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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 책을 읽으며 책익는 마을의 모습을 다시 훑어 봅니다. 그러던 차에 선만이(원래는 황선만님이라고 공적인 용어를 써야 하지만 저에게는 애정이 가는 친구라 이렇게 부릅니다.)가 보령신문에 쓴 글을 차분히 다 읽어 봅니다. 책익는 마을의 역사,의미, 하는 일,미래혹은 희망까지 일목요연하게 풀어 논 명문이네요. 그래서 한번에 다 읽을 수 있도록 편집을 했습니다. 우리 마을 분들이 혹은 이곳을 방문하여 책익는 마을이 어떤 곳인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 글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보세요.
행사장이란 곳이 으레 그렇듯이 뷔페에서 진행된 그날의 행사장도 다소 지루한 의식행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의자 소리는 고사하고 옷깃을 여미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어쩌면 마음들은 이미 저 병풍 너머에서 모락모락 수증기를 풍기고 있는 저녁 식탁에 가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이동하는 완행열차처럼 진행되는 의식행사장의 보고와 축하와 감사 자리에서 청중이 되는 일은 대게 주체도 객체도 아닌 어정쩡한 일이다. 하마터면 밀려오는 졸음에 고개를 꾸벅 할 뻔 했는데 의식행사를 마친다는 사회자의 선언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옆 자리에 앉았던 분이 불쑥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 분도 나처럼 이 순간을 기다렸는가 보다. “제가 읽어 봤는데 재미있어서 한 권 더 샀어요.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보셔요.” 책을 받아보니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제목이 크게 써있고 제법 두툼했다. 책 차례를 살펴보았더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맞부딪치는 요충지로서의 한반도가 고구려 이래 어떻게 존재해왔는지를 분석하면서 새로 다가올 시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끼악,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터운 책을 게다가 따분하기 이를 데 없을 이야기를 어떻게 재미있게 읽는단 말인가. 아침에 출근하면 퇴근시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신문을 펼쳐들 시간 조차 없이 생활하고 있는데 말이다. 퇴근 후에도 업무와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 밤늦도록 지내다가 술에 취해 귀가해서는 잠자리에 들기 바쁜데 말이다. 간혹 계모임에서 친구들을 만나지만 누군가가 고상한 문화 이야기를 할라치면 반향이 없으니 겸연쩍어지고, 정치 이야기를 할라치면 격앙되고 거친 언사가 서로의 소통을 끈어버리니 그 또한 멀찌기 달아난지 오래 아니던가. 그저 어느 동네 부동산 가격이 어떻다거나 요즘은 재테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따위의 돈 이야기를 해야만 서로의 눈빛이 모아지지 않던가. 아! 때로는 스포츠 이야기도 나눈다. 누구는 배드민턴을 선수처럼 잘 치는가하면 누군가는 야구에 빠져서 휴일을 반납하고 있다고 그런다. 돈을 잘 벌어서 경제적 여유가 좀 생긴 한 친구는 요즘 골프채를 들고 필드에 나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빛을 반짝인다. 하지만 나도 야구 너도 야구, 나도 골프 너도 골프가 아니다보니 길게 이어지지 못하기 일쑤다. 학창시절을 벗어나 10여 년 생활전선 속으로 뛰어든 결과가 이런 자화상을 만든 것이다. 알베르 까뮈를 읽고 인간의 부조리를 논하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우리네 사회를 염려하던 청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핸드폰과 승용차와 돈벌이라는 마술에 사로잡혀 생활 속으로 들어간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책과 두터운 담을 쌓고 있었던 것 아닌가. 선물받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부쩌지 못하던 나는 짐짓 평온한 채 가장하고 ‘이 책을 읽고 다음 달에 만나 이 책 이야기를 나줘보자’고 제안했다. 사실은 그렇게하지 않는 다면 내가 그 책을 재미있게 읽어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의 숙제가 주어졌고 숙제인만큼 거뜬히 읽을 수 있었다. 짧은 기간에 두터운 책을 밑줄 그으며 읽는다는 것이 대체 얼마만 이었던가. 난 책을 선물해준 이에게 너무 감사했다. 그 책 선물이 없었다면 역시 똑같은 한 달을 밤낮없이 허겁지겁 보냈을 것이다. 책이 주어졌다고해서 갑자기 내게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후에 느꼈던 그 희열은 어떤 유쾌한 술자리에서도 어떤 신나는 영화 관람 후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약속한 자리에 가면서 나는 권하고 싶은 책 두 권을 사들고 갔다.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나도 책 한 권 사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 여름에 시작된 그 책 선물은 지금까지 매달 이어졌고 그 소문이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떠돌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50여 명이 책익는마을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책을 선물하고 선물받고 있다. 또한 그 자리는 모두가 주체가 되고 진정으로 진지해질 수 있으니 따스하기 그지없다.
2.아빠 뭐 해?
어린 자녀들이 있는 가정집에 방문해보면 책장에 책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 위인전, 전래동화, 창작동화에서 인체, 우주, 자연 등 제법 전문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편집된 책들이 집안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는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태교용 책에 이르기까지 준비돼 있곤 하니 가히 독서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될 듯 싶다. 할부로 전질류 한 질을 어렵게 구입해서 큰 애부터 막내까지 손 때를 느껴가며 돌려 읽었던 20~30년 전 서민들의 가정집 풍경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마도 어린 아이들이 대체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럴 것이다. 만나보면 그렇게 똑똑할 수가 없고, 책 속에서 얻은 지식들을 놀랍도록 많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직업상 어린 학생들을 자주 만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지식은 책이 아니고는 도저히 얻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부모들이 독서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도서관도 시스템이 제법 잘 갖춰져 있어서 큰 도서관, 작은 도서관, 학교 도서관 할 것 없이 가까이에서 만날 수가 있다.
집집마다 어린이 책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요즈음, 나는 가정집을 방문하면 슬그머니 훔쳐보듯 하는 습관이 한 가지 생겼다. 바로 어른들의 책을 찾는 것이다. 아뿔사! 그 즐비한 책장 사이 어디에서도 어른들의 책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특별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어른들의 책을 만나는 것이 ‘발견’하는 수준인 경우가 흔히 있다.
부모들은 자녀의 책읽는 모습을 보면서 흐믓해하고 격려해준다. 반면에 책을 안 읽는 자녀에게는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를 늘어놓곤 한다. 책 읽는 습관이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책과 친해지지 않는 아이들도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책장에 책도 채워 주었고, 도서관도 가까이에 있지만 무슨 환경이 더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어른들의 책읽는 모습이 아닐까. 부모의 독서하는 모습이야말로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이 아닐까.
