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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26
창세기 5:21-32
하나님의 동행과 안식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성경의 계보를 대하는 자세는 단순하다. 몇 세에 아들을 낳았고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제일 오래 산 사람으로 므두셀라가 969세까지 살았다는 것 정도로만 기억한다. 그래서 므두셀라의 나이와 노아가 방주를 지어 홍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연결시켜 므두셀라가 오래 산 것은 노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제임스 어셔라는 성경 연구가는 본문의 계보에서 기록된 나이를 계산하여 창조 연대를 4004년이라고 하였고 오늘날 어셔의 잘못된 계산을 정정한다고 4114년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성경의 다른 계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창세기의 계보를 가지고 연대를 계산하는 것은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 손자, 혹은 그 후의 자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이를 계산하여 아담이 창조된 연대를 정확하게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성경은 언약을 중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말씀으로 하셨던 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지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 얼마나 살았고 누구를 낳았는가 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언약의 실체요 온전한 성취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시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다음 도표를 통해 확인해 보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절). 본문에 대해 흔히 죽음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설교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매일 Q.T를 하며 그 말씀을 삶에 적용시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동행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는 것은 그런 의미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동행”이란 히브리어로 ‘할라크’인데 ‘가다, 오다, 걷다’라는 뜻인데 문자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동행이 무슨 뜻인지 성경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2,7)
뜻이 같은 상태가 동행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알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즉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시기 위한 동행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알리시고 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말씀하여 공유함으로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같은 뜻이 된 상태를 동행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과 동행하심으로 뜻이 같고 비밀을 공유하는 상태가 되었으니 노아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은 의인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행이란 단순히 같이 걸어간다거나 같이 사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들어가 의인이요 완전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관계를 말씀한 것이다.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인데 ‘취하다, 붙잡다, 가져오다, 아내로 삼다’라는 뜻이다. 창세기 3:23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라고 하였을 때 “근원”이 ‘라카흐’이다. “갈게 하시니라”라는 말씀은 히브리어 ‘아바드’로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쫓겨나서 자기 자신의 근본이 되는 땅을 일구며 고생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저주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짜 사람을 보내어 땅을 취하여 섬기게 하시겠다는 언약임을 이미 앞의 강론에서 확인했었다. 또 이 단어가 여호수아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대표적인 한 구절만 확인하자.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수 11:16)
여기서 “점령하였으니”라는 표현이 히브리어로 ‘라카흐’이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취한 것을 점령하였다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한 결과로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찾아오셔서 에녹을 취하셔서 점령하심으로 에녹은 하나님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의의 상태가 되어 말씀의 모든 비밀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에녹을 아내로 삼으심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는 하나가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이 계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한 언약의 말씀이다.
그래서 몇 년을 “지내며”라는 표현이 단순히 이 세상을 살면서 지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은혜를 입히셔서 살게 하셨다는 뜻으로 앞의 강론에서 생각했었다. 즉 죽음의 계보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시고 살리시는 생명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죽음 안에 생명을 담아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에녹을 취하고 점령하여 하늘의 비밀을 공유하고 그 뜻을 함께 하는 존재로 만드실 때 에녹은 없는 것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자면 “세상”이란 표현이 없다. 직역하면 ‘하나님이 그를 점령하심으로 없더라’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에녹을 취하고 점령하심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이 땅의 존재와는 다른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땅의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있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만 있음의 존재이기에 그 외에 어떤 존재도 ‘없음’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취하신 진짜 있음의 존재가 된 자가 에녹이다. 그러기에 있음의 존재로 여기는 이 땅에서는 에녹을 없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동행하였다고 말씀한다. 65세가 되기까지는 동행하였다는 말이 없다가 므두셀라를 낳고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므두셀라를 낳을 때 계시가 주어졌기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그것을 신약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4-15)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하였는데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경건하지 않은 것이란 무엇인가? 그다음 말씀에 보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이라고 하였는데 한마디로 진리 아닌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에녹은 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 안에 들어갔고 그 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에 의해 말씀 안에 있게 된 관계, 그것이 영생이고 구원이다.
우리가 흔히 에녹은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채로 데려가심으로 승천했다고 말하는데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그가 살아있는 채로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녹을 취하심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 하나가 된 관계 그것이 영생이라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비록 죽음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죽음의 계보 안에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은혜를 입히신다는 언약을 담고 있고 그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하늘의 비밀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관계로 만드실 것이다. 그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은혜를 베푸심으로 하늘의 비밀을 아는 자로 동행하게 된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28-29절). “노아”란 ‘휴식, 안식’이라는 뜻이다. “수고롭게”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잇차본’이라는 말인데 ‘고통, 노역, 수고’라는 뜻인데 단순히 수고롭게 일하는 것에서 안식을 주는 것이라면 그 안식은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땅의 저주”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인간들의 죄성에 의해 율법을 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마 23:4). 그렇다면 단순히 힘들게 노동하는 수고가 아니라 “땅의 저주”란 율법의 짐이 된 땅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은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스스로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지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 땅의 저주에서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노아를 통해 율법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건져내어 안식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언약을 담고 있는 계보이다.
가인의 계보에서 에녹 때 성을 쌓아 자기 성전으로 삼는 모습이었지만 언약의 계열에서는 에녹과 같은 존재에게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살리심의 은혜를 입히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이루지는 동행이다. 가인 계열의 라멕은 강한 자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하나님 언약 안에서는 라멕은 노아를 낳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언약을 담고 있는 강한 자로 나타낸다. 이렇게 가인의 계보와 아담의 계보를 대조하여 죄 가운데 버려두심의 심판과 죄 가운데서 은혜를 입히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준다(202301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