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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 경상도(慶尙道) 영산현(靈山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 경상도(慶尙道) 영산현(靈山縣)
동쪽으로는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0리, 남쪽으로 칠원현(漆原縣) 경계까지 23리, 서쪽으로 창녕현(昌寧縣) 경계까지 15리,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78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서화현(西火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상약(尙藥)으로 고쳐서 밀양군(密陽郡)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전대로 소속시켰다. 원종(元宗)인 감무(監務)를 두고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서화(西火)ㆍ취산(鷲山)ㆍ취성(鷲城).
【성씨】 본현 신(辛)ㆍ문(文), 전(全) 김(金)이라고도 한다. 조(曺)ㆍ채(蔡), 박(朴) 내성(來姓)이다.계성(桂城) 서(徐)ㆍ진(陳)ㆍ석(石)ㆍ전(田)ㆍ신(申), 이(李) 내성(來姓)이다.
【풍속】 백성들은 모두 주씨, 진씨다 고려 신예(辛裔)의 시(詩)에, “영취산(靈鷲山) 높아 조그만 티끌도 없는데, 안구역 백성들은 곧 모두 주씨(朱氏), 진씨(陳氏)로다.” 했다. 뽕나무를 심고 대나무를 가꾸었다 남재(南在)의 시(詩). 십실(十室)의 음악 소리와 글 외우는 소리 이지강(李之剛)의 시(詩)에, “생각 밖에 조그만 고을에서 음악 소리와 글 외우는 소리 들리니, 모름지기 조정에서 문화를 숭상함을 알겠도다.” 하였다.
【형승】 취령진촌(鷲嶺鎭村) 이백첨(李伯瞻)의 시(詩)에, “취령(鷲嶺) 높고 높아 네 마을을 누르니, 영특한 재주와 무사(武士)의 지략(智略) 몇 가문(家門)이던가.” 하였다.
【산천】 영취산(靈鷲山) 현의 동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서역(西域)의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이 산이 천축(天竺)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아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태자산(太子山)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 신라(新羅) 태자(太子)의 묘가 있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도초산(道草山) 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건현(件峴) 현의 동쪽 22리에 있다. 이물현(尼勿峴)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 석천산(石泉山) 현이 남쪽 15리에 있다. 병풍암(屛風巖)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천연(穿淵)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방아굉이가 물에 잠겨 땅속을 뚫고 들어가다가 법사지(法師池)로 나왔다.” 한다. 지금은 변해서 내가 되었다. 기음강(岐音江) 현의 서쪽 28리에 있다. 창녕현(昌寧縣) 감물창진(甘勿倉津) 하류(下流)인데 의령현(宜寧縣) 정암진(鼎巖津)과 합쳤다. 옛날에는 가야진(伽倻津)이라고 불렀다. 매포진(買浦津) 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 멸포(蔑浦)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漆原縣) 우질포(亏叱浦) 하류다. 동보포(同步浦)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온천(溫泉) 현의 동남쪽 17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계성천(桂城川) 계성현(桂城縣)에 있다. 창녕현(昌寧縣) 화왕산(火王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매포(買浦)로 들어간다. 법사지(法師池)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가뭄이 들면 호랑이 머리를 못에 넣으면 곧 비가 왔다. 장자택(長者澤)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작택(鵲澤)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죽전(竹箭) 병풍암(屛風巖)에서 난다. 붕어[鯽魚]ㆍ잉어[鯉魚]ㆍ복령(茯苓)ㆍ매실(梅實)ㆍ꿀[蜂蜜]ㆍ감[柹]ㆍ석류(石榴)
『신증』 감초(甘草) 밭이 있다.
【봉수】 여통산봉수(餘通山烽燧) 계성현(溪城縣)에 있다. 현에서 떨어지기 14리인데 남쪽으로 봉산(烽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창영현 합산(合山)에 응한다. 봉산봉수(烽山烽燧)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칠원현(漆原縣) 안곡산(安谷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여통산(餘通山)에 응한다.
『신증』 정사(亭榭) 쌍수정(雙樹亭)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 홍의달(洪義達)의 회문시(回文詩)에, “맑은 그늘 푸른 나무 서쪽과 동쪽에 무성한데, 겹겹이 둘러선 산 천 번이나 거듭했네. 갠 날 늦안개는 희미하게 멧부리를 두르고, 저녁 하늘 봄비는 가늘게 바람에 불리네. 푸른빛이 흰 것과 연한 것은 매화와 대나무가 섞여 있고, 푸른빛에 붉은 것이 겹쳐 있는 것은 꽃이 소나무에 닿은 것일세. 꾀꼬리는 노래하고 제비는 춤추니, 영주(瀛州)나 봉래(逢萊) 같은 좋은 경치 정말 웅장해.”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일문역(一門驛)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온정역(溫井驛)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제원(普濟院)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매포(買浦) 동쪽 언덕에 있다. 급구원(汲救院) 계성현(桂城縣)에 있다.