책익는마을은 ‘어른들의 독서’를 모토로 하고 있다. 물론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내가 독서토론 모임을 한다고 말하면 어떤 이는 “우와!” 감탄을 자아낸다. 또 어떤 이는 이해를 잘 못했는지 “어린시절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해!” 라고 동문서답 아닌 동문서답을 하곤 한다. 책 읽는 것이 무슨 예외적인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학창시절에나 책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학창시절에 책읽기를 얼마나 제대로 교육하던가. 중학생만 되면 입시전선에 돌입해서 ‘책 읽지 말고 공부하라’고 윽박질러대지는 않았던가. 입시관련 문제집을 수 십 권 씩 밑줄긋지만 정작 삶 속에서 자신의 심성과 지혜를 가꾸는 데 필요한 서적을 펼치고 얼마나 밑줄 그어 보았던가. 진짜 독서는 학창시절을 벗어나야 가능하거늘 훈련받지 못한 우리는 책과 친해지지 어렵다.
간혹 학창시절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서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매우 큰 오해다. 성인들의 독서 생활이란 학창시절에 국영수를 어떻게 했는지와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란, 저 오대양처럼 한없이 넓고 깊기 때문에 너 나 할 것 없이 신입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을 한 번 상상해 보자. 어느 날 독서 재미를 알게 된 아빠가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다. “아빠, 뭐 해?” “어, 아빠 책 읽고 있어!” “아빠, 나하고 놀자!” “책 조금 밖에 안 남았으니까, 다 읽고 같이 놀아줄게!” 그동안 아이는 무엇을 하면서 기다리게 될까. 그리고 책을 읽고 난 아빠는 아이와 놀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될까. 상상이 현실로 되는 길은 멀리있지 않다. 오늘밤 당장 거실 쇼파에서 가능한 일이다.
3.토론은 싫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허, 그 사람 말 한 번 기막히게 잘허네” 바로 제가 한 말입니다. 선거 유세를 보다가, MBC 백분 토론을 보다가 말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우리들은 행사장에서, TV를 보다가 무심결에 박수를 치면서 그런 말을 던지곤 합니다.
선거 입후보자가 무르익은 유세장에서 혼신을 다해 상대 후보를 빠른 말로 공격하거나, TV토론에 나온 토론자가 상대방 패널을 향해 조목조목 짚어가며 잽싸게 공격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지지자가 되곤 합니다. 말의 힘이지요. 그래서 속으로 생각해봅니다. ‘나도 저렇게 말 잘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어디 말이 그렇게 쉽던가요. 세상 살아가는 데 말 잘하면 얻는 것이 많다는 속담도 수두룩하고 직장 생활하면서 말 잘하는 사람이 얻어가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서 속상해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바람대도 되지 않으니 웬일일까요? 말 잘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위안 삼기도 하지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계속 말은 해야만 하고 말하고 돌아서면 부족할 경우가 많으니 어디 말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럴 것입니다. 책익는마을에서 독서 ‘토론’을 한다고 하면 그 토론이라고 하는 말에 뜨악해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토론은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론이란 단어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토의라는 말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도를 협력해서 찾는 것이기에 익숙할 수 있지요. 하지만 토론은 TV토론처럼 뭔가 멋진 말로 상대방을 제압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서 내가 토론을 할 때는 논리가 치밀해야만하고 말의 속도가 가능한 빨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토론이란 것을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 덕을 보곤 합니다. 제가 책익는마을에서 독서토론을 오랫동안 했다고 하면 ‘말 잘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속고 살아왔습니다. 지레짐작으로 가졌던 선입견 때문에,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화에 임하는 상대방의 계략 때문에 말을 더듬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말을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말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좋은 분위기에서 약간의 훈련만 한다면 말입니다.
책익는마을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넉 달 동안 독서토론에서의 발언권이 없답니다. 듣기만하는 것이지요. 학교에서도 성인사회에서도 자연스러운 토론을 학습할 기회가 그다지 없다보니 ‘토론’ 자리라고 하니까 공격하려고하기 일쑤랍니다.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작위적인 잘난체로 흐르기도 하지요. 심지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 시간에 자신이 할 말을 어떻게 표현할까 골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듣는 데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이지요. 바로 각박한 생활의 희생자, 경쟁과 공격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발언권이 없는 넉 달이 지나고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누구나가 말을 잘하게 된답니다. 아니, 원래부터 말 못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책익는마을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여유를 갖다보니 자연스럽게 자기 내면에 숨겨두었던 진실한 말들을 하게 됩니다. 진실한 말은 잘할 수 있게 되고 비교적 빨리 말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런 토론은 자기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정모에서의 독토가 끝나면 많은 사람이 인터넷 카페 보령책익는마을에 들어와 후기를 남깁니다. ‘넘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4.숙제가 즐거워
학창시절의 숙제와 관련된 일화 한 박스 쯤 갖고 있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아무리 써도 채워지지 않던 영어 깜지 쓰기 숙제며, 부랴부랴 전과나 자습서를 펼쳐놓고 옮겨 적다 보면 어느새 팔목의 힘이 빠져서 펜을 놓고 손목을 흔들어댔던 그 문제풀이 숙제까지 숙제는 재미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숙제를 못해가면 매서운 매타작이 이어지던 시절이었으니 숙제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중고생 교실의 쉬는 시간은 숙제를 베끼는 진풍경을 매일 만날 수 있었지 않았던가.
지금은 겨울 방학이 깊숙이 들어가 있다. 아마도 겨울 방학이 팔부능선을 지나 구부능선 쯤에 이르면 학생들은 또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하리라. 겨울방학 숙제를 짜깁기하고 급조하고 꿰맞추느라 가족이 총 동원령을 내릴 것이다. 그 많았던 기간은 다 어디에 쓰고 과제 제출일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부랴부랴 움직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숙제를 그렇게 미루고 미루는 습관은 비단 학생들만이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지난달에는 어떤 교수님과의 약속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의 눈이 충혈되어 있고 피로해 보였다. 사연인즉, 논문 제출 기일이 꽉 차서 어젯밤에 그 논문을 마무리 하느라고 밤을 꼬박 지샜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숙제는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미루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그나마 학습시키고 책임의식을 훈련시켜준 것이 숙제 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간혹 얼토당토않은 숙제도 있었지만, 대게 숙제는 하교 후에 느슨해지기 쉬운 학생들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부여하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준 것 같다. 하지만 숙제는 예나 지금이나 피해가고 싶고 없으면 좋아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이 던져준 의무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는 요즘도 숙제를 한다. 회삿일을 집에 싸들고 가서 밤새우는 그런 숙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숙제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고 안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숙제는 하다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숙제를 마치고 나면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다. 날밤을 새워도 그 다음 날 일을 그다지 훼방하지 않는다. 이름하여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즐거운 숙제다.
책익는 마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씩 모둠별 독서토론이 있다. 그 정모에 나갈려면 선정된 책 한 권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여서 정모를 일주일 쯤 남겨놓고서야 비상이 걸리곤 한다. 낮에는 회삿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으니 밤에 독서를 해야만 하는데, 저녁 시간에는 이런 저런 모임과 집안일 때문에 책읽을 시간을 만들기가 만만치 않다. 사정이 그러하니 스케줄을 조정하거나 귀가 시간을 앞당긴다.
