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읍 현리縣里 유래
영양군 관문인 송영당으로 들어 오면 오른쪽 넓은 들에 자리한 동쪽 마을이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반변천은 물이 맑고 주위의 경치가 아름답다. 본래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영양현의 소재지였다. 해서 현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때 양평동을 합하여 현동이라고 이르게 된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서악사 절터에 있는 무량사와 북악사 터에 있는 3층 석탑, 수장산의 물무지, 남악사의 오층모전탑,영성사, 그 밖에 송영당소를 들 수 있다.북악사 터의 3층 석탑은 탑의 테 면 탑신에 사천왕과 여덟 보살을 양각하였는데 신라 때 세웠다고 한다. 아울러 남악사의 오층모전탑은 벽돌 모양의 것으로 쌓아 올렸는데 신라 시대의 것이라 한다.
마을의 남동쪽에 산이 있는데 이 산에서 자주 불이 남으로 하여 불의 재난을 막기 위하여 산꼭대기에 물단지 세 개를 묻는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이 물단지에 물을 길어다가 붓는다고 한다.
한편 송영당이란 소는 소 위로 큰 길이 나서 마을의 관문이 되었으며, 거두산성의 신당에는 동부 여덟 개 동과 서부 다섯 동이 매년 정월 보름날에 번갈아 가며 제사를 지내며 다음날 동부와 서부는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제 영산서원과 영성사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영산 서원은 조선조 효종 6년에 세워졌는데 퇴계 이황선생과 학봉 김성일 선생 두분을 서원에 모신다. 숙종 20년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쓴 액자를 걸어 두는 사액서원이 되기에 이르나, 그 뒤 고종 5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서 헐리게 된다. 2019년 현동 마을 뒤에 영산서원을 복원 하였다.
5층모전탑이 있는 영성사는 1940년에 권영성 선생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지은 절이라고 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달밭ㆍ월전
지대가 높고 땅모양이 반월형이며 밭만 있고 논이 없어서 1940년 무렵에 붙여진 이름이다. 월전은 달밭을 한자로 뒤쳐 적은 것인데 달밭은 높은 지대에 있는 밭이란 뜻풀이를 할 수 있다.
*압싯골ㆍ압실골ㆍ신동
현리 앞에 위치하여 양지 바르고 살기 좋아 선비 김태식 선생이 붙였다고 전한다. 1945년 현리로 분할될 당시 신동이라고도 칭한다. 행정 구역상 현 3리이다.
*양지마ㆍ양평
영양현 관아가 있었던 현리의 앞들이 있는 마을이며 토질이 비옥하고 넓어 양평이라 하였다. 강의 흐름이 변하여 행정구역상 현 2리이며 산비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중앙은 들이다.양평의 양은 땅 이름을 고칠 때 그칠 간에 점을 찍어 좋은 뜻으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양-혹은 간- 계열의 땅 이름은 거의가 북쪽에 많이 있으며 여기 간은 물신 혹은 땅신을 드러내는 감과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령 대구 동구의 양방동도 본래는 간방동에서 비롯한 경우와 같은 것이다.상양평양지마와 마을이 이어져 있으나 위치상 상단에 있기 때문에 상양평이라 부른다. 옛날에 큰 우물이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양평에서 간-감의 걸림을 물신과 관련하여 풀이하였는 바 여기 큰 우물이 바로 이를 뒷받침하는 보기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마치골ㆍ마차골
전곡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서 현리의 마지막 골이라는 뜻이다. 마치골은 현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집단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소리의 걸림으로 볼때 맞-맟으로 상관성을 둘 수 있으며 동사로는 '마치다'를 기본으로 하는 형태로 보인다.
*창터ㆍ창몰ㆍ창촌
영양현에 딸린 창고가 이 곳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1358년 영양현 관아가 불탈 때 함께 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창고엔 각종 병기를 넣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그 흔적은 없고 들판일 뿐이다.
*탑밭둑ㆍ탑답둥천
영성사 앞 5층모전탑이 있는 곳으로 구조 연대 미상이다. 부근에 큰 사찰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지대가 높다. 탑이 있기 때문에 탑밭둑이라 한다.
*현동
영양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였으므로 현동이라 하였다. 1358년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소실되었으며 다시 그 자리에 중창되지 못하고 동헌이 현재의 영양군청 자리로 옮겨졌으므로 지금은 3층 석탑과 큰 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을 뿐이다.
*산성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들머리 산중턱에 성을 쌓았다 하여 산성이라 한다.
[출처: 영양군지. 영양군청홈페이지]
(영양말캉 역사 알고 가시더/창태111, 187) 영양읍 현리(縣里)가 궁금니껴?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가세, 바우, 맹글어, 가꺼러, 앙꾸도, 마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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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는 고려시대 때 부터
군(郡)단위인 영양현의 관아(군청)가 있었꼬
과거 영양현(縣)의 중심지 였따꼬
"현동(縣洞)"이라 카다
동(洞)이 리(里)로 바끼면서
현리(縣里)가 되었찌만.
아또 주민들은 대부분 현동이라 카니더.
현리(縣里)는 영양읍 관문에 들어 서자마자
동쪼구(오른쪽)의 널따란 들판이
그랑가세 펼처져 있니더.
마실을 가로찌르는 그랑(반변천)은
기차바우, 소엔당, 소득계 등
디게 멋찐 자연풍광들을 맹글었니더.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
양평(지금의 현2리)캉 압시골(전곡) 일부를
쬐메 엄체가 현리(縣里)이라 카게된니더.
(달밭ㆍ월전)
지대가 높따라꼬 땅 모양이
반달가꺼러 생겼꼬 밭을 빼면 앙꾸도
없따꼬 달밭이라 켔따카기도 하고
높은 지대에 펼쳐진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꼬 켔따 카기도 하니더.
월전(月田)은 달밭을 한자로 쓴거시더.
(압싯골ㆍ압실골ㆍ신동)
지금의 현3리 지역이며
과거 영양현(縣)의 중심지인
현리 본마실(현1리) 앞에 있는 마실이라꼬
압싯골(압실골)이라 카니더.
그리고 1945년경에는 새로운 집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부터
신동(新洞)이라꼬도 카게 된니더.
(양지마ㆍ양평)
토질이 비옥하며 펑퍼짐하고 널따랐타꼬
양평(良坪)이라 카니더.
지금의 현2리 지역이며
현1리 앞 그랑(반변천) 건너편 마실이시더.
(마치골ㆍ마차골)
전곡리캉 이사지는 데시더.
과거 영양현(縣) 마지막 골짜기라는 뜻에서
마차꼴(마치꼴)이라꼬 카니더.
(창터ㆍ창몰ㆍ창촌)
과거 영양현(縣)에 딸래가 있는 창고가
있떤 데라꼬 창촌(倉村)이라꼬 카니더.
1358년 영양현의 관아가 불타 없어질때
같이 없어졌니더.
(탑밭둑ㆍ탑둥천)
영성사 앞 모전5층석탑이 있는 데시더.
탑이 밭이 있는
둥천(높은지대)에 있따케서
탑둥천 혹은 탑밭뚝이라꼬 카니더.
(현동)
현1리 중심지로 과거에 영양현(縣)의
관아가 있었떤 데라꼬 현(縣)이라 카니더.
1358년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싹따 불탄 후 동헌이 지금의 군청 자리
(서부3리)로 옴겨가게 되가꼬
현(縣)의 중심 기능이 사라지게 됬니더.
(산성)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을 막을라꼬
산 중턱에 성을 맹글게 되었따꼬
산성(山城)이라 카게 되었니더.
지금도 산성 자죽이 남가져 있니더.