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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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일, 빛바랜 엽서 한 장이 김유정문학촌에 돌아왔다.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 실레골 김유정 대형’앞으로, 경북 대구 달성에 사는 김학수 라는 친구가 보낸 우편엽서가 그것이다. 소화(昭和) 11년 2월 12일자 대구우체국 소인이 찍혔는데, 전날인 2월 11일에 쓴 것으로 적혀있다. 소화 11년은 일본의 히로히토시대의 연호로서 1936년이 되므로 무려 80여 년 전에 김유정이 받은 엽서가 된다.
강원 고미술계의 개척자이자 수집가인 정하(廷河) 유용태 선생이, 소장품인 이 엽서를 김유정문학촌에 선뜻 기증함으로써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는데 천금 이상의 가치를 지닌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김유정의 사후에 처음으로 발견된 유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에 있어서 작품 이상의 무엇이 있을 수 없겠지만 유품이란 또 하나의 분신으로 고인을 대신하는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김유정문학촌에서는 이 엽서를‘김유정 유품 제1호’로 지정을 했다.
김유정이 이승에 남긴 유품은 이제껏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유정이 1937년 3월 만 29세의 나이에 요절한 후, 그의 휘문고보 동기로 절친한 친구이자 소설가였던 안회남은 김유정 생전의 원고를 비롯한 일기, 서신 등의 유품을 가져갔다. 그리고 안회남은 해방 후 월북을 하는데, 가져간 유품들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은 채 북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후 안타깝게도 김유정의 유품은 사라지고 말았다. 안회남이 북으로 갈 때 김유정의 유품을 가지고 간 것인지 어떻게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문학촌장을 지낸 J교수께서 북한을 방문하는 기회에 그쪽 문인들에게도 수소문을 해보았는데 남한에 있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북한으로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대목이지만, 서울에 두고 갔다 하더라도 이후 6․25사변과 같은 전란 속에 온전하게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이런 가운데 80여 년 전 김유정이 받은 엽서가 고스란히 고향인 실레마을로 기적처럼 돌아온 것이다.
이 엽서는 안회남이 가져갔던 유품 중에 하나였을 개연성도 있다. 그렇다면 안회남은 북으로 갈 때 최소한 김유정의 유품을 몽땅 가지고 간 것은 아니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모두 두고 갔거나 일부만 가져갔을 수 있다. 어딘가에 또 다른 유품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한다.
이 엽서가 돌아올 수 있었던 뒷이야기도 극적이고 흥미롭다.
정하 선생이 1993년 서울 낙원동 고미술가의 어느 책방에 들렀는데 이 엽서가 눈에 띄었다. 본시 서울 태생이지만 일찍이 춘천에 정착해 있었던 정하 선생은 이 고장 출신인 당대 최고의 문인이 받은 서신이라는 각별한 마음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했다. 그러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난 해, 김유정문학촌을 관람하다가 이곳에 김유정 유품이 한 점도 없다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때 정하 선생은 김유정문학촌이야말로 이 엽서가 있을 자리라는 생각을 굳히고 기증을 위해 막상 엽서를 찾으니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를 두고 서가를 온통 뒤지던 끝에 어느 수첩 갈피 속에서 엽서가 떨어졌다.
‘김유정 유품 제1호’는 이렇게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김유정의 엽서가 돌아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50여 년 전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에서 가시적으로 김유정 문학을 기리고자 하는 의미 있는 사업이 태동하게 된다. 1967년 김유정문인비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이듬해 의암댐 옷바위 옆에 김유정 문인비를 세운다. 이어서 건립위가 개편된 김유정 기념사업회에서 김유정 전집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마침 김유정의 31주기가 되던 해였으니, 김유정의 진갑(進甲)이 되던 해이기도 하다.
이후 1978년 3월 29일 김유정의 기일에 소설가 김동리의 휘호로 새긴 김유정 기적비(紀蹟碑)를 김유정이 야학을 펼쳤던 실레마을 금병의숙 터에 세웠다. 1994년 10월에는, 김유정이 문화체육부로부터‘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기념으로 그의 동상을 제작하여 춘천문화예술회관에 건립한다. 이와 함께 김유정 문학비 건립, 추모제와 문학제 거행 등 김유정의 문학적 열정과 가치를 알리고 이를 전승하고자 하는 선양사업이 꾸준히 활발하게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2002년에 이루어진 김유정문학촌의 개관은 김유정 문학의 선양 및 기념사업의 화룡점정이었다. 그의 고향인 실레마을의 옛 집터에다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 전시관을 만들고, 춘천문화예술회관에 세워진 동상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명실상부한 김유정문학의 산실로 그 모습을 갖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실레마을에 있는 경춘선 신남역과 동춘천농협 신동지점 그리고 춘천우체국 산하 신동우체국이 김유정 작가의 이름을 따서 각각 김유정역, 김유정지점, 김유정우체국으로 바꾸는 일들을 추진했다.
김유정의 엽서가 그의 고향집인 실레골 문학촌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노력과 투자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유품이 보존될 수 있는 미더운 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다. 정하 선생께서 유품의 기증을 결심하게 한 동기일 것이다.
그러니만큼 이 엽서가 돌아온 것처럼, 절친한 친구였던 안회남이 좋은 뜻으로 가져간 김유정의 귀중한 유품들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김유정이 그토록 그리던 신록향(新祿鄕),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洞名)을‘실레’라 부르는…”, 그 실레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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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 유용태 선생께서는 1932년 서울 태생이신데, 일찍이 춘천에 정착하면서 본적지를 후평동으로 옮기고 강원도 사람이 된 분이다. 학사경찰 제1기로 강원경찰에 투신, 강릉·철원·화천경찰서장을 역임했다. 김유정의 출신학교인 서울 재동초등학교와 김유정이 입학을 했던 보성전문학교의 후신인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또한 선생의 선친은 휘문고보 출신으로 부자 분께서 김유정과 동문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정하 선생께서는 김유정의 유품 제1호인 엽서를 문학촌에 기증한 이후, 2019년 봄에 또다시 본인이 평생을 모은 희귀 민속자료와 옛날 돈, 음반자료, 고미술 관련 서적 등 2천3백여 점을 김유정문학촌에 기증했다. 이는 “수집품을 즐기다가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고미술계에 헌신하셨던 선친의 유지를 받든 것이기도 하다.
기증품 중에는 김유정 작품 속의 1930년대 일제 강점기를 힘겹게 살았던 하층민들의 손때가 느껴지는 귀중한 자료들이 여러 점 있어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깜짝 놀랄만한 김유정의 또 다른 유품이 나왔는데, 김유정이 그토록 구애해 마지않았던 명창 박녹주의 판소리 SP판이다.‘춘향가 이화춘풍’이 수록된 이 음반은 김유정이 생전에 고향인 실레마을에 내려와 박녹주를 생각하며 수없이 들었던 유품으로 인정되었다. 이 음반이 ‘김유정 유품 제2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알았던 김유정의 유품이 두 점씩이나 김유정문학촌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한평생을 강원 고미술은 물론 민속자료와 함께해 오신 정하 선생의 고귀한 뜻으로 이루어진 값진 결과이다.
김유정의 문학적 열정과 문학 혼을 기리는 후학들에게 드리는 선물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내내 강녕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