그렇게 비상을 걸고 꺼이꺼이 숙제를 하다 보면 책 한 권 읽는 이 숙제가 또 수월치 않다. 혼자서 읽고 끝낼 책이라면 그럭저럭 읽다가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고 재미있는 부분만 띄엄띄엄 짚어갈 수도 있지만 이 숙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할 터인데 내용을 자세히 모른다면 헛짚게 될 것 아닌가. 게다가 읽으면서 생각해보고 다 읽고 나서 나름 정리를 해야만 한다. 혼자서 읽고 만다면 그런 의무감을 갖을 필요도 없겠지만 독토에 나가서 무언가 내 느낌과 생각을 표현해야만 하니 밑줄을 그어야하고 메모를 해나가야 하는 독서가 된다.
그래서 책익는마을에서는 이 독서를 일컬어 ‘함께 책을 읽는다’고 말한다. 혼자서 읽는 것과 여럿이 같이 책을 읽는 것은 차이가 크다. 책을 자세히 읽게 되고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읽게 되니 책을 두어 번 읽은 꼴이 된다. 말하자면 책 한 권 읽는 일이 본전을 뽑고 이자까지 쳐서 받는 격이 된다. 더구나 독토 자리에 나가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다 보면 나의 얄팍하고 경직되었던 생각을 확인하기도 하니 일석 삼조가 된다.
다음 달 우리 모둠의 당번은 시집 두 권을 선정하였다. 아마도 낯선 경험이 될 것 같다. 시집을 선뜻 두 권이나 손에 쥐는 것도 그렇고 그 시집을 밑줄 긋고 깊이 생각하면서 읽고 나름 정리까지 해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달도 후반부로 들어갔다. 월말이 되면 나는 또 비상을 걸어야 할 것이다. 다음 달 초에 있을 독서토론을 대비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시집을 펼치고 씨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숙제가 기다려진다. 내 심장을 콩닥거리게 하고 내 마음을 다잡게 만들어 줄 그 숙제를 빨리 하고 싶다.
5. 찾아오는 사람들, 밀물이 되다
지금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차 한 잔 놓고서 사내 서너 명이 둘러앉아 뭐가 그렇게 좋다고 수다를 떨었는지 말이다. 우리들의 독서토론은 보통 두 시간 가량 진행이 됐는데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허리도 뻐근하고 입도 말라가면서 이젠 몸이 궁싯거리기 시작하면 서둘러 종료를 선언해야 했다. 더 하고 싶은 말일랑 뒤풀이로 자리를 옮겨서 나누자는 말과 함께. 그렇게라도 제어하지 않는다면 사내들의 수다는 언제 멈출지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차가운 술 한 잔 없는데 중년의 사내들이 모여 앉아 기나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놀라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모두가 직장인들이니 한 낮의 피로감에 쉴 자리를 찾아야 할 밤 시간인데 어찌하여 그토록 즐겁게 보낼 수 있었을까. 게다가 자리를 파하고 늦은 밤 귀가를 하면 어찌 그리 마음이 포근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이 서서히 주술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독토날이 다가오면 애인과의 약속시간을 기다릴 때처럼 몸이 달뜨게 되었다. 그 후 우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독서토론 하는 날’ 이라고.
말이 그렇지 생활 속에서 만나는 누군가에게 독서토론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생활에 바쁘고 찌든 일상인들에게 ‘독서토론’이라는 것은 너무도 멀고 낯선 일이 아니던가. 듣기에 따라서 이질감이나 소외감을 줄 수도 있고 이해 할 수 없다는 반응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좋은 걸 어쩌란 말인가. 처음엔 우물쭈물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함께 할 것을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몇 몇 사내들만의 그 좋던 보금자리는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제 더 풍부하고 다양한 수다가 시작된 것이다.
어쩌다 은포리나 해망산 앞 갯벌에서 조개를 캐다보면 그랬었다. 서툰 손짓이 좀 익숙해지는가 싶어서 휘파람을 불면서 호미질을 하다보면 밀물이다. 어찌나 빠른지 멈칫거릴 여유가 없다. 특히 밤에 갯벌에 나가면 밀물을 조심해야만 한다. 욕심내다보면 방향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책익는마을에 새로운 마을주민들이 들어오는 속도가 그렇게 밀물 같았다.
열 명이 되고 열다섯 명이 되더니 어느새 또 다른 주민들이 전입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그 오붓하던 수다는 강력한 제약을 받게 되고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메바처럼 분화가 필요해졌고 정회원 기준 여덟 명이 되면 우리는 두 모둠으로 분화하는 지혜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여섯 모둠이 각각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A팀은 조만간 또 분화할 태세다. 마을이 커지면서 촌장이 생기더니 작은 마을이 많아지니 반장도 생겼다. 그렇게 책이 익어가는 우리 마을에는 자꾸만 새로운 무늬가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그 무늬 속에서 진정한 빛을 밝히고 있는 색채가 있으니 마을 주민들이다. 너무나 다양한 직업과 나이를 만날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만남이다. 더구나 여타의 동호회와 달리 우리 마을 사람들 수다의 주제는 한 없이 많다. 문명, 자연, 시, 소설, 미술, 철학, 영화, 정치, 경제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주제가 널뛰기 하듯이 펄쩍펄쩍 다가온다. 선정도서에 따라서 주제는 불현듯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주제가 주어지면 마을 주민들은 진지하게 다가간다. 책 한 권은 각각의 주제를 품고 있고, 그 책을 읽고 풀어내는 이야기란 책이 던진 주제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똑같은 책을 읽어도 직업이나 나이에 따라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니 그 감칠맛을 무엇과 비교하랴. 우리들의 수다는 그래서 진정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밀물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세상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6. 어떤 책을 읽을까
책 한 권 읽기 힘든게 우리네 일상이지만 세상은 내 일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뛰어가나 보다. 간혹 대형서점에 가보면 맵시 있게 디자인한 새 책들이 어찌나 많은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수 백 평은 될 듯싶은 저 매장에 가득한 책들을 누군가는 읽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괜시리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책 한 권을 선택하는 것은 용기와 큰 결단일 필요한 일이다.
아니, 그렇지만은 않다. 고민하지 않고 특정한 진열대를 찾아가서는 별 망설임 없이 책을 집어 드는 사람도 있다. 으레히 자신이 찾는 부류의 서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분야는 거들떠 볼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 관심분야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갸륵한 일이랴. 그렇게라도 책을 만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 얼마나 기특한 일이던가.
내 20대의 독서가 그랬다. 나는 철학이나 문학 관련 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과학이나 주류경제학, 자기개발서 따위의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따라서 서점에 들어가면 책을 고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제법 많은 서적을 탐독하게 된 어느 날, 참으로 가소로운 관점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주류경제학이나 자기개발서 따위의 코너에서 책을 고르는 친구들을 가여운 듯이 바라보는 것 아닌가.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는 참여문학이나 맑시즘 관련 철학 서적이 아니라 감성적인 에세이집이나 칸트, 니체 등의 서적을 손에 든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쯧쯧쯧’ 하는 버릇을 오랫동안 지니고 살았었다.
