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어느 비 오는 날의 포장마차/ 한석산
22. 열하를 향하여/ 이기철
23. 옮겨가는 초원/ 문태준
24.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김현태
25. 저 거리의 암자/ 신달자
26.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이채
27.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김기택
28. 풀의 노래/ 이근모
29.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오세영
30.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국보문학 시낭송대회 지정시3부(21~30)
21. 어느 비 오는 날의 포장마차 / 한석산
난 지금 사람이 그립다.
내 어린 날의 노래 눈물 젖은 빗소리
추억의 연탄불에 고추장 꼼장어 진한 냄새가 생각난다.
이런 날은 그저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땡겨야 하는데
요새는 포장마차도 잘 안 보이니 아픈 그리움이네.
도시 변두리 막다른 골목 한 지붕 다섯 가족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저녁 먹고
티브이보다 다 함께 자던 그때 그 시절
그땐 옆방 엄마가 우리 엄마같이
네 엄마 내 엄마 없이
아이들이 보이면 안고 밥 떠 먹여주던 시절
늦은 밤 아버지 귀갓길은 온 동네 똥개들이 뒤를 따랐다.
양념 묻은 손에 쥔 찢어진 봉지에 닭발 몇 개
거나한 취기에 서투른 애정 표현 투박한 아내 잔소리
자식들의 술 냄새 투정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나이 들고 살다 보니
그저 원망만 했던 아버지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나네요.
고단한 시대의 애환을 한잔 술로 풀어내던 포장마차
아버지는 술이 아닌 눈물을 삼켰다.
어릴 때 아버지 손잡고 따라가
처음 먹어본 꼼장어, 닭똥집, 오뎅 한 꼬치
아련한 카바이트 불빛
포장마차에 떨어지는 빗소리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민족의 혼을 깨우다/ 한석산/ 도서출판 국보/ 2024
22. 열하를 향하여 / 이기철
지원은 하룻밤에 아홉의 강을 건너
거친 모래 땅 열하에 도달 했다지만
나는 아홉의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도 한개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마음 덮으면 없는 강이 마음 밝히며 열의 강으로 소리를 놓인다.
숱 많은 머리카락 날리며 바람은 어디로 불어 가는가
메마른 계절일수록 마음은 불타 올라
쓰라린 시대에는 쓰라린 정신만 남는다.
참말 뜨겁게 살아 보리라.
마음 다지면 맨살의 모래는 끓어오르지만
다가서면 열하는 마음 밖 백리에 피안으로 누위 있다.
아직도 멀었느냐 아픈 발 내리고 내 몸 잠시 쉬일 곳은,
내 발 디뎌 참새 발자국만한 흔적 남길수 없는 땅 위에
낙타의 발을 이끌고 오늘도 고삐를 죄는 세월이여
어제 상수리나무 아래 쉬던 사람들
오늘은 꿈이 어지러운 그들의 적막 위에 잠들었느냐
어제 아프던 사람들 오늘 새살 돋은 발을 이끌고
고원을 건넜느냐
바라보던 눈물겨운 것들 너무 많아
내 작은 가슴으로 그곳들의 아픈 꿈 다 끌어안을 수 없지만
눈물의 값짐을 아는 자만이 사람의 귀함도 알수 있다
가자 날 저물면 처마 아래 들고 날 밝으면 모래밭을 걸어
슬프고 작은 것 불러모아 그들의 등 다독이며 가자
고독도 손 잡으면 친구이리니
마음의 거친 물결 재우며 가자.
*열하를 위하여/ 이기철/ 민음사/ 1995
23.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먼 곳/ 문태준 / 창비/ 2012
24.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 김현태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낙엽 하나 뒤척거려도 내 가슴 흔들리는데
귓가에 바람 한 점 스쳐도
내 청춘 이리도 쓰리고 아린데
왜 눈물겹지 않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은 만나야 한다기에
그저 한번 훔쳐본 것 뿐인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매스꺼운 너울 같은 그리움
왜 보고 싶은 날이 없겠습니까
하루의 해를 전봇대에 걸쳐 놓고
막차에 몸을 실을 때면
어김없이 창가에 그대가 안녕하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내 마음의 편린들은 그 틈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데
왜 서러운 날이 없겠습니까
그립다는 말
사람이 그립다는 말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저 달빛은 오늘도 말이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두고 두고 오래도록 그리워해야 한다는 말
어찌 말처럼 쉽겠습니까
달빛은 점점 해를 갉아먹고
사랑은 짧고 기다림은 길어지거늘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비라도 오는 날에는
기댈 벽조차 그리웠습니다
*그대는 왠지 느낌이 좋습니다/ 김현태 / 책 만드는집/ 2002
25.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어둠 깊어 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댄 농담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어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이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저거리의 암자/ 신달자/ 문학사상/ 2023
26.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 이채
깊어서 고요한 것이 있다면
바다만이 아닐 것이며
넓어서 편안한 것이 있다면
하늘만이 아닐 것입니다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눈빛이 그러하고 가슴이 그러하고
중년에 온화한 당신의
표정이 그러하고 생각이 그러합니다
세월의 오랜 정을 소중히 여기고
진실한 마음의 참됨을 알기에
문득 그리워지는 사람 하나
어둠 속 별이 되어 빛날 때
깊어도 때로는 외롭던가요
외롭다가 슬프기도 한 눈빛으로
흘러도 보이지 않는 가슴 속 눈물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입니다
떠나간 이름 하나
긴 하루로 남았던 기억
어느 날 너와 나의 만남이
엷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날 때
넓어도 때로는 그립던가요
타다 남은 불씨에
실바람이 불어오면
달래고 재우는 버들잎 손길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입니다
가고 오는 세월은 유수 같아라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나니
한줄기 노을빛이 더욱 아름다워
중년인 내 나이를 사랑하렵니다
*중년의 고백/ 이채/ 도서출판행복에너지/ 2018
27.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은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소/ 김기택/ 문학과지성사/ 2010
28. 풀의 노래 / 이근모
살랑이는 바람 앞에
가녀린 촛불처럼
그렇게 태우고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고
그럴 때마다
몸을 눕혀야 했습니다
저만치 밀려오는
짓밟는 발자욱 소리 귀 세우며
뻗어야 할 뿌리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세레나데
너울거리는 하얀 순결은 꽃이 되어
감춘 뿌리, 더욱 튼튼 키웠습니다
길가에 터 잡아도
들판에 터 잡아도
절벽에 터 잡아도
궁시렁거림 없이 생을 빛냈습니다
스치는 쓸쓸한 발자욱
먼먼 당신님께 향하는
나만의 마음 피었다 지고
그리움에 울다가 지는
봄, 가을이 반복 되어도
계절 속에 빠진 별들을 건지며
긴 겨울도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봄에 피운 꽃, 겨울에 사위더라도
나의 뿌리 고이 맞아줄
그리움 깊이 안고 높이 안고
내 생의 풀씨, 민들레 홀씨처럼
그렇게 홀로 서서
기다림을 잉태한 망부초가 됩니다
망부초가 됩니다
*풀의 노래/ 이근모 / 도서출판 시와이야기 / 2020
29.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아래 까마득히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러르면
먼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 섶엔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한국대표명시선100/ 오세영 천년의 잠/ 시인생각/2013
30. 한 사람을 사랑했네 /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자음과모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