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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낙남정맥 스크랩 낙남정맥 6구간
영일만 친구! 추천 0 조회 87 12.01.28 00:1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6차,

 

                                                                                                  일시; 2012. 1.15 4:10--14:40

                                                                                                 구간; 추계재..대곡산..화리재..무량산..(큰재)..(백운산)

                                                                                                          장전고개..떡고개..덕산..배치고개..신고개..탕근재

                                                                                                          봉광산..새티재 18.5km

                                                                                                  참여인원;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원 35명과 

 

6구간 개념도

 

 

개화산역 

사당에서 11시30분 출발

금곡 IC를 지나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달려 추계재에 도착하니 3:30,

밤 하늘에는 동짓달 스무 이틋날 달이 서산으로 기울어진다.

바람은 푸근하여 산행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온이다.

익숙하게 준비를 하고 하나 둘씩 출발한다(4:10)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우측 숲으로 들어선다.

도로를 개설하느라 절개를 한 탓에 출발 지점부터 제법 가파르다.

10여분 동안 땅만 내려다 보고 오르다가 다소 완만한 능선을 만난다.

가뿐숨을 몰아쉬고 주위를 둘러보니 우측 방향으로는 많은 불빛이 명멸한다.

좌측 능선 아래 추계리는 한동안 불빛이 이어 지다가 숲속으로 사라진다.

 

또다시 가파른 능선을 오르지만 조금 전 보다는 다소 완만하다.

 

잡목이 수시로 앞을 가로막는 등로를 이어 가다가 툭 터진 곳으로 내려선다.

가선대부 병조참의 인동 장씨와 정부인 경산 김씨 묘라고 쓰인 상석 뒤로 봉분 2개가 나란히 잠들어있고

그 옆에는 빛 바랜 검은 비석이 어둠속에 서있다.(4:30).

오랜 세월을 지켜온 비석의 글씨는 희미하지만 옆에 새운 상석은

근래에 새로 설치한 듯 글자가 분명하다.

완만한 능선을 이어 가다가 우측으로 송전탑을 스친다.(4:50)

 

 

 

 

정상인지 능선인지 구분이 안 되는 평탄한 구간에 오르니

우측 발 아래로 명멸하는 불빛이 계속 따라온다.

발아래 불빛은 가르멜 여자 수도원으로 향하는 가로등 불빛으로 짐작이 된다.

 

지형이나 소요 시간으로 판단 하건데 이곳은 지도상 404m 봉우리이고

주변에는 사람 얼굴을 닮은 바위가 우뚝 서있다.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이번에는 집체만 한 큰 공 같은 바위도 흩어져있다.

고성은 공룡의 자취가 유난히 많아 둥그런 바위가 공룡 알이 아닌가 할 정도로 특이하다.

 

 

                             404m 봉우리 부근 얼굴 닮은 바위

 

 

   1980년대 초반, 구미시에 있는 공장에서 근무 할 때

   같은 부서의 여 직원이 사직을 하고 수녀가 되겠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수녀가 되거나 불가에 귀의 할 경우 종교적인 의지가 강하거나

   살아 가면서 특별한 동기가 있지 않고서는 선뜻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1년 후에 수녀복을 입고 회사를 찾아 왔을 때

   수녀복 속에 드러난 아름다운 모습과 가련함이 동시에 배어 나옴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무엇이 이 여자를 수녀가 되는 길로 이끌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연은, 왜관 순심여고 앞에 있는 집에서 자라면서 항상 수녀가 되는 것을 꿈꿔 왔으며

   집에서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에서 일도 잘하고 인물도 반듯하여 많은 총각들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었는데

   제복을 입고 수녀의 길로 들어선 예비 수녀의 모습을 보고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파계를 떠 올렸었다.

   지금은 어엿한 수녀님이 되어서 어떤 모습일지 궁금 하기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30년 전의 시간으로 되 돌려 놓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가지런히 단장된 경주 최씨 묘를 지나고 이어서 유인 함안 이씨 묘를 지난다.

봉분은 다소 허물어 졌으나 묘지 앞에는 까만 오석으로 비석을 세워 놓았고

본관과 이름도 함께 써 놓아서 조금은 특이한 느낌을 갖는다.

통상 여자들의 묘에는 유인 OO(본관), O( 성씨) 之墓 라고 써 놓는 것이 유가儒家의 관례였는데

근래에 설치한 상석이나 비석에는 고인의 본관, 성씨 이외에 이름까지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대곡산 정상 오르기 직전 소나무

 

 

평탄한 안부와 임도를 지나서 완만한 능선으로 오른다.

정상에 이르기 전에 기이한 형상의 소나무 두 그루가 마치 팔을 벌려 감싸 안듯 반긴다.

많은 산악인들에게 사랑을 받던 특이한 형상의 소나무 이다.

