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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1]
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각자의 주의를 초월하여
교회의 현상을 통일하기로 노력하자!”
- 풍암 이병춘(2)
탁암 심국보_편집주간
1905년에
북접대도주 손병희가 보낸 간찰=가능한 크게/
1905년에 북접대도주 손병희가 보낸 간찰이다.
이 편지에서 지난 40년간 동학교도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생활하라고 하였다.
원문에 '외국통신(外國通信)'이라고 쓴 것으로 미루어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쓴 것으로 보인다.
독립자금 모금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이병춘은 1919년 3·1운동 당시 전라북도 총책임자로서, 상경하여 파고다 공원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준승과 긴밀히 연락하여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전주 천도교구에 운반하여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마친 후, 상경한다. 파고다 공원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3년형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공훈록을 비롯한 동학천도교인명사전에서도 이병춘은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병춘은 서울 만세운동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으로 체포되어 심문받은 기록이다.
3.1운동 당시 이병춘은 천도교단에서 도사라는 직책에 맡고 있었다. 이병춘은 3월 15일 중앙총부의 대종사장실에서 정광조에게서 조선독립을 위한 운동자금이 부족하여 곤란하니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이병춘은 서울 송현동 28번지 박승래의 방에 하숙하고 있었다.
이병춘은 박승래에게 상황을 전달하였고, 고산교구장을 맡고 있던 김태현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계획하였다. 이후 이병춘은 오지영과 함께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담양군의 교구장을 맡고 있던 황정욱은 이병춘에게 독립운동자금 명목으로 300원을 전달하였다. 이병춘은 일제에 체포되었고, 이병춘의 소행조서를 아래와 같다.
<피고인 이병춘 소행조서>
一. 주소. 전주군 전주면 다가정 116번지. 출생지. 장수군 면미상, 전실리.
一. 천도교 전도사 리병춘 당56세
一. 완고하고 교활한 자이다.
一. 본인은 음주 또는 축첩이 없다. 항상 감언이설로 타인에게서 금품을 사기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타인에게 기피되고 있는 자이다.
一. 가족은 10인으로 다른 생계의 방도가 없고 종교상의 성미를 거두어 그 수익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따로 생활의 근거가 없고 빈곤한 자이다.
一. 동산·부동산 등은 없다.
一. 성명도 쓸 줄 모른다.
一. 개전의 가망이 없다고 보인다.
8년 5월 29일 전주경찰서에서 순사보 이범선
위의 소행조서에 따르면 이병춘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특히 일제가 이병춘을 완고하고 교활하다고 판단한 점은, 그의 계획적인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대한 인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병춘은 일제에게 심문을 당할 때도, 김현태를 만난 일도 없으며, 전혀 독립운동자금과 상관없음을 끝까지 피력하였다. 또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냐고 묻는 일제의 말에 “우리들이 그런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도저히 될 일이 아니므로 그런 희망은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병춘의 전주 3.1운동 참여
1차연성기도인. 송현동대교당에서 기념사진: 호남지역에서는 박준승, 이병춘, 구창근이 참여하였다.