책익는마을을 만나 제법 독서와 친숙해진 회원들로부터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이 책은 쉽다”거나 “저 책은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간혹 지나칠 정도로 아카데믹한 책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쓰여진 책을 읽게 되기 때문에 그 말은 많은 어폐를 갖고 있다. 대체로 바른 독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인사회로 진입한 우리들은 독서를 스스로 배워가야 했고 그런 만큼 수 많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한가 보다. 책과 비교적 가깝다는 사람들도 결국 자기가 선호하는 분야의 책이 있어서 다른 분야의 책을 만나면 우선 마음으로 경계를 하곤 한다. 마음을 주지 않으니 그 책이 선뜻 내게 다가올리 만무한 것이다. 어떤 이는 그 책 내용과 관련한 기초 지식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중요치 않다. 어차피 대중을 상대로 나온 책이니 마음으로 멀리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시작할 일이다.
책익는마을은 도서 선정과 관련한 묘수를 갖고 있다. 그게 바로 책 선물이다. 당번이 된 사람이 홀로 선택한 책을 선물해주면 다른 사람은 의무적으로 읽는 것인데 처음엔 고통을 호소하곤 하지만 일정한 과정이 지나면 모두들 행복해한다. 조금 더 지나면 나도 당번이 될 터이고 그 때가 되면 다른 이들에게 고통아닌 고통을 주게 된다. 한동안 낯선 책과 씨름하다보면 놀랍게도 무릎을 탁, 치면서 “바로 이거였어!” 하는 희열을 느끼게 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래서 우리 마을에 유명한 말이 “내가 내 돈 주고 책을 샀다면 결코 이 책은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낯선 분야, 낯선 내용의 책을 읽는 맛, 바로 그 속에 독서의 묘미가 있다. 내 생각을 고정시키지 않고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지난주에는 매월하는 정기 독토가 있었다. 여섯 모둠이니 책 여섯권이 선정되어 각 모둠별로 밑줄그으며 책을 읽고 만났다. 가브리엘의『제국의 몰락』, 장하준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최두석의『임진강』, 박종기의『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장 지글러의『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등의 책을 읽었다. 당번이 던져준 이 책들은 회원들 각자에게 세상은 다양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주었고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옷깃을 여미게 만들어 주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무슨 책이면 어떤가. 책 속에는 저자의 고뇌어린 숨결이 살아있거늘. 그리하여 독서란 그 책을 읽는 우리가 다시 해석해서 마음으로 다시 책을 쓰는 일인 것을.
7.우리시대의 청소년이여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돌아온 홍세화 선생에게 몇 년 전에 들은 이야기다. 어떤 여고생이 임신을 했다고 한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 당사자인 여고생이 호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상대 남학생도 한 자리에 앉았다. 엄중한 꾸지람이 이어졌고 두 학생은 크게 혼쭐이 났다. 그리고 심도 있는 가족회의가 이어졌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두 학생을 결혼시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고 그들은 부부 고등학생으로서의 새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2011년 대한민국으로 가져온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아마도 결혼에 이르기 까지는 고사하고 두 학생은 문제아로 사방에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리고 자칫하면 성년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에 막대한 지장을 입게 될 것이다. 홍세화 선생이 언급했던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그 나라 청소년들의 생활 속에서는 간혹 만나게 되는 일이라고 한다.
무례하고 버릇없는 일이지 않은가. 감히 청소년들이 말이다. 내 가족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고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한 번 더 돌이켜보자. 불과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만해도 결혼이란 스무살 전후에 이루어졌지 않은가. 아니, 우리민족의 오천년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지금처럼 결혼 적령기가 늦춰진 것은 길게 잡아야 오육십년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아니,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짐은 무엇이던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0교시 논란 속의 학교에 등교하고, 하교 후에는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학원버스에 올라타고 학원에 갔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귀가하기 일쑤다. 오죽하면 밤 12시 이후 학원수업 금지니, 10시 이후 금지니 하는 논란이 거세겠는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국영수 중심의 입시공부다. 청소년기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지 않는 학생은 이미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루 12시간 이상씩 밑줄 긋는 내용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그렇게 공부하고 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서 아름다운 인간세상을 만드는 데 얼마나 큰 몫을 하고 있을까. 불행히도 그들이 밑줄 긋는 내용에서는 개인의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탐구나 인류나 인생을 향한 깊은 고뇌를 만나기 어렵다. 자신이 이웃과 함께 만들어갈 바람직한 사회를 향한 진솔한 토론을 경험하기 어렵다. 이름 하여 입시지옥, 학벌중심 사회다. 그 관문을 통과한 자 만이 환영받고 칭찬받는 사회, 국영수 성적이라는 단일한 평가기준을 자랑하는 우리시대 청소년들의 사회다. 이 시대 어른들이 걸어오면서 통탄했던 그 길이 이제는 더욱 다져져서 튼튼한 성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년 전에 깜짝 놀랄일이 일어났다. 여고생들 6명이 독서토론을 하고 싶다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그 갈망을 학교에서 풀어주지 못하자 물어물어 우리 책익는마을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우리는 대 환영을 했고 그들에게 매달 책을 선물해주고 있다. 물론 책 선정을 학생들이 토의해서 하고 있으며 우리는 책값만 지불하는 형식이다. 독서토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기에 우리 마을에서 담당자를 파견하고 있다. 그 담당자는 토론에 끼어들어 가르치기보다는 원활한 진행을 돕는 보조자 역할 정도만 하고 있다.
여고생들의 숫자가 8명으로 늘어난 지난해 가을에는 중학생들도 찾아와서 매달 책 두 권 씩을 읽고 있으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회원중에 재무를 맡은 어떤 이는 “매달 나가는 책값이 장난이 아니야.”하면서 웃음짓기도 하는데 참으로 흐믓하고 즐겁다. 스스로 모여 함께 토론을 배우고 책 한 권을 집중해서 읽고 정리해대는 청소년들, 그들이 만들어갈 대한민국 사회는 다를 것이다. 개별성이 존중받으면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사회를 만드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청소년들이여 아무리 입시가 중요해도 책을 읽을 지어다. 그 속에 당신들의 미래, 우리 시대의 꿈이 담겨있으니.