정상은 빼곡한 풀로 덮혀서 어디가 정상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누군가 나무 가지에 정상 표지판을 걸어 놓았고

웃 자란 풀 속에는 삼각점이 박혀서 대곡산 임을 알려준다.(545m, 5:20)

진행 방향으로 불야성을 이룬 고성읍의 불빛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대곡산 정상에서 건강미 넘치는 남성

 

 

     대곡산大谷山(545m),

     낙남정맥 구간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서

     정상은 삼각점 이외에는 특별한 표지가 없다.

     산의 높이는 542.9m, 시중의 등산 지도에는 545m,,등 제 각각 이지만,

     이곳은 철마산, 천왕산을 거쳐 통영으로 향하는 통영기맥의 분기점이다.

 

 

 

                                                   대곡산 정상 삼각점

 

 

잠시 사진을 찍고 서둘러 앞선 일행을 뒤따른다.

철쭉 나무가 빼곡하여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짐작으로만 가다가

툭 터진 공간을 만난다.

다시 이어지는 잡목, 그리고 내리막은 가히 절벽에 가깝다.

등로는 얇은 흙 먼지가 일고 있으나 그 아래는 길이 얼어 붙어서 수시로 얼음 조각이 드러난다.

실로 위험 천만한 구간이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려선다.

 

 

급경사가 끝나는가 싶더니 좌측으로 낡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고

등로는 철조망 옆으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그 옆은 간간이 낭떠러지이다.

한동안 이어 오다가 다소 평탄한 지역에 이르니 이번에는 동물의 똥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좁은 철조망 옆길을 따라 오다가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다.(5:40)

 

 

                              대곡산 내려 서는 길, 농장의 철조망과 좁은 등로

 

 

     대곡산 자락 능선은 오래된 사슴 목장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국내에서 자라는 사슴을 키웠는데, 요즈음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큰 사슴(엘크)를 키우고

     오소리도 키웁니다. 주로 식용으로 키우는 겁니다.

     그곳 농장에서 흘러 내리는 동물의 오폐수가 계곡을 타고 갈천으로 흘러 내려서 남강으로 이어 지는데

     그 구간은 개울에도 못 들어 갈 정도로 악취가 심합니다….

                                                                      (개천면 사무소 직원)

 

 

시멘트 길을 따라 5분여 올라가니 철조망 Gate가 설치되어있고

길은 좌측으로는 조금 전에 지난 사슴 목장으로, 우측으로는 비 포장 임도로 3갈래 친다.

지도상으로 마장골 안부에 이른다.

임도 끝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서니 잘 단장된 성주 배씨의 묘가 잠들어 있다.(5:50)

 

묘지 뒤 왼쪽 숲으로 올라선다.

소나무 숲이 시원하게 느껴 지더니 잠시 후에 잡목과 가시 넝쿨이 얼굴을 할키면서

가파른 등로가 이어진다.

조금 더 진행을 하여 편백나무 숲이 우거진 한적한 곳을 지나 작은 능선에 도착한다.(483m 능선)

 

대곡산 정상에서 이곳까지의 등로를 충분히 판단 할 수 있는 지점이다.

대곡산 내림길 안부의 사슴 농장의 철망으로 인하여

낙남정맥의 등로는 사슴 목장 안으로 잠식 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등로는 철조망 옆 위험한 길을 이어 왔으며

마장골 안부에서도 정면의 산을 넘지 못하고 우측으로 비껴 온 것이다.

 

완만한 능선을 넘어서니 내림길은 온통 가시나무, 청미래 넝쿨, 억새 풀이 앞을 수시로 가로 막는다.

개간을 한 유실수 단지 인듯 밤 나무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평탄한 지점,

지도상으로 방화골 안부에 이른다.

 

여전히 앞길을 가로 막는 지독한 넝쿨식물,가시나무와 억새가 얼굴을 할킨다.

 

가뿐 숨을 몰아쉬고 정상에 이르니 또다시 고성읍 불빛이 드러난다(527m봉우리, 6:25)

능선 좌측으로 산촌의 불빛이 다시 드러나고 차가운 새벽 바람이 뺨을 때린다.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가 급경사 내리막길을 지나고 툭 터진 곳으로 내려서서

넓직한 시멘트 임도가 사방으로 갈래를 치고 있는 화리재에 도착한다.(6:40)

 

 

          화리재,

          평탄한 고개로서 임도가 사방으로 뚫려있다.

          우측은 양화리 수치골이고, 좌측은 갈천리 종생마을로 내려서는 길이다.

          그래서 종생마을 주민들은 양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양화고개라고 부른다.

          임도는 이곳에서 무량산 좌측 산 비탈을 감고 돌아 무량산과 백운산 중간 큰재로 이어진다.

 

 

임도를 가로 질러 숲으로 들어 선다

길은 평탄하고 후미 그룹 3-4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새벽이다.

