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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로 민족 자긍심 높인 과학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한국의 과학기술인]
석주명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9)
2014.05.28. 09:12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나비박사로 잘 알려진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은 평생을 나비에 미쳐서 보냈다. 그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때 가장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일본 저명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바로잡음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과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산 나비에 대해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자로서 나비 연구의 현대화와 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지난 2008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25번째로 헌정되었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의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여 집안이 부유했는데, 어머니는 어린 석주명에게 비싼 타이프라이터를 선물로 사줄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1921년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동맹휴학 사태가 일어나 이듬해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그때만 해도 공부보다는 음악과 연극을 더 좋아한 석주명은 거기서 과학자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을 만나게 된다.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박물학 교사로 재직 중이던 유명한 조류학자 원홍구가 바로 그였다.
석주명은 원홍구의 지도와 영향을 받아 1926년 졸업한 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립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 교수의 사사를 받았던 그는 생물과 관련된 공부를 하며 나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석주명 선생 기념비. ⓒ 연합뉴스
유학에서 돌아와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박물교사가 된 석주명은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 거기서 1942년까지 약 11년간 교사로 지내면서 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 연구에 매달렸다.
쉬는 날마다 포충망을 들고 개성 주변의 산과 들을 누볐으며, 방학이 되면 개성을 벗어나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니며 나비를 채집했다. 허름한 복장에 쓸모도 없는 나비를 찾아 헤매는 그를 두고 뱀을 잡는 땅꾼으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선의 나비박사로 서양학자들에게 알려져
석주명은 학생들에게도 나비를 채집해오라는 방학숙제를 내줬다. 당시 송도고보에는 전국 각처에서 모인 학생들이 많아 방학이 끝나면 전국 각 지방의 나비들이 석주명의 연구실에 쌓이곤 했다. 그가 나비박사로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 동안의 연구활동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의 활동이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는 사건이 우연히 벌어졌다. 1931년 어느 날 미국 앤드류스 공룡탐사대의 일원인 모리스 박사가 몽골지방의 탐사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다가 개성에서 열차를 내렸다. 원래 경성에 내린다는 것이 실수로 개성에서 내렸던 것.
개성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던 그는 다음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송도고보에 들려 박물관을 구경하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 거기에 전시되어 있던 석주명의 나비 표본과 원홍구의 조류 표본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모리스 박사는 석주명에게 미국의 박물관들에 나비 표본과 연구자료를 보낸다는 조건으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다음해부터 미국의 박물관과 나비 표본의 교환을 시작한 석주명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비교동물학과장의 도움을 받아 다른 서양학자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양에 그의 업적이 알려지자 1939년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에서 석주명에게 한국산 나비에 대한 연구를 총정리한 논문 집필 요청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1940년에 발간된 것이 바로 ‘조선산 나비 총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이란 영문 단행본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 학자가 과학 분야에서 영문으로 된 연구서를 펴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석주명이 외국 저명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이론’ 덕분이었다. 그가 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이미 한국 나비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었다.
개체변이 연구로 외국 학자들의 오류 바로잡아
석주명은 자신이 채집한 나비표본들을 일본 곤충학의 대가들이 발간한 마츠무라의 ‘일본곤충대도감’과 우치다의 ‘일본곤충도감’ 등과 비교해 정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가 기존의 도감에 실린 내용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즉, 자신의 연구결과에 같은 종으로 분류된 표본들이 도감에는 다른 종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 학자들이 범한 오류를 자신이 창안한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이론’을 토대로 바로잡아 나갔다. 당시 나비 연구자들은 자신이 채집한 개체가 조금만 특이하면 신종이나 아종으로 등록하곤 했다. 그러나 석주명은 그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해 그처럼 특이한 개체들이 환경의 차이에 따른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개체변이란 같은 종인데도 날개 길이 및 빛깔, 무늬수 등의 형질이 다른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석주명이 우리나라 각지에서 계절마다 수집한 배추흰나비만 해도 17만여 개체나 되었다. 그것을 모두 분석해 그동안 신종이나 아종으로 보고되었던 20여 개의 학명이 모두 하나의 배추흰나비임을 알아냈다.
그 같은 연구를 통해 석주명은 외국 학자들이 다른 종으로 분류한 921개의 한국산 나비 가운데 무려 844개의 동종이명을 말소시켰다. 이는 전체 동종이명의 90퍼센트가 넘는 수치였다. 석주명의 연구결과 한국 나비는 250여 종으로 정리되었는데, 오늘날 한국산 나비와 밝혀진 종수와 비슷한 수치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연구 업적이다.
하지만 석주명의 그 같은 연구결과에 대해 반박하는 일본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일본곤충대도감을 발간한 마츠무라 역시 자신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음에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아 기존 연구가 잘못됐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초급대학 졸업의 식민지 교사가 일본 제국대학 교수들의 연구를 바로잡았다는 자신감은 그의 말에서도 당당히 드러나고 있다.
석주명은 1939년 ‘조광(朝光)’ 6월호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34년의 논문에서 179개의 동종이명을 학계에서 말소시켰는데, 아직까지 아무 항의도 없다는 것에서 과거의 학자가 얼마나 개체변이를 확대시하고 많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하편에서 계속)
생물학에 민족성을 심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석주명 (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0)
2014.06.05. 08:28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석주명은 1930년대 초부터 1950년까지 20여 년의 연구생활 동안 무려 75만 개체에 이르는 나비 표본을 조사했다. 개체변이에 대한 범위를 규명해 나비에 대한 분류학 연구를 어느 정도 일단락 지은 그는 자신의 채집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산 나비 각각의 종에 대한 분포 연구로 연구 테마를 옮겨갔다.