8. 저자와 토론을 하다니
한 달에 책 한 권씩 읽고 만나는 시간이 2년을 훌쩍 넘어선 어느 날 불쑥 용기가 솟구쳤다. 저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함께 읽는 책이 책 장 한 켠을 제법 의젓하게 자리하게 되면서 뿌듯한 마음이 생겼고 저자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커가게 된 것이다. 아마도 우리끼리 하는 토론이 더욱 자연스러워지면서 우리끼리 만날 때 부족한 부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상 저자를 초청하는 강연회는 전국 대형서점이나 도서관, 문학 단체 등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간혹 그런 강연회를 가 보기도 하였지만 그야말로 저자의 ‘강의’를 줄곧 듣기만하는 행사들을 만나곤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원하는 저자와의 만남은 그렇게 강연만을 듣는 것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자를 초청한다는 것은 그 저자의 책을 읽고 더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니 형식과 내용을 달리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또 저자 강연회는 대부분이 대중성을 의식해서인지 문학인들의 강연회가 중심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읽는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철학, 자기계발, 역사, 사회 등 서점에 진열된 어떤 분야이든 관계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 대상도 대중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논의를 더해가면서 우리들은 저자를 만나게 된다는 꿈에 부풀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망설이기도 하였지만 저자를 만나고자 하는 욕구는 우리 마을의 대세가 되고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저자를 어렵게 초청하면서 우리끼리만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우리는 “이 행사를 보령시 주민들께도 알리자”는 데 동의를 하고 그야말로 ‘행사’를 만들게 되었다.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나보다. 2008년 가을, 적십자 인명구조대 건물 강당에서 책익는마을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이 된 제1차 저자초청토론회를 열었다. 초청저자는 우리 보령에 살고 있는 아동문학가 안학수 선생이었다. 처음 초청행사이니 보령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살리고 멀리서 저자를 모셔오는 부담감도 줄이자는 뜻에서 모시게 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안학수 선생은 빼어난 동시집을 두 권이나 낸 분이었다. 그것도 우리나라 굴지의 출판사인 계몽사와 창작과비평에서 출간을 하였으니 이미 전국적인 시인으로 유명세를 탄 분이었다. 선생은 작년에 문학동네에서 세 번째 시집을 냈다.
토론회에 나온 사람들은 예고했던 대로 모두들 선정도서인 『낙지네 개흙 잔치』를 읽고 나온 분들이었다. 진행은 순발력있게 나아갔다. 먼저 저자에게 주어진 도입 강의는 30분, 그 후 1시간 30분 동안은 계속 이어지는 질의응답이었다. 사실은 ‘질의가 별로 없으면 어쩌나’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계속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에 예정시간을 넘겨서야 끝내게 되었으니 첫 번째 저자초청토론회는 대성공이었다.
사실상 안학수 선생은 함께 보령에 살면서 종종 만나뵙게 되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만들고 보니, 사적인 자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선생의 글과의 만남과 삶의 철학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가 기획한 것은 단순한 강연이 아니라 질의응답을 중심으로 한 ‘토론’이었다. 따라서 청중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함께 자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참여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은 같은 책을 사전에 읽고 만났으니 모두들 매우 커다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자리는 또 하나의 공동체였고 또 다른 탐구와 학습의 공간이었다. 서해안의 작은 마을 보령, 그 날 그 순간은 소도시 보령에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느 기관의 도움도 받지 않고 회원들만의 십시일반으로 만든 열린 독서토론회, 책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었다. 초청저자는 청중이 모두 책을 읽은 사람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토론회, 어떤 곳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식이면서 대중적인 독서토론회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9.저자들과 벗되어 연대하다
저자를 초청하는 일은 간절한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일면식도 없는 저자에게 연락해서 지방까지 와달라는 부탁이 아닌가. 저자 대부분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현실에서 그 분들이 보령에 한 번 다녀갈려면 하루가 걸리는 길이 되므로 큰 결심이 필요하다. 더구나 저자 대부분은 누구 못지않게 바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인데 지방 초청에 선뜻 응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혹시 강사료라도 두둑히 준다면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저 동아리 수준이므로 저자의 헌신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다.
초청을 위해서는 연락처 확보가 필요했다. 먼저 출판사를 더듬고 거쳐간 직장을 더듬더듬해서 메일 주소라도 얻어내야 한다. 그 다음은 우리의 간곡한 초청 의도를 작성해서 메일로 보낸다. 기다리던 메일이 오면 또 답장을 보내기를 몇 차례 하고나면 편안한 유선 통화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저자의 일정이 빼곡하다. 때로는 토론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도 있어서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육 개월 후, 열 달 후에 일정을 잡곤 한다. 어떤 분은 강사료를 얼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더 이상 부탁을 드리기 어려워진다. 어렵게 찾아서 여쭈었지만 수포로 돌아갈 경우 허탈해지고 상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저 우리의 ‘독서운동’적인 뜻을 공유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는 항상 길이 펼쳐진다고 했던가. 우리의 저자초청 토론회는 어느 순간 날개를 달았다. 다섯 번째 초청 저자였던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뒷풀이에서 한 말이다. 자신이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곧 보령에 간다”고 말했더니 이권우 도서평론가와 임종인 변호사가 “자신들은 벌써 갔다 왔다”고 하더란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즐거운 우연의 일치였는데 두 번째 초청저자였던 이권우 선생과 세 번째 초청저자였던 임종인 변호사가 강양구 기자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었다. 아, 그 때 부터였던 것 같다. 책익는마을의 이름이 저자 세계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하는 활동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무되기 시작한 것은.
저자초청 토론회가 횟수를 더해가자 장소문제도 해결되었다. 사용료를 지불해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보령도서관에서 장소를 제공해주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도서관운동에 열정적이기로 유명했던 박찬희 관장의 배려와 관심 덕에 우리는 폼나는 도서관 세미나실에서 마음껏 토론회를 열게 되었다. 토론회는 박차를 가해서 시와 소설을 쓰는 유용주 선생, 조선정치사를 가르치시는 박성순 교수, 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이철수 화백, 화려한 작가 장정일 선생 등이 회원들과 보령시민들을 토론의 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또 새 시대를 향한 농촌공동체의 한 전형을 만들고 계신 이남곡 선생, 학문의 즐거움을 대중과 함께하는 고미숙 선생, 그리고 이 시대의 대표적 칼럼리스트이자 진보적 활동가인 홍세화 선생을 만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느끼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가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현실에서 강사료에 연연하지 않고 찾아와준 수많은 저자들은 우리의 선생이자 벗이 되어주었다. 어떤 분은 강사료를 선뜻 마을에 후원하기도 하였고, 어떤 분은 이후 우리가 열어나가는 마을 독서 행사를 적극 도우면서 새로운 장을 만들어 주었다. 또 초청저자 대부분이 저토가 끝난 후에도 뒤풀이에 결합해서 수많은 시간을 함께 토론하고 우정을 나누었으니 우리는 저자와 벗이 되었고, 인간적 연대까지 모색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오는 4월15일에는 12차 저토를 연다. 서울예술대학의 김융희 교수가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만남』이란 책을 들고 찾아오신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그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또 마을 회원은 아니지만 저토의 단골 시민이 된 사람들도 그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책 읽는 일이 가져다주는 흥을 알게 되었고, 책이 가져다주는 진보적인 삶과 행복도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아니 지구가 가까이 다가오는 드넓은 시야의 확보도 그 결실중 하나일 것이다.
10. 저자초청 행사, 천안을 찾아가다
우리나라 시단의 획을 그은 시인 김수영은 행운을 일컬어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현 듯 찾아온 어떤 기분 좋은 일을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없이 기뻐하곤 한다. 행운인 것이다. 행운이란, 사람의 기운을 솟구치게 하고 더욱 큰 정열을 만들어내는 묘약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늘 기분좋은 일들을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며, 복된 하루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새해 첫날부터 기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어디 일없이 찾아오겠는가. 행운을 바라는 사람이 인류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터인데 그 여신이 오죽 바쁘겠는가.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행운이 있다고 말하지만, 심심풀이로 한 두 번 로또 복권을 산 사람에게 1등 당첨의 행운이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행운의 여신은 미리미리 준비하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을 찾아가기에도 분주할 터이다. 따라서 행운이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책 익는마을에서 저자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초청하는 저자분들은 이곳저곳 나라 안팎 구경도 많이해서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우리 책 익는마을의 운영방식이나 내용들이 매우 독특하고 모범적이라며 칭찬 일색이 아닌가. 처음엔 의례적인 인사치레거니 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반복해서 듣게 되자 색다른 기운이 솟구치게 되었다.