조금 더 진행을 하다가 뒤 돌아오는 탱크님을 만난다.

앞선 그룹과 진행을 하다가 숲속에서 잠시 용무(?)를 보고 재 출발하였는데

어두운 숲속에서 방향을 착각을 하여 반대 방향으로 오다가 우리와 만난 것이다.

함께 진행을 하다가 회리재에서 이어진 임도를 다시 만난다.(6:45)

우측 숲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를 따라 일행 8명이 함께 오른다.(6:50)

 

 

 

                 화리재에서 큰재로 이어가는 임도 중에서 무량산으로 오르는 이정표

 

서서히 고도를 높이는 등로, 그리고 시간상으로 밀려오는 허기 때문에 밥 생각이 간절하다.

2, 3단 테라스 식으로 힘들게 고도를 이어가니 능선에 늘어선 한 무리의 불빛이 반갑게 맞이한다.

선두 그룹이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다 .(무량산 갈림길, 7:05)

뒤 쳐져서 가다가 보면 앞선 그룹이 기다려 주는 것이 그렇게도 고맙게 느껴진다

선두는 이미 무량산을 다녀 왔다고 한다.,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무량산에 올라 잠시 사진을 찍고 삼거리로 돌아온다.

 

 

 

 

         무량산(581.4m)

        고성의 진산으로서 정상에는 까만 오석 뒷면에 고성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고 쓰여있다.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은 모습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은은한 산세를 지녔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5구간 산행의 최고봉이자 고성군의 500m가 넘는 고만고만한 많은 산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고성의

진산(鎭山)이다.

무량산 자락에는 해인사 다음으로 큰 법천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며

지금은 흔적이 없이 지주, 석조물, 붕도탑 등이 출토되어 무언으로 말해준다고 한다.

무량은, “무량수는 영생에 귀일하고 무량대수는 무한대에 귀결한다라는 불교 에서 나온 말이다.

우측 양화리에는 대무량사라는 절이 있다.

그러나, 높이는 정상석엔 581.4m, 삼각점에는 582.4m, 지형도에는 583m로서 다소 혼란스럽다.

 

 

 

 

                                            무량산 표지석 뒷면에 새긴 글

 

 

 

 

 

도착한 일행은 모두 떠나고 경암님과 후미 그룹이 도착 할 때 까지 기다린다.

후미대장, 정문교 님이 버너를, 그리고 경암님은 찌개 재료를 준비한 탓에

기다렸다가 아침을 먹고 같이 가겠다고 한다.

어디쯤 오는지 소리쳐 불러보니 저편 능선에서 희미하게 반응을 한다.

30여분 후에 사이먼님 부부와 함께 도착하여 다섯명이서 멋진 전망대에 자리를 잡는다.

 

 

넓직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내려다 보니

발 아래는 화리재에서 내려서는 양화리 계곡이고

양화 저수지 옆으로는 커다란 대가 저수지가 잔잔한 호수 같다.

그 뒤로는 드넓은 평야 한 가운데 고성읍이 돗단배 같이 서있다.

고성읍 뒤로 벽방산이 드높고 좌측 거류산도 산세를 자랑한다.

읍내 우측으로는 들판을 지나 고성만이 지척이다

넓은 바다 뒤로 점점이 박힌 섬들, 그리고 더 멀리로 통영, 거제시로 짐작되는 높은 산군들이

울을 치고 들어서 있다.

날씨가 다소 흐려서 멋진 일출을 놓치는 것이 아쉽지만

고성읍, 고성만을 뒤로한 산, , 바다는 평화롭기 그지 없다.

고려시대부터 수시로 왜구들이 넘나든 곳,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 한 고장임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무량산을 조금 지난 전망바위에서 고성읍 조망,

                       앞으로 양화 저수지, 대가 저수지 그리고 멀리 뒤로 거류산(좌측), 벽방산(오른쪽)

 

거류산 자락에는 고성이 낳은 산악인, 엄 홍길의 기념관이 있고

그곳에도 기념품들이 전시되어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엄홍길 님은 우리가 지나온 5구간, 양전산 자락의 봉림리에서 태어나서 3세때 의정부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망월사 역 앞에도 기념관이 있고 많은 기록과 장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성,

뻬어난 산세와 넓은 들판, 그리고 풍부한 해산물을 접할 수 있는 바다를 접한 이곳은

한때 대한민국 고위 공무원을 가장 많이 배출된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풍수가 수려한 곳이다.

 

 

후미대장과 사이먼 님이 건내는 소주를 한잔씩 들이키니 추운 날씨에 뱃속에 콰 하다.

경암님이 김치, 돼지고기 찌게를 두개의 코펠에 가득할 만큼 준비를 해왔다.

