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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말 먼 곳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당선소감]
詩가 준 위로, 나눌 수 있어 기쁘다
박은지
10년 후 내 모습 같은 걸 그려보는 일은 어려웠다. 계획은 늘 틀어졌고, 예상치 못한 일은 자꾸 찾아왔다. 오늘을 무사히 견디자
는 목표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자주 실패했다.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
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엔 시의 힘을 빌렸다. 시를 읽거나 쓰면 내가 덜 초라하게 느껴졌고 덜 외로웠다. 시를 써야 내가 ‘나’ 같았고, 가끔은 근
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잘 쓰고 싶었고, 좋은 시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자주 실패했다. 그냥 쓰는 수밖에. 시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쓰
는 수밖에. 그러던 오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0년 후 만난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오늘도 내일도 시의 힘을 빌려야지. 이 힘
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어 기쁘다.
우리 엄마 허경숙, 엄마의 사랑으로 제가 살아 있습니다. 행복의 밀도를 높여주는 우리 가족, 특히 조카 박지성 고맙고, 사랑합
니다.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끝까지 저를 지켜봐 주신 박주택 교수님,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종회 교수님을 비롯한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 프락시스연구
회와 경희문예창작단, 현대문학연구회 선후배님들이 계셔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환, 승원, 은영, 규진 더 많은
밥과 술을 함께합시다. 나의 가장 큰 위로인 의룡,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많이 웃고 많이 울며
계속 쓰겠습니다.
■박은지 ▲1985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심사평]
수사 과잉의 피로감 속 간결미 돋보여
심사위원 이문재(왼쪽)· 나희덕(오른쪽) 시인.
2000년대 이후 서정시의 갱신은 탈주체의 문제나 문법적 해체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명의 작품들에서
도 그런 변화가 확연히 느껴졌다.
주체가 불분명한 진술들과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과 비
약이 항상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규진, 남수우, 장희수, 박은지의 시들은 새로운 어법을 보여 주면서도 나름
대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정말 먼 곳’을 당선작으로 뽑게 된 데에는 과잉된 수사가 주는 피로감 속에서 그의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가 상대적으
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투고자들보다 작품의 편차가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뢰감을 갖
게 했다.
박은지의 시에는 특히 ‘장소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
일 넘어지고 있었다”는 진술처럼, 시적 화자는 여기와 저기, 현실과 상상,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한다.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현실을 손쉽게 이월하지도, 거기에만 사로잡히
지도 않는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을 견디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 그 리드미컬한 힘으로 그는 ‘정말 먼 곳’까지 갈 것이
다. 앞으로 펼쳐질 시적 여정을 기대하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당선소감
“네팔에서 소원이 이뤄졌네요
한 사람보다 한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난겨울, 저는 네팔에 있었어요. 바람이 시작되는 곳 묵티나트에서 포카라까지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야크를 키우는 집에 들어가 질 좋은 치즈를 사 먹기도 하고 11월에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걷는 여행이었죠.
매일 산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마지막 날이었을 거예요. 길을 안내해주던 네팔인 수잔이 일행 모두를 불러 세웠어요. 수잔은 5분 뒤에 재미있는 것을 알려줄 테니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주우라고 했어요. 우리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씩 주웠습니다. 5분 후 도착한 곳은 경사가 가팔라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저 멀리에 반토막난 나무가 있었고 댕강 잘려나가 평평해진 부분에는 여러 크기의 돌들이 쌓여있었답니다. 수잔은 돌을 던져서 그 부분에 안착시키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들은 차례차례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그중 저만 안착에 성공. 그대로 눈을 감고 시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네팔의 좋은 기운 덕분이었을까요. 오늘부터는 제가 쓴 시를 더 이상 혼자만 읽지 않아도 되네요. 이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서 며칠간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제주에서 김포를 오가는 비행기를 몇 번 탔어야 했는데요. 그 안에서 잔뜩 겁을 먹어야 했답니다. 이 멋진 소식을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해버릴까 봐서요. 만약 추락한다면 휴대폰의 비행모드를 해제시키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의 당선 소식을 반드시 알리고 죽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이병률 선배님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황인찬 선배님, 김동영 작가님. 그리고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시를 위해 제주에 머물 것 같아요. 가끔씩 제주가 아닌 곳에 다녀오고 싶을 땐 기꺼이 다녀올 거고요. 그곳이 동남아든 유럽이든, 어디든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낯선 것들이 풍부한 공간에 있어야, 제게 시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원하
1989년 서울 출생
연희미용고 졸업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만장일치 당선 확정, 독자가 읽게 만드는 시”
응모작들 가운데 본심으로 올린 것은 총 다섯 사람의 원고였다.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은 일찌감치 그들 중에 둘의 손을 놓고, 남은 셋을 머리에 이고 진 채 논의를 이어나갔다. ‘유리창의 전개’외 4편을 응모한 조주안은 구사하는 문장에 있어 숙련된 대장장이 같았다. "나는 유리창에 보고 싶은 것을 그리면서/ 종교가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유리창을 종교로 품고 자라난 날들을 통해/ 작은 돌에도 믿음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시의 서두를 장식할 줄도 안다.
