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이란 글 서(書), 샛길 각(刻)자로 문자를 새긴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의 문헌에는 '새나 동물의 발자국을 관찰하여 나무에다 눈금같이 서계(書契)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서계라 함은 '째다', '새기다'라는 의미로 오늘의 각(刻)에 해당된다.
서각은 문자를 매재(媒材)로 하기 때문에 서예적인 맛과 운도(運刀)에 의한 각적(刻的)인 맛, 색채에 의한 회화적인 맛, 그리고 공예적인 맛 등 가히 생명력 있는 종합예술이라 하겠다. 특히 목판에 각자(刻字)한 판각본은 원고 자체를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새겨서 인출(印出)해 냈던 것이다. 판목(板木) 또한 매우 잘 다루어야 했다. 먼저 글자를 새기기에 적합한 나무를 배어 적당한 크기와 부피를 판목 시켜서, 짠물 또는 민물 웅덩이에 오래 담구어 결을 삭혔다가 밀폐된 곳에 넣고 쪄서 살충과 동시에 진을 뺀다.
그리고 충분히 건조시켜 뒤틀리거나 빠개지지 않게 하여 판면을 곱게 대패질 한 후 간행할 내용을 종이에 써서 붙여 새긴다.
이렇듯 서각은 목재에서 서예 그리고 조각적인 부분까지 종합 문화 예술인 것이다.
재료는 나무, 석고등 다양한 재료가 있으며 물감과 무광 락카로 마무리한다.
서각은 생활속의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적과 같이 일상생활에서도 가끔씩 사용되어져 왔다. 서각의 역사는 결국 초기의 문자시기에 존재했던 문자 전달의 절대 수단으로부터 필통, 현판, 인테리어 소품 등 공예적 의미나 인쇄 문화의 요체로서 인식되고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각이라는 용어를 매우 생소하게 여긴다. 그러나 서각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고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 그 가치와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 서각의 역사
서각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외에 나라의 경우를 보면 기원전 1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과 AD 273년, 인도의 아소카왕의 비문이 돌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결승문자(結繩文字) 이후로 기원전 3,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골문(甲骨文)과 같은 동물의 뼈나 나무 이외 돌, 흙, 조개껍질 등 각종 자연 재료에 의해 표현되었다.
청동기나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명문(銘文)과 같은 방법으로 각종 용기(用器)에 글자를 새기게 되는 재료상의 변천을 겪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각의 유적이 많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가름하기는 어려우나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2∼3세기 경부터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당시의 기록이 새겨진 유적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현재 알려진 것으로는 진대문자가 새겨진 무기와 한 대에 주조된 명문이 있는 동종이 평양부근에서 발견되어 문자 유적으로는 최고의 것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틀림없이 목재나 금석류에 무엇인가 글자를 새겨 남기고자 하는 행위가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고려 고종19년(AD1282), 대장경 주조를 위해 중앙에 도감을 두었고, 그 안에는 각자장이 있어 경판, 주조 등 판각의 일을 하게 했다는 경국대전의 기록과 조선조 후기 윤종의의 수택본인 대동여지비고 공장조에 관수용의 공장을 세분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중앙에는 은장, 화장, 인장, 금박장, 칠장, 필장, 조각장, 각자장 등을 두었고, 지방에는 원선장, 유구장 등을 두어 각 분야에서 일을 하게 했다는 한다.
특히 목판에 각자한 판각본으로는 1977년 10월 3일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 대다리니경이 세계 최고의 목간본임이 밝혀졌다. 현재도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옛 사찰과 고궁의 현판이나 주련,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판각본 팔만대장경을 보면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신라 시대부터 경판이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신라시대에 목판 인쇄술이 발생하여 많은 서적이 간행 보급되었으며, 그 예로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석가탑(釋迦塔)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보 제126호, 두루마리형식, 길이 6m 30Cm, 폭 5.3Cm>은 서기 751년 이전에 간행된 세계 최고의 현존하는 목판 인출 본임이 밝혀져 그 가치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52호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또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경판 인쇄가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보여주는 한편의 석가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어서 서각은 위와 같은 경전과 각종 문서등 판본(板本)을 중심으로 하여 사찰과 고궁의 현판(懸板), 기둥에 부착되어 있는 주련(柱聯), 편액(篇額) 그리고 비각(碑刻) 및 각종 공예품에 새겨진 공예적 영역으로까지 계승되어 왔다. 역사속에서도 빠질 수 없었고 사료적 가치도 높게 차지하고 있는 서각은 1971년 신학균, 김응섭, 오옥진선생에 의하여 다시 맥을 잇게되기 전까지 침체기 였다가 한국서각협회 창립이후 전국에 수많은 회원들이 서각의 맥을 잇고 있으며, 극소수의 회원들은 창작 서각에 관심을 갖고 전통 서각과는 다른 현대 서각의 연구에 전력하여 서각의 새로운 모습을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