듬직한 체구와 서글 서글한 경상도 사나이 답게 푸짐하게 준비를 해 온 덕분에

다섯명이 먹어도 충분하다.

장갑을 벗은 손끝이 시리지만 술과 찌게로 인하여 따뜻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한잔 하니 마음도 뱃속도 든든하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는 발걸음이 가볍다(8:20)

 

능선은 가끔씩 암봉이 드러나지만 등로는 대체로 양호하다.

이따금씩 이어지는 전망대가 고성 방향으로 몇 차례나 비경을 보여준다.

좌측 산비탈, 산 자락을 깍아 내리고 다듬어서 마당이 넓직한 사찰이 들어서 있다.

지도를 들여다 보니 백운산 아래 자리잡은 천비룡사 이다.

 

 

 

 

 

 

                                      큰재 뒤로 자리한 천비룡사

 

 

 

 

 

 

몇 개의 능선을 오르내리고 우측 전망을 즐기는 사이

사이먼 부부님을 뒤로하고 앞선 경안님과 정문교님을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인다.

아무리 뛰어도 두 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아침 추위와 한참이나 떨어진 본대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빨리 갔구나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뒤 따른다.

 

 

이러한 조바심이 큰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능선이 끝나는 지점(지도상 578m)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잘 뚫린 길을 따라 내려선다.

한참을 내려 서다가 안부에 드러난 지점에서 바라 보아도 앞선 두 분이 보이지 않는다.

안부에 도착하니 좌측으로 소로길이 나 있고 누군가 지나간 흔적도 보인다.

두 사람은 이 소로길로 간 것일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오르막 길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올라선다.

정상에 이르니 아뿔사, 봉화대 터 같은 돌탑과 함께 주변은 온통 대나무 밭이다.

그제사 지도를 들여다 보니 봉화산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9:10)

조금 전에 능선이 끝나는 지점(578m )에서 좌측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지나온 길이 더욱 뚜렷하고 확실하여 꼬리표도 보지 못하고 내려선 것이다.

 

                                         봉화산 정상 (이곳은 낙남정맥 길이 아님)

 

 

잠시 심호흡을 하고 지도와 지형을 관찰한다.

 

 

대안은, 오던 길을 되 돌아가서 제대로 된 맥길을 따른다.

이 경우 시간상으로 40--50분 이상 지연이 예상된다.

두번째 안은 안부 까지만 되돌아가서 안부에서 척정리로 내려서서 큰재까지 가로 질러가는 방법이다.

이럴 경우 시간상으로 첫 번째 안보다는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짐작된다.

마지막 안은 그대로 진행하여 척정리 1009번 지방 도로로 떨어져서

장밭고개에서 합류하는 방법이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오늘 산행 구간을 담티재까지 늘려서 22km를 하여야 하는 점을 감안하고

너무 늦게 도착하여 다른 일행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세번째 안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봉화산을 내려선다.

좌측 효 체험마을(삼계리)로 내려 서서 또다시 좌측 임도로 향한다.

조금 후에 포장 도로를 만나서 가로 질러 능선을 오른다.

정상에서 삼각점(지도상 넓은등)을 지나서 1009번 지방도로 화암리 입구에 도착한다.

등로를 이탈하여 이곳에 이르기 까지 능선에는 낙남정맥 꼬리표가 계속 붙어있고

등로도 매우 양호하여 그점도 이상 하였다

 

1009번 지방도로를 따라 걸어가다가 중턱에서 지나가는 차량을 얻어 타고

장밭고개 마루에 도착한다.(9:50)

 

 

                              백운산, 제일목장을 거쳐 장밭고개로 내려서는 길

 

 

   장밭 고개

      지방도로 1009번이 지나가는 완만한 고개로서 통행량이 제법 많은 고개이다.

고개 아래 터널은 통영 대전간 고속도로가 지나 간다.

고개 좌측 대가면 송계리에는 괴정, 장밭 마을이 있으며

장밭은 원래 마당만한 밭이 많다고 하여 마당 장()자와 밭 전()자를 붙여 장전이라 하였다.

괴정(槐亭)은 옛날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나무가 회화나무로 회화나무 괴()자를 붙여

괴정이라 하였다 한다.

  주변 산자락에는 제일목장, 수도원등이 있으며 도로 옆에는 ” SP 산업이 들어서 있다.

 

 

고개마루 간이 정류소에는 송영우님이 혼자서 기다리고 있다

무릎이 아파서 산행을 이어 가기가 무리라서 오늘은 이곳에서 그만 두겠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여분의 무릎 보호대를 드리겠다고 하여도 사양을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건너편 제일 목장으로 내려서는 후미를 만난다.(10:20)

당초 후미 그룹 4명에다가 고문님, 투투님등 7명이 합세한 모습이다.