다만 이런저런 사유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낼 때의 뒷심이 아쉬웠다. 뚝뚝 끊겨 읽히는 피로. 어깨에 옴팍 준 힘부터 빼야 할 것이다. 양은경의 ‘지구만 한 노래, B면’ 외 4편은 구조적으로 아주 잘 짜인 시들의 묶음이었다. 뼈대는 단단했고, 그에 붙은 살은 너무 기름지지도 너무 담백하지도 아니하였다. 특히나 ‘모과의 내부’가 좋았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개성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 시뿐이었다. 모창이 아닌, 영향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일단 자신감의 회복이 급급할 터였다.
우리는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외 4편을 만장일치로 꼽았다.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란 시에서도 느낀 거지만,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그 어떤 이견 없이 심사위원 모두의 의견이 한데 모아진 데서 오는 즐거운 불안 말고는 아낄 박수와 격려가 없는 시였다. 앞으로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의 유쾌한 행보를 설렘으로 좇아볼 예정이다. 건필을 빈다.
박상순・손택수・김민정 시인
미륵을 묻다
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2018 신춘문예] 시 - 김형수 씨 당선 소감
막 싹 틔운 나의 시…채찍과 격려 해주시길
큰 산 앞에 섰다.
두렵기만 하다. 시라는 것이 알면 알수록 더욱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래서 두렵다.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0년쯤 전의 일이다.
개인사가 힘든 시기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 어려웠던 때 시가 나에게 왔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힘들 때마다 시 한 줄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그런 한편으로 시인이 되고 싶었다. 물론 문청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공부 없는 객기만 앞섰다.
요즘 시는 아주 어렵거나 너무 쉽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
어려운 시는 독자가 외면하고 너무 쉬운 시는 독자가 경멸한다.
나무의 목숨값에도 미치지 못할 가벼운 시집들이 버젓이 나온다.
시인은 넘쳐나는데 시는 멀어지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문청은 지금도 시대의 각혈로 글을 쓰고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제 막 싹을 틔운 나의 시에 많은 채찍과 격려가 함께하길 빌어 본다.
부족한 글에 손 내밀어 주신 정일근, 손택수, 조향미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약력=1958년 경남 창원 생.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졸. 전 부산일보 기자. 전 경향신문 기자 . 현 부산지방공단스포원 공로연수 중.
[2018 신춘문예] 시 심사평
전체적으로 고른 성취로 안정감 돋보여
수사의 과잉이 사물과 현실을 왜소하게 한다. 문장들은 매끄러우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미지는 넘치나 소비되기에 급급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삶과 시에 대한 예각적 인식보단 장황한 요설과 실험실에서 배양된 인위적 표현들이 유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심 인상기를 공유하며 본심에 올린 최종 대상작은 권수찬, 김형수, 김현곤, 박민서의 작품이었다. 이들의 응모작은 적어도 언어 실험실의 폐쇄성과 자의식 과잉 그리고 지나친 경험 추수로부터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면서 개인의 방언을 소통의 장으로 옮겨오는 데 모두 성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대와 몸을 관통한 언어로 좀 더 자연스럽게 공적 음역을 확보할 수 있다면 머지않아 성과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먼저 권수찬은 드물게 사회학적 렌즈로 시대 현실을 조명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나 안타깝게도 인식이 감각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현곤은 성큼성큼 내딛는 남성적 어법에 호감이 갔으나 이분법적 문명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형수와 박민서의 작품을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박민서의 작품은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슬아슬 위태로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힘에 있어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김형수의 경우는 기시감이 문제적으로 다가왔으나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과 성취로 안정감을 주었다. 위태로운 새로움과 오래된 울림 중 격론 끝에 간신히 선택된 ‘미륵을 묻다’는 지층에서 캐어낸 미륵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시다.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견딘 이 빛나는 시적 순간이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면서 측정 불가의 우주적 시간 단위로 시인을 밀어가길 바란다.
[2018 한경 신춘문예] 詩 당선작
새살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 당선 통보를 받고
"휘청거려 두려워도, 늘 詩로 이야기하는 시인 될 것"
나는 너무 작고 약해 번번이 휘청거렸다.
언젠가 끝내 무너져버린 나를 발견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주 울었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많았다. 못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의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다. 온전한 나를 시에 담고 싶었다. 늘 진심이었다.
이런 나의 진심을 읽고 최고의 날을 선물한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쓰는 마음가짐을 가르쳐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도 감사인사를 드린다. 포기하지 않도록 기다려주고 이끌어주신 모든 선생님께 이 기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와 보폭을 맞춰 옆에서 걸어준 시모임 문우들, 문학을 품은 명지대 학우들, 온 마음을 다해 안아준, 나의 반짝이는 장면들에 함께한 모든 이에게 벅찬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내 가족들에게 믿어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보낸다.