보령시민들을 초청해서 열어가는 저자초청 토론회를 타 지역에도 알리면 어떨까? 어차피 책익는마을의 행사들이 책을 함께 읽는 즐거움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는 취지라면 보령시에만 국한해서 존재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우리들 만남의 형태가 이웃에 권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몇 해 동안 그저 책읽고 토론하는 즐거움을 옹기종기 나눌 뿐이었던 우리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행운을 만난 것이다. 새롭게 펼쳐갈 꿈을 만난 우리들은 기획에 착수했고 첫 도착지로 천안시를 향하게 되었다.
천안에서 충남인연맺기운동본부라는 사회운동을 하는 지인을 통해 천안지역의 주최단체를 결정하고, 책익는마을이 주관하는 천안시민초청 독서토론회를 열게 된 것이다. 천안 측에는 행사 한 달 쯤 전에 포스터, 현수막 따위를 만들어 천안시민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우리 책익는마을에는 저자를 섭외하고 초청료를 부담하며 당일 사회를 맡는 역할이 주어졌다. 선정도서는 물론 천안 단체측에서 결정했는데, 다행히도 보령 저자초청토론회의 두 번째 초청저자였던 이권우 도서평론가를 원하는 것 아닌가.
작년 6월 26일, 차량 두 대에 나눠탄 우리는 천안을 향해 출발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던 기분으로 신나게 달려간 우리들은 저자를 모시고 행사장으로 들어갔고, 선정도서를 미리 읽고 찾아온 천안시민들과 저자와의 독서토론회를 진행해주었다. 두 번째로 만난 이권우 선생은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의 저자답게 독서론과 독서법에 대해 청중과 뜨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서운동가인 이권우 선생과의 이날 만남은 또 다른 행운을 던져주었으니 책익는마을에 예기치 않았던 행운이 곱으로 찾아온 날이기도 하였다. 타 지역에서의 저자초청 독서토론회를 광범위하게 개최하는 꿈을 꾸는 행운을 얻은 우리들은,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이권우 선생을 필두로한 저자 열 세분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11. 인문학 페스티벌의 시작
봄소식이 한창 들려오던 지난달에 생태환경 연구에 매진하는 벗을 따라서 이웃마을 청양군의 지천이라는 하천의 발원지를 찾아갔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봄까치꽃의 귀여운 자태도 만나고 부풀어 피어나는 버들강아지에게 인사도 나누면서 여유있게 시작하였다. 천변 물줄기와 논밭을 따라 걷는 그 길은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산책길이었다. 그런데 물줄기가 희미해지면서 인적없는 계곡이 시작되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허위허위 찾아간 발원지에는 희미한 물기운이 전부였다. 그것도 손으로 긁어내서야 만나게 된 한 줌의 물이었다.
그 발원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이고 모여서 계곡을 이루고 물장구치는 개울을 만든다. 고요히 흐르던 물줄기는 어느 순간에 협곡을 만나고 힘차게 요동을 치는가 싶더니 강물이 되어서 유유히 먼 바다로 흐른다. 그 깊이는 가늠하기 어렵고 그 넓이 또한 좁아지고 넓어지기를 반복해서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넘어선 거대한 자연이라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한 줄기 한 줄기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내는 물길 여행은 그래서 경이롭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합리적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체험들을 만나곤한다.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일이 간혹 그렇고 행복과 불행의 역사 또한 불현 듯 다가오곤 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의 평가란 결과에 꿰맞춰서 어떤 일을 합리화하기 일쑤다. 일종의 결과론적 함정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그 또한 삶을 긍정하는 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분명한 것은 강물이란 실개천이 모여서 이루어지며 어느 순간이 되면 거센 물줄기로 포효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개천이 만들어지듯 역사를 만들어오던 책익는마을이 어느 순간 힘찬 물줄기가 되어 세상을 향해 흐르게 되었다. 작년 여름날, 뙤약빛이 내리쬐던 그 무덥던 여름날에 우리는 2010보령 인문학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파티를 대천해수욕장에서 펼치게 된다. 대학교수 13명이 1박2일을 함께하는 자리였다. 충청도 보령이라는 작은 마을에 경사가 난 것이다. 모든 문화행사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특히 지식을 테마로 한 파티가 작디작은 시골 마을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 출발은 저자초청토론회라는 이름의 행사를 하면서 빠른 속도로 의기투합이 된 도서평론가 이권우 선생과의 만남에 뿌리를 갖고 있다. 당신 스스로가 독서를 사회운동처럼 생각해서 우리 책익는마을의 취지와 내용에 적극 공감하고 계셨는데, 저자분들을 모시고 내려와서 마을 회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이른바 손님 접대의 방법을 두고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대여섯분이 내려오실 줄 알았는데, 열 명이 넘는 분들이 책익는마을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아! 감동이란 이럴 때 사용하는 단어일 것이다. 이런 시골 구석에 학계의 유명한 분들이 동시에 내려오신다니, 그것도 책익는마을이라는 모임 사람들을 만나러 오신다니,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순간적으로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진정하고 숙고에 들어갔다. 이 행운의 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 큰 선물이 다가온단 말인가. 정말로 우리가 하는 이 일이 사회적으로 좋은 취지인 것은 확실한가 보다.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뒷머리가 묵지근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 고민의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저자초청토론회를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운영해왔듯이 이 교수님들과의 만남 또한 열린 시간으로 운영하면 될 것이었다. 발원지에서 한 줌의 물로 시작된 물줄기가 실개천을 이루더니 유유히 흘러 협곡을 만나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12.보령 인문학 페스티벌
대천해수욕장은 보령의 자랑이다. 여름이면 수 많은 인파가 몰려와서 다양한 추억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기나긴 모래사장, 조개껍질이 가루되어 만든 그 백사장은 걷는 느낌부터 색다르다. 게다가 하루 두 번씩 멀리에서 몰려오는 파도의 포말은 동해나 남해에서는 만날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한다. 그래서 해변에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해변은 그래서 젊디젊다. 요즘은 머드축제로 또 다른 유명세를 자랑하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누구나 젊어지는 젊은이의 공간이다.
그래서 대천해수욕장은 여름내 열기가 가득하다. 사람의 열기가 아니라도 작열하는 태양빛을 인간의 힘으로 견디기 어려울 터인데, 이야기와 체온이 만들어내는 뜨거움이 더해지니 가히 용광로같은 도가니가 된다. 보령 인문학 페스티벌은 그 뜨거운 여름 한 복판에서 펼쳐졌다. 지자체마다 마련하는 어떤 돈벌이 축제도 아니고 가수나 게그맨이 등장하는 신바람 축제도 아니었다. 대천한화콘도 대형 세마나실에서 아주 조용하고 진지하게 흘러가는 낯선 축제였다.