고문님과 투투님도 봉화산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안부를 거쳐 큰재로 따라 붙었다고 한다.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등로는 간이 정류소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 있으며

우측은 능선으로, 좌측은 임도를 따라 송전탑 아래까지 이어진다.

봉화산을 다녀온 그룹과 뒤에서 오는 그룹이 합치면서 오르막 임도를 따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능선으로 올라서 송전탑(69번 송전탑) 아래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10:40)

가야 할 마루금은 송전탑 71번을 뒤로하고 이리 저리 용 트림을 하듯 길게 이어져있고

우측 계곡 아래로 조그만 소류지가 손바닥 만하게 붙어있다.

능선 너머로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뒤로는 넓다란 호수 같은 바다, 당항포가 눈에 들어온다.

 

 

 

 

                              송전탑 뒤 능선이 가야 할 등로

 

 

당항포,

충무공이 이끈 해군의 중요한 전적지 중 하나로서 해군사에 길이 빛날 승전의 전장戰場이다.

그 이름을 따서 해군에는 당포함이라 명명한 군함이 있었으나

북괴의 야욕에 희생된 가슴 아픈 사연도 안고 있는 이름이다.

 

 

당항포,

고성군 마암면, 구만면 앞의 넓은 만으로서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앞 입구는 매우 좁아서 전체 모양은 호리병 같다.

물결도 잔잔한 까닭에 육지에서 보면 큰 호수와 다름없다.

임진 왜란 때 충무공은 마산만에 나타난 왜선에게 도망가는 척 하면서 당항포로 유인하여

포구 연안에 미리 진을 치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여

왜선 50여 척과 왜군이 꼼짝없이 몰살된 곳이다.

 

 

지도를 들여다 보니 능선 우측에 살짝 솟은 봉우리가 성지산(393m)이다.

임도를 따라 능선에 도착한 우리가 전송탑에서 바라보니 살짝 뒤쪽으로 떨어져 있다.

짧은 능선을 올라서서 봉우리(456m )에서 우측으로 틀면서 급경사 내리막으로 떨어진다.

물결 치듯 구불 구불한 능선을 따라 진행 하던 중 선두에서 연락이 온다.

떡고개 묘지 앞에 소주 한 병을 두고 갈 테니 후미 그룹에서 나눠 마시고 힘내라고 한다.

고만 고만한 능선을 따라 송전탑 71번을 지나고(11:10)

이어서 74번도 지난다(11:35)

 

 

2기를 연 이어서 지나고 떡고개 안부에 내려선다.(11:45)

넓직한 안부는 좌측 월곡과 우측 신리를 잇는 희미한 고갯길이 넘어간다.

월곡은 전형적인 산촌의 끝 마을로서 산 봉우리를 따라 사방으로 임도가 트여있고

일부 농가는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신리로 내려서는 길 옆에는 큰 봉분이 하나 있고

주변에는 검은 오석을 세워놓은 비석이 10여 개가 줄지어 서있다.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조상의 묘를 한곳으로 이장 하였거나 화장으로 마무리한 가족묘로 짐작이 된다.

지난번 구간에 이어 이번 구간에도 이런 모습이 자주 보인다.

 

 

 

 

 

묘지 앞 누런 잔디밭에 털썩 주저 앉아 소주.오미자 술, 막걸리를 나눠 마신다.

사이먼 님의 돼지 족발을 안주 삼아 한 입 베어 물고 벌러덩 뒤로 눕는다.

포근한 봄 날씨 같이 훈훈하다.

남은 길이 아직도 많아 우리끼리 새티재에서 마무리 하자고 숙의를 한다.

산행을 마치고 상경할 때 담티재에서 새티재를 경유하면 될 것이니 그리 부담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도 몸도 넉넉하고 편안하다.

고문님과 나는 대형 알바를 한 탓에 쉽게 결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 진다.

 

 

 

 

                                           떡고개에서 휴식

 

 

1기를 지나서 오르막길 숲 속으로 들어선다.

술 한잔을 걸친 탓인지 가파른 등로가 힘겹다.

깊게 깔린 갈참나무 잎이 미근 거리지만 곧 정상에 도착한다. (12:20)

잡목과 웃 자란 풀 숲으로 덮힌 밋밋한 덕산 (278m) 정상에는 삼각점이 박혀있고

소나무 판자에 산봉우리 이름을 써서 나무 가지에 메달아 놓았다.

 

 

 

 

 

 

 

 

 

 

                                       덕산 정상 고목 나무에 걸린 표시판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로는 한적한 시골 뒷산을 걷는 기분이다.

우측으로 차 소가도 들리고 나무 가지 사이로 넓은 들판이 드러난다.

마암면 신리 구간의 뒷산으로서 소나무 숲이 아주 잘 가꾸어져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마암면 신리, 장산리 일대는 넓은 들판이 반듯하게 정리가 되어서

풍요로움이 더해 보인다.

마음도 발걸음도 푸근해 진다.