1964년에 발간된 『전주시사』(전주시사편찬위원회, 1964년 발간)에서는 이병춘이 전주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천도교단에서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준승과 이병춘을 전북 총책임으로 임명하여 서울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창근을 비롯하여 전주의 천도교인 김진옥, 민영진, 윤창모, 최재붕, 조성덕, 김왕길, 김영우, 김태만, 김창, 서모某, 김성칠, 안승환, 정용근, 이군필, 김창환, 박화춘, 박화성, 박화개, 김명규, 이광필, 이곤암, 김봉모, 한영태 등과 규합하여 비밀리에 회합을 한 연후에 각 군면의 담당자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급하게 조직되었기 때문에 전주지역은 서울의 만세운동과 호응할 수 없었고, 그날 밤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전주시내에 배포하는 정도로 그쳤다. 이날 배포된 독립선언서가 3월 3일 아침에 발견되면서 일경이 그 경위를 탐문하고 검속을 강화하여 만세운동으로 추진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전주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 천도교단의 인종익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인종익은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연락받은 전주천도교구장 김봉년에게 전달하려 하였으나, 자리를 비움에 따라 금융원 김진옥에서 1천8백매를 전달하였다. 이 선언서는 기독교측으로 전달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정확한 경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최종삼의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서 보내오는 연락으로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만들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 천도교나 이병춘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주의 3·1운동은 3월 12일 첫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3월 23일까지 수차례 지속되었다. 이들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뿐만 아니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등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이외에도 기생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전주 3·1운동에서 50여 명이 일경에 피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산에 있는 조선군사령부에서 1개 중대병력을 파견할 정도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이병춘을 비롯하여 김종곤, 김가전, 최종삼 등이 체포되었다. 이병춘은 이를 계획한 주도자로 지목받아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목숨은 겨우 건질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병춘의 독립자금모금활동은 3월 15일 이후에 추진되었던 것으로, 전주지역의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다시 살펴야 된다.
다만, 이병헌의 『3.1운동비사』(시사시보사, 1959, 901쪽)의 기록에 의하면 “3월 22일 오전에 야소교인과 그 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 남녀학생과 천도교인 백여 명이 밤 11시까지 4, 5차에 걸쳐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하였는데, 경찰은 이를 제지하고 검거에 착수하여 두 교회 간부는 검거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도교 백여명이 참여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천도교단의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가능했던 인원이었다고 판단된다. 이 인원 동원에 이병춘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옥살이
3.1만세운동 이후 이병춘은 천도교단에서 주요 직책을 맡아 교단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1920년대 천도교단은 청년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교세를 늘리기도 했지만, 신구파의 분열과 합동이 번복되는 매우 혼란한 때이기도 하였다. 1921년 4월 천도교를 개혁하기 위해 이병춘을 비롯하여 이종훈,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홍기조, 정계완, 이종석, 박준승, 오지영, 이승우, 홍기억 등 13명이 모여 영흥관에서 회맹식을 개최하였다.
이병춘을 비롯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당시 교단에서 최고두령으로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천도교의 잘못된 폐단을 철저하게 교정하고, 교단이 바로 설수 있게 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결국 이들은 임시대회를 열어 의사원후원회를 조직하여 혁신과 관련된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렇듯 혁신파와 복구파 사이의 교단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 무렵 이병춘은 금융관장, 종법원 종법사 등의 직책을 맡는다.
1921년 12.25 이병춘 임시 금융관장에 임명.
1922년 1.7 이병춘 금융관장에 임명.
1922년 1.17 이병춘 종법원종법사로 공선(公選)되고, 충청북도 순회로 임명됨.
그러나 1922년 4월 이후 금융관장은 경리과주임으로 직책 명이 바뀌고 이병춘의 이름은 한 동안 찾아볼 수 없다. 이병춘은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집하여 송금하였고, 이것이 발각되어 2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고 공훈을 인정받았다.
'도사장 풍암 이병춘 행적 ' 첫페이지-1977년 원호처장에게 제출된 서류
이와 관련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지만, 이병춘의 아들 이재준은 ‘천도교 도사장 풍암 이병춘 행적’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치에 분개하여 손병희 선생을 위주로 이병춘, 권동진, 오세창, 최린, 오지영 등 몇 분이 명월관에서 비밀회의 끝에 유능한 인재를 골라서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전개케하고 그 운동자금은 천도교에서 부담키로 한 바, 그 당시 이병춘은 도사장이면서 금융관장으로 임명중이어서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한 것이 경성 진고개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공중에 매달아 놓고 고문 끝에 헌병감옥에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부터는 요시찰인으로 형사가 미행하면 그 기분 불쾌한 심정이 표면에 보이기도 한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이병춘이 금융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던 시기는 1921년 12월 이후부터 1922년 4월까지이다.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한 사건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것으로 짐작된다.