때는 작년 8월 13일, 해수욕장 해변의 열기가 후반부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무렵이었다. 첫날은 밤 10시까지 이어졌고 다음날은 아침 9시부터 시작해 저녁 6시까지 계속된 마라톤 강의였다. 국어학, 과학철학, 종교철학, 문화인류학, 천문학, 과학과 문명사, 아리스토텔레스, 장자, 진화심리학, 토론학 등 비교적 무게있는 주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총12강을 이틀 동안에 모두 펼치다보니 쉬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주어졌다. 하지만 다양한 청중이 자리한 그 넓찍한 세미나실은 내내 열기가 이어졌다.
찾아온 청중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청소년에서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생업을 접고 참가한 책익는마을 회원들과 오며가며 얼굴이 익은 보령시민들을 비롯해 부여, 천안, 인천, 수원, 익산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인터넷을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달려와 이틀 동안 자리를 지켰다. 이 자리는 나이도, 학식도, 학력도 관계가 없었다. 자신의 지식을 대중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강사들의 정성과 다양한 공부의 욕구로 무장한 청중들의 열정이 함께하는 열린 공간이었다.
또한 강사분들은 자신의 강의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청중의 자리로 돌아와서 강의를 들었고 틈틈이 청중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서울 경기 지역에서 내려온 강사분들이었고 책을 몇 권씩이나 출판한 전문가들이었는데 길다면 긴 귀한 시간을 함께 나눈 것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축제의 전형을 만드는 시간이었고 지식이 아카데미를 빠져나와 광장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인구 11만이 채 안되는 충남 보령땅에서 말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대중과 나누는 데 선뜻 응해준 강사분들은 누구였던가. 박인희 교수, 김명진 교수, 이진남 교수, 류호철 교수, 이명현 교수를 첫날 만났다. 다음날에는 이정모 교수, 김시천 교수, 이종필 교수, 편상범 교수, 전중환 교수, 이재현 교수, 강양구 기자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니 도서평론가 이권우 교수다.
책익는마을 회원들은 이 행사를 위해 한 달 동안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경제적 부담 또한 마을 회원들의 몫이었다. 기관과 기업에서 약간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행사비는 꽤 많이 필요했다. 모아두었던 재정과 자발적인 특별회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허락하는 회원은 선뜻 몫돈을 내놓았고 십시일반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보령인문학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축제의 배는 아마도 저 대양으로 흘러갈 것이다. 돛을 달고 바다에 들어갔으니 해류를 타고 멀리멀리 항해를 떠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책과 지식이 대중과 공존하는 문화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삶 속 마음과 정신이 더욱 진중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벌써 우리 책익는마을에서는 2011년 보령인문학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여름에는 좀 더 다듬어진 기획으로 대천해수욕장을 더욱 뜨겁게 달굴 것이다.
13.그대, 잘 살고 있는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 살고 있는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아마도 한 발짝 뒷걸음질을 하면서 겸연쩍은 대답을 하기 십상이다. 그 이유는 모호하기 짝이없는 질문 탓이다. 도대체 잘사는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질문을 던지는 누군가는 그 기준을 갖고 던지는 것일까. 아니, 당신은 최근에 그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았는가. 묻는 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참으로 어색해질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물음을 계속 던진다. 어쩌면 이 질문은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이요, 회한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한 번 더 되짚어보면 우리의 질문과 대답 속에는 공통된 기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돈 잘 벌고 사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치되곤 하는 경우이다. 사실상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 꼭 필요하다. 아니, 우리네 삶의 기쁨과 슬픔의 거개가 그곳에서 비롯되니 어찌할 것인가.
상황이 그러할진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이를 어찌 나무랄 것인가. 김시천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을 보면 소인은 소인답게 자기 앞가림을 잘 할 줄 아는 소인의 이기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옛 고전에서도 무수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고 하니, 자신을 가꾸고 가족을 챙기는 일 중에 경제적인 부분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영역임에 틀림이 없는가 보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그룹은 대체로 이기적이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계모임들을 비롯해서 사적 이익을 배면에 깔고 있는 그룹들이 대부분이다. 또 어떤 그룹의 책임을 맡으면 그에 수반한 이익을 얻기 십상이다. 심지어는 우리 시대의 머슴을 자처하는 정치인들도 얼마나 자신의 사적이익을 잘 찾아가던가. 그래서 우리는 순수하게 공익이나 헌신을 추구하는 작은 모임이라도 만나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곤 한다.
물질이 최상의 가치로 추앙받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익에 밝은 것은 어쩌면 부끄러울 것도, 욕이 될 것도 아니다. 김시천 식으로 말한다면 대인이 대인답게 대인의 이기주의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소인인 우리들이 소인의 이기주의를 따르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살아가기에는 마음 한 켠에 늘 텅빈 공허가 또아리를 틀 것이니 그 공허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만 살다보면 타인도 자신과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하에 타인의 보상없는 헌신과 봉사를 폄하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무료로 시민들을 초청하는 저자초청 토론회를 10회 이상 진행했고 인문학 축제를 운영했으며, 타 지역에도 이런 독서토론의 즐거움을 알리고자 애쓰고 있는 책익는마을은 누가 운영할까. 책익는마을은 운영자 7명이 있다. 최초에 결합한 마을 주민들이면서 나아가고자하는 방향을 최초로 세웠고,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자한 사람들이다. 어디 경제적인 부분뿐이겠는가. 바쁜 일상을 접고 시간을 내고 마음을 모아야 하는 일이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는 일곱 시간 이상의 마라톤 회의도 해야 했고, ‘소인’으로서는 몫돈을 내야하기도 했다.
만 6년이 되면서 간혹 의심의 눈초리도 만나곤 하는데, 세상은 내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때로는 진실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알아주는 이 없고, 내게 이득이 없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내 영혼이 풍성해진다면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 아닌가. 그 길이 스스로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감사한 일 아니던가. 회원들이 부쩍 많아진 일년 쯤 전부터는 월 3천원 이상씩의 자발적 후원금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직 그것은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상징이고 배려에 가깝다. 책익는마을의 운영자, 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감사를 보낸다.
