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Prologue
1931년 6월 3일, 오늘도 '에스페란토 학습회'의 모임이 있는 날인 모양입니다. 모임은 오후 6시로 예정되어 있지만, 이곳 여순에서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은 샌님,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니다. 누가 정하지도 않았건만 모임은 30분 늦은 6시 30분에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새 손님 3명이 추가로 와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었죠. 그 세 명은 바로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와라 간지 중좌, 만주영화협회(만영) 이사 아마카스 마사히코, 일본제국 농림성 관료이자 만주 전근을 요청한 기시 노부스케였습니다.
총무를 맡은 나카타 히로 중좌가 멤버들을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소개하고 나서, 다들 여태 친하게 지내지 못했던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며 술잔이 몇 차례 돌자 슬슬 취기가 올라왔죠. 물론 나카타 중좌를 제외한 나머지는 주량이 원래 강하거나, 아니면 술을 적당히 마시는 척만 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시와라 중좌가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대충 "장학량 같은 아편중독자 호색한 피라미 놈이 만주를 쥐고 있는 지금이 타이밍인데 무능한 대본영, 제국의회 놈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같은 내용이었죠. 원래 이시와라와 친분이 있던 호소카와 마사다케 소좌가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뒷담화를 은근슬쩍 내놓으며 동조하자 분위기는 빠르게 전환되었습니다. 또한 김상덕에게도 유독 "마적단의 운영원리"를 물어보며 거사를 논의하기 위한 밑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모두들 만주 경략의 필요성에 공감을 표하고 나카타 중좌가 술에 완전히 취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때쯤, 기시 노부스케가 한 술 더 뜨기 시작했습니다.
"재원도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낡은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황국이라고 해도 영구불멸하게 동아의 리더일 수는 없지요. 오히려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땅을 기반으로 처음부터 '오류가 적은 방식으로' 대동아공영의 중추를 기획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가네다 상, 반쯤은 맞는 말입니다. 만주와 조선은 서로를 보충해주는 관계입니다. 지금은 열도가 그 두 지역의 자원을 가져다 쓰는 상황이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요?"
폭탄 발언이었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럼, 그럼!"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모두의 표정이 급변했습니다. 나쓰메 박사는 '그게 가능하냐'는 표정이었고, (사실 독립운동가인) 김필중 사장은 술이 확 깨 이시와라와 기시의 표정을 번갈아 뚫어지게 바라봤습니다. 호소카와 소좌가 "국가사회주의 혁명은 피 없이 달성되지 못한다"며 이 주장에 찬동하면서 분위기가 한층 더 심각해진 건 덤이었죠. 아나스타샤 역시 잠시 혼란스러워하다 입장을 정리하고는 "내지에는 희망이 없으니 만주를 소련의 위협을 막아낼 방파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후네스키 역시 해군 육전대를 최대한 움직여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만주와 조선을 독립국의 형태로 내지로부터 분리시켜 선제적으로 '혁명'의 전초기지이자 중추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대동아공영권을 달성하자는 의견은 가장 마지막까지 현실성에 의문을 던지던 부숙경마저 수긍하면서 사실상 회합의 중론이 되어갔습니다. '일본과 그 식민지들'이 아닌, 동등한 주권국가의 끈끈한 형제애를 주장하던 이시와라 역시 고무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카타 중좌가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부하에서 업혀서 귀가한 오후 9시 경, 이제 모두는 정보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에스페란토어로 소통하며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이시와라는 많은 이들의 논의를 수합하여 즉석에서 식탁보를 빼내어 가지고 다니던 세필붓으로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습니다. 먹물은 간장(...)으로 대신했죠.
대동아 공영을 위한 맹세
하나. 우리는 관동군의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장학량 세력을 몰아내고 만주를 빠른 시일 내에 겸병한다.
하나, 우리는 중앙 계획경제의 제도를 차용하여 공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만주를 수호한다.
하나, 우리는 근시일 내 조선 통할의 실권을 획득한다.
하나, 이 모든 조건이 맞추어진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내지가 만선에 불간섭할 환경을 조성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만선을 중추로 하는 진정한 만민협화의 대동아 공영을 달성하기로 하며, 이를 위해 제국주의 열강에 맞설 수 있는 무력과 경제력을 확보한다.
회합은 이제 불순분자의 비밀결사가 되었고, 신 만주국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01. 태양이 용을 삼키다
회합에서의 '맹세'가 비밀리에 채택된 지 닷새가 지난 쇼와 6년(1931) 6월 9일, 일행들은 여순의 모 가옥에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만주 진출을 위한 세부계획안을 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나카타 히로 중좌가 빠지고 대신 관동군의 도이하라 겐지 대좌가 자리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죠. 도이하라 대좌는 말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야시 센주로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조선주둔군)을 끌어들이자고 해 관동군이 주도권을 뺏기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발언을 내뱉으면서, 명분을 만들려면 자고로 커다란 사건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던 그였습니다.