 

 

      선생님, 고성 지방은 소나무를 잘 가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군데 군데 소나무 전지를 하여 밀식도 방지하여 곧고 길게 자란 소나무가 아주 좋습니다.

, 우리 지방에서는 수년 전부터 계획적으로 소나무 전지와 간지 작업을 하여 왔습니다

소나무는 양의 성질이라서 햇빛을 받지 못하면 잔 가지는 전부 말라 죽습니다.

적절히 가지 치기를 하고 빼곡한 곳은 간벌을 하여 빛을 많이 쪼일 수 있도록 한 결과 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도 견학을 많이 옵니다….

                                             (고성군 개천면 사무소 직원 설명….)

 

 

능선을 따라 이어 오다가 툭 트인 곳에서 급경사 내리막길을 만난다.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고 좌측 능선에는 나무를 제거하고 붉은 벽돌 건물 주변으로 철조망이 쳐져있다.

고갯 마루, 배티재를 경계로 우측은 마암면, 좌측은 개천면 경계 지점이다.(12:45)

차량 통행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이지만

툭 트인 고갯 마루에서 좌측 마을 좌련리 뒤로 고성 군립공원 연화산 능선이 우뚝하다.

 

 

    배티재에서 바라본 마암면 방향, 가스공사 건물(붉은 지붕)과 연화산 봉우리              

 

 

      배티재(170m),

      고개를 숙이고 이곳을 넘나들었다고 하여 배치拜峙재라 불린다고 하였으나

      정맥 꾼들의 눈에는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또다른 설은, 아주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하여 해일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기게 되었을 때

뒷산에 피신하였던 신리마을 주민들이 계속 불어난 골짜기의 물에 실려 가다가

어디선가 밀려온 한 척의 나룻배를 발견하고는 배를 타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대부분은 배를 못 타 물에 빠져 죽고 몇 사람만 겨우 배를 타고 이 재를 넘어 개천 쪽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불어난 골짜기 물에 실려 고개를 넘어가던 배를 탔던 고개라고 "배타재"로 불렀다고도 한다.

(선답자의 산행기 중에서)

 

 

      개천면 방향 좌측 산 비탈 시설물은 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에 있는 한국가스공사에서

진주로 보내는 관이 이 도로를 따라 매설되어 있으며

운영 및 관리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는 시설 및 인원이 근무하는 곳 이라고 한다.

                                                                          (개천면 사무소 직원 설명)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가시 넝쿨이 또 성가시게 한다.

조금 후에 밤나무 밭 우측 능선을 따라 오른다.(13:05)

숲으로 들어 갔다가 밤 나무 밭 비탈을 다시 지나고 대나무 숲과 소나무가 빼곡한 지점도 지난다.

밤 나무는 전정이 안되어서 계속 키가 자라기 때문에

어느 정도 키가 자라면 수확할 때 애로가 많다고 한다.

능선 전면으로 우뚝 솟은 산이 버티고 서있지만 다행히 등로는 좌측으로 살짝 휘어서 이어진다.

전면의 봉우리 매봉산은 정맥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지점에 서있다.

 

                                      밤나무 단지

 

길 옆에 자리한 묘 1,

통정대부 장공의 묘라고 쓰였으나 가라앉은 봉분과 상석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또 한번 낮은 능선을 오르고 나서 비탈길로 내려서는 등로 좌측으로는 낡은 철조망이 이어진다.

 

 

 

                                 봉분도 상석도 잡초에 묻혀 버린 통정대부의 묘지

 

잡목과 나무 가지가 얼굴을 때리는 비탈길을 내려서서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도로, 신고개에 도착한다(13:25)

고성 군에서 세워놓은 표지판에는 가야 할 탕근재에 대한 입산금지에 대한 내용만 있고

정작 고개 이름이나 설명은 없어서 다소 서운하다.

 

                                      신고개

 

 

                                         신고개에 세워 놓은 입산통제 내용

 

 

완만한, 그러나 길고 긴 오르막이 기다린다.

좌측으로 간간이 연화산 능선이 조망을 제공 할 뿐, 그져 평범한 시골 뒷산 같은 능선이다.

한발, 두발 천천히 내 딛으면서 묵묵히 오른다.

말은 하지 않아도 몸은 천근 만근, 앞서가는 고문님의 보폭이 점점 좁아진다.

천리길도 한 걸음 이라던가, 그러나 한발 두발이 정상으로 이끈다.

누군가 이름을 써서 비닐 봉투 안에 메 달아 놓은 탕근재에 도착한다. (367m, 13:55)

이름과 달리 탕근재는 봉우리이다.

