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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회복 : 정체성 12.
제3부 하늘의 상이 정체성이다.
3. 박해 받는 사람이 받을 상
하늘에서 주시는 두 번째 큰 상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에 대한 상이다. 박해당하는 것이 좋지 않은 일 인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박해를 받음으로써 오히려 하늘의 상은 더 커지는 것이다. 놀랍게도 박해를 받는 그 자체로 이미 큰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받는 박해와 비난 자체에 대하여 이미 하늘에서는 큰 상을 준비하신다는 것이다.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은 박해를 받아도 끝까지 이겨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씀은 박해받을 짓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 3:14)
성도가 자기 신앙 양심대로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박해는 더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박해는 오지 않고 고난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 신앙양심을 따라 살려고 하면 반드시 박해는 따라 오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한 박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다가 받는 어려움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려다가 반대자들에 의해 곤란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인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 선지자들에 대한 박해
주님은 박해받는 사람들을 선지자들과 동등하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똑같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선지자들과 똑같은 이유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다면 선지자들이 받는 상과 동일한 큰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올바른 선지자라면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말하고 복음대로 살면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영원히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이고 그러므로 선지자가 받을 상을 주시는 것이다. 왜 선지자들을 박해했을까? 우선 선지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공의에 기초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차피 박해를 받거나 죽거나 할텐데 하나님은 왜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시는가?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한다. 아무리 선지자들을 박해해도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박해가 온다. 인간의 모든 종교는 제도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율법이나 복음이 빠질 수도 있고 다른 거짓 복음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마23:34)
● 초대 교회 성도들에 대한 박해
초대의 성도들이 당한 박해는 선지자들이 당한 박해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다.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에 맞음, 톱으로 켜짐, 칼로 죽임, 짐승 가죽 입고 유리하기, 궁핍, 환난, 학대. 말로만 들어도 끔찍하다. 이것이 박해의 종류이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런 끔찍한 박해를 받는다면 그 자체로 상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신약시대 성도들이 선지자들과 동일한 박해를 받았지만 박해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소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되 예수님을 통해서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박해가 훨씬 많았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참된 구원의 길을 받지 못하고 박해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 2:14)
예수님이 박해를 받았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결단 속에 이미 예수님과 같은 박해를 각오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20)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성령을 따라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도 같다.
사탄이 물질을 지배하고 죄와 죽음을 장악하고 있는 세상에서 영으로 난 사람이 살아가려면 당연히 반대나 위협이나 박해를 받아야 한다. 박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리를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또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박해가 따라온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삶에서 구현해내는 모습을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느낀 사람은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와 악을 싸워 이기려고 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결국 경건과 같은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서 그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박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삶을 살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이다. 예수님은 팔복선언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에게는 선지자가 받을 상과 똑같은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초대교회의 시대나 현재의 시대나 이런 박해가 행해지는 지역이 다수 있다. 우리가 지닌 믿음은 동일하다. 그 믿음으로 순교하는 성도들도 있고 그 믿음으로 물질 만능의 세상에서 싸우다가 심각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박해를 당한다면 그 사람은 선지자들과 동일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박해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니다. 평화시대에는 평화시대에 맞는 박해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다만 그런 박해들은 박해라는 모습이 아니라 손해, 불이익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삶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정직과 긍휼의 모습들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박해인 것이다.
기독교인은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뱀처럼 지혜롭기도 해야 한다. 기독교의 구원의 세상 윤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사실은 세상 윤리보다 훨씬 엄격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 품고 있었다면 오늘날처럼 이토록 세상이 썩어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지금 이 나라의 미래를 보면 큰 고난이 닥쳐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전부 물질과 명예와 출세의 우상 숭배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축복! 축복! 또 축복!하면서 끊임없이 기복신앙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또는 끝없이 치유, 회복, 용서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참된 복음으로, 진실된 믿음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는 회복될 수 없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쫓아가는 이유는 박해가 두려워서이다. 나에게 돌아올 손해, 불이익, 위협 같은 것들이 우리를 협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면 박해는 없다. 하지만 거짓 평안의 뒤에는 무서운 심판이 따라온다. 지금도 그리스도인의 말씀 외면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다. 박해를 두려워하는 정체성은 건강한 정체성일 수 없다. 박해를 받는데 큰 상을 주시는 것은 몹시 힘들지만 오로지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상을 주시는 것이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사탄이 지배하는 의식들을 과감하게 대항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만군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께서 계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 박해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은 박해를 받을 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결코 저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왜 축복해야 할까? 또 어떤 축복을 해야 할까? 가장 큰 축복은 저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축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이런 행동은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마음의 도전을 받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의 축복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 복을 빌어야 한다. 그러면 저들에게 그 복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복으로 갚은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아주 큰 상이 주어질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23:34)
박해를 받을 때 취해야 할 두 번째 태도는 박해가 올 때 참고 견디는 것이다. 알면서도 당하고 몰라서도 당하는 것이 박해이다. 그래서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큰 상이 주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예수님은 오히려 박해를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박해가 올 때 정말로 기뻐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그렇게 박해받을 만한 믿음은 없으나 성령님으로 인하여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기뻐할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이다. 후에 제자들도 실제로 이렇게 박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선지자들이 똑같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받을 큰 상을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늘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기뻐하면서 박해를 당할 이유도 없다. 하늘의 상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작동되게 만들어주는 힘과 능력이 되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사도바울도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약할 때가 오히려 강할 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야말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자기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게 되므로 사실상 가장 강할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박해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박해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이때는 바로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복으로 충만한 때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박해로 인하여 약해질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이 세상에 아무리 강한 것이 덮쳐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근거이다. 하나님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살리시고 그렇지 않더라도 영생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시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9)
박해가 올 때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하다. 박해나 고난을 만날 때 그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며 참고 견디며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박해를 받는 것 자체로 이미 하늘에 큰 상을 준비해 놓으셨다. 세상을 거슬러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 박해를 통하여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다.
첫댓글 집사님 감사해요~~ 기쁘고 행복합니다.
우리 삶의 시작과 끝 모든것이 주님의 주관하심입니다.
같은 자영업지만 상황이 다르잖아요...집사님 힘드신 가운데 애써주심에 감동이고
저도 힘내고 힘내고있습니다.
주님을 닮아가려고요.
감사한 마음과 눈으로 봐주시니 제가 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