철도 폭탄테러를 조작하고 아편 밀수를 허위적발해 명분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거의 채택될 뻔 하였으나, 호소카와 소좌는 "이미 한번 써먹은 방식을 또 쓰면 너무 티나지 않겠냐"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시와라도 수긍했죠. 이윽고 도이하라가 입을 열고는, 장춘 인근 만보산에서 일본 군경과 지나인들 간의 충돌사건을 써먹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지나와 조선을 분리하기 위해 그 사건을 확대보도해 조선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어떻냐는 말까지 덧붙였죠. 부숙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소카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김상덕과 아나스타샤도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지만, 이 때 다른 의견이 들려왔습니다.
여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필중 사장이 "내지인이 희생당하는 사건이면 직빵 아니냐? 왜 어렵게 돌아가려고 함?"이라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는 내지인이 아닌 조선인이었지만, 이미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이하라는 좋은 의견이라며 그럼 그 내지인 희생자를 어디서 구해오냐고 물었고... 이시와라는 뒷편에서 조용히 도이하라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후네스키의 망나니 후배, 노숙자, 고아 등 여러 의견이 제기되고 있을 때, 도이하라 대좌는 잠깐 자리를 비우고 밖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길 기다리던 이시와라가 말하길...
"사실 저 도이하라 대좌라는 사람은 우리의 대의에 도움이 안되오. 여전히 황국이 정신 차리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느림보라고 할 수 있지.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저 자는 어떻소까?"
모두가 경악했지만, 호소카와 마사다케 소좌와 야마모토 후네스키 소좌가 가장 먼저 냉정하게 판단한 뒤 찬동했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이곳에서 결행하자는 데에는 모두 난색을 표했죠. 이시와라의 의견에 따라 도이하라를 근처 유곽으로 꾀어낸 뒤 그곳에서 사살, 관동군 사령부에 급보를 타전해 사태를 키우자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돌아온 도이하라를 가네다 마사이치 과장이 살살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저속한 트래쉬토크로 그의 색욕(...)을 일깨우고, 부숙경에게 근처 '물 좋은 곳'을 추천받는 등 혼신의 연기(?)를 펼쳤죠. 아나스타샤는 "저놈 저거 분명 연기 아닐거야"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무튼 도이하라, 이시와라, 가네다, 부숙경, 그리고 일행 중 가장 체격이 탄탄한 후네스키가 유곽으로 향했습니다. 유곽 '상암정'에서 기생들과 즐겁게 놀다 뒷간에 가던 도이하라는... 등 뒤에서 정확히 심장 부위를 겨냥해 단도를 찌른 후네스키의 일격에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이시와라가 시신을 '발견'하고, 마침 대기 중이던 아나스타샤의 리무진을 '우연히 마주쳐 환자 이송용으로 빌려탄' 뒤, 관동군 의무대로 데려갔죠. 김상덕은 기시의 의견에 따라 자신이 보호중인 조선인 마을들에 장학량이 거사를 꾸민다고 전하며 이들을 무장시켰고, 마사다케는 자신이 아는 세명의 황색 언론인들을 불러 "지나인이 도이하라를 살해했다"는 정보를 슬쩍 흘렸습니다. 가네다는 만철에 소식을 알리며 그가 "만철에 유독 우호적이었다"는 메시지를 각인시켰죠.
뒷처리가 마무리되고, 김상덕과 그의 부하들이 서간도와 심요 일대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소식을 전하던 무렵, 아나스타샤와 아마카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남편 후지와라 타마히코는 만영 선전부 방송실로 향해 내일 아침부터 상영될 도이하라 겐지의 추모방송 및 선동방송을 녹화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관동주는 물론 만주 전역, 조선, 열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조선주둔군은 아예 자신들이 지원하고 싶다면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고, 관동군 소속 부대들은 아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좌의 원수를 갚겠다며 선제 출동을 부르짖고 있었죠. 조선군의 합류는 만주 동북군과의 전투에 도움이 되지만 일행의 주도권에는 해가 되기 때문에, 일행들은 조선에 작은 소요사태를 일으켜 조선군의 발을 묶어놓는 동시에 상태가 좋지 않은 동북군의 사기를 뚝 떨어뜨려 탈영 또는 투항을 유도하는 투트랙 전략을 택했습니다.