【불우】 보림사(寶林寺)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이 절에 반야루(般若樓)가 있다. 고려 김륜(金倫)이 합포 만호(合浦萬戶)가 되었을 제, 서역(西域) 중[僧] 지공(指空)을 위해서 이 누(樓)를 3일만에 지었다. 지공(指空)이 여기 올라가서 반야경(般若經)을 강론하였다 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죽림사(竹林寺)ㆍ고봉사(高峯寺)ㆍ서림사(西林寺)ㆍ적조사(寂照寺)ㆍ법화사(法華寺) 모두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절벽(絶壁) 위에 겨우 뚫린 돌길이 있어 사람들이 붙들고 오르내린다. 일미사(一味寺) 화왕산(火王山)에 있다. 석천사(石泉寺) 석천산(石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영취산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 사전(祀典)에는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라고 하여 봄 가을로 본읍(本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써 있다.
【고적】 계성폐현(桂城廢縣)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밀성군(密城郡)에 붙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곳에 소속되었다. 뒤에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밀성(密城)에 붙였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에 다시 여기로 소속되었다. 마천부곡(馬川部曲)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왕기음부곡(王岐音部曲) 계성현(溪城縣) 서쪽 10리에 있다. 길곡부곡(吉谷部曲) 지금은 기곡(箕谷)이라고 부르는데 현의 동남쪽 20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곡계당기(箕谷谿堂記)에 쓰기를, “취성(鷲城) 동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깎은 듯이 삼면이 높다랗고, 그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마치 키[箕]와 같이 생겼기 때문에 기곡(箕谷)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동방(東方)은 본래 기자(箕子)가 봉한 나라요, 또 기성(箕星)의 분야(分野)이므로 이 골짜기를 기곡이라고 한 것은 처음에는 비록 그 모양이 키와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겠지만 그 이름의 뜻을 상고해 본다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체 키라는 것은 곡식을 까부르는 도구인 까닭에 군자를 안으로 하고 소인을 밖으로 하는 뜻이 있다 한 것은 태괘(泰卦)의 형상[象]이다. 그래서 어진 사람이라야 이 골짜기에 살 수 있고 못난 자는 제 몸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군자(君子)다운 이 부감(李府監)이 여기에서 늙은 것이다. 무술(戊戌)년에 집 동쪽에 당(堂)을 짓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시냇물을 끌어 오리를 기르며, 대나무 천 주를 심어 음악 소리를 대신하고 소나무 백 그루를 심어 절조를 가다듬는다. 이는 모두 계당(谿堂)의 구경거리로 군자(君子)가 즐겨하는 바이다. 마침내 언덕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 취봉(鷲峯)이 우뚝 서 있는 것은 키[箕]의 발뒤꿈치가 아닌가! 낙수 물이 가로놓인 것은 키의 혓바닥이 아닌가! 그 밖에 쇠잔한 산과 끊어진 항구, 별 같은 것이 또한 많다. 하늘에는 기성(箕星)이 있고 땅에는 기곡(箕谷)이 있어 빛나는 멧부리의 기상이 서로 사랑하는 덕에 감응하여 덕을 나게 하여 계당(谿堂)의 주인에게 주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 부감(李府監)이 그렇게 수(壽)하고 또 강녕하며 그 자손이 잘 되고 또 많단 말인가. 내가 가서 그를 찾으니 공(公)은 나를 계당 위에서 대접하여 술을 마시고 나서 그 당(堂)의 기(記)를 청하기를, “내 당(堂)이 이루어진 지 이제 15년이나 되었건만 글하는 선비라고는 그대가 처음 왔으니, 나를 위해서 기(記)를 지어달라.” 했다. 나는 강경하게 사양했으나 그 뒤 며칠만에 또 편지를 보내어 권하는 뜻이 더욱 두터웠으므로 끝내 사양치 못했다.” 하였다. 오가이향(烏加伊鄕) 매포(買浦) 동쪽에 있으니 현에서 거리가 20리다. 퇴곡소(退谷所)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수다이소(水多伊所)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신천(辛蕆)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밀직사(判密直事)에 이르렀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문인(門人)이다. 유(裕)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반대하는 의논이 있을 때 천(蕆)이 총랑(摠郞)으로서 힘써 문묘 종사를 주장했다. 신예(辛裔) 과거에 급제하였고,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남대어사(南臺御史)가 되었으며, 고려에 벼슬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본조 신극례(辛克禮) 태종조(太宗朝) 때 좌명정사공신(佐命定社功臣)이 되었고, 취산군(鷲山君)에 봉해졌다. 신유정(辛有定) 장수의 재질이 뛰어나고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도안무사(都按撫使)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무절(武節)이다. 신인손(辛引孫) 유정(有定)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신석조(辛碩祖) 인손(引孫)의 아들로 고제(高第)에 뽑혔으며 문예(文藝)로 이름났다. 벼슬이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이르고 시호는 문희(文僖)다.『신증』 신주(辛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우거】 본조 이첨(李詹) 집이 현의 서쪽 마고리(馬古里)에 있다. 매화나무 한 쌍을 뜰 앞에 손수 심고 스스로 그 집을 이름 지었는데, 그 매화가 지금까지 있다.
