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존재
정온유
말 없는 말들이 잠들어 버린 시간
오히려 안부들이 일렁일지 모른다는
진공 된 생각으로부터
존재들이 붉어진다
멍이든 공간을 좇는 일로 채워가는
막다른 길마다 실종되는 언어들
부재는 존재가 되고
존재는 부재가 된다
집채만큼 부풀린 고요의 무게가
지워진 삶처럼 무섭게 엄습해오면
사납게 몸서리치는
부재의 존재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부재’의 시간보다 ‘존재’의 시간이 더 긴 생명체든 사물이든 미생물이든 그런 ‘존재‘는 애초에 없다. 사람이 ‘부재’를 두려워하고 낯설어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대리 감정이다.
라틴어 계열의 어떤 언어는 ‘있다’라는 말을 변하지 않고 성격을 의미하는 경향에 쓰는, 즉 거의 영구적인 “ser”라는 동사와 상태를 의미하는 경향에 쓰는, 즉 변할 수 있는 “estar”를 라는 동사를 둘 다 ‘존재’한다는 뜻으로 쓴다. 또 ‘있다’ 그 동사들 앞에 “no”를 붙이면 졸지에 ‘부재’가 된다. 하지만 이 한 단어 ‘no’가 생살여탈권을 쥘 만큼 부재와 존재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단지, 그 방식은 “밥은 먹었는지?”, “어디 가는지?”, “어느 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하는지?” 혹은 단지 눈빛으로 그 질문과 대답을 대신하고 만다. 인류만이 누려온 관계의 올가미다. 안부를 묻는다면 그와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묻지 않는다면 '부재'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공간’이 먼저였는지 시간이 먼저였는지 난 모른다. 아닌 내 사고 안에는 ‘부재의 존재’ 같은 의문이다. 그것은 영구적으로 그에게 내가 존재하는 삶을 사는지 변할 수 있는 정도로 그에게 내가 존재하는 삶을 사는지 정도의 그러니까 생각할수록 머리 아픈 자문자답일 뿐이다.
살면서 ‘몸서리’ 쳐 본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요의 무게’라는 질량을 숙명처럼 계량하면서 때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자포자기도 했다가 어떤 땐 환장할 만큼 기뻐하기도 한다.
고요의 무게를 ‘부재의 존재’로 받아들일 때 마침내 나의 ‘존재’는 ‘부재’가 된다.
출처 : 시민포커스(http://www.simin11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