나는 아마도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휘청거릴 것이다. 휘청거리다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과 같은 순간을 믿어보려고 한다. 그저 내 자신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여기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늘 진심으로.
조윤진 씨는 △199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심사평]
젊음의 비애가 눈앞에 생생 소박하지만 진실해서 감동적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시인) 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2018 한경 신춘문예’ 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심사에 들어갔다.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실감이 사라진 아득한 세계, 점차 희미해지는 너와 나의 존재감, 그것의 기묘한 알레고리화(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 등을 공통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1차 관문을 너끈히 통과한 응모자는 박현주, 박은영, 양은경, 안정호, 전수오, 김보라, 이서연, 전명환, 서주완, 조윤진이다. 뒤의 세 명을 최종 집중토론 대상으로 삼았다. 전명환의 ‘도출한 적 없는 윤리성’은 못을 박다가 벽이 전부 무너져 버린 상황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나 제목이 생경했고, 알레고리의 타점이 불명확했다. 서주완의 ‘인간적인 새들의 즐거움’은 ‘세계는 좀먹은 탁자에 불과했지만/나는 어떤 것도 올려놓지 못했다’는 좋은 구절이 짜임새 있게 변주·확장·의미화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숙고와 토론 끝에 조윤진의 ‘새살’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못다 한 최선’이 ‘잘못’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길 없는 젊음의 비애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리는 능력이 좋았다. 상처 뒤 새살을 꿈꾼다는 뻔한 상투성을 극복해내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감동이 있었다. 심사자들의 몫은 여기까지다. 새로운 시인에게 무한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2018 경향 신춘문예]시 당선작
크레바스에서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2018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
열린 문틈,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겠다
스무 살 무렵 한 프랑스 소설가가 제 삶에 문을 만들어준 이후, 어느 길로 가야 그 문이 열리는지 알 수 없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고 그 최초의 문틈이 살짝 열린 것 같아서, 드문드문 내리는 비처럼 온종일 떨었습니다.
터질 듯한 열망과 열정으로 꿈을 좇는 제게, “지금 자신의 방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계속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걸어왔던 것과 똑같이 앞으로도 그 수많을 실패와 함께 걷겠습니다. 시를 향해 걷겠습니다.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더 멀리 걸어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게 문을 열어주시고 귀한 기회를 주신 최정례, 장석남, 강성은, 신용목 심사위원님들과 경향신문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서툰 문장에서 저를 발견해주시고 시를 계속 쓸 수 있도록 고무해준 손택수 시인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최고의 튜터 신동옥 시인께 감사합니다. 추운 날에도 대학로에 모여 함께 합평했던 동기분들 고맙습니다. 언제나 한쪽 날개를 빌려주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곁에서 수많은 좌절을 지켜보며 한결같이 지지해준 정근, 고맙고 사랑해요.
일요일 오후, 한강으로 이어지는 쭉 뻗은 천변을 따라 계속 걷고 싶지만 발길을 돌려야 하는 그 마음들을 생각하며 계속 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산책로에는 끝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 끝없이 정진하겠습니다.
박정은
방송통신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2018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
삶의 비극적 일면을 웅숭깊게 구현
심사위원 장석남·최정례
완벽한 시 한 편이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 만족스러운 그 한 편에 가닿기 위해 그저 그렇고 그런 시들을 백 편 천 편 쓰게 되는 것 같다. 예심을 통과한 열셋 응모자들은 시를 향한 열의와 욕망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세히 살피면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자니 만족스러운 작품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엉뚱한 단어로 문장을 조립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확한 단어가 놓일 마땅한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발전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정확한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생각, 그 생각이 이행 혹은 비약하면서 깊이를 얻고 새 길을 찾을 때 시에 힘이 생긴다.
‘밀밭의 생성’을 쓴 백선율은 초반부의 신선한 발상을 매력적으로 끌고 갔으나 중반 이후부터는 그 생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경영혁신추진팀’이라는 전혀 시적일 것 같지 않을 제재로 시를 시도한 변호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의 일면을 새롭게 보여주려 했으나 이분 또한 끝마무리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신선한 생각과 그 생각의 발전 과정과 비약의 정점을 내장한 시의 마지막 문장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시를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모서리의 생활’을 쓴 전윤수의 시를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고려한 이유는 이 도시의 한 모서리, 방 한 칸의 틈에서 신산스럽게 사는 우리의 일상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묘사했더라면 올해의 당선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심사자 둘이 동시에 손뼉을 친 한 작품을 발견하였다. 박정은의 ‘크레바스에서’는 절제된 감정을 인상적으로, 긴장과 이완의 국면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비극적 일면이 웅숭깊게 구현되어 울림이 컸다. 2018년의 신인 박정은의 발견으로 우리 시단이 한층 풍요로워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만족스러운 시 한 편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에게 축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