김필중은 '자신이 아는 루트'를 통해 신간회의 홍명희에게 소스를 넘겼고, 홍명희는 "동지들과 결정한 바에 따라" 이를 맛깔나게 각색해 노조 지도부 등에게 전달했습니다. 조선 팔도 각지에서 크고 작은 소작쟁의와 총파업이 일어나자 총독부 정무총감과 우가키 총독은 하야시 장군에게 내부 혼란이나 정리하라고 들들 볶았고, 조선군의 파병은 무산되었습니다. 한편 매일을 매춘과 아편으로 보내던 동북군 역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장학량이 북경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관동군 밀사의 말에 그들을 심각히 동요했고...
증원된 관동군은 호소카와의 전략안에 따라 빠르게 동북군 병력을 포위섬멸하며 불과 2개월만에 주요거점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약 10만명의 동북군이 포로로 잡혀 3만명은 만철과 기타 사업체의 노무인력으로, 5만명은 신생 만주군 및 해군육전대 신규병력으로, 나머지 아편중독자 또는 매독환자로 구성된 2만명은 "미전향 포로 인도"를 명목으로 중국 관내로 '이송'되었습니다.
1931년 11월 초가 되자 관동군과 신생 만주군은 동북지방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만주사변'이 완료된 것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이번 이벤트와 다음 이벤트간의 간격이 몇 년이나 되니 약간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매력 2 올리고 선동 1 올리겠습니다.
운신에 1씁니다.논쟁,기만은 지금 상황에선 불피요해 보여서...능력치 올리는것도 없겠다.
기만 1 올리겠습니다
선동 1 올리고 킵하겠습니다
반영완료——-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이걸로 이번 화도 전부 끝난 거 맞죠?
@카라멜 마끼아또 네 곧 작성 들어갑니다. 점심먹고…!
[번외: 트로츠키의 편지]
친애하는 알렉세이 바레츠노프 동지에게,
참으로 하수상스럽고도 놀라운 시국이 아닐 수 없소. 일찍이 많은 동지들이 예견했던 대로 우리의 연방은 최근 몇 해 사이 이념 면에서 급격히 쇠퇴하여 결국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고, 나는 그에 통탄을 금할 수 없소.
(중략)
그러나 극동에서 코민테른과 독립되어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일본인, 중국인, 고려인들의 활동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남겨주었소. 레닌 동지의 말대로 타락한 혁명가는 그 자체로 다시 혁명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방법론의 차원에서 그들의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겠소.
(중략)
바라건대, 이 서신을 다음과 같은 이들에게 전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해보길 권하오.
니콜라이 부하린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알렉세이 리코프
미하일 톰스키
비사리온 로미나제
세르게이 시르초프
마르테먄 류친
이반 스미르노프
일리야 우스트랼로프
(…)
당신의 오랜 친구(друг)이자 동지(товарищ), ‘페로’ “
트로츠키 ㅋㅋㅋㅋㅋㅋㅋㅋ 표트르가 또 무쌍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오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그전에 스탈린이 싹다...할수도
@931117 (이상 스탈린에게 쓱싹당한 명단)
@E.E.샤츠슈나이더 그럼 바레츠노프도... 곧....
@카라멜 마끼아또 저 중 실존인물들은 원역사에서는 죄다 죽었거나 굴라그에서 썩었습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될지?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몰아내고 소련을 다시 장악하면 진란과 마르텔도 다시 돌아갈 수 있겠죠?
@카라멜 마끼아또 나 자신과의 싸움;;
@카라멜 마끼아또 어떻게든 튀어서 후네스키한테 와서 배박이 선언을 하면 은신처를 마련해주기는 할텐데 솔직히 요원하네요
@카라멜 마끼아또 일단 트로츠키가 극동에 신경 안쓰길 기도해야 할걸요.
대놓고 반공 반소를 피력해서 국제연맹 가입도 반대했는데 그나마 이것저것 따지는 스탈린이니까 아직 냅두는거지...
@931117 그런데 왜 소련이 침공한다는 생각만 하시고 소련이 침공을 안한다는 생각은 안하시나요?
@카라멜 마끼아또 소련 침공은 항상 대비해야 하는 메뉴얼 아닙니까?
현실에서도 다른 국가들도 비상 메뉴얼은 있잖아요
@931117 사실 후네스키는 소련 침공하면 오히려 좋습니다. 만주-한국이 점령당하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고 어차피 소련 해군은 일본 해군을 못 이기고 소련이 내려오면 쫄은 영프미가 일본에 지원을 해줄 것이므로...
@하일레 셀라시예 이거 진짜 대규모 전쟁이 중국이든 소련이든 터짐 어찌될지 감이 안잡히네요.
다만 영프미는 경제상태가 걸림돌일듯
@하일레 셀라시예 그렇게 되면 일본은 ㄹㅇ 미국의 불침항모 역할을 20년 빨리 하게 되겠네요... ㅋㅋㅋㅋ
다음 화 나왔습니다 여러분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