즉, 각 종의 나비마다 서식지를 파악해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을 구하는 등 형태에만 치중하는 분류학에서 벗어나 유연관계를 고려하여 계통을 세우고 환경과 분포의 관계까지 밝혀내는 곤충학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연구를 미처 마무리하기 전 그는 한국전쟁 와중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다행히 누이동생 석주선이 한국전쟁 때 피난을 다니면서도 배낭에 보관한 덕분에 그의 분포 연구 결과는 1973년 ‘한국산 접류 분포도’라는 유고집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이 책은 한국 나비 250종이 분포하는 지역을 종마다 각각 한국 지도와 세계 지도 한 장씩에 붉은 점으로 표시한 지도 500장으로 편집되어 있다.
석주명은 제주도의 자연 및 인문사회 분야에 관한 연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진은 서귀포시에 있는 석주명 선생 기념비. ⓒ 연합뉴스
석주명은 제주도의 자연 및 인문사회 분야에 관한 연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진은 서귀포시에 있는 석주명 선생 기념비. ⓒ 연합뉴스
1942년 자신의 학문적 근거지였던 송도고보를 그만둔 석주명은 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의 촉탁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다음해인 1943년 제주도에 생약연구소의 시험장이 생기자 그는 파견을 자원했다. 그때만 해도 제주도는 채집 여행이 쉽지 않아 그의 연구에서 취약지구였으므로 모두가 꺼리는 벽지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약 2년간 근무하면서 제주도의 언어 및 풍속 속에 우리나라의 옛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제주도의 자연 및 인문사회 분야 연구에 뛰어들었다. 아직 지역연구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기 전이어서 석주명의 제주도에 대한 연구는 그를 ‘제주도학’이라는 지역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했다.
특히 그는 제주 방언을 중심으로 각 지방의 방언 분포를 따지는 일이 각 지방의 나비 분포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연구결과 1947년에 간행된 ‘제주도방언집’을 보면 경상도 및 전라도 등 각 지방의 방언을 제주 방언과 비교한 통계적 시도는 물론 몽골어, 일본어, 중국어, 필리핀어 등과 비교해 그 계통의 추구를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를 ‘조선적 생물학자’라고 칭해
그밖에도 석주명은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관계문헌집’, ‘제주도수필’, ‘제주도곤충상’, ‘제주도자료집’ 등의 제주도총서를 포함해 제주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논저 38편을 남겼다.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던 석주명은 국제어인 에스페란토에도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집필했는가 하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초창기 대표적 인물로 꼽힐 정도였다. 에스페란토 운동이란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1887년 폴란드 언어학자 루드비코 라자로 자맨호프가 만든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해 만민 평등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자는 언어운동이다.
더불어 그는 표준어도 수도권의 언어를 채택하기보다는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민족 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평소 가치관과도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구대상만은 철저하게 한국의 나비로 한정했다. 생물학은 다른 과학분야와 달리 향토색이 짙어서 ‘한국학적 생물학’이 가능하다는 그의 독특한 과학관에 따른 판단이었다.
따라서 석주명은 스스로를 ‘조선적 생물학자’라고 칭하며,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등 조선의 고전에서 나비와 관련된 기사나 인물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등 자신의 나비 연구를 한국학과 연결 짓곤 했다. 그는 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추진되었던 ‘조선학 운동’에 큰 관심을 보이며 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생물학 연구도 그 흐름에 놓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가 평생 나비 그림만을 그려서 ‘남나비’라는 별명으로 불린 조선 후기의 화가 남계우에 대한 3편의 연구 논문이다. 석주명은 그 논문에서 남계우가 그린 나비 그림을 통해 실제 나비 종류를 분석하고 당시 서울 근교에 자생하던 37종 나비 종류를 밝혀냈다. 이처럼 그는 평생 한국 나비만을 연구했으며, 외국 나비에 대한 연구는 한국 나비 연구에 참고하기 위해서만 진행했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10년간 하라
그의 주체적인 민족의식은 우리말 나비 이름 짓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부 나비를 제외하고는 일본식 이름만 있었고, 우리말로 된 나비는 별로 없었다. 석주명은 그가 정리한 한국산 나비 248종에 대해 우리말 이름을 직접 지었다. 각시멧노랑나비,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떠들썩팔랑나비, 은점어리표범나비 등등 순수한 우리말 나비 이름의 대부분은 그가 지은 것들이다.
나비에 대한 석주명의 연구 방식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중요한 나비가 발견되면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쫓아가 기어이 잡고야 말았다. 한번은 지리산에서 처음 보는 나비를 3시간 동안 추격해 잡은 적이 있다. 작은 나비를 쫓아서 험한 산길을 내달려야 했던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연구태도는 그가 남긴 다음의 한 마디에 잘 요약돼 있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10년간 하면 꼭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정성껏 가꿔야만 한다.”
해방 후 국립과학박물관의 동물학 연구부장으로 임명되어 연구를 계속하던 석주명은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사망했다. 그해 9월 폭격으로 인해 과학박물관이 전소되자 그에 대한 대책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시내에서 불의의 총격을 받아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일각에서는 불이 난 과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자신의 표본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숨졌다는 설도 있다.
석주명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죽음을 기려 일본인 학자 시로즈는 흑백알락나비 아종의 학명에 ‘석’ 자를 넣어 명명했으며, 사바타니란 학자는 홍줄나비의 학명에 ‘석’ 자를 넣어 명명했다고 한다.
그는 20여 년 동안 일본과 조선의 전문 학술지에 128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유고집 8권, 소논문과 기고문을 포함한 잡문 180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06.05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