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역사 100년이 넘는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박해시대의 은둔처
하우현 성당은 작은 규모지만 1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속칭 ‘하우 고개’에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1869~?, Oscar) 신부가 초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설정되었다. 여러 차례 공소와 본당의 과정을 되풀이하다 1980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65년에 신축된 것이다.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하우현(하우 고개)은 옛날에는 광주부 의곡면에 속해 있었다.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하우현은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고 있었으므로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다. 역원은 역마를 바꾸어 타던 곳을 말한다. 그래서 이곳을 일컬어 ‘원터’라고도 한다.
하우현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곳으로서 인적이 드문 험준한 이 산골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유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 마을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1752~1802,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 잡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일이 있고, 그 뒤 구전 자료에 따르면, 김선영(金善永, 1898~1966, 요셉) 신부의 증조부인 김준원(金俊遠, ?~1845, 아니체토)이 1845년 9월에 잡혀 남한산성에서 치명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신부가 묘론리에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장제철의 밀고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이곳은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병인박해 이전부터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모시고 교회 활동을 하다가 개항 이후에는 입국한 선교사들과 함께 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다시 모아 한국교회 재건에 힘썼던 김기호(金起浩, 1824~1903, 요한) 회장이 만년(1901년)에 봉사 활동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내려와 머문 곳이다.
김기호 회장은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주교 당시에는 전국 8도의 도회장(都會長, 현 평신도협의회 전국회장) 직분을 맡아 정기적으로 각 지역 회장들을 모아 피정을 지도하며 교육하는데 힘썼으며 《구령요의(救靈要義)》, 《소원신종(溯源愼終)》 등 교리서와 ‘피악수선가(避惡修善歌)’, ‘성당가(聖堂歌)’ 등 천주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의 묘지는 청계산(淸溪山) 응봉(鷹峰) 자락에 있다.
1900년에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지은 사제관은 몸체는 석조로, 지붕은 골기와 팔작집으로 이루어진 한불 절충식 건물이다. 신축한 사제관은 2001년 1월 22일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 김기호(金起浩) 회장
김기호(1824~1903, 요한) 전교회장은 황해도 수안군 남면 무송동에서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났다. 25세 경 중병을 잃고 난 뒤부터 사상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여 고민하던 끝에 1854년 이마두와 홍봉주에게《성세추요(盛世추堯)》와 성서를 빌어 읽고 이해 8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베르뇌 주교를 보좌하며 전국으로 전교 여행을 다녔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경기도 청계산의 하우현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강원도 금강산, 양양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1876년 블랑 주교,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 등을 맞아들였고 1881년부터 평안도에서 전교하였다. 1891년 일선 전교 활동에서 은퇴하고 하우현에 거주하면서 하우현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을 창설 한 후 1903년 12월 28일 사망하여 청계산에 안장되었다. 김기호가 남긴 저술로는 1903년 명동 성당 준공의 기쁨을 노래한 〈성당가(聖堂歌)〉 등 천주가사와 《구령 요의(球靈 要義)》, 《소원신종(遡源愼終)》, 그리고 40여 년간의 전교 활동을 회고한 《봉교자술(奉敎自述)》 등이 있다. 서울대교구의 김운회(루카) 주교가 그의 후손이다.
■ 순교자
◆ 한덕운 토마스 (1752∼1801) <하느님의 종 124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800년 10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그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