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희가 결혼 49주년(1971.3.25)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이 꽃은 결혼 49주년 기념으로 아내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방 안으로 찾아 온 봄 손님
광성교회(담임 : 김창인목사)는 강동구 풍납동에 소재하는 교회로서
당시 약 2700 명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장로교 교회에서는 영락교회 다음으로 큰 교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성교회 교역자들(앞 줄 좌측 4 번째 필자. 6 번째
김창인목사)과 성가대원
1.목사 안수
심방과 청년 대학부 (40여명)를 담당했으며 이 교회 시무 시 목사 안수를 받았다(1980.5)
청년 대학부
필자가 속한 장로 교단의 목사 자격은 대학
4년 신학 3년(M.DV) 전도사
2년 후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주어진다. 졸업 후 2년 만에 목사고시에 합격한 후 광성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
광성교회 교안들의 축하
광성교회 교역자와 제직
성광 교회 이원경목사의 축하(우측 첫번째)
송학대교회 교인들의 축하
가족
2.보신탕
이 교회에는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당회를 가정에서 모이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그때마다 보신탕이 준비되었다. 권사님 한 분이 보신탕 요리에 솜씨가 있어서
그 분이 준비했다.
3.사례비
지금까지 생활지가 넉넉하지 못했다.
이 교회 당회장 목사님은 교역자들이 생활비 걱정을 하면 목회에 지장이 있으니
교회에서 생활비를 넉넉히 줄 테니 목회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4.
교인들의 사랑
당시 천호동은 사업에 실패했거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교인들은 생활이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인들 중에는 목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겨란 한 줄 또는 시래기를 삶아 둥그렇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때론 첫 수확이라고 하면서 호박 한 개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그 때 그 교인들의 정성과 따뜻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
5.보람
제자 중 3 명의 목사가 배출 되었다.
한 명은 권홍량목사로 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국에 와서 LA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금은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최순남이란 학생도 후에 목사가 되어 상계동에서 아가페 교회에서 시무했는데
이 목사는 매월 신간 서적 한 권을 보내주곤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40이 조금 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김성복이란 학생도 대학 졸업 후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다.
지금 홍콩에서 목회하고 있다.
샌디에고에서 목회 하는 중 세 목사 부부가 필자를 방문했다.
스승님이 보고 싶어 왔단다.
샌디에고를 관광 시켜주고 멕시코까지 갔다 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하니 백화점으로 가자고 했다.
백화점에 들어가더니 필자를 양복을 파는 양복점으로 데려가더니 “목사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한 벌 고르세요”하였다.
생각지 않게 양복 한 벌이 생겼다.
그 지금도 옛 제자들을 생각하며 그 양복을 가끔 입는다.
사모님들은 제 아내를 양장점으로 데려가서 양장 한 벌을 사주었다.
6.홍형강 아내 약국
홍형강 동문이 언제가 필자의 글을 읽고 댓글에 광성 교회 시무 시 자기 아내가 운영하는 약국에 필자가 가끔
들렸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의 아내가 필자에게 “목사님 수고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락교회에서 필자의 설교를 들었다고 설교 제목까지 이야기했다.
아마 그때 영락교회 출석했던 모양이다.
난 도무지 그 설교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어째든 고마운 친구다.
7.어머님 별세.
군 시절에 술도 좀 마셨다.
어머니는 큰 형님과 함께 사셨는데 휴가를 나오면 형님 댁에서 보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술 한 잔하고 밤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왜냐하면 술 마신 것 형님에게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자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무릎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 우리 창기 술 끊고 신앙생활 잘 하게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후일 필자가 목사가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며 살았다.
신학교 줄업 당시 어머니는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생활하셨다.
병 상에서 “창기야 네가 목사가 되는 것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님은 신학교 졸업식에는
참석하셨는데 그렇게도 원하셨던 목사 안수 받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79세 때 별세하셨다
목사 안수 받을 때는 병 중이라 목사 안수 식에 참석을 하지 못하셨다.
영락 동산 하관 예배
영락 동산 묘비
차 례
(회고록)(17) 꿈을 이루다 (영락교회1981-1985)
(회고록)(18) 이민
(회고록)(19) 이민 목회 시작(산호세 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