 성십자가의 일부가 들어있는 청동 십자가를 올려놓아, 이교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다음은 성천사 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