이병춘의 천도교단 활동
통일기성회회의록과 일지
이병춘은 처음에는 혁신파에서 활약하였고 이후에는 구파 측에서 활동하였다. 교단 내 갈등은 지속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통일운동이 제기되었고, 이때 이병춘은 천도교 통일기성회 고문을 맡았다. 위원장에 이종린, 상무위원에 김경함, 신태순, 김영륜, 정용근, 김재계, 이시우 등과 고문으로 권동진, 한현태, 박준승 이병춘 등을 선출하였다. 통일기성회는 조직을 끝낸 후 선언강령을 발표하였다.
<결의문>
1. 우리는 각자의 주의를 초월하여 교회의 현상을 통일하기로 노력한다.
1. 통일의 실현은 언제든지 이 회에 있으므로 우리는 원만한 통일을 기도한다.
1. 본회는 최제우의 동귀일체의 심법을 위반하는 자는 교회의 분열을 기도함이라 인정한다.
1. 분열을 기도하는 그 이면을 적발하여 천하의 여론을 일으킨다.
통일기성회는 종리사 측(신파), 교인대회 측(오영창 계열)와 접촉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통일기성회는 1925년 11월 오영창 계열의 교인대회 측와 통합하여 ‘천도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6년 1월에는 이 중앙위원회의 명칭을 중앙종리원이라고 고치고 최린 계열의 신파 측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하였다. 사회에서는 이들을 천도교 구파라고 불렸다.
이병춘은 1928년 7월 전주청년동맹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고, 1930년 12월 권동진, 오세창, 최린, 나용환과 함께 5인의 고문에 위촉돼 신·구파 간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구파는 1932년 4월 재분열 하였고 이때 이병춘은 구파의 종법사장이 되었고, 법정이 되었다. 그리고 1932년 6월 전주에서 환원하였다. 이병춘의 아들 이재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이병춘도 서명날인 할 찰라 손병희 선생은 절대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손병희 선생 대신 교중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3인은 서명하였고 이병춘은 못하였으나 그 행동은 다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행진한 바 … 체포당하여 고문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2년의 형기를 완료하고 출옥하셨으나…일평생을 동학에서부터 대한독립운동에만 헌신 투쟁한 결과 어혈병과 골병으로 회춘치 못하시고 고생 끝에 1932년 6월 29일에 별세하셨습니다.
…부친 이병춘은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셨으며 장남, 차남, 5남 삼형제 분은 을사보호조약 후 매국노 역적 이완용과 송병준을 분개한 나머지 타살하자는 소리를 외치며 관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그 3형제 분의 전 가족마저 몰살당하여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남은 관군에 체포되어 형 이병춘의 행방을 알리라는 모진 고문 끝에 절명하였으며 가족은 도망하여 피신, 다행이도 후손을 이어 현재 임실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소생의 부친 생존 시, 아버지께서 저에게 집안 사정을 종종 말씀하여 주시면서 눈물을 금치 못하심을 보고 나는 대략 기억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참고로 이병춘은 전주지역에서 동학혁명과 독립운동을 했던 최재붕 접주와 사돈 간으로, 최재붕 접주의 따님이 이병춘의 둘째 며느리이다. 최재붕(崔在鵬, 陽菴)은 전주군 화산리 출신으로 1894년 입도하여 함열교구장(1917.10)을 역임하며 이리교구장 이중열 등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전주부교구장(1942.4)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병춘의 막내아들 이재원은 한국전쟁 때 육군하사로 3년 2개월 군복무하고 교육행정공무원으로 근무(고창 해리중 행정실장으로 정년퇴임)하다 퇴임 후, 조부 이병춘의 자료를 수집하여 유공자 신청 및 수훈을 받았고 1992년 5월 사망하였다.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로 올해 10월 29일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