 

 

 

 

 

   탕근재

 

대부분의 산행기에서는 이 곳을 탕근재라고 언급하면서

봉우리 이름에 고개이름이 붙었있어서 이상하다고 지적을 한다.
이곳에서 살짝 내려서면 310m 안부에 탕근재라고 표시해 놓았고,(2007년 발행, 국토지리원 발행지도)
개천면 좌연리 좌이 마을에서는 좌이산,또는,탕근산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佐蓮里) 좌이(佐耳)마을에
"
연화산 기슭 동이 틀때
아홉마리의 좌(
)라는 움직이고
선비는 탕근을 쓰고 내려다 보니

좌이(
佐耳)주민 생기돌고
좌연학교 종소리 우렁차게 들리네" 라는 마을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탕근""탕건(宕巾)"이 옳다.

그래서 367m 봉우리는 탕건봉, 그 다음 봉광산 가기 전 안부를 탕건재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선답자의 산행기와 국토 지리원 발간 지도에서)

 

 

솔바람을 맞으며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내려선다.

안부에 이르니 우측으로 조금 전 보다는 훨씬 드넓은 들판이 다시 들어난다.

지도를 들여다 보니 구만면 용와리이고 구만면은 당항만으로 이어지는 넓은 지역이다.

이제 어떻게 선두 그룹에게 연락을 하느냐..하면서 고심을 하는 중에

짧은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니 밋밋한 정상에는 봉광산이라고 새겨진 표시판이 걸려있다(389m, 2:25)

고성군 구간은 소나무 판자에 한글로 산 이름을 써서 나무 가지에 메 달아 놓은 것이 다소 인상적이다.

처음에 대할때는 대포집 이름 같은 인상을 풍겨서 실소하였으나

자꾸대하니 그것마져 친근하게 다가온다.

 

 

 

 

 

 

선 자세로 잠시 다리쉼을 하다가 어디까지 진행 할 것인지 한번 더 숙의를 한다.

해안지대나 평야지대 부근의 산들은 고도가 3-400미터만 되어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시간이나 기력으로 봐서 발 아래에 있는 새터재 까지만 진행 하기로 하고

묘지 주변에 둘러 앉아 마지막 간식으로 휴식을 한다.

 

 

 

 

 

그 사이 고문님이 선두에게 전화를 하여 우리 후미 그룹 8명은 새티재에서 기다릴 테니

담티재에서 산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pick up해 달라고 연락을 한다.

그런데 선두 그룹도 새터재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묘지에서 지근 거리에 있는 수원백씨 가족 묘지 입구 표지석을 뒤로하고 포장도로로 내려서서

미리 도착한 선두 그룹과 조우한다. (2:40)

새터재 주변은 구만면의 용와리 와룡동,

개천면의 봉치리, 용안리, 그리고 지나온 봉광산등,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새티재(지도상 샛곡)

 

원래 새티(鳥峙), 또는 조치리(鳥峙里)라고 부르다가 이름이 상스럽다고 하여

새 조자에다가 궤를 쒸워 봉치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주 옛날, 천지가 개벽하여 물이 범람할 때 모두 물에 잠기고

이곳은 새 한마리가 겨우 앉을 곳만 남기고 물에 잠겨서 새티()라고 불렀다고 전해온다.

 

 

 

 

후기

지형과 이름, 그리고 특이 시설물에 대한 개천면 사무소 직원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 드린다.

 

백두대간을 시작으로 지난 5년 동안 많은 무박 산행을 즐겼으나 오늘 같은 대형 사고는 처음이었다.

그 원인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오늘 산행 구간에 대해서 사전 공부를 하지 않은 점이 제일 큰 과오다.

선답자의 산행기를 참고로 하여 주의 할 곳을 미리 숙지하여야 함에도 그것을 하지 않았다.

두번째로 일행에서 뒤쳐져서 경관을 즐기다가 혼자 남게 되어서 빨리 따라 가야겠다는 조바심이

주의를 흐리게 만들었다. ‘

 

그래서 갈림길 중에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크고 뚜렷한 길을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선 것이다.

 

또한, 잘못 진행된 것을 알았을 때

오던길을 뒤돌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연이 되어서

우회하여 중간지점에서 합류 한 것은 결과적으로 정맥길을 이어 가는데 바람직 하지 못한 선택 이었다.

대간이든 정맥이든, 높은 산이든 낮은 봉우리이든

사전에 산행 구간을 숙지하고 산행 중에도 지도를 보고 확인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은 산행이었다.

 

오늘산행을 이곳에서 마무리한다   (상거리 :24km    산행소요시간 :11시간30분)

 

 

참고자료

 

연화산, 옥천사

고성군 마암면 소재 연화산은 고성군립공원으로 지정 되었으며 옛날에는 비슬산(毘瑟山)이라고 불렸다.

조선 인조때에 연꽃을 닮았다 하여 산 이름을 연화산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연화산의 산록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여기를 산성치라고 부른다.

 

 

옥천사라는 이름은 맑은 물이 샘솟는 경내의 옥천샘에서 따온 이름이다.

