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한류 열풍이 ‘한글’로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한국 가요(K팝)를 듣는 것을 넘어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늘고 있는 것이다. 고무적인 현실에도 외국어 홍수와 온갖 줄임말, 혐오 표현으로 우리 국어 환경은 몹시 어지럽다. 무슨 뜻인지 모를 외국어의 범람은 세대 갈등을 부추기고 알 권리를 막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말을 얼마나 알고, 잘 쓰고 있을까. 이데일리의 연재 기획 ‘반갑다 우리말’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데일리는 문화체육관광부·㈔국어문화원연합회·세종국어문화원과 함께 외국어 남용 실태를 짚고, 이를 쉬운 우리말로 개선하기 위한 기획 기사를 총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현대는 민중의 시대요, 한글은 민중의 글자”, “한글이 목숨”,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다”.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 남긴 어록들이다.
김슬옹(60) 세종국어문화원 원장은 철도고 1학년 시절 한글에 미쳐 한글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외솔 최현배 선생의 뜻을 이어 무려 40년 넘게 한글 외길을 걷고 있다. 지금껏 한글 관련 저술만 90여권, 관련 논문은 130여편에 달한다. 훈민정음학, 국어교육학, 문학 총 3개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올해 이데일리 ‘쉬운 우리말 쓰기’ 연재 자문역할도 맡고 있다.
최근 서울 광화문 세종국어문화원 사무실에서 만난 김 원장은 “1977년 당시 철도고 80%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었는데 따로 기숙사가 없어 대부분 신문배달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당시 온갖 신문을 다 봤다”며 “그런데 죄다 한자가 수두룩하더라. 천자문을 뗀 나도 모르는 한자가 많았다. 국어시간에는 한글이 최고라고 배우는데 푸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듬해 겨울방학에 이름을 한자로 된 용성에서 ‘슬기로운 옹달샘’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슬옹’으로 바꾸고, 교복 이름표까지 교체해 달았다.
김 원장은 한글의 가치에 대해 “한글에는 보편주의가 담겨 있다. 누구나 쉽고 평등하게 배울 수 있다”며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지식과 정보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가 한글만 쓰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다. 2005년 국어기본법이 나왔다”며 “한자와 영어 사대주의가 체질화돼 있다 보니, 쉽고 과학적인 한글의 가치가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것까지는 쉽지 않았다. 다른 나라 학자들은 한글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되레 우리는 홀대해 왔다”고 지적했다.
국어기본법 시행 뒤 지역 대학마다 국어문화원을 세우면서 그동안 정부 정책과 민간으로 이원화됐던 우리말 사업이 정착되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김 원장이 말하는 성과다. 어려운 한자어, 차별어 등을 우리말로 잘 바꾼 좋은 사례로는 대합실→맞이방, 잡상인→이동상인, 미혼→비혼 등을 꼽았다.
김 원장은 “2019년부터는 연합회를 주축으로 각 국어문화원은 공공언어 개선사업, 지역어 보존사업, 한글교실, 공문서 바로쓰기 등 우리말을 가꾸고 우리말 오염실태를 진단해 우리말 제대로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며 “다만 아쉬운 점은 이 같은 노력에도 여전히 외국어 남용 대세를 완전히 바로잡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언어는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것”이라면서도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인권, 경제에 부정적이라면 잘못된 언어 사용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인 만큼 획일화된 영어중심의 변화는 수용해선 안 되며 다양성 차원에서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아울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은 우리나라 성인과 청소년의 문해력과 관련해선 “한글은 빨리 깨우치는 데, 맥락에 대한 이해 수준은 꼴찌 수준”이라면서 그 원인으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문화와 객관식 위주의 국어교육을 꼽았다.
김 원장은 “교육 열기는 높지만 객관식 위주의 문제를 푸는 국어교육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논술은 문제를 제기하고 맥락을 파악한 뒤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하는 기본적 언어 글쓰기다. 생활 속에서 능동적 언어 주체가 되는 것이 문해력을 키우는 힘”이라고 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학자로서 국어문화운동을 실천하고 열심히 펼쳐나가는 게 김슬옹 원장의 여전한 꿈이다. 그는 “국어를 보존·발전시키고 후속세대를 키우는 과정이 끊임없이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더 나아가 1446년 세종이 간행한 해례본을 국민이 읽고 배울 수 있는 교육센터를 여는 게 목표”라며 “한글을 산업적으로 연구하는 일도 하고 싶다. 한글학자가 돈 버는데 왜 신경을 쓰냐고들 하는데, 한글의 가치를 나누는 게 산업이다. 함께 배려하고 소통하는 게 한글의 중요한 가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