14. 글이 익어가는 마을
누군가 당신에게 독후감을 써 오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참으로 난데없는 주문이 될 것이다. 그런 글은 생활에 바쁜 성인들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글이란 숙련과정을 거친 전문 글쟁이의 몫이 아니던가. 보통 사람들의 독후감 경험이란 학창시절 방학숙제 때 만난 것이 대부분일 터인데 독후감을 써 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책익는마을에는 독후감이 난무한다.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처음엔 꾸역꾸역 시작한 독서가 어느 순간 탄력을 받는다. 관련서적을 한 권 더 구입한다든지, 도서관을 찾아가서 이웃한 책을 빌려와 읽어댄다. 이른바 겹쳐 읽고 깊이 읽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책 속 여행은 하해와 같아서 시작도 끝도 찾을 수가 없다. 너무나 목이 말라서 음료수를 한 컵 들이켰으나 갈증은 계속 이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래서 되묻기도 한다. 도대체 이렇게 책을 읽어서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에 이른 당신은 이미 고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자꾸만 책을 찾아가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 사색의 깊은 행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래서 독서는 다시 시작된다. 나를 자꾸만 자극하고 세상을 깊숙이 파헤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걷는 독서의 길은 사색의 길인 것이다. 무릇 독서란 활자의 문화이고 사색의 문화가 아니던가. 그래서 청소년이 독서와 친하면 큰 나무가 되고 어른이 독서와 가까이하면 세상이 밝아질 터이다. 또한 활자의 문화는 결국 만드는 자와 소비하는 자가 구별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소비하는 자는 그 독서를 통해서 또 다른 활자를 만들어 낸다. 그게 바로 독후감이요, 글쓰기가 아니던가. 독서를 통해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 생각이 활자화 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글과 책을 만나는 것이다.
이 자연스런 순환의 과정 속에 책익는마을이 존재하고 있다. 어느 순간 부터인가 책익는마을에는 독후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원고지 두세편 길이의 독후감이, 또 불현 듯 20~30매 분량의 독후감이 인터넷 카페에 등장한다. 모두가 자발적이다. 그 글이 누가 강제한다고 나올 것도 아니다. 학점을 받을 것도 아니요, 상을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책익는마을 카페에는 이곳저곳이 독후감으로 넘쳐난다. 책이 소비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또 다른 책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쓰는 이는 쓰는 이 대로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하는 순간이고 그 글을 읽는 이에게는 새로운 독서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올 봄에는 책익는마을에 선물이 찾아왔다. 철학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책익는마을에 글을 요청했다. 그 모임에서 발행하는 인터넷 잡지 ‘시대와 철학’에 우리 책익는마을 코너를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부산을 떨었다. 그 웹진의 위상이 있는데 아무 글이나 실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글 잘쓰는 사람을 골라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전문 글쟁이가 아니거늘 누가 누구를 고르고 말고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독후감과 후기를 써왔듯이 가고 있는 길을 그대로 가면 될 일이었다. 단지 식구끼리 먹는 밥상이 아니라 초대받은 밥상이니 옷매무새도 단정히 하고 양말도 갖춰 신으면 될 일이었다.
요즘은 책이 익어가는 마을에서 글이 익어가는 소리가 우렁차다. 글을 업으로 하는 자에게도 다독은 그 출발점이라고 하듯이 꾸준한 독서는 새로운 글을 만든다. 이제 책익는마을은 활자의 일방적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를 겸하게 되었다. 누가 알겠는가. 책익는마을에서 생산되는 활자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되어 청소년들이 큰 나무가되고, 성인들이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 디딤돌이 되리라는 것을.
15. 푸른꿈을 꾸는 사람들
우리네 봄은 거인의 발걸음처럼 성큼성큼 지나간다. 해동이 되면서 환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여름 내음이 물씬 풍긴다. 불과 몇 주 전만해도 산들에 돋아난 여린 봄꽃들을 발견하면 바짝 엎드려서 살펴보곤 했는데, 이젠 무릅까지 올라와 버렸다. 하얀 냉이꽃이 훌쩍 커버렸고 쑥은 쑥쑥자라서 쑥밭을 만들었다. 애기똥풀은 튼실한 줄기 끝에 진노란꽃을 마음껏 자랑하고, 봄까지꽃, 꽃마리, 꽃다지는 아예 지천이다. 산나물 뜯기 선수급인 동네 아낙은 풀섶이 우거졌다며 투덜거린다.
기나긴 겨울이 비로소 떠났는가 싶었는데 여름인가보다. 이젠 소매짧은 옷을 꺼내야 할 터이다. 이젠 무성한 수풀 속을 거닐어야 할 때이다. 그늘을 찾게 될 것이고 싱싱한 푸르름 속에서 맘껏 자연을 호흡하게 될 것이다. 겨우내 꿈꾸며 준비했던 봄 친구들은 그렇게 재빠르게 여름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준비한 자들이 맞이하는 해동은 그렇게 쏜살같이 푸른 청춘의 계절로 달려가는가 보다.
지금 책익는마을도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식물 친구들만큼이나 바쁜 계절을 보내고 있다. 매월 진행하는 모둠별 독서토론 외에도, 6월에는 철학을 하는 이진남 교수를 필두로 한 철학온 그룹과의 1박2일 연합 세미나가 준비를 완료하고 있다. 또 7월에는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의 저자 이종하 교수를 모시고 13차 저자초청토론회를 연다. 어디 그 뿐인가. 8월 가장 뜨거운 여름에는 작년에 이어 제2회 보령인문학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모두 책을 읽어야 참여할 수 있는 일들이니 책 읽을 복이 넘쳐나게 되었다.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기도 포천시와 이웃마을 청양군에서의 저자초청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으니, 차칫 본업과 취미가 경중을 가르지 못하게 될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분주한 여름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무슨 유혹에 빠져서 귀한 시간들을 책과 함께 보내는 것일까. 아니, 혼자서 책을 읽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시민들을 초대한다, 타지역으로 찾아간다, 하면서 부산을 떠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고자 한단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던가. 책익는마을은 책을 함께 읽는 기쁨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우리는 수많은 매체에서 쏟아내는 정보와 주의, 주장을 손만 뻗으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정보와 다듬어지지 않은 주의, 주장이 또한 분별없이 우리의 생각을 빼앗아가는 시대이다. 그래서 책은 더욱 소중해진다. 책을 통할 때 우리는 정보의 분별력을 갖게되고 세상 속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볼 때 우리는 튼실한 사유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책익는마을은 매일 꿈을 꾼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세상을 말이다. 벌써 작은 책익는마을은 곳곳에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다. 보령에서 시작한 씨앗이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타고 날아가서 서울에도 인천에도, 경기도 어느 마을에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책익는마을의 다양한 움직임이 우리네 어른들의 일상에 자극이 되어 수 십 개, 아니 수 백 개의 책익는마을로 거듭나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나는 이런 일도 꿈꾼다. 충청도 보령땅에 어느날 건물이 들어섰다. 이름 하여 대한민국 독서토론회관, 그곳은 어른들이 주축이 된 독서토론회가 매일 열리고, 매일 전국의 명사들이 찾아와서 시민들과 뜨겁게 책이야기를 나눈다. 이번 푸르른 계절이 지나가면 그 꿈은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 때 이 연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끝)
첫댓글 책익는 마을의 역사와 미래~ 저 처럼 컴으로 보는게 어려운 사람도 군데군데 뭉클해 집니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이런 글 올려 주셔서 고밉습니다.
아! 선만형 만나술한잔 하고십다..
때로는 머리를 쥐어짜며 원고 마감시간에 이르러 송고한 글도 있겠지요? 형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열정의 열매를 지금 우리는 따 먹고 있습니다. 다시금 수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