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삶과 인물
공자는 노나라 양공22년(B.C.551,B.C.552라는 설도 있음)에 노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 궐리闕里에서 태어났다. 「공자가어」에는 공자의 나이 세 살 때 아버지 공흘(孔紇, 자:숙량淑梁)이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기에 공자는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도 ‘내가 젊어서 빈천했기에 천한 일에 두루 능하였다[吾少也賤故多能鄙事 『논어』 「자한」]’고 하였다. 공자 나이 17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생활의 어려움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장성한 공자는 키가 9척6촌이나 되어 당시 사람들이 ‘키가 큰 사람[장인長人]’이라고 부르며 기이하게 여겼다고 했다. 당시의 1척은 약 22.5cm이었으니. 대략 216cm의 장신이었다. 아마도 부계父系로부터 당당한 무인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후 공자는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를 만나 예禮에 대해 문답하기도 하고, 제齊, 위衛, 진陣, 송宋, 초楚나라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덕치德治라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애를 썼으며, 또한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 덕목인 仁을 실현함에 온 삶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겪었던 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논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 때 공자는 노나라 정공定公에게 등용되어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장관인 중도재中都宰를 지냈고, 이어서 국토를 관장하는 벼슬인 사공司空 벼슬로, 또다시 승진하여 법무부 장관격의 벼슬인 대사구大司寇의 지위를 가져서 한때나마 관직에서 능력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의 일이었고 공자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자신을 등용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서 방랑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제후들은 부국강병에만 관심이 있어 도덕적 정치를 주장하는 공자를 크게 쓰지 않았던 까닭에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재대로 펴지 못하였다. 공자가 자신을 등용해 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공자 나이도 아마 노경에 든 68세였다. 이때에도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공자 자신도 굳이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이후로 공자는 후대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를 정리하고, 「시경詩經」을 편집하였으며, 「악樂」을 바로 잡았고, 「단전彖傳」, 「계사전繫辭傳」, 「상전象傳」, 「설괘전說卦傳」, 「문언文言傳」 등 주역周易에 대한 풀이 글인 십익十翼을 썼다. 공자는 자신의 운세가 다 된 것을 예견하여, 「춘추春秋」라는 노나라의 역사책을 쓰게 된다.
공자는 사상가인 동시에 훌륭한 교육자였다. 공자 자신부터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한 바 있거니와, 특히 제자의 성품과 앎의 정도 등을 헤아려 그에게 꼭 알맞게 가르친 공자의 교육 방법은 ‘수인이교隨人異敎’라 하여 바람직한 교육의 모범이 되어왔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가 3천명이난 되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 예禮(규범) • 악樂(음악) • 사射(활쏘기), 어御(마타기,수레몰기) • 서書(글씨) • 수數(셈하기)의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공자의 학단學壇은 훌륭한 학문의 도량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렇듯 현실정치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제자들을 가르침으로써 공자는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남았다.
정치와 교육, 저술과 실천으로 한 평생을 바쁘고 고단하게 보낸 공자는 노나라 애공 16년(B.C.479)에 별세하였다. 공자는 타계하기 전에 스스로의 죽음을 예지하고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로 문 앞을 거닐다가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내려앉는가! 철인哲人이 시들려는가! 하는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이 노래를 읊은지 7일 후, 공자는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의 내용은 ‘공자의 삶과 인물’이라고 부제를 단
「큰 스승을 찾아가는 길 논어」(김형기 편저, 성균관 刊)에서 모셔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