【효자】 본조 박연수(朴延守) 연수(延守)가 나이 14세 되던 영락(永樂) 갑진(甲辰)년에, 그 아버지를 따라 산골짜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밭을 만드는데, 아비가 범에게 물려 가는 것이 보였다. 연수는 왼손으로 아비의 발을 잡고 오른손으로 낫을 휘둘러 범을 위협하면서 범에게 수백 보(步)나 끌려가다가 드디어 아비의 시체를 빼앗아서 돌아왔다. 경태(景泰) 을해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안도(安堵) 벼슬이 우헌납(右獻納)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자 혼자 여묘살이 3년을 마쳤다. 영락(永樂) 을유(乙酉)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의(朴椅) 어머니가 나쁜 병에 걸리자 의(椅)는 허벅다리 살을 베어 끓여 먹이니 병이 점점 나았다. 성종조(成宗朝) 때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열녀】 고려 신씨(辛氏) 낭장(郎將) 신사천(辛斯蕆)의 딸이다. 홍무(洪武) 임술(壬戌)년 6월에 왜적 50여 명이 영산(靈山)을 침략했을 때 사천(斯蕆)은 온 집 식구를 데리고 난을 피하여 멸포(蔑浦)를 건너려 하는데, 적의 추격이 몹시 급했다. 이때 사천의 식구들은 모두 배에 타고 둘째 아들 식열(息悅)이 밀고 끌었는데, 때는 여름 장마로 물이 많고 빨라서 뱃줄이 끊어지면서 배가 갑자기 언덕에 닿았다. 이에 적이 쫓아와 사천을 쏘아 죽이고, 신씨(辛氏)의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했다. 신씨가 듣지 않자 적이 칼날을 번뜩이면서 위협했으나 신씨는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놈들아, 죽이려면 죽여라. 너희가 이미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너희들을 따라가겠느냐.” 하고, 적의 목을 움켜잡고 발길로 차서 넘어뜨리자 적은 화가 나서 죽였다. 그때 나이 20세였다. 체복사(體覆使)가 이 일을 모두 갖추어서 사관(史官)에게 보고하고 또 조정에 알려서 비석을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신씨(辛氏) 낭장(郞將) 김우현(金遇賢)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을미(乙未)년에 왜적이 졸지에 이르니 우현(遇賢)은 군사를 일으킨 장수로서 도망치고 나오지 않았다. 감군(監軍)이 우현의 있는 곳을 신씨(辛氏)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이것이 만일 상을 탈 일이라면 남편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지만, 이제 죄를 주려고 묻는 바에야 어찌 차마 그것을 사실대로 가르쳐 주어서 남편이 죽음을 당하게 하겠는가.” 하고 아무리 매를 때려도 종시 말하지 않고 마침내 맞아 죽었다. 영락(永樂) 을미(乙未)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제영】 천감목노호산촌(泉甘木老好山村) 이원(李原)의 시(詩)에, “샘물 달고 나무 늙은 좋은 산촌에, 일 한가로운 대낮 관청 문이 반쯤 닫혀 있네. 절후는 풍년이고 무기 쓸 일 없으니, 농삿집 자제들도 글을 할 줄 안다네.” 하였다. 죽리모옥엄형문(竹籬茅屋掩荊門) 최종리(崔宗理)의 시(詩)에, “산이 막아주고 시내 감돌아 한 마을 이루었는데, 대울타리 초가집은 대문이 닫혀 있네.” 하였다. 노전계회사녹문(路轉溪回似鹿門) 최수(崔脩)의 시(詩)에, “봄 구름 비 되어 앞 마을을 지나니, 길은 구부러지고 시내는 돌아 녹문(鹿門)과 같네. 다음날 취봉(鷲峯)에 집을 지으면, 어느 사람이 북산문(北山文)을 모방해 지으리.”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仁祖) 9년에 창녕(昌寧)을 합하였다가 15년에 나누었다.
【고읍】 계성(桂城) 북쪽으로 15리다. 본래 신라 때에 읍을 설치하였는데 옛 이름은 알 수 없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계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밀성군(密城郡)에 속했고, 공민왕(恭愍王) 15년에 내속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다시 밀성에 속했다가, 본조 태조 3년에 또 내속하였다.
【방면】 읍내(邑內) 끝이 10리다. 부곡(釜谷) 동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40리다. 기곡(箕谷) 동남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20리인데, 고길곡부곡(古吉谷部曲)이다. 도천(都泉) 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다. 계성(桂城)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다. 마단(馬丹) 남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은 20리다. 장가(長嘉)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다. 도사(道謝)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다. ○ 마천부곡(馬川部曲)은 동남쪽으로 30리다. 옥기음부곡(玉岐音部曲)은 계성 옛 현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오가이향(烏加伊鄕)은 매포(買浦) 동쪽에 있고, 현과 20리 거리다. 퇴곡소(退谷所)는 동쪽으로 10리다. 다이소(多伊所)는 동쪽으로 30리다.
【진도】 매포진(買浦津) 남쪽으로 23리이고, 멸포(蔑浦)라고도 부르며, 즉 칠원현(漆原縣) 혜질포(兮叱浦) 하안(下岸)이다. 송진(松津) 남쪽으로 20리인데, 칠원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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