옥천사에서 약 4km의 거리인데 아마도 승병이 주둔했던 곳으로 짐작된다.

천년 고찰 옥천사는 가람의 배치가 섬세한 화엄 10대사찰의 하나다.

경내에는 청담 스님을 기리는 부도와 부도비가 있으며 근래에는 Temple Stay도 실시한다

 

 

경상남도 고성군은 본래 6가야 중 소가야 (小伽倻:42?∼532)의 도읍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고자군이라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철성부(鐵城府고주·고성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고성현이 되었으며,1895(고종 32) 부제실시에 따라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다.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에는 마을 이름 그대로 돌로 만든 말이 세필이 있다.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피해를 입히자 돌로 말을 만들어 세웠으며

오랫동안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여 동재를 지내면서 태평성대를 빌었다고 한다.

 

 

마암면 장산리에는 장산 이라는 이름으로 평지에 자리잡은 숲이 있다.

조선 태조때 부터 김해 문중의 허기許麒,

성종때 이황의 제자 허천수許千壽가 연못을 파고 노산정을 짓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고성에는 허씨 중에서 유명한 분들이 많다.

특히, 허기, 허천수등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연서원 이외에도 위계서원, 수림서원등이 있다.

 

 

통영과 충무시

 

한산도한산대첩과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1592년 임진년, 420년이 지난 2012… 1갑진년은 60, 7갑자가 지난 2012년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임진왜란의 향방을 승기로 잡은 한산대첩, 한산도 제승당(승리를 만든다는 글자의 의미), 세병관, 충렬사등

이순신과 관련된 자취가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고장이다.

난중일기는 말 그대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쓴 진중 일기로서

전체 1491일 중에서 1029일은 한산도에서 3 8개월 있으면서 쓴 것이다

 

 

통영이란 지명은 현대의 해군 함대 사령부 격인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로서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었으며 이것이 지명이 되었다.

충무시라는 명칭도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이 있는 이름이다.

 

 

통제사는 경상, 전라, 충청등 삼도 수군을 지휘, 통솔한 수군 총 사령관에 해당하며

정식 명칭은 삼도 수군 통제사이다.

임진왜란때 경상도 좌., 전라도 좌. , 충청도로 분할 되어 각도에 1명씩 수군절도사를 두었으나

왜란중에 통제사를 신설하고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으로 하여 겸직하게 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어 군영軍營(통제영)을 한산도에 설치 하였다가 통영으로 옮겼다.

 

 

이런 개념의 연장선에서 이해를 하면

해군의 도시 진해시에는 해군 부대로 들어가는 정문부터 군 시설 전체를 통제부라고 부른다.

 

 

통제영은 그 부속기관으로서 6, 13공이 있었으며

13공방은 부채,,그림,대장간,활통,,말안장,놋쇠,금은,,말총,장롱,상자를 만드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러한 공방은 전쟁을 위한 필수 기술로서 전국의 장인들이 몰려 들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예술적 유전자가 이어 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갓,나전칠기,소목장등은 통영의 것을 제일로 알아준다.

 

 

1955년에는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이 되어서 분리 되었다가

1995년에 충무시와 통영이 통합 되어 통영시가 되었다.

(충무시라는 지명도,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딴 것이다)

 

 

통영과 문인

통영은 문화적 가치와 애술성을 지닌 특이한 도시이다.

소설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 이상, 시인 유치환(거제),

꽃신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소설가 김용식등 많은 문인, 에술가의 고향이다.

윤이상은 통영에서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았었으며 통영여고 교가는 유치환 작사, 윤 이상 작곡 이다.

 

 

통영상륙작전

1950 6·25전쟁 중 해병대 김성은(金聖恩) 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최초로 적전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한 작전이다.

 

 

1950 8월에 접어들자 서부 전선에서는 진동리로 침입한 적이 마산·진해·부산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거제도를 점령하여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1950 8 17일 새벽 3시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 지점에

있는 지도(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거제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함정 7척의 지원 엄호하에

8 17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을 개시하였다.

 

 

1950 9 23일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할 때까지 통영을 평정하여

당시 이 작전에 종군했던 외신기자들은 "귀신잡는 해병" 이라는 특필보도로

저마다 최대의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전은 우리 해군·해병들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적전 상륙작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배경)

 

6.25 전쟁시 주민 10만명인 거제도에 포로 수용소가 설치, 운영 되었으며

피난민 20만 명과 포로 17만명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컨테이너로 만든 수용소 건물 잔재가 기념관 내에 일부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1951년 말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는 132,472, 유엔군 11,559명 이었으며

종전 후 북으로 귀환한 포로는 약 48,000명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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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1.31 19:43

    첫댓글 우리나라의 끝 부분에서 좋은 산행하셨